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秋의 旅
仁川愛/근대 월미도 이야기
2014-04-09 15:55:05
淸秋의 旅 (청추의 려)
江華行
茄子峯人
江華! 아-江華!! 檀君神祖-三子를 命하사 祭天하시던 瞻星壇이 잇는 江華! 神子三人이 몸소 築城하시던 三郞山城이 잇는 江華! 山中名山 摩尼山이 잇고 寺中大寺 傳燈寺가 잇는 江華! 山조코 물조코 歷史만코 古蹟만흔 江華! 쌀만코 柑만코 고사리 만히 나는 江華! 車타고 배타고 또 거러가는 江華! 한번 보고 萬懷抱를 풀고 두번 보고 千古史를 알만한 江華! 우리가 願하야 보고저 하는 江華! 우리가 기어코 가야만 할 江華!
아-이러한 江華! 언제 한번 機會잇서 언제 한번 가서 보나? 언제 한번 그의 품에 들어 언제 한번 그의 사랑을 바들가? 皎皎한 秋月이 西山을 넘을 때 문득 그 생각이 나며 蕭蕭한 金風이 東窓을 스칠 때 또한 그 생각이 懇切하도다. 행여나 2, 3同志만 어드면 萬事를 俱除하고 決然히 江華行을 作하리라고 斷然히 作念하고 苦待苦待하던 차 마츰 普成小學校修學旅行의 好機를 어드니 淸快한 10月 12日의 아츰이로다.
京城으로 仁川
여섯時에 일어나서 天氣부터 살펴보고 얼른 洗手하고 아츰도 못 먹고<100> 一尺杖 휘두르며 鍾路를 썩나서니 벌서 오고가는 行人이 시골 市場만콤은 되어 보인다. 그 중에 나의 눈에 반갑게 보여 興分을 일이키는 것은 典洞으로 寺洞으로 씩씩히 모여드는 少年學徒들이다. 輕快한 校服에 「변도」를 둘러메고 意氣洋洋히 南大門을 향하야 快步를 옴기는 그들의 動作은 누가 보던지 感嘆치 안흘 수 업다. 그들의 가슴에는 生命의 피가 뛰며 그들의 발압헤는 希望의 빗이 비추웟다. 마츰 해가 그들의 가슴에 直射할세 그들의 얼굴은 더욱 아름다우며 가비어운 바람이 그들의 몸을 시츨세 그들의 手足은 더욱 敏活하다. 혹은 電車 혹은 徒步로 南大門 驛頭에 總集이 되니 先生과 學徒가 82人이다.
8時 5分 仁川直行은 우리 一行을 곱게 모신다. 그리 들추지도 안코 그리 기울거리지도 안는다. 첫 고동에 南大門을 떠나 두 번재 고동에 龍山에 이르니 複雜하나마 坐席整頓은 되엇섯다. 1分間 멈을러서 다시 車가 구을기 始作하니 生意充天한 少年동무들은 그만 氣高萬丈하야 혹은 웃으며 혹은 노래하며 혹은 손ㅅ벽 치며 혹은 날뛴다. 象頭山이 굽어 賀禮하며 漢江水가 길이 압흘 引導한다. 구름은 슬어지며 바람은 긔척이 업서진다. 江山이 다-그들의 江山가트며 四圍에는 아모 것도 업서 보인다. 어떤 妙齡의 입으로 「漢江鐵橋다. 아-조타. 汽車歌하자-」의 一令이 나린다. 그리자 모다 손ㅅ벽 치며 「조타-」「하자-」소리가 일제히 幷發되면서
「들들들 굴러가는 汽車바퀴는
終日코록 쉬지 안코 다라나도다.
十里萬里 갈 길이 비록 멀으나
살과 가티 迅速히 得達하누나.(二節畧)
의 汽車歌를 목이 쨰어져라 손바닥이 터져라 하고 高唱大拍을 하는데 첫 句節의 고흔 목소리 軟한 曲調는 마치 十里淸灘의 潺湲한 波絞가트며 둘재 句節의 놉흔 소리 강한 曲調는 마치 萬丈飛瀑의 砯砰한 怒濤와 갓다. 일제히 「하하」웃고 일제히 「딱딱」손ㅅ벽 치고는 다시
「景槪조흔 山과 물은, 재가 사랑함이로다.
四面江山 단이다가, 조흔 곳 왓네」
의 探勝歌를 連해 부르며 발을 굴으며 손을 휘두르는 光景은 실로 生의 빗이 질질 흐르는 勇少年임을 歷歷히 許하겟다. 子弟잇는 이는 學校에 보내기를 願하며 아들 딸 업는 이는 아들딸 낫키를 願하며 늙은이는 隱然히 눈물지으며 젊은이는 실로 부러워한다. 間間이 끼어 안즌 男女乘客들은 아모 私談이 업다. 어떤 이는 精神업시 안저 勇少年의 날뜀을 바라볼 뿐이며 어떤 이는 히죽이<101> 웃으며 어떠 이는 손목을 만저주며 어떤 이는 「어느 學校냐」고 무르며 어떤 이는 噓唏一嘆으로 無子의 情을 表한다.
車는 어느덧 永登浦 素砂를 거쳐 杻峴을 왓다. 左右山의 丹楓이며 上下野의 黃禾는 우리의 눈,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朱安鹽田을 紹介하자마자 벌서 仁川이라 한다. 車에 나려 埠頭에 이르니 아홉시 족음 넘엇다.
仁川으로 傳燈寺
우리 一行의 預想은 迅速하고 便利한 蒸氣船이엇스나 形便에 의하야 不便하나마 부득이 木船을 타게 되엇다. 往復 36圓으로 木船 네隻을 불러 타고 70里 水路에 櫓를 젓기 始作하얏다. 仁川을 등지고 月尾島를 엽헤 끼고 永宗島를 압흐로 보며 으여차 그여차 波濤와 싸움을 하게 된다. 바다와 바람은 떠날 수 업는 關係가 잇는 듯하다. 陸地에서는 一点風이 업더니만 바다를 臨하자마자 바람이 일기 始作한다. 心術구진 海伯이 우리 一行의 勇氣를 試驗코저 함인 듯하다. 비록 살이 軟하고 뼈가 弱하나 우리 勇少年은 족음도 恐怖가 업다. 배를 처음 타보고 바다를 처음 보지만 船長海老에게 못하지 안타. 波山波谷이 起伏할 때마다 船頭船尾가 上下할 때마다 氣가 더 나며 興이 더 실린다. 月尾島 難關을 겨우 넘어 虎島를 안고 돌을세 압배에 탄 사람은 어서 오라고 손을 저으며 뒷배에 탄 사람은 가티 가자고 손을 휘두른다. 압배가 떨어지면 뒷배가 압서고 뒤배 沙工이 잘 저으면 압배 沙工에게는 攻擊이 퍼붓는다. 마치 압배는 敵軍의 탄 것갓고 뒤배는 追擊軍이 탄 것갓다. 一場活動寫眞이 열린 듯하다. 콩알섬을 지나면 밤알섬이 보이며 자라섬을 지나면 거북섬이 또 닥친다. 白鷗는 翩翩히 날며 波光은 天色과 一樣인데 孤島의 漁翁은 船頭에서 放歌하며 遠村의 微烟은 石峯으로 살작 돈다. 그 중에도 心線을 끄을며 情緖를 그러당기는 것은 背山臨海의 數間茅屋에서 唐紅치마 美少女를 이끌고 나와 손바닥만한 菜田에서 白菜뽑는 島國婦人이다. 아-그들의 生活! 얼마나 滋味스러울가. 男便은 고기 잡고 女便은 白菜뽑고 少女는 재롱부리며-하는 自由島의 自由人들의 生活?! 交通이 비록 不便하고 出入이 비록 苟苟할지나 밥 먹고 똥 싸고 않�들 나코 딸 나코 배 타고 山 타고 하는 그들의 生活 그 얼마나 自由스러운가. 나는 실로 그들을 위하야 祝福하며 欽羡하기에 마지 못하얏다.
永宗島를 벗어나서 江華海口로 들어간다. 멀리 山城이 보이며 松林이 보이며 大刹이 보인다. 沙工에게 무른즉<102> 그가 곳 傳燈寺라고 우리 一行은 拍手로써 멀리 來意를 表하며 沙工을 督促하야 速行을 圖하니 어느덧 草芝里渡船場에 이르엇다. 때는 오후 3時이며 一行이 다 無故하다. 江華天道敎人 具德禧 具達祖氏 등 10餘人이 반가히 마저준다.
草芝里는 砲臺를 싸핫던 곳이다. 지금도 堡壘가 남아 잇다. 草芝里의 上下端은 다-砲臺를 築하얏던 곳이다. 草芝里서 西으로 約10里許에 孫돌목(石項)海口가 잇다. 이 孫돌목海의 東岸砲臺는 辛未亂에 우리 魚在淵將軍이 洋軍과 奮戰하던 곳이다. 辛未의 事를 귀로 들으며 이 땅을 발로 밟으며 당시의 亂을 스스로 생각하니 忿하기도 하고 可笑롭기도 하다. 誰의 罪를 말하기 果然 어렵다. 洋國艦隊가 지금것 잇서 挑戰하는 듯하며 우리의 砲臺로서 빨간 불이 반작거리는 듯하다.
아-이 江華島 亂을 몃번이나 치럿는가. 4000年의 戰史를 考察하야 볼 때 누가 江華에 대하야 눈물을 아니 뿌리겟는가. 帝王이 몃번이나 遷하얏스며 生靈이 몃백만이나 魚肉이 되엇는가. 壬辰 丙子의 慘劇, 丙寅 辛未의 兵火-다-우리로서는 永遠히 잇지 못할 것이 아닌가. 더욱이 우리의 금일이 境遇를 直接招來한 것이 江華에 잇슴을 切實히 記憶할 때 우리의 가슴이 얼마나 압흐겟는가.
우리 一行은 悵然히 佇立하야 悽然한 顔色으로 자취만 남은 左右砲臺를 보며 스스로 눈물짓기에 마지 못하얏다. 往事는 莫論이라. 來頭를 위하야 奮鬪할 뿐이라 하고 一行은 夕陽山路에 千古의 恨을 뿌리며 緩緩히 거러 三巨里를 거쳐 普通學校, 面所, 駐在所가 잇는 곳 鼎足山城(三郞山城)東門턱을 올나섯다.
아-鼎足山城! 一見에 萬年愁가 다-슬어지도다. 四面으로 바다를 보며 島嶼를 보며 田野를 봄은 鼎足山城의 外景이오 솟발가티 둘러선 露積績, 落照, 昆盧三峯을 보며 鬱蒼한 松栢을 보며 雄壯한 寺刹를 봄은 鼎足山城의 內景이다. 하물며 神代神祖를 追慕하는 우리의 情境이랴. 日暮함을 慮하야 곳 傳燈寺에 入하니 5, 6名 和尙이 合掌禮로써 마저준다. 房을 정하고 石溪에 발씻고 少年友와 더불어 1時間 談樂한 뒤 素菜白飯으로 배을 불키고 자리에 누워 心身을 慰勞하얏다.
翌日 淸晨에 막대를 들고 史庫터을 올라 四圍의 景色을 玩賞하고 寺中에 돌아와 住持僧鞠昌煥師를 訪하야 寺의 來歷을 問하얏다. 師의 말을 듯건대
傳燈寺의 舊名은 眞宗寺이엇는데 高麗 忠烈王時 貞和宮主가 玉燈三個를 施함으로부터 傳燈寺라고 改稱하얏다 한다.(其亦事實末詳云)<103> 寺의 創建은 累次 兵火를 被하야 史記를 消失하얏슴으로 그 年代를 確知키 難하다 하며 殘史에 元至政 3年에 3次 重修라 함을 보건대 적어도 2000年前이라 한다. 寺의 前面露績峯下에 30餘間의 兵庫가 잇섯던 바 己酉年間에 養兵의 所據로 인하야 日兵이 消火하야 지금은 墟據만 남앗다 하며 寺의 西面 落照峰下에는 由來의 國史保藏하던 史庫가 잇섯던 바 年前總督府로부터 國史를 移去함에 由하야 史庫는 毁破하고 其亦 빈터만 잇다 한다.
그리고 三郞山城은 檀君의 三子께서 築하심은 事實인 바 中間에 幾度의 改築이 잇섯다 하며 城의 周圍는 畧10里假量인데 東西南北 4門이 잇스며 三郞山城을 鼎足山城으로 改稱함은 三峰이 完如鼎足이라 하야써 名하얏다 한다. 寺의 重修는 距今 5年前이라 하며 寺의 財産은 4, 5백石秋收에 不過하다 하며 末寺가 30이나 잇는 中 彼有名한 開城 華藏寺도 그의 末寺라 한다. 現在 僧侶는 20名에 不過하며 方在仁川에 布敎堂을 置하는 중이라 한다. 나는 住持和尙에게 約 1時間동안 寺에 관한 말을 듯고 仍하야 對潮樓에 登하야 眼前의 自然과 즐기게 되엇다. 南으로 永宗列島가 碁局과 가티 보이며 仁川港의 大小烟突이 우뚝우뚝 섯슴을 보겟다. 東으로 金浦諸山을 보겟스며 멀리 三角道峰이 雲霧중에 놉히 솟앗슴을 보겟다. 山넘어로 구비구비 휘두른 洋洋한 漢江이며 셤 사이로 줄곳 내버든 洋洋한 黃海는 다-對潮樓의 조흔 景槪이다. 해뜨는 아츰 구름 돌아가는 이때 爽快한 松風을 가슴에 바드며 金色波光을 내밀어 보는 나의 心身은 仙臺에 臨한 듯 雲間에 遊하는 듯 一大 快味가 실로 俗界의 凡人에 比키는 抑鬱하다. 오고 가는 商賈船은 어긔어차 櫓저으며 크고 작은 男女老少가 이 집 저 집 나설 때에 對照樓 놉흔 곳에 飄然히 서서 浩然히 一氣를 吐함은 이 실로 이 平生의 快事이다.
슬프다. 이것도 잠간이다. 聚立一令에 學生들은 벌서 行列을 지어 장차 떠나려 한다. 슬프다. 山高水長은 萬古一樣인데 오즉 人生뿐 無常하고나. 對照樓를 어찌 나뿐 반겻스랴. 千古의 遊客이 다-반겻슬 것이며 對照樓를 어찌 나뿐 슬퍼하랴. 千古의 遊客이 다-슬퍼하얏슬 것이다. 詩하나 歌하나 외울새 업시 총총히 摩尼行을 作하게 되엇다. 나는 할 일업시 牧隱의 詩 「潮樓晩對一塵淸今古遊人幾遍行. 芸閣秘書藏百世 蓮燈貝葉悟前生. 地分山足渾如鼎 石隱楓林自護城. 好是禪綠來信宿. 啼禽老佛總關情」을 빌어 외울 뿐이엇다.
傳燈寺로 摩尼山<104>
13日 上午 9時이다. 우리 一行은 鼎足山城 西門을 넘어섯다. 黃海 萬里가 眼下에 노혓스며 摩尾高峯이 天空에 놈핫섯다. 船頭里 논(畓)벌을 건너 下道村을 거쳐 摩尼의 下麓을 끼고 돌을세 漁翁에게 길을 무르며 村婦에게 물을 어더 먹으며 혹 柑을 어드며 혹 밤을 주으며 혹 野菊을 꺽그며 혹 나락을 만지며 竹杖을 춤추어 談笑和樂, 興겨온 거름은 疲困을 感할새 업시 어느덧 摩尼山下 德浦里에 이르럿다. 村家에 點心을 맛기고 旅服을 更束하야 祭天壇을 향하고 올라갈세 山은 高하고 巖은 急하야 凡足은 容易치 아니하다. 비록 少年軍이나 우리 一行의 冒險이 아니면 生意도 못하겟다. 이어차 이어차 一步一步 登하니 先隊先, 中隊中, 下隊下, 或行或立, 或高喊, 或喘息은 果是探勝隊가트며 突擊軍갓다. 바위를 넘으면 또 바위 峰을 오르면 또 峰이다. 구두를 벗으며 上衣를 脫하며 나무를 휘어잡으며 길 대 기고 뛸 대 뛰어 艱辛艱辛히 上上峰에 登하니
아-快하도다. 險路를 지나고 難關을 넘어서 摩尼山 上峯에 올라선 壯觀 江華全幅이 足膝下에 屈服되엇고 忠淸 京畿 黃海의 大小山河가 眼前에 展開되엇다. 黃海에 바람 일고 山巓에 구름 돈다. 山水의 美-其極을 盡하얏다. 이러한 山海絶處에 무엇이 잇는가.
아-祭天壇! 우리 倍達國을 創建하시고 우리 倍達兄弟를 나흐신 우리의 倍達國의 神祖檀君께서 三子를 命하사 祭天하시던 祭天壇!! 우리 兄弟-此에 至하매 한아버지를 뵈옵는 듯하면 한아버지 품에 든 듯하도다. 한아버지께서 우리의 등을 어루만지는 듯하며 우리의 머리를 쓸어주는 듯하도다. 우리는 실로 惶悚함을 禁치 못하겟스며 感淚를 抑制치 못하겟도다.
우리를 잘 살리기 위하야 우리에게 永遠한 씨를 뿌리기 위하야 몸소 壇을 싸흐시고 몸소 한우님께 祈禱하시던 祭天壇! 한아버지의 語音이 들리는 듯하며 한아버지의 足跡이 臨한 듯하도다. 4000年의 東洋藝術의 代表的 祭天壇! 東西人이 欽嘆하는 祭天壇도 雄偉堅固로 10000年에 不敗할 祭天壇! 아-실로 朝鮮魂이 다-뭉친 듯하도다.
아-슬프다. 後孫이 無能하야 이 寶壇을 善保치 못하얏도다. 幾千年의 風雨에 多少의 毁傷이 되엇던 次 無知沒識한 日兵이 最後의 破壞를 行하얏다 한다. 지금은 牌文도 門樓도 업시 다만 石臺 2層 뿐이로다. 아-傷心處로다.
이 寶壇이 만약 英米에나 日本에 잇서 보라. 그들이 얼마나 힘잇게 保存하얏겟는가. 우리가 不幸하니까 寶壇조차 不幸하얏도다.<105> 檀君 한아버지의 嚴責이 나리는 듯하도다. 우리 一行은 다 各其 아모 말업시 沈黙裏에서 後生의 無能을 自責하면서 將來를 위하야 義奮을 내엇섯다.
우리 一行은 近 두 시간이나 天壇에 올라 一悲一嘆, 千古懷를 말하며 四圍의 風景을 翫賞하다가 午後 3時頃에야 下山하야 德浦里 李應冕氏宅에서 点心하고 仍히 回路에 登하얏다.
開城行
李丙燾
10月 14日-1921-
며칠 旅行準備에 바뿌던 우리는 이날이야 裝을 束하고 隊를 作하여 校門(中央高等普校)를 出하엿다. 晶曜한 한울은 더욱 우리에게 깃븜을 주엇다. 南大門驛에 달려나와 一行은 午前 9時 50分發 北行車에 실리어 近 100名의 團軆를 지엇다. 실려 잇는 우리 一行은 呼角소리에 車바퀴의 움즉임을 보고 愉快를 感하기 始作하엿다. 乘員은 압흘 다투어 窓外의 野景을 바라보앗다. 超脫한 氣象의 天空과 春飾夏繁의 形式을 벗은 山水草木은 한께 透明한 沈着한 觀念의 世界로 들어온 듯하다. 乘員의 혹은 水色廣野에 展開한 禾穗를 보고 이를 밀우어 全道의 豐作을 점(卜)치는 者도 잇섯스며 또 혹은 村家 집웅우에 널린 밝안 고초를 바라보고 이를 歎美하는 者도 잇섯다. 실로 이 고초는 村家를 裝飾한 것가티 보엿다. 굴으는 바퀴는 벌서 臨津江을 건너 長湍驛을 지나 目的地인 開城을 다다럿다. 時刻은 11時 30分이엇다.
驛頭에는 우리 一行을 맛는 2, 3人의 紳士가 잇섯다. 그들은 곳 우리 學校校友이엇다. 一行은 全部 車에서 나리어 職員의 그들에 대한 簡單한 인사가 잇슨 뒤, 그들의 引導알에 驛長을 벗어나 市街로 향하엿다. 鐵道公園압흘 지나 途中 左側으로 舊太平館(元使를 留宿케 하던 곳)址와 壽昌宮(李太祖 卽位하던 곳)址란 것을 順次로 살펴본즉 舊閣은 어더볼 수 업고 다만 그 位置하여잇던 곳만 瞥見할 뿐이엇다. 다음 또 左側으로 一門樓가 視界안에 들어옴을 보고 나는 곳 南大門임을 깨달앗다. 果然 開城市街의 거의 中央에 位置한 南大門이엇다. 門의 規模는 매우 적으나 그래도 나는 이 門이 京城 南大門보다 2年 혹은 3年을 압서된, 즉 李太祖 2年에 된 古建築物로 생각하고 본즉 스스로 거듭 쳐다봄을 깨닷지 못하엿다.<106>
또 그 門抨�우에 걸린 大梵鍾은 約 600餘年前에 鑄造된 것으로 現存한 朝鮮 4大鍾의 1이라 이른다. 나는 市街地에 들어와 더욱이 門압흘 當到하여, 通過하는 이곳 사람들을 보고 녯날 高麗사람이나 본 것가티 깃버하엿다. 門東側楓橋를 건너 北으로 左折하여 城섯던 터를 밟으면서 子男山을 向登하엿다. 山上에 올라 市街를 굽어본즉 市街의 대부분은 眼下에 노혀잇다. 나는 곳 地圖를 펴들고 古城壁의 周圍의 廣大함과 今市街의 分布된 地域의 狹小함을 實際로 比較하여 보고 또 昔日 戶數가 10만萬餘에 達하엿다는 記錄을 聯想하여 今昔變異의 嘆을 抑치 못하엿다. 실로 昔日의 繁榮이 이가티 衰落하엿나 하는 太息을 再抑치 못하엿다.
그러나 市街중에 石造洋屋이 比較的 만히 잇슴을 發見하고 나는 좀 慰安이 되어 곳 引導하는 J君에게 그 무슨 집임을 무러보앗다. J君은 親切하게 一一이 가리처 주고 또 開城서는 巨大한 石材가 만흠으로 煉瓦造보다 돌이어 石造屋의 工費가 廉하다고 말하엿다. J君은 더욱 자미잇는 말로 모든 巨屋과 有名한 古蹟잇는 곳에 향하여 우리에게 說明하여 주엇다. 말이 끗난 뒤 隊를 끌고 觀德亭虎亭(共히 射亭)을 등지고 이 山東麓으로 나려가서 麗末의 忠臣이오 大儒인 鄭圃隱先生의 舊邸崧陽書院에 들어가 先生의 影幀과 遺物을 어더 보게 되엇다.
一同은 이에 대하여 鄭重한 敬禮를 表하고 좀더 나려와 先生의 最後의 悲慘을 遂하던 善竹橋上에 모여 里人의 傳하는 所謂 血痕을 살펴보앗다. 宛然한 斑血이 石橋의 一部를 흐르는 듯하엿다. 나는 다시 머리를 돌려 東으로 李太祖의 舊宅인 穆淸殿을 바라보고 다시 지금 보고 온 崧陽書院을 돌아다보면서 녯날 鄭先生이 李太祖를 問病하고 自宅으로 돌아오다가 이 다리에 서 李太祖의 心服 趙英珪에게 狙擊을 당하던 光景을 그리어 보앗다. 이에 대한 약간의 說明이 잇슨 뒤 一行은 慷慨한 맘으로 古人을 吊하고 다리 西側에선 碑閣에 들어가서 我英宗, 高宗의, 先生의 忠節을 表彰한 碑文을 一讀한 後閣庭에 散座하여 携來한 點心을 喫하엿다.
時針은 下午 1時 20分을 가르치엇다. 食後步를 續하여 昔日 最高學府이던 成均館을 訪하고 路를 轉하여 彩霞洞에 들어가 幽佳한 景色에 接하엿다. 불꼿에 눌린 듯한 黃葉과 서리에 물들러 타는 듯한 紅葉은 幽邃한 洞中을 化粧시키어 더욱 빗나게 하엿다. 아름다운 自然에 迷醉한 일동은 興을 이기지 못하여 撮影으로써 이 곳을 探訪한 記念을 作하엿다. 다음에 石造巨屋의 松都高等普通學校를 訪하고 隊를 返하여 市街로 들어왓다. 旅館은 校友의 周旋下에 정하여젓다. 隊를 네 집에 난후어 宿泊케 하엿다. 夕飯後 나는 호을로 거리를 通하여 散策하엿다.<107>
開城사람의 一種 숨은 生活이라 할는지 다른 곳에서 發見치 못할 疑集的, 團合的, 守舊的 生活의 現象을 엿보앗다. 9時半 館에 돌아와 첫 나그네 꿈을 꾸엇다.
翌15日 早朝, 困한 잠을 깨어 一行은 다시 裝을 簡便히 하여 校友 K君의 引導로 朴淵을 향하여 勇進하엿다. 正히 上午 6時엇다. 隊列은 市街를 훨신 벗어나자 東天은 막 朝日을 비져냇다. 朝日의 떠오르는 形勢와 주는 센비츤 行頭에 부는 囉叭소리와 한께 새벽의 寂寞을 깨치엇다. 東北으로 멀리 보이는 金角峰과 天摩山은 한울을 뚤흘만큼 元氣차게 솟아잇다.
三角山과 比較하여 一致한 點이 만흠을 發見하고 興味를 느끼엇다. 얼마 아니되어 徐花潭先生(徐敬德)의 놀던 逝斯亭을 다달앗다. 亭압헤 잇는 花潭과 潭엽헤 선 嶄巖과 巖上에 고흔 丹楓은 數百餘年前 先生의 사랑하던 自然이엇다. 書籍으로 先生을 늘 崇慕하던 나는 이곳에 와서 더욱 先生의 性格을 闡明할 수 잇섯다. 거름을 계속하여 두어 고개를 넘은 뒤 槐亭에 와서 다리를 또 쉬고 携帶한 벤도를 먹엇다.(槐亭이라고 무어 亭子가 잇는 것이 아닐다. 岩石에 이가티 새겨잇슴으로 나도 이곳 이름을 그러케 부름이다)
食後 一行은 일층 勇氣를 鼓舞하여 大興山城門(南門)을 향하여 險惡한 길을 攀登하엿다. 左右丹楓에 싸히어 오르고 오르는 중에 놉히 보이던 城門도 未久에 우리 脚下에 잇섯다. 南으로 三角山과 西으로 黃海를 바라볼 수 잇는 놉흔 곳임을 깨닷고 往時 唯一한 要害로 高麗王 室避難所에 適當하엿던 것을 果然 認識하엿다. 헐어진 城門을 등지고 나려와 昔日 軍營과 行宮잇던 자취를 볼 수 잇섯다. 大興寺를 지나 다시 石徑曲路를 踏破하엿다. 길 左右側으로 岩石의 大小를 不問하고 人名의 刻書가 업는 돌이 거의 드믈엇다. 이곳뿐 아니라, 지금 밟아오던 길에서도 만히 보앗섯다. 어떤 바위에는 子에 아모 孫에 아모 兄에 아모 弟에 아모라는 마치 家譜의 一部를 새겨 노타십히 하엿다. 多數한 人名을 一一이 세여볼 수는 업섯지만 그 多數한 人名 중에서 偉人이나 天才를 하나도 發見치 못하엿다.
山城北門을 出하여 가까스로 40里 長路의 目的地인 朴淵을 到達하엿다. 正히 5分前 12時이엇다. 一大奇絶한 瀑布에 接한 群衆은 熱狂的으로 뛰고 부르지젓다. 怒瀑은 우리를 戰慄케는 못하엿스나 그대신 自然의 神秘한 奧底를 열어 보이는 듯하엿다. 榻도 갓고 屛風도 가튼 奇巖怪石-더욱 上朴淵의 潭水를 담은 큰 항아리가튼 돌이며 또 潭中에 솟은 島巖-은 一層 造物主의 妙秘한<108> 손을 빌어 된 것으로 생각하엿다. 俗傳에 녯날 朴進士란 者가 잇서 淵上에서 笛을 불고 잇섯더니 龍女가 이를 感得하고 朴進士를 引하여 夫를 삼앗다 한다. 朴淵의 稱이 이에서 由來한 것이라 里人은 말한다. 一種 웃은 이악이에 不過하나 이것이 自然의 秘密과 人間과의 交通을 具軆的 方法으로 그리려 하는 努力에서 나온 것은 勿論이다.
約 1時餘의 觀賞이 잇슨 뒤 다시 山城內로 隊를 返하여 아까 지나오던 大興寺에 들어와 이미 豫約하엿던 이곳 別味의 비빔밥을 요긔하고 歸路에 오를 動力을 振作하엿다. 下午 3時頃에 寺內를 出한 我隊는 오던 羊膓曲路를 通하야 혹은 險高한 고개를 두어번 넘어 道半에 이르럿다. 벌서 夕照의 燦爛함을 보게 되엇다. 또 압흔 다리를 억지로 이기어 것고 것는 중에 東嶺에서 吐出하는 보름달을 보게 되엇다. 俗談에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이곳에서 우리는 望月의 機를 得하게 되엇다.
우리에게 적지 아닌 慰安을 주엇다. 나는 먼저 이 달을 通하여 古人의 心情을 追憶치 아니치 못하엿다. 우리가 바라보는 달은 녯날 高麗人도 바라보던 同一한 달이엇다 하는 意識은 더욱 過去의 觀念을 새롭게 하엿다. 國은 이미 破하여 山河만 오즉 依舊하다고 長歎하던 맘도 天上에 걸린 明月의 永劫不變함을 볼 때에 山川도 오히려 滄桑의 變을 免치 못하엿스리라 하는 생각뿐이엇다. 실로 天地의 悠久에 比하여 人生의 須臾임을 嘆치 아니치 못하엿다. 不知中에 벌서 我隊는 市內를 當到하엿다. 一行 無事히 歸宿하게 된 것을 서로 喜幸히 여기엇다.
翌16日 朝 8時頃 疲困한 다리를 다시 일으키어 隊를 作하여 校友 J君의 先頭미테 共同白蔘製造場을 叅觀하엿다. 百蔘의 香臭는 鼻를 觸하여 藥으로 먹으니와 진배업다고 생각하엿다. 넓은 마당에 펴널은 白蔘의 數爻도 만치만 蔘皮를 벗기는 婦女勞働者도 또한 만흠을 發見하엿다. J君에게 1年이 마당에 떨어지는 蔘갑이 얼마 되는가 무럿다. 무려 백만원의 巨額에 達한다 하엿다. 蔘은 실로 開城사람의 半生命이라고 말할 수 잇섯다. 다시 J君은 우리를 끌고 松巖山밋에 잇는 滿月臺로 향하엿다. 林檎밧을 지나 몃개의 階段을 올랏다.
階段위마다 一帶廣場이 잇다. 廣場에는 樓門과 殿閣이 서잇섯는 것을 想像할 수 잇슬만큼 만흔 柱礎를 볼 수 잇섯다. 더욱 會慶殿이 서잇던 곳에 올라서 四圍를 돌라보고 昔日 宮殿의 雄大하엿던 것을 또한 想像할 수 잇섯다. 4, 5백년 榮華를 누리던 터가 지금은 오즉 荒寥로 化하고 말앗다. 생각컨대 宮殿은 仁宗(17代)時 李資謙亂에 一部 灰燼되엇고 後에 重建되엇던 것이 恭愍王(卅一代)때에 이르러 紅賊의 亂에<109> 인하여 全部 烏有에 歸한 것이엇다. 所謂 滿月臺라 함은 이 會慶殿터를 이름이라 한다. 그러나 본래는 宮中에 望月臺가 잇서 後人이 望을 滿으로 訛稱하여 宮터의 大部分을 滿月臺라 하엿다 한다.
J君은 또 우리를 끌고 訥里門을 나와 高麗太祖顯陵으로 인도하엿다. 이 陵은 他處로 여러번 移葬하엿던 陵이엇지만 石物其他가 比較的 完全히 남아잇다. 지금껏 陵叅奉을 두고 守護하여 나려온 德澤이라 한다. 陵叅奉은 特別히 王姓을 가진 사람으로써 任한다 이른다. 그러나 이 陵을 뒤로 두고 西便으로 향할 때에 附近 丘上에 보이는 歷代諸王陵은 荒凉하여 陵名은 勿論, 何代王의 것인가도 모른다 한다. 한 10里를 또 거러 恭愍王의 玄陵과 同王妃魯國大長公主의 正陵을 當하엿다.
이 두 陵의 石物其他附屬物의 雄大優麗함은 이미 들어 안 바이지만 實地로 와본즉 果然 點頭치 아니치 못하엿다. 麗代 諸王陵은 勿論이오 李朝歷代의 陵으로도 이 陵의 石物에 比가 될 수 업다 한다. 一方으로 이를 밀우어 麗末王家의 窮奢極侈의 風을 可히 알 수 잇섯다. 이가티 宏壯히 일으킨 陵墓가 지금은 또한 荒廢함을 免치 못하엿다.
王氏의 子孫으로도 이를 위하여 守護의 勞를 執하는 者 업다 나는 생각하엿다. 만일 이것이 孔子의 墳墓나 釋迦의 墳墓나, 그리스트, 마호메트의 墳墓라고 하면 설마 이가티 頹廢한 가온대는 잇지 아니하엿스리라. 그 子孫이 업다하더래도 聖者를 信崇하는 사람들은 死力을 다하여서라도 他人의 手에 讓치 아니할 것이다. 王者와 聖者의 差가 이런 족으만 일에도 심함을 느끼엇다. 麗末의 衰運을 이악이하면서 携帶한 點心을 喫하엿다. 歸路에 杜門洞을 歷入하여 麗末 72賢의 節義를 彰示한 我英宗御製御筆의 碑文을 謹讀한 後 곳 行步를 緩히 하여 開城驛에 다달앗다. 約 2時間을 기다리어 5時 2分發 列車로 京城을 향하엿다. 車窓을 通하여 未久에 夕烟이 村家에 일어남을 보앗더니 또 얼마 아니되어 旣望의 달이 우리의 늲�이 되어잇슴을 깃버하엿다.<110>
개벽 제17호
발행년월일 1921년 11월 01일
기사제목 淸秋의 旅
필자
기사형태 기행문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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