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오래된 중국집
仁川愛/인천이야기
2019-10-22 15:42:41
인천의 오래된 중국집 글. 유동현
* 공화춘의 후예들, 여전히 춘장을 볶고 있다
물 끝 닿는 곳에 화교가 있다. 전 세계 모든 곳에 화교들이 살고 있다. 인천에는 개항과 더불어 청국 거상(巨商)들이 입항하고, 뒤이어 쿨리(苦力·노동자)들도 밀려들었다. 그들과 함께 중국 음식문화가 들어왔다.
그들은 어디에 가든지 식칼 하나와 춘장 한 단지만 있으면 청요리 음식점을 차릴 수 있었다. 한국 최초의 서양 호텔이었던 중화루(中華樓)는 1915년 청요리 집으로 바뀌어 60여 년간 그 명성을 날렸고 이어 송죽루(松竹樓)가 문을 열었다.
애관극장 옆에 평화각(平和閣), 빈해루(濱海樓) 등이 개업하고 덕순반점, 원동반점 등이 중국집 간판을 걸면서 인천은 명실공히 청요리의 본산이 된다. 이제 1세대들은 거의 다 세상을 떠났고 몇 집만이 그 아들 혹은 손자들이 그 손맛을 잇기 위해 여전히 불과 씨름하고있다.
신일반점(新一飯店)
팔순 주방장이 만드는 해삼요리
현재 우리나라 중국음식점 중 가장 고령 현역 주방장은 신일반점의 임서약(林書若) 옹이다,
1931년 생으로 올해, 만으로 81세다. 신일반점에는 한명의 요리사가 따로 있긴 하지만
아직도 불 앞에서 커다란 검은 냄비를 들었다 놨다 하는 실제적인 주방장이다.
중국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가 고향인 임 옹은 65년째 중구 신흥동로터리 주변에서
청요리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신일반점의 뿌리는 현재의 자리 건너편에 있던 작은
아버지(임극관·林克寬)가 하던 호떡집이었다. 임옹은 16세 때 낯선 땅 인천에 첫 발을
내디뎠고 작은 아버지를 도와 일을 했다. 비가 줄줄 새는 단층 하꼬방을 40만원에 얻어
중국 호떡을 팔아서 돈이 조금 모아지면 수리해가면서 살만큼 어려운 생활을 했다. 자식이
없던 숙부는 그를 1957년 양자로 입적했다.
그는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전라도 광주의 음식 재료상에 취직한다. 구례의 중국집에 자주
물건을 배달하러 다니다가 그 집 딸 왕수진(王秀珍)을 만나 결혼하게 된다. 임 옹을 믿음직
하게 보았던 처가집에서는 그에게 요리를 가르쳤다.
인천으로 돌아와 호떡집을 중국집으로 바꾸고 ‘신흥동에서 제일 맛 좋은 음식점이 되자’는
소망을 담아 ‘신일반점’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살림집이 따로 없던 부부는 가게 홀에서
의자를 붙여놓고 새우잠을 자면서 일을 했다. 남편은 불 앞에서 땀을 흘렸고 아내는 하루에
40지게씩 우물에서 물을 길어 날랐다. 부부의 근면성과 요리 솜씨 덕분에 손님이 줄을
이었다. 하루에 밀가루 4포대가 소비되었는데 짜장면으로 치면 300 그릇이다. 면을 만들기 위해
수타하는 사람만 3명을 두었다는 게 임 옹의 기억이다.
78년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10여 년전 까지 만해도 돌잔치나 약혼식을 치를 만큼
규모가 큰 연회석을 갖춘 음식점이었다. 예전만은 못하지만 아직도 임 옹의 손맛을 잊지 못해
찾아오는 손님들이 적지 않다. 임 옹 스스로 꼽는 베스트 메뉴는 해삼요리다. 해삼을 갈라
그 안에 다진 새우를 넣고 튀긴 다음 양념과 소스를 얹어 쪄내는 소양해삼은 특미 중 특미다.
알맞게 삶은 삼겹살을 접시 바닥에 편 다음 그 위에 해삼탕을 부어내는 해삼쥬스도 단골들이
즐겨 찾는 이 집의 특별요리다.
그런데 임 옹의 이 손맛은 아쉽게도 대를 이어 전해질 것 같지는 않다. 일찍이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고 마음먹은 장남 헌일(憲一·60)씨는 10대 후반에 요리를 배우려고 무척 노력했지만
재주가 없어 아버지한테 야단맞기 일쑤였다. 게다가 고도근시로 인한 불편함으로 결국 주방일
을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이후 배달일을 열심히 해 현재도 그 일을 하면서 아버지를 돕고
있다. 임 옹의 차남과 삼남은 일찍 세상과 이별했다.
헌일 씨는 왕윤청(王潤靑·55) 씨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그들은 현재 모두 한의사로
국자 대신에 침을 들고 있기 때문에 할아버지의 뒤를 잇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임 옹은
아들이나 다름없는 한국인 주방장에게 20년 넘게 비법을 전수해 주었기 때문에 그의 손맛은
계속 이어질 것이라 게 식도락가들의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신일반점 882-1812
신성루(新盛樓)
옛 중국집 분위기 그대로 간직
신성루를 처음 개업한 사람은 현재의 사장 장덕영(張德榮·53) 씨의 외삼촌 이영은(李永恩·
작고) 씨다. 중국 산동성 출신인 이 씨는 일제강점기에 한국을 오가며 무역을 했다. 6.25 전쟁이
터지기 전에 현재의 위치 중구 신생동에 정착해 처음엔 월병 장사를 했다. 중국요리점으로
간판을 달았을 때 처음 이름은 신생반점이었다.
서울의 중국음식점에서 일하던 장 씨는 외삼촌의 부름을 받고 신성루에 와서 10년 동안
일하다 가게를 떠안게 된다. 외삼촌 이 씨는 병을 얻어 음식점을 운영할 수 없게 되었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외조카 장 씨에게 주방칼을 넘겨주었다. 장 사장은 그 후
오늘까지 28년 동안 신성루의 맛을 이어 오고 있다.
신성루는 손맛뿐만 아니라 공간 분위기로도 오래된 중국집의 맛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외삼촌의 큰 아들이 장가 갈 즈음에 지었다는 게 장 사장의 기억이다.
약 40년 정도 된 중국집이다. 나무계단, 창틀, 손님방 등 신축 당시의 분위기를 그대로 품고
있다. 특히 신성루의 특징인 작은 연못도 큰길가 출입문 옆에 그대로 있다. 그곳에는 80년 된
목단이 여전히 살아있다. 외삼촌은 그 목단을 미국에 가져가려고 할 만큼 애지중지했다.
옥상에 올라가면 40년 중국집의 역사를 고스란히 볼 수 있는 나무판자 옥탑창고가 있다.
한때는 종업원들이 잠자리였을 그곳에는 커다란 솥 등 옛날 주방 도구가 쌓여있다.
신성루의 전성기는 길 건너에 키네마극장과 동방극장이 있었던 70년대 중반이다. 영화 관람
후 사람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출입구가 길 양쪽에 있던 신성루는 그 당시 카운터가
두개였는데 계산하려는 손님들로 두 개의 카운터 모두 북새통을 이뤘다. 그 영화(榮華)도
구도심의 쇠락과 함께 어쩔 수 없이 사그러 들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매일 주방에 들어가
직접 식칼을 잡는 장 사장의 그 손맛을 잊지 못한 사람들의 발길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취재하는 날 인일여고 1회 졸업생들의 저녁 모임이 있다고 출입문 앞에 게시돼 있었다.
그들은 70세를 바라보는 나이다.
신성루 761-4463
진흥각(振興閣)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주방 들어가는 후(侯) 여사
진흥각이 중국음식을 요리한 지 올해로 꼭 50년째다. 왕진모(1980년 작고) 씨는 중국 산둥
에서 황해도 해주로 건너왔다. 왕 씨는 20세에 인천으로 내려와 배다리 근처 고모부가 운영
하는 중국집 금곡루(金谷樓)에서 일을 배웠다. 1962년 12월 10일 현재의 중구 신포동
스탠다드차타드은행(제일은행)에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왕진모 씨의 가운데 이름 ‘진(振)’
자를 넣어 ‘진흥각’ 간판을 달았다.
길모퉁이에 있는 진흥각 자리가 은행 위치로는 적격이라고 생각한 제일은행 측 요구에
따라 67년 바로 옆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일본식 2층 목조 건물이었는데 이름 덕분이었는
지 진흥각은 늘 문전성시를 이뤘다. 한때 진흥각에 가서 요리를 먹는 것을 최고의 대접이라고
생각했던 시절도 있었다. 어린이날에는 예약을 하지 않고는 짜장면 냄새조차 맡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왕진모 사장은 슬하에 3남 2녀를 두고 80년에 세상과 하직했다. 현재는 차남 왕린보
(王麟?·48) 씨가 실제적으로 진흥각을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주방장은 왕 씨의 화교 친구가
맡고 있다. 주방장의 손에 의해 진흥각의 맛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 후란영
(侯蘭英·81) 씨는 매일 아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주방에 들어간다. 직접 요리를 하진 않지만
요리사들에게 ‘진흥각 방식’을 강조하며 남편의 손맛이자 아버지의 손맛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진흥각 772-2944
복화루(福華樓)
‘복(福)’자 돌림의 마지막 중국집
복화루는 해방 직후인 1947년 부평문화의 거리 뒤편에 문을 열었다. 처음 문을 연 바로 그
자리에서 65년 동안 여전히 중국요리를 만들고 있다. 롯데백화점 부평점 맞은편에는
차이나타운 화교학교의 분교가 있었다. 그만큼 부평에는 화교들이 많이 살았고 중국집도
적지 않았다. 복금원, 복성원, 복흥원 등 유독 ‘복(福)’자 돌림의 중국집이 많았는데 이는
현재 복화루를 처음 문을 연 이복충 씨(1987년 작고) 형제들의 돌림자인 ‘복(福)’자에서
따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들 떠나고 복화루만이 그 전통과 맛을 지켜가고 있다.
복화루는 현재 이복충 씨의 아들인 이본위(67) 씨가 부인 왕수영(61) 씨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씨 부부의 부모와 조부모는 중국 산동성 출신으로 그들 모두 청나라 시대 때 인천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신흥동 신일반점의 이모네집이다.
복화루 503-9725
진흥관(振興館) - 현재 업종변경으로 운영하지 않고 있음
매운 짜장면으로 유명
주안사거리 옛 경기은행 옆골목에서 중국요리집을 해온 세월이 올해로 44년째. 이 집이
유명한 것은 ‘빨간 짜장면’ 사천(쓰촨)짜장면이다. 개업 내내 주방장을 지켜온 주인
왕동량(72) 씨가 20여년 전 개발해낸 매운 짜장면이다. 이 집의 또다른 주메뉴는 닭대신
복어를 사용한 복깐풍이다.
화교 2세로 인천이 고향인 왕 사장은 열아홉살 때부터 중국요리집에서 일을 배웠다.
서울 서대문과 명동 모 백화점 인근의 규모 큰 음식점을 거쳐 중구의 대표적인 중국집
‘진흥각’에서 주방장을 맡게 된다. 진흥각에서 7년 정도 일한 후, 왕씨는 독립해 주안 지금의
자리에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상호를 자신의 근무했던 ‘진흥각’의 이름을 따 ‘진흥관’으로
붙였다. 왕 사장의 부인은 탤런트 하희라 씨와 사촌지간으로 알려져 있다.
진흥관 875-1664
자장면 없는 ‘중국집’ 복래춘(福來春)
차이나타운 화교 중산학교 바로 정문 앞의 복래춘은 짜장면집이 아니다. 4대째 꽁신삥
(공갈빵)과 웰빙(월병)을 굽고 있는 중국 전통과자점이다. 지금은 곡회옥(曲懷玉·63) 씨와
그 아들 곡사충(曲士忠·31) 씨가 화로 앞에서 함께 땀을 흘리고 있다.
곡 씨의 할아버지는 1920년대 한국으로 건너와 월병을 팔기 시작했다. 그 역사를 한눈에
보여 주는 것이 상점 벽에 걸려 있는 ‘월병 가계도’다. 곡 씨의 가계(家系)를 그린 그
종이에는 월병의 기술을 전수한 가족들의 이름을 빨간색 테두리로 표시해 놨다. 가게
곳곳에는 월병 무늬를 찍어낼 때 사용한 나무틀 등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도구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복래춘은 처음에 공화춘(현 짜장면박물관) 근처에 있다가 50여 년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중국인들에게 원래 공갈빵과 월병은 간식거리가 아닌 제삿상에 올리는 귀한 음식이다.
곡 씨 가족이 만드는 과자들은 중국 산둥성 북방족의 맥을 고스란히 잇는 것들로 대만에서
만드는 남방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복래춘에는 부영고, 소과, 깨과자, 팔보월병 등
공갈빵 외에도 수십 가지의 중국 전통과자를 만든다. 19세 부터 빵을 굽기 시작한 곡회옥
씨는 인천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맛있는 중국 전통과자를 만든다는 긍지를 갖고 있다.
이러한 자부심을 담아 복래춘의 포장지에는 ‘百年傳統老店’이라고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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