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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문화/인천배경문학,예술,문화

인천의 성냥공장 노래와 시

by 형과니 2023. 7. 2.

인천의 성냥공장 노래와 시

인천의문화/인천배경책과영화&문학

2019-07-09 14:32:47

 

인천의 성냥공장 노래와 시

 

1883년 인천의 개항은 이곳에 많은 변화를 가져 왔는데, 그 중 하나가 여기에 성냥공장이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1900년 러시아 대장성이 발행한 '조선에 관한 기록'이란 보고서에는, 1886년 제물포에 외국인들이 성냥공장을 세웠는데, 값싼 일본제 성냥의 범람으로 얼마 되지 않아 생산을 중단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으로는 이 성냥공장의 정확한 위치와 상호, 규모 등을 알 수 없다. 단지 한국 최초의 성냥공장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기록에 남아 있는 인천 최초의 성냥공장은 191710월 지금의 동구 금창동에 세워진 조선인촌주식회사(朝鮮燐寸株式會社). 1932년 인천교육회에서 간행한 <인천향토지(仁川鄕土誌)>에는 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어, 이 중 중요한 사항만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역주譯註 인천향토지,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2005, 298~299쪽 참조)

 

첫째, 목적 : 인천공장에서는 성냥을, 신의주공장에서는 나뭇개비 및 성냥갑 종이를 제조한다. 둘째, 직공수 : 인천공장에서만 남자직공이 150, 여자직공이 300명으로 합계 450명이고 그 외 가정에서의 부업으로 성냥갑 만들기에 종사하는 자가 약 2500명에 달한다. 셋째, 직공임금 : 최저 30, 최고 150(1일의 생산량에 따른다), 성냥갑 붙이기 임금 1만 상장 160(1일 한 사람 평균 500상자를 붙일 수 있다) 넷째, 생산량 : 1200상자(200다스들이=240봉입) 일년간 약 6만 상자 즉, 조선 내 소비량의 약 1/3에 해당한다.

 

이상에서와 같이 성냥 제품 생산은 수공업으로, 당시 조선처럼 비교적 임금이 저렴한 지역에서는 가장 유리한 사업이었다. 더욱이 인천은 압록강 오지에서 생산되는 성냥 원료인 나뭇개비와 성냥갑 종이를 쉽사리 들여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경인 지역의 넓은 시장에 인접해 있다는 이점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인들에 의해 세워진 이 공장은 이처럼 비교적 다수의 직공을 필요로 하는 것 이외에도 상자(성냥갑) 제조를 위해 조선인에게 원료를 공급하고 노임을 주는 곳이 500여 호에 달하게 하는 등 지방 산업의 발달에 공헌하는 바가 크다는 평가를 받게 했다.

 

그렇지만 <인천향토지(仁川鄕土誌)>에서의 이러한 평가가 일본인이 당시 그들의 관점에서 인천향토사를 정리하면서 얻게 된 결과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일례로 그 무렵 조선노동자들은 일본노동자의 임금인 252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원을 받는 민족차별을 견뎌야 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1920년대 말부터 단체 행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던 인천 성냥공장 근로자들이 1931년 파업에서 승리를 쟁취하자 1932년에 들어 금곡리(금창동) 공장과 송림정(송림동) 공장이 경영주의 횡포에 항거하여 동시 파업에 들어갔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하지만 이 성냥공장 근로자들의 파업이 정미 업계로 파급될 것을 우려한 경찰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2주일 만에 무조건 업무에 복귀하기로 하고 해산됐다.

 

이와 같은 측면에서 본다면 일제강점기를 지나 1980년대 신식 가스라이터의 생산으로 성냥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기 전까지 어려운 시기에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이 땅의 누이로서 인천의 성냥공장 여성근로자들이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라고 오히려 조롱의 대상이 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군대에서 "인천에 성냥공장 성냥공장 아가씨 / 하루에 한 갑 두 갑 일 년에 열두 갑 / 치마 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 때 / (이하 생략)"와 같은 노래가 군가처럼 불렸던 것은 사실이다. 지난날 많은 군인들은 그 사연도 모른 채 행군할 때라든가 힘들면 이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김윤식의 '인천의 성냥공장'을 비롯하여, 김연신의 '인천에 있는 슬픈 성냥 공장', 박흥식의 '인천 성냥공장', 이남숙의 '성냥공장을 보았니', 정경해의 '인천 40-만석동 성냥공장', 최정례의 '성냥공장 아가씨' 등의 시는 좋지 않은 작업 환경 속에서 다른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일에 충실해야 했던 그들의 삶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해 주어 그나마 다행이다.

 

이렇게 볼 때 세상 만물이 다시 탄생하는 이 봄날, 이들 시를 감상해 봄으로써 그들이 느꼈을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풀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인천에는 속된 노랫말의 옛날 성냥공장이 남아 있다. 누가 지었는지, 입에 올리기가 거북하지만, 노래의 뒤는 씁쓸하다. 불을 켜기 위해 어둠 속에 몸을 감추는 부끄러운 누이들, 아가씨들이 있다. 영영 여기를 떠나지 못하는, 황 냄새 매캐한 옛날 성냥공장이 있다. 슬픔이 있다. // 붉은 벽돌로 지은 삐죽한 安氏 아저씨네 공장 울타리에는 흰 가을꽃들이 하늘거리고 있었다."(김윤식, '인천의 성냥공장' 전문)

 

황규수 동산중 교사·문학박사 2017.05.10 인천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