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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과옛적의 인천이야기

淸秋의 旅

by 형과니 2023. 6. 27.

淸秋

仁川愛/근대 월미도 이야기

2014-04-09 15:55:05

 

淸秋(청추의 려)

 

 

江華行

茄子峯人

 

江華! -江華!! 檀君神祖-三子하사 祭天하시던 瞻星壇이 잇는 江華! 神子三人이 몸소 築城하시던 三郞山城이 잇는 江華! 山中名山 摩尼山이 잇고 寺中大寺 傳燈寺가 잇는 江華! 조코 물조코 歷史만코 古蹟만흔 江華! 쌀만코 만코 고사리 만히 나는 江華! 타고 배타고 또 거러가는 江華! 한번 보고 萬懷抱를 풀고 두번 보고 千古史를 알만한 江華! 우리가 하야 보고저 하는 江華! 우리가 기어코 가야만 할 江華!

 

-이러한 江華! 언제 한번 機會잇서 언제 한번 가서 보나? 언제 한번 그의 품에 들어 언제 한번 그의 사랑을 바들가? 皎皎秋月西山을 넘을 때 문득 그 생각이 나며 蕭蕭金風東窓을 스칠 때 또한 그 생각이 懇切하도다. 행여나 2, 3同志만 어드면 萬事俱除하고 決然江華行하리라고 斷然作念하고 苦待苦待하던 차 마츰 普成小學校修學旅行好機를 어드니 淸快1012의 아츰이로다.

 

京城으로 仁川

여섯에 일어나서 天氣부터 살펴보고 얼른 洗手하고 아츰도 못 먹고100一尺杖 휘두르며 鍾路를 썩나서니 벌서 오고가는 行人이 시골 市場만콤은 되어 보인다. 그 중에 나의 눈에 반갑게 보여 興分을 일이키는 것은 典洞으로 寺洞으로 씩씩히 모여드는 少年學徒들이다. 輕快校服변도를 둘러메고 意氣洋洋南大門을 향하야 快步를 옴기는 그들의 動作은 누가 보던지 感嘆치 안흘 수 업다. 그들의 가슴에는 生命의 피가 뛰며 그들의 발압헤는 希望의 빗이 비추웟다. 마츰 해가 그들의 가슴에 直射할세 그들의 얼굴은 더욱 아름다우며 가비어운 바람이 그들의 몸을 시츨세 그들의 手足은 더욱 敏活하다. 혹은 電車 혹은 徒步南大門 驛頭總集이 되니 先生學徒82이다.

 

85分 仁川直行은 우리 一行을 곱게 모신다. 그리 들추지도 안코 그리 기울거리지도 안는다. 첫 고동에 南大門을 떠나 두 번재 고동에 龍山에 이르니 複雜하나마 坐席整頓은 되엇섯다. 1分間 멈을러서 다시 가 구을기 始作하니 生意充天少年동무들은 그만 氣高萬丈하야 혹은 웃으며 혹은 노래하며 혹은 손ㅅ벽 치며 혹은 날뛴다. 象頭山이 굽어 賀禮하며 漢江水가 길이 압흘 引導한다. 구름은 슬어지며 바람은 긔척이 업서진다. 江山이 다-그들의 江山가트며 四圍에는 아모 것도 업서 보인다. 어떤 妙齡의 입으로 漢江鐵橋. -조타. 汽車歌하자-一令이 나린다. 그리자 모다 손ㅅ벽 치며 조타-」「하자-소리가 일제히 幷發되면서

 

들들들 굴러가는 汽車바퀴는

終日코록 쉬지 안코 다라나도다.

十里萬里 갈 길이 비록 멀으나

살과 가티 迅速得達하누나.(二節畧)

 

汽車歌를 목이 쨰어져라 손바닥이 터져라 하고 高唱大拍을 하는데 첫 句節의 고흔 목소리 曲調는 마치 十里淸灘潺湲波絞가트며 둘재 句節의 놉흔 소리 강한 曲調는 마치 萬丈飛瀑砯砰怒濤와 갓다. 일제히 하하웃고 일제히 딱딱손ㅅ벽 치고는 다시

 

景槪조흔 과 물은, 재가 사랑함이로다.

四面江山 단이다가, 조흔 곳 왓네

 

探勝歌해 부르며 발을 굴으며 손을 휘두르는 光景은 실로 의 빗이 질질 흐르는 勇少年임을 歷歷하겟다. 子弟잇는 이는 學校에 보내기를 하며 아들 딸 업는 이는 아들딸 낫키를 하며 늙은이는 隱然히 눈물지으며 젊은이는 실로 부러워한다. 間間이 끼어 안즌 男女乘客들은 아모 私談이 업다. 어떤 이는 精神업시 안저 勇少年의 날뜀을 바라볼 뿐이며 어떤 이는 히죽이101웃으며 어떠 이는 손목을 만저주며 어떤 이는 어느 學校고 무르며 어떤 이는 噓唏一嘆으로 無子한다.

 

는 어느덧 永登浦 素砂를 거쳐 杻峴을 왓다. 左右山丹楓이며 上下野黃禾는 우리의 눈,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한다. 朱安鹽田紹介하자마자 벌서 仁川이라 한다. 에 나려 埠頭에 이르니 아홉시 족음 넘엇다.

 

仁川으로 傳燈寺

 

우리 一行預想迅速하고 便利蒸氣船이엇스나 形便에 의하야 不便하나마 부득이 木船을 타게 되엇다. 往復 36으로 木船 을 불러 타고 70里 水路를 젓기 始作하얏다. 仁川을 등지고 月尾島를 엽헤 끼고 永宗島를 압흐로 보며 으여차 그여차 波濤와 싸움을 하게 된다. 바다와 바람은 떠날 수 업는 關係가 잇는 듯하다. 陸地에서는 一点風이 업더니만 바다를 하자마자 바람이 일기 始作한다. 心術구진 海伯이 우리 一行勇氣試驗코저 함인 듯하다. 비록 살이 하고 뼈가 하나 우리 勇少年은 족음도 恐怖가 업다. 배를 처음 타보고 바다를 처음 보지만 船長海老에게 못하지 안타. 波山波谷起伏할 때마다 船頭船尾上下할 때마다 가 더 나며 이 더 실린다. 月尾島 難關을 겨우 넘어 虎島를 안고 돌을세 압배에 탄 사람은 어서 오라고 손을 저으며 뒷배에 탄 사람은 가티 가자고 손을 휘두른다. 압배가 떨어지면 뒷배가 압서고 뒤배 沙工이 잘 저으면 압배 沙工에게는 攻擊이 퍼붓는다. 마치 압배는 敵軍의 탄 것갓고 뒤배는 追擊軍이 탄 것갓다. 一場活動寫眞이 열린 듯하다. 콩알섬을 지나면 밤알섬이 보이며 자라섬을 지나면 거북섬이 또 닥친다. 白鷗翩翩히 날며 波光天色一樣인데 孤島漁翁船頭에서 放歌하며 遠村微烟石峯으로 살작 돈다. 그 중에도 心線을 끄을며 情緖를 그러당기는 것은 背山臨海數間茅屋에서 唐紅치마 美少女를 이끌고 나와 손바닥만한 菜田에서 白菜뽑는 島國婦人이다. -그들의 生活! 얼마나 滋味스러울가. 男便은 고기 잡고 女便白菜뽑고 少女는 재롱부리며-하는 自由島自由人들의 生活?! 交通이 비록 不便하고 出入이 비록 苟苟할지나 밥 먹고 똥 싸고 않들 나코 딸 나코 배 타고 타고 하는 그들의 生活 그 얼마나 自由스러운가. 나는 실로 그들을 위하야 祝福하며 欽羡하기에 마지 못하얏다.

 

永宗島를 벗어나서 江華海口로 들어간다. 멀리 山城이 보이며 松林이 보이며 大刹이 보인다. 沙工에게 무른즉102그가 곳 傳燈寺라고 우리 一行拍手로써 멀리 來意하며 沙工督促하야 速行하니 어느덧 草芝里渡船場에 이르엇다. 때는 오후 3이며 一行이 다 無故하다. 江華天道敎人 具德禧 具達祖氏 10餘人이 반가히 마저준다.

 

草芝里砲臺를 싸핫던 곳이다. 지금도 堡壘가 남아 잇다. 草芝里上下端은 다-砲臺하얏던 곳이다. 草芝里西으로 10里許돌목(石項)海口가 잇다. 돌목東岸砲臺辛未亂에 우리 魚在淵將軍洋軍奮戰하던 곳이다. 辛未를 귀로 들으며 이 땅을 발로 밟으며 당시의 을 스스로 생각하니 忿하기도 하고 可笑롭기도 하다. 를 말하기 果然 어렵다. 洋國艦隊가 지금것 잇서 挑戰하는 듯하며 우리의 砲臺로서 빨간 불이 반작거리는 듯하다.

 

-江華島 亂을 몃번이나 치럿는가. 4000戰史考察하야 볼 때 누가 江華에 대하야 눈물을 아니 뿌리겟는가. 帝王이 몃번이나 하얏스며 生靈이 몃백만이나 魚肉이 되엇는가. 壬辰 丙子慘劇, 丙寅 辛未兵火--우리로서는 永遠히 잇지 못할 것이 아닌가. 더욱이 우리의 금일이 境遇直接招來한 것이 江華에 잇슴을 切實記憶할 때 우리의 가슴이 얼마나 압흐겟는가.

 

우리 一行悵然佇立하야 悽然顔色으로 자취만 남은 左右砲臺를 보며 스스로 눈물짓기에 마지 못하얏다. 往事莫論이라. 來頭를 위하야 奮鬪할 뿐이라 하고 一行夕陽山路千古을 뿌리며 緩緩히 거러 三巨里를 거쳐 普通學校, 面所, 駐在所가 잇는 곳 鼎足山城(三郞山城)東門턱을 올나섯다.

 

-鼎足山城! 一見萬年愁가 다-슬어지도다. 四面으로 바다를 보며 島嶼를 보며 田野를 봄은 鼎足山城外景이오 솟발가티 둘러선 露積績, 落照, 昆盧三峯을 보며 鬱蒼松栢을 보며 雄壯寺刹를 봄은 鼎足山城內景이다. 하물며 神代神祖追慕하는 우리의 情境이랴. 日暮함을 하야 곳 傳燈寺하니 5, 6名 和尙合掌禮로써 마저준다. 을 정하고 石溪에 발씻고 少年友와 더불어 1時間 談樂한 뒤 素菜白飯으로 배을 불키고 자리에 누워 心身慰勞하얏다.

 

翌日 淸晨에 막대를 들고 史庫터을 올라 四圍景色玩賞하고 寺中에 돌아와 住持僧鞠昌煥師하야 來歷하얏다. 의 말을 듯건대

 

傳燈寺舊名眞宗寺이엇는데 高麗 忠烈王時 貞和宮主玉燈三個함으로부터 傳燈寺라고 改稱하얏다 한다.(其亦事實末詳云)103創建累次 兵火하야 史記消失하얏슴으로 그 年代確知하다 하며 殘史元至政 33次 重修라 함을 보건대 적어도 2000年前이라 한다. 前面露績峯下30餘間兵庫가 잇섯던 바 己酉年間養兵所據로 인하야 日兵消火하야 지금은 墟據만 남앗다 하며 西面 落照峰下에는 由來國史保藏하던 史庫가 잇섯던 바 年前總督府로부터 國史移去함에 하야 史庫毁破하고 其亦 빈터만 잇다 한다.

 

그리고 三郞山城檀君三子께서 하심은 事實인 바 中間幾度改築이 잇섯다 하며 周圍10里假量인데 東西南北 4이 잇스며 三郞山城鼎足山城으로 改稱함은 三峰完如鼎足이라 하야써 하얏다 한다. 重修距今 5年前이라 하며 財産4, 5石秋收不過하다 하며 末寺30이나 잇는 中 彼有名開城 華藏寺도 그의 末寺라 한다. 現在 僧侶20不過하며 方在仁川布敎堂하는 중이라 한다. 나는 住持和尙에게 1時間동안 에 관한 말을 듯고 하야 對潮樓하야 眼前自然과 즐기게 되엇다. 으로 永宗列島碁局과 가티 보이며 仁川港大小烟突이 우뚝우뚝 섯슴을 보겟다. 으로 金浦諸山을 보겟스며 멀리 三角道峰雲霧중에 놉히 솟앗슴을 보겟다. 넘어로 구비구비 휘두른 洋洋漢江이며 셤 사이로 줄곳 내버든 洋洋黃海는 다-對潮樓의 조흔 景槪이다. 해뜨는 아츰 구름 돌아가는 이때 爽快松風을 가슴에 바드며 金色波光을 내밀어 보는 나의 心身仙臺한 듯 雲間하는 듯 一大 快味가 실로 俗界凡人키는 抑鬱하다. 오고 가는 商賈船은 어긔어차 저으며 크고 작은 男女老少가 이 집 저 집 나설 때에 對照樓 놉흔 곳에 飄然히 서서 浩然一氣함은 이 실로 이 平生快事이다.

 

슬프다. 이것도 잠간이다. 聚立一令學生들은 벌서 行列을 지어 장차 떠나려 한다. 슬프다. 山高水長萬古一樣인데 오즉 人生無常하고나. 對照樓를 어찌 나뿐 반겻스랴. 千古遊客이 다-반겻슬 것이며 對照樓를 어찌 나뿐 슬퍼하랴. 千古遊客이 다-슬퍼하얏슬 것이다. 하나 하나 외울새 업시 총총히 摩尼行하게 되엇다. 나는 할 일업시 牧隱潮樓晩對一塵淸今古遊人幾遍行. 芸閣秘書藏百世 蓮燈貝葉悟前生. 地分山足渾如鼎 石隱楓林自護城. 好是禪綠來信宿. 啼禽老佛總關情을 빌어 외울 뿐이엇다.

 

傳燈寺摩尼山104

 

13日 上午 9이다. 우리 一行鼎足山城 西門을 넘어섯다. 黃海 萬里眼下에 노혓스며 摩尾高峯天空에 놈핫섯다. 船頭里 ()벌을 건너 下道村을 거쳐 摩尼下麓을 끼고 돌을세 漁翁에게 길을 무르며 村婦에게 물을 어더 먹으며 혹 을 어드며 혹 밤을 주으며 혹 野菊을 꺽그며 혹 나락을 만지며 竹杖을 춤추어 談笑和樂, 겨온 거름은 疲困할새 업시 어느덧 摩尼山下 德浦里에 이르럿다. 村家點心을 맛기고 旅服更束하야 祭天壇을 향하고 올라갈세 하고 하야 凡足容易치 아니하다. 비록 少年軍이나 우리 一行冒險이 아니면 生意도 못하겟다. 이어차 이어차 一步一步 登하니 先隊先, 中隊中, 下隊下, 或行或立, 或高喊, 或喘息果是探勝隊가트며 突擊軍갓다. 바위를 넘으면 또 바위 을 오르면 또 이다. 구두를 벗으며 上衣하며 나무를 휘어잡으며 길 대 기고 뛸 대 뛰어 艱辛艱辛上上峰하니

 

-하도다. 險路를 지나고 難關을 넘어서 摩尼山 上峯에 올라선 壯觀 江華全幅足膝下屈服되엇고 忠淸 京畿 黃海大小山河眼前展開되엇다. 黃海에 바람 일고 山巓에 구름 돈다. 山水-其極하얏다. 이러한 山海絶處에 무엇이 잇는가.

 

-祭天壇! 우리 倍達國創建하시고 우리 倍達兄弟를 나흐신 우리의 倍達國神祖檀君께서 三子하사 祭天하시던 祭天壇!! 우리 兄弟-하매 한아버지를 뵈옵는 듯하면 한아버지 품에 든 듯하도다. 한아버지께서 우리의 등을 어루만지는 듯하며 우리의 머리를 쓸어주는 듯하도다. 우리는 실로 惶悚함을 치 못하겟스며 感淚抑制치 못하겟도다.

 

우리를 잘 살리기 위하야 우리에게 永遠한 씨를 뿌리기 위하야 몸소 을 싸흐시고 몸소 한우님께 祈禱하시던 祭天壇! 한아버지의 語音이 들리는 듯하며 한아버지의 足跡한 듯하도다. 4000東洋藝術代表的 祭天壇! 東西人欽嘆하는 祭天壇雄偉堅固10000不敗祭天壇! -실로 朝鮮魂이 다-뭉친 듯하도다.

 

-슬프다. 後孫無能하야 이 寶壇善保치 못하얏도다. 幾千年風雨多少毁傷이 되엇던 次 無知沒識日兵最後破壞하얏다 한다. 지금은 牌文門樓도 업시 다만 石臺 2뿐이로다. -傷心處로다.

 

寶壇이 만약 英米에나 日本에 잇서 보라. 그들이 얼마나 힘잇게 保存하얏겟는가. 우리가 不幸하니까 寶壇조차 不幸하얏도다.105檀君 한아버지의 嚴責이 나리는 듯하도다. 우리 一行은 다 各其 아모 말업시 沈黙裏에서 後生無能自責하면서 將來를 위하야 義奮을 내엇섯다.

 

우리 一行두 시간이나 天壇에 올라 一悲一嘆, 千古懷를 말하며 四圍風景翫賞하다가 午後 3時頃에야 下山하야 德浦里 李應冕氏宅에서 点心하고 回路하얏다.

 

開城行

李丙燾

 

1014-1921-

며칠 旅行準備에 바뿌던 우리는 이날이야 하고 하여 校門(中央高等普校)하엿다. 晶曜한 한울은 더욱 우리에게 깃븜을 주엇다. 南大門驛에 달려나와 一行午前 950分發 北行車에 실리어 100團軆를 지엇다. 실려 잇는 우리 一行呼角소리에 바퀴의 움즉임을 보고 愉快하기 始作하엿다. 乘員은 압흘 다투어 窓外野景을 바라보앗다. 超脫氣象天空春飾夏繁形式을 벗은 山水草木은 한께 透明沈着觀念世界로 들어온 듯하다. 乘員의 혹은 水色廣野展開禾穗를 보고 이를 밀우어 全道豐作을 점()치는 도 잇섯스며 또 혹은 村家 집웅우에 널린 밝안 고초를 바라보고 이를 歎美하는 도 잇섯다. 실로 이 고초는 村家裝飾한 것가티 보엿다. 굴으는 바퀴는 벌서 臨津江을 건너 長湍驛을 지나 目的地開城을 다다럿다. 時刻1130이엇다.

 

驛頭에는 우리 一行을 맛는 2, 3紳士가 잇섯다. 그들은 곳 우리 學校校友이엇다. 一行全部 車에서 나리어 職員의 그들에 대한 簡單한 인사가 잇슨 뒤, 그들의 引導알에 驛長을 벗어나 市街로 향하엿다. 鐵道公園압흘 지나 途中 左側으로 舊太平館(元使留宿케 하던 곳)壽昌宮(李太祖 卽位하던 곳)란 것을 順次로 살펴본즉 舊閣은 어더볼 수 업고 다만 그 位置하여잇던 곳만 瞥見할 뿐이엇다. 다음 또 左側으로 一門樓視界안에 들어옴을 보고 나는 곳 南大門임을 깨달앗다. 果然 開城市街의 거의 中央位置南大門이엇다. 規模는 매우 적으나 그래도 나는 이 京城 南大門보다 2혹은 3을 압서된, 李太祖 2에 된 古建築物로 생각하고 본즉 스스로 거듭 쳐다봄을 깨닷지 못하엿다.106

 

또 그 門抨우에 걸린 大梵鍾600餘年前鑄造된 것으로 現存朝鮮 4大鍾1이라 이른다. 나는 市街地에 들어와 더욱이 압흘 當到하여, 通過하는 이곳 사람들을 보고 녯날 高麗사람이나 본 것가티 깃버하엿다. 門東側楓橋를 건너 으로 左折하여 섯던 터를 밟으면서 子男山向登하엿다. 山上에 올라 市街를 굽어본즉 市街의 대부분은 眼下에 노혀잇다. 나는 곳 地圖를 펴들고 古城壁周圍廣大함과 今市街分布地域狹小함을 實際比較하여 보고 또 昔日 戶數10萬餘하엿다는 記錄聯想하여 今昔變異치 못하엿다. 실로 昔日繁榮이 이가티 衰落하엿나 하는 太息再抑치 못하엿다.

 

그러나 市街중에 石造洋屋比較的 만히 잇슴을 發見하고 나는 좀 慰安이 되어 곳 引導하는 J에게 그 무슨 집임을 무러보앗다. J親切하게 一一이 가리처 주고 또 開城서는 巨大石材가 만흠으로 煉瓦造보다 돌이어 石造屋工費하다고 말하엿다. J은 더욱 자미잇는 말로 모든 巨屋有名古蹟잇는 곳에 향하여 우리에게 說明하여 주엇다. 말이 끗난 뒤 를 끌고 觀德亭虎亭(射亭)을 등지고 이 山東麓으로 나려가서 麗末忠臣이오 大儒鄭圃隱先生舊邸崧陽書院에 들어가 先生影幀遺物을 어더 보게 되엇다.

 

一同은 이에 대하여 鄭重敬禮하고 좀더 나려와 先生最後悲慘하던 善竹橋上에 모여 里人하는 所謂 血痕을 살펴보앗다. 宛然斑血石橋一部를 흐르는 듯하엿다. 나는 다시 머리를 돌려 으로 李太祖舊宅穆淸殿을 바라보고 다시 지금 보고 온 崧陽書院을 돌아다보면서 녯날 鄭先生李太祖問病하고 自宅으로 돌아오다가 이 다리에 서 李太祖心服 趙英珪에게 狙擊을 당하던 光景을 그리어 보앗다. 이에 대한 약간의 說明이 잇슨 뒤 一行慷慨한 맘으로 古人하고 다리 西側에선 碑閣에 들어가서 我英宗, 高宗, 先生忠節表彰碑文一讀後閣庭散座하여 携來點心하엿다.

 

時針下午 120을 가르치엇다. 食後步하여 昔日 最高學府이던 成均館하고 하여 彩霞洞에 들어가 幽佳景色하엿다. 불꼿에 눌린 듯한 黃葉과 서리에 물들러 타는 듯한 紅葉幽邃洞中化粧시키어 더욱 빗나게 하엿다. 아름다운 自然迷醉한 일동은 을 이기지 못하여 撮影으로써 이 곳을 探訪記念하엿다. 다음에 石造巨屋松都高等普通學校하고 하여 市街로 들어왓다. 旅館校友周旋下에 정하여젓다. 를 네 집에 난후어 宿泊케 하엿다. 夕飯後 나는 호을로 거리를 하여 散策하엿다.107

 

開城사람의 一種 숨은 生活이라 할는지 다른 곳에서 發見치 못할 疑集的, 團合的, 守舊的 生活現象을 엿보앗다. 9時半 館에 돌아와 첫 나그네 꿈을 꾸엇다.

15日 早朝, 한 잠을 깨어 一行은 다시 簡便히 하여 校友 K引導朴淵을 향하여 勇進하엿다. 上午 6엇다. 隊列市街를 훨신 벗어나자 東天은 막 朝日을 비져냇다. 朝日의 떠오르는 形勢와 주는 센비츤 行頭에 부는 囉叭소리와 한께 새벽의 寂寞을 깨치엇다. 東北으로 멀리 보이는 金角峰天摩山은 한울을 뚤흘만큼 元氣차게 솟아잇다.

 

三角山比較하여 一致이 만흠을 發見하고 興味를 느끼엇다. 얼마 아니되어 徐花潭先生(徐敬德)의 놀던 逝斯亭을 다달앗다. 압헤 잇는 花潭엽헤 선 嶄巖巖上에 고흔 丹楓數百餘年前 先生의 사랑하던 自然이엇다. 書籍으로 先生을 늘 崇慕하던 나는 이곳에 와서 더욱 先生性格闡明할 수 잇섯다. 거름을 계속하여 두어 고개를 넘은 뒤 槐亭에 와서 다리를 또 쉬고 携帶한 벤도를 먹엇다.(槐亭이라고 무어 亭子가 잇는 것이 아닐다. 岩石에 이가티 새겨잇슴으로 나도 이곳 이름을 그러케 부름이다)

 

食後 一行은 일층 勇氣鼓舞하여 大興山城門(南門)을 향하여 險惡한 길을 攀登하엿다. 左右丹楓에 싸히어 오르고 오르는 중에 놉히 보이던 城門未久에 우리 脚下에 잇섯다. 으로 三角山西으로 黃海를 바라볼 수 잇는 놉흔 곳임을 깨닷고 往時 唯一要害高麗王 室避難所適當하엿던 것을 果然 認識하엿다. 헐어진 城門을 등지고 나려와 昔日 軍營行宮잇던 자취를 볼 수 잇섯다. 大興寺를 지나 다시 石徑曲路踏破하엿다. 左右側으로 岩石大小不問하고 人名刻書가 업는 돌이 거의 드믈엇다. 이곳뿐 아니라, 지금 밟아오던 길에서도 만히 보앗섯다. 어떤 바위에는 에 아모 에 아모 에 아모 에 아모라는 마치 家譜一部를 새겨 노타십히 하엿다. 多數人名一一이 세여볼 수는 업섯지만 그 多數人名 중에서 偉人이나 天才를 하나도 發見치 못하엿다.

 

山城北門하여 가까스로 40里 長路目的地朴淵到達하엿다. 5分前 12이엇다. 一大奇絶瀑布群衆熱狂的으로 뛰고 부르지젓다. 怒瀑은 우리를 戰慄케는 못하엿스나 그대신 自然神秘奧底를 열어 보이는 듯하엿다. 도 갓고 屛風도 가튼 奇巖怪石-더욱 上朴淵潭水를 담은 큰 항아리가튼 돌이며 또 潭中에 솟은 島巖-一層 造物主妙秘108손을 빌어 된 것으로 생각하엿다. 俗傳에 녯날 朴進士가 잇서 淵上에서 을 불고 잇섯더니 龍女가 이를 感得하고 朴進士하여 를 삼앗다 한다. 朴淵이 이에서 由來한 것이라 里人은 말한다. 一種 웃은 이악이에 不過하나 이것이 自然秘密人間과의 交通具軆的 方法으로 그리려 하는 努力에서 나온 것은 勿論이다.

 

1時餘觀賞이 잇슨 뒤 다시 山城內하여 아까 지나오던 大興寺에 들어와 이미 豫約하엿던 이곳 別味의 비빔밥을 요긔하고 歸路에 오를 動力振作하엿다. 下午 3時頃寺內我隊는 오던 羊膓曲路하야 혹은 險高한 고개를 두어번 넘어 道半에 이르럿다. 벌서 夕照燦爛함을 보게 되엇다. 또 압흔 다리를 억지로 이기어 것고 것는 중에 東嶺에서 吐出하는 보름달을 보게 되엇다. 俗談에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이곳에서 우리는 望月하게 되엇다.

 

우리에게 적지 아닌 慰安을 주엇다. 나는 먼저 이 달을 하여 古人心情追憶치 아니치 못하엿다. 우리가 바라보는 달은 녯날 高麗人도 바라보던 同一한 달이엇다 하는 意識은 더욱 過去觀念을 새롭게 하엿다. 은 이미 하여 山河만 오즉 依舊하다고 長歎하던 맘도 天上에 걸린 明月永劫不變함을 볼 때에 山川도 오히려 滄桑치 못하엿스리라 하는 생각뿐이엇다. 실로 天地悠久하여 人生須臾임을 치 아니치 못하엿다. 不知中에 벌서 我隊市內當到하엿다. 一行 無事歸宿하게 된 것을 서로 喜幸히 여기엇다.

 

16日 朝 8時頃 疲困한 다리를 다시 일으키어 하여 校友 J先頭미테 共同白蔘製造場叅觀하엿다. 百蔘香臭하여 으로 먹으니와 진배업다고 생각하엿다. 넓은 마당에 펴널은 白蔘數爻도 만치만 蔘皮를 벗기는 婦女勞働者도 또한 만흠을 發見하엿다. J에게 1이 마당에 떨어지는 갑이 얼마 되는가 무럿다. 무려 백만원의 巨額한다 하엿다. 은 실로 開城사람의 半生命이라고 말할 수 잇섯다. 다시 J은 우리를 끌고 松巖山밋에 잇는 滿月臺로 향하엿다. 林檎밧을 지나 몃개의 階段을 올랏다.

 

階段위마다 一帶廣場이 잇다. 廣場에는 樓門殿閣이 서잇섯는 것을 想像할 수 잇슬만큼 만흔 柱礎를 볼 수 잇섯다. 더욱 會慶殿이 서잇던 곳에 올라서 四圍를 돌라보고 昔日 宮殿雄大하엿던 것을 또한 想像할 수 잇섯다. 4, 5백년 榮華를 누리던 터가 지금은 오즉 荒寥하고 말앗다. 생각컨대 宮殿仁宗(17)時 李資謙亂一部 灰燼되엇고 重建되엇던 것이 恭愍王(卅一代)때에 이르러 紅賊109인하여 全部 烏有한 것이엇다. 所謂 滿月臺라 함은 이 會慶殿터를 이름이라 한다. 그러나 본래는 宮中望月臺가 잇서 後人滿으로 訛稱하여 터의 大部分滿月臺라 하엿다 한다.

 

J은 또 우리를 끌고 訥里門을 나와 高麗太祖顯陵으로 인도하엿다. 他處로 여러번 移葬하엿던 이엇지만 石物其他比較的 完全히 남아잇다. 지금껏 陵叅奉을 두고 守護하여 나려온 德澤이라 한다. 陵叅奉特別王姓을 가진 사람으로써 한다 이른다. 그러나 이 을 뒤로 두고 西便으로 향할 때에 附近 丘上에 보이는 歷代諸王陵荒凉하여 陵名勿論, 何代王의 것인가도 모른다 한다. 10를 또 거러 恭愍王玄陵同王妃魯國大長公主正陵하엿다.

 

이 두 石物其他附屬物雄大優麗함은 이미 들어 안 바이지만 實地로 와본즉 果然 點頭치 아니치 못하엿다. 麗代 諸王陵勿論이오 李朝歷代으로도 이 石物가 될 수 업다 한다. 一方으로 이를 밀우어 麗末王家窮奢極侈히 알 수 잇섯다. 이가티 宏壯히 일으킨 陵墓가 지금은 또한 荒廢함을 치 못하엿다.

 

王氏子孫으로도 이를 위하여 守護하는 업다 나는 생각하엿다. 만일 이것이 孔子墳墓釋迦墳墓, 그리스트, 마호메트의 墳墓라고 하면 설마 이가티 頹廢한 가온대는 잇지 아니하엿스리라. 子孫이 업다하더래도 聖者信崇하는 사람들은 死力을 다하여서라도 他人치 아니할 것이다. 王者聖者가 이런 족으만 일에도 심함을 느끼엇다. 麗末衰運을 이악이하면서 携帶點心하엿다. 歸路杜門洞歷入하여 麗末 72節義彰示我英宗御製御筆碑文謹讀行步히 하여 開城驛에 다달앗다. 2時間을 기다리어 52分發 列車京城을 향하엿다. 車窓하여 未久夕烟村家에 일어남을 보앗더니 또 얼마 아니되어 旣望의 달이 우리의 늲이 되어잇슴을 깃버하엿다.110

 

 

 

개벽 제17

발행년월일 19211101

기사제목 淸秋

필자

기사형태 기행문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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