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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반문화사랑회

개항장답사

by 형과니 2023. 6. 14.

개항장답사

인천의문화/해반문화사랑회

2010-10-11 23:40:48

 

개항장 답사

서선경

 

1.개항장 답사의 목적

 

금번 실시하는 동구골목해설사교육은 동구의 지리와 역사, 문화재를 설명하는 전문인을 양성하는 데 있다.

 

동구는 현재 인천의 중요한 일부일 뿐 아니라 인천 개항 시기의 역사에서 당시 중심축이던 제물포 일대였던 점을 감안할 때, 동구의 해설을 위해서는 인천 개항의 역사를 이해하고 더불어 행정구역 상 중구로 편입되어 있는 개항장 일대의 모습과 여러 이야기들을 알아 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에 개항장 답사의 진행은 한국의 근대사와 인천의 근현대사를 압축하고 있는 과거 제물포의 공간성과 역사성을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답사 일정

 

인천역 차이나타운 일대(패루, 공화춘, 삼국지벽화의거리, 화교중산학교, 의선당, 층층2) 자유공원(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 인천항, 맥아더장군동상, 기상대, 웃터골운동장, 제물포구락부) 성공회성당 유항렬주택 홍예문 구 일본인조계지역(중구청, 1은행, 18은행, 58은행, 대불호텔터, 일본우선회사) 조계지경계계단(중국인주택)

 

3.내용

 

1)인천역: 철도의 역사(인천에 놓인 수인선 협궤열차)

 

경인선 철도의 기공과 완공에는 조선의 근대화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를 경인선 철도를 통해 알아보고 철도의 역사와 함께 수인선도 함께 살펴본다.

 

2)차이나타운 일대: 개항과 함께 인천에 조계지가 설정되었다. 청나라 조계지역의 변천과정과 현재 차이나타운에서의 화교들의 모습을 알아본다.

 

패루- 중국인 마을이나 상가 입구에 세우는 대문. 중국인들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는 건조물로써 중국 전통대문의 모습을 띠고 있다. 현재 차이나타운에는 모두 3기의 패루가 있다.

 

공화춘- 등록문화재 246

 

인천의 등록문화재 5기에 대한 설명.(공화춘, 일본우선회사인천지점, 구인천부청사, 대한민국수준원점, 제물포고등학교강당 )- 등록문화재에 대한 설명.

 

청국조계지의 건축물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1905년 건물이다. ‘공화국 원년의 봄이라는 뜻의 공화춘과 함께 차이나타운 일대의 3대 청요리집이 유명세를 탔다. 현재 공사중이다. 차이나타운에서는 중국음식의 대표격으로 불리는 자장면도 만들어졌다고 한다.

 

삼국지벽화의거리- 중국의 기서.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의 명장면을 타일로 구워 만든 벽화이다. 차이나타운의 새로운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화교중산학교- 인천에는 모두 4개국의 영사관 건물이 존재했다. 청나라 영사관이 있던 위치에 세워진 화교학교는 현재 정식으로 허가된 외국인 학교이다. 현재 영사관 회의청 건물이 남아있다. 인천 여러 곳의 분교와 차이나타운의 본교가 운영이 되었다.

 

차이나타운이 차이나타운으로서 불릴 수 있는 이유는 화교학교가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의선당- 초기에는 화엄사라는 절이었다고 전해진다. 부처님을 모셨기에 절이라고 할 수 있으나 현재는 사당으로서의 성격이 더 강하다. 관운장 등을 모시고 기복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의선당이라는 이름으로 정식 발족하기는 1893년이라고 한다. 구한말에는 화교들이 소림사 십팔기 무술을 연마하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규모는 작으나 청나라 말기 모습의 토상들이 있는 독특한 장소이다.

 

층층2- 차이나타운에서 자유공원으로 이어지는 계단 중 한 곳이다. 차이나타운에 있기에 중국을 상징하는 패루와 화표라 불리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고 올라가는 계단 곳곳에 중국을 대표하는 상징물들이 벽화로 베풀어져 있다.

 

3)자유공원: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 사바찐의 설계로 1888년 조성되었다.

 

응봉산에 위치한 이 공원은 서양인들이 모여 살던 각국조계 내에 위치하여 각국공원, 만국공원으로 불렀고 일제강점시기에는 서공원으로, 광복 후에는 다시 만국공원으로 불리다가 1957년 맥아더동상을 세우면서 이름을 자유공원이라고 하였다. 탑골공원보다 9년 앞선다.

 

이곳에서는 공원의 의미와 상대적으로 소수에 불과했으나 영향력이 컸던 서양인들의 존재, 각국공동조계가 어떻게 실현되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 서양과 이루어진 최초의 조약으로 1882년 화도진에서 체결되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82100주년기념탑이 자유공원에 세워졌다.

 

원래 이 자리에는 1905년도에 준공되어 인천의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했던 죤스턴별장이 위치하고 있었다. 죤스턴별장은 인천을 대표하는 양관이었다..

 

인천항- 인천항은 내항과 외항으로 구분된다. 자유공원에서 보이는 곳은 내항으로 갑문을 통과한 배들이 이곳에 정박한다. 1부두부터 8부두까지 전문부두가 있다. 갑문은 현재 육속화 된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 소형갑문, 대형갑문의 2기가 있다. 개항 이후 축항공사와 일제강점 때의 갑문에 대하여 알아본다.

 

맥아더장군동상- 1950915일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은 3곳의 해안(그린비치, 블루비치, 레드비치)으로 시간차를 두면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전쟁의 전세가 역전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57년 개천절에 만국공원에 맥아더동상을 세우게 되었다.

 

세창양행 숙사- 동상 앞쪽에 세창양행 숙사 건물이 있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서양인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양관으로 기록된다.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독일의 상사 세창양행은 철수하였고, 일제하에서 1922년 인천 부립 도서관으로 개관되었다. 해방 후에 인천박물관으로 사용되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소실되었다. 죤스턴 별장과 함께 인천의 랜드마크로 알려진다.

 

세창양행의 광고를 통해 외국상사의 조선에서의 활동, 일본· 중국· 서양상인들의 경제활동을 비교하고 이에 대항한 조선 상인들의 움직임을 알아본다.

 

기상대- 인천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근대적인 과학기술을 이용한 기상관측이 이루어진 곳이다. 기상관측이 절실하게 요구되었던 인천에 세워진 기상대는 1905년부터 전쟁이후 중앙기상대의 업무가 서울로 이전되기 전까지 우리나라의 중앙기상대로서 역할을 하였다.

 

관측소의 기능 중 하나는 시보를 알리는 일이다. 1908년부터 기상대에서는 정오의 신호로 포를 쏘았고 이를 오포분다고 하였다. 이 일대를 오포산이라고 한 유래도 여기에 있다.

 

웃터골운동장- 웃터골은 현재 제물포고등학교 교정으로 쓰이고 있는 분지 일대의 지명이다. 1920년 인천부의 정지작업을 거쳐 공설운동장으로 개설한 인천최초의 종합경기장이었다. 1934년 도원동 공설운동장으로 이전하기까지 15년간 사용되었다. 웃터골에서는 각종 운동경기가 열렸다. 그 중 야구가 가장 인기를 끌었는데 기차통학생들로 구성된 한용단의 활약은 당시 조선청년들의 기상을 살펴볼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제물포구락부- 인천에 거주하던 미국, 독일, 러시아 등의 외국인들이 사교장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건축한 회관이다. 현재의 건물은 1901년에 지어졌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되던 건축물이다. 조적조의 건물로 멘사드양식을 하고있다.

 

4)성공회성당-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가 들어온 시기는 1890년이다. 성공회교회는 종교개혁 과정에서 탄생되었기 때문에 신교에 속하지만 교리와 형식에서 모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중간자적인 위치에 있다. 이곳은 조선인들에게 약대인으로 칭송을 받으며 영국병원을 운영하던 랜디스 박사의 자취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제물포성당(답동성당), 내리교회, 성공회성당이 삼각형 구도로 자리한다. 개화기 교육과 의료, 구호사업은 이들 선교사의 몫이었고 특히 교육을 통한 선교가 폭넓게 이루어졌다.

 

5)유항렬주택- 조선인 최초의 도선사인 유항렬 도선사의 주택이다.

 

6)홍예문- 무지개 모양의 문으로 일본인들은 혈문으로 불렀다. 인천에 머물던 일본공병대가 주축이 되어 3년에 걸쳐 완공하였다. 개항 이후 일본 조계지에서 일본인들이 늘어나자 그들의 생활· 활동영역을 조선인 구역으로 확장하기 위하여 통로를 뚫게 되었다. 현재는 인현동· 전동 일대와 신포동 일대를 연결하는 통로로 사용되고 있다.

 

7)일본인조계지역:관동· 중앙동 일대의 노른자위 땅에 위치하고 있다. 최초의 근대적인 의미의 계획도시이기도 하다. 일본은 당시 우리나라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었고 더욱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승리 이후에는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남아있는 건축물과 조계지의 구조를 살펴본다.

 

중구청- 일본 영사관이 있던 자리이다. 한일병합 이후에 일본이 인천부청사로 사용하던 건물을 없애고 1933에 모던양식의 새로운 청사를 완공하여 인천부의 조선인들을 지배하던 인천부청사 건물이다. 등록문화재이다.

 

일본은행- 1900대 초에 인천에는 일본 금융업체 20여 개소가 들어섰다. 모든 일본은행은 일본인들을 위하여 존재했으며 조선의 금융권을 장악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일본은행은 조선의 곡물을 일본으로 반출하는데 앞장섰고 일본인을 내세우는 방법 등으로 땅 투기와 고리대금업을 하여 일본인 지주를 양산하였으며 조선의 금을 모으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경제침탈의 맨 앞에 일본은행이 있었던 것이다. 남아있는 일본은행을 돌아보며 역사의 교훈을 되새길 수 있다.

 

구 일본국립제1은행인천지점- 1은행은 인천은행의 효시로 일본 정부와 일본 중앙은행의 지원 아래 선발주자로서의 온갖 특권을 누리며 이윤을 추구하였다. 현재 건물은 니이노미다카마사의 설계로 1899년에 완공된 석조건물이다. 1909년 한국은행이 되었다가 1911년 조선은행으로 바뀌었다.

 

18은행- 나가가키에서 활동하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한 은행이다. 일본에서 현존하며 영업한다. 이 건물은 1890년에 지어졌는데 18은행이 해외에 세운 최초의 지점이기도 하다.내부에 금고가 남아있다. 현재 근대 건축사 전시관으로 활용중이다.

 

58은행- 오사카에 본점을 두었던 은행으로 인천 전환국에서 만들어진 신화폐와 구화폐를 교환하는 업무를 보았다.

 

대불호텔자리-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 대불호텔이며 1888년 일본조계지에 들어섰다. 1902년 서울 중구 전동에 세워진 손탁호텔보다 앞선다. 한때 호황을 누리다가 철도가 들어선 이후에 인천의 호텔업은 사양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1918년 중국인에게 팔리면서 중화루라는 청요리집으로 운영되다가 1978년 철거되었다. 인천은 1920년대 이후 40여 년간 호텔이 전무한 시대를 거치기도 했다. 철도불황에 대해 알아본다.

 

일본우선회사인천지점- 개항 이후에 인천에 들어온 일본 해운회사의 업무용 건축물이다. 현재 건물은 1888년에 지어졌으며 개항장 일대에 남아있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고종의 지원 아래 1892년에 설립된 이운사의 경영권이 오래지 않아 일본우선회사로 넘어감에 따라 우리나라 근대해운업의 기초도 무너지고 말았다. 이후 일본우선회사는 인천연안의 정기항로를 독점적으로 운영하게 된다. 등록문화재이다.

 

8)조계지경계계단: 이 계단을 경계로 일본과 청나라의 조계지가 형성되었다. 근래에 보수공사를 하면서 각 조계지의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하여 일본식 석등과 중국식 석등을 설치하였다.

 

중국인주택- 근대시기 중국인의 다가구주택의 모습을 보여주는 집이다.

 

 

4.마치며...

 

도보답사의 목적은 현장을 밟으며 직접 몸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근대의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과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참고로 여건이 허락되면 감리서지와 그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인천우체국, 차이나타운의 천주교해안성당 교육관(여씨주택)까지 진행할 예정입니다.

 

출처 : ()해반문화사랑회 주최 골목문화해설사 교육자료집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