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꾀꼬리인 十大歌手를 내보낸 作曲·作詞者의 苦心記
知識 ,知慧 ,生活/옛날공책
2020-01-06 18:05:54
잡지명 삼천리 제7권 제10호
발행일 1935년 11월 01일
기사제목 「거리의 꾀꼬리」인 十大歌手를 내보낸 作曲·作詞者의 苦心記
기사형태 회고·수기
「거리의 꾀꼬리」인 十大歌手를 내보낸 作曲·作詞者의 苦心記
一百二十萬張
이것이 일년 동안에 조선시장에서 팔니는 레코-드 수효다. 이 중에 조선소리판이 그 1/3쯤은 된다. 엇잿든 매년 4, 50만장의 구매자를 가지고 잇고 그 노래를 돗고 즐기는 사람을 수십만명 수백만명을 가지고 잇는 레코-드게는 참으로 부럽고도 빗나는 존재라 아니 할 수 업다. 그러면 이 120만장을 움지기는 이는 누구누구들인가. 그는 오직 「거리의 꾀꼬리 」인 가수들이다.
그런데 가수라 하여도 여러 종류와 여러 게급이 잇다. 이제 본사에서 인긔투표하여 본 결과 10대가수가 당선되엿다. 이분들이 월계관을 쓴 분이라 볼 것이다. 이러케 생각하여 볼 때에 이러한 유명한 가수를 낫키에 얼마나 작곡자와 작사자들의 숨은 눈물겨운 로력이 잇섯든가. 이 평풍 뒤의 꼿구경을 엿보려 이 붓을 옴겨보는 바이다.
蔡奎燁氏의 「시드른 靑春」을 작곡하고
全基玹-
蔡奎燁氏는 벌서 우리가 레코드界에 나오기 전부터 그 명성은 높았던 것이외다. 내가 시드른 그 청춘을 작곡해주어 보았더니 과연 잘 합듸다. 누구누구해도 蔡奎燁氏는 실로 그 목청이 자기에 목청이 아니라 그때그때 따라서 변할 수 있는 妙音이외다. 蔡奎燁氏의 목청은 남자로서는 좀 우렁차지는 안타고 하지만 레코-드로서는 아주 적합한 목청이외다. 몇10만 청춘 앞에서는 확대기를 사용한다 하드라도 이것은 상관없는 것이외다. 어듸 군대대장처럼 큰 고함을 치는 것이 아니요 그 기묘하게 가늘게 빼고 꺽거 돌리는데 큰 고함소리가 하등 필요가 없는 것이외다. 그 복스러이 생긴 얼굴 두리두리한 체격은 보는 이로 부드러운 마음을 너어주며 마디마디 곱게 돌리는 妙한 법은 蔡奎燁氏에게서 비로소 찾게 되는 것이외다. 그가 본 고향이 함흥인데 소년時부터 음악을 좋아했다는 말을 그에 친구에게 드렀음과 그가 또 大正15년에 大阪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연구한 것과 서울에 돌아와 근화녀학교 음악선생으로도 게섰고 그후 다시 큰 포부를 품고 다시 현해탄을 건너 東京中央音樂學校에 입학한 것이외다. 그때 벌서 오직 조선청년으로 처음 콜럼비아에 전속가수로 세련되고, 또 進就하는 목소리는 레코-드를 통하야 민중에게 그 아름다운 멜로디를 전파로 방송한 것이외다. 생각하니 蔡奎燁氏는 벌서 콜럼비아가수된 지 8년이 넘은가 바요. 그동안 300여枚에 레코-드를 吹込하고 또 藝名 長谷川一郞이라고해서 日本流行歌界에서 대환영을 받고 있읍니다. 재작년에 조선나왔다가도 대환영을 받았읍니다. 과연 强者多敵으로 蔡씨를 욕하는 이가 있지마는 예술을 보아만 주기를 바람니다.(사진은 蔡奎燁)
사람에 허물없는 이 있는가? 나- 너 할 것 없이 허물이 있거늘 적은 허물로 큰 예술을 없이하려는 것은 너무나 예술가를 생각지 안는 점에서 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氏에 잘못없는 것마는 못할 망정 氏에 노래에 있어서 과연 동양적 가수로 斯界의 하나인 것은 공인하는 바이외다.
氏에 목청은 유행가 더구나 레코-드회사로서 좋와할 특색이 있는데 유행가란 것을 일반 대중이 좋와하고 또 많이 팔리는 것이 本인데 그때그때에 때를 따라 유행될 만한 곡을<152> 집어넣어 팔게 만드므로 蔡奎燁氏에 노래는 超스피드의 최신 유행가일 것이외다.
鮮于一扇의 「꼿을 잡고」를 作詞하고서
金岸曙
어느 느즌 봄날이외다. 꼿잎은 하용업시 떠러지고 한갓되이 푸른 봄만이 뜨거운 여름을 기다릴 때외다. 지나간 옛날을 생각하면 사람으로 여러가지 생각이 없지 안을 수 없을 것이외다. 사람도 저와같이 스러운 생각만 가슴에 남기고 슬어질것이외다. 생각하면 모두다 뜬구름에 뜬바름이건만은 그러나 어디 사람의 일이야 그렀읍니까, 봄바람이 불 때에는 모도 다 좋아라고 흥이저지만은 그 흥이 끝나지 못해서 모도 다 이저버리고 말지 안습니까. 이리하야 지나간 옛일을 돌아볼 때의 서러운 심정은 누라구서 가엾다하지 안을 수가 있읍니까. 그러한 생각을 가젔는지라 노래같은 것을 하나 지어보고 싶었읍니다. 말하자면 봄바람이 휘돌아서 지나간 옛일을 돌아보면 역시 이즐 수가 없어 한갓되이 슬픈 생각에 운다는 것이외다.
詩가 아니요. 가사로 지었든 것을 李면상씨가 와서 보고 자미있다면서 가저갔읍니다. 가저다가 작곡하야 된 것이 지금 말하는 「꼿을 잡고」외다. 꼿을 잡고의 노래를 누구에게 작곡시키고 누구에게 불리우려고 쓴 것이 아니외다. 그러나 우연히 그렇게 되어서 세상에 알게된 것이외다.
鮮于一扇에 아름다운 목에다 그 노래가 을퍼지고 보니 나로서도 그것을 들을 때에는 또한 無心이 지낼 수가 없읍니다. 자미있단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는 것이외다.
노래가 그렇거니와 李면상씨의 그러한 작곡에다가 鮮于一扇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없었든들 나의 우수운 노래가 그렇게 유행되리라고 생각할 수가 없읍니다.鮮于一扇의 노래는 보통 유행가로만 볼 것이 아니라 조선정조를 발휘하는 우리 조선민요를 노래할 品價가 높은 목청이외다. 누구누구하여도 조선민요로서 鮮于一扇의 목청이 아니고는 도저히 완전히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외다.
王壽福의 부른 「孤島의 情恨」의 作曲을 하고
全基玹
王壽福이가 콜럼비아에서 포리돌로 넘어온다는 것을<153> 신문 잡지상으로 宏壯이 떠든 만큼 또 콜럼비아에서 큰 가수이니까 포리돌에 와서는 유행가에 여왕이라고 하도록 만들려 하는 데서 제1회 작품인 孤島의 情恨은 작곡 작사가 매우 힘드러 나온 것이외다.
처음에 그 노래를 드러본 즉 첫인상으로 이 노래는 동경에서 부르는 小唄를 많이 모방한 것을 알았읍니다. 王壽福의 몸집이 건장한 만큼 목소리도 우렁차게 기운좋게 시차게 나옵니다. 특히 平壤藝妓學校를 졸업한 만큼 그 넘기는 데는 과연 감탄 아니 할 수 없지요. 本성대가 아니라 순전히 만드러내는 성대이면서 일반에게 환영을 받고 유행되고 많이 팔리기로 전무후무외다.
孤島에 情恨을 내가 작곡함에 힘드려한 것은 작곡가로서 매우 힘든 것은 중간에 가서 목을 별안간에 變曲을 시키게 되면서 가늘게 뽑아내는 데 나로서는 과연 힘이 들었소이다. 이것이 성공할까. 王壽福이가 이렇게 갑작이 變曲이 될까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랫던 것이 의외에 작곡자에 생각한 이상 묘하게 꺽거 變曲을 시키면서 가늘게 뽑는 데는 참말로 놀랐읍니다.
그래서 王壽福의 孤島에 情恨으로 나의 작곡은 세상에 알리워 一曰작곡가라고 하여주더이다. 다시 말하거니의 조선 레코-드界에 있어 孤島의 情恨 이상으로 팔린 것은 아마 없으리라고 봅니다. 그만큼 나와 王平씨의 힘이 모이고 王壽福의 힘이 가한 孤島의 情恨이외다.
金福姬氏 부른 「哀傷曲」을 지을 때
異河潤
順序인즉 작사도 먼저 되고 그 다음 작곡이 되고 그 후에 노래를 불러 주어야 옳을 터인데 이 哀傷曲은 아주 까꾸로 되었지오. 金福姬의 목청을 듯고 그게 맛즐 곡을 지어주면서 이러이러한 의미에서 했으면 좋을듯하고 하기에 내 생각해보아야 아무레도 잘 나오지 안습니다.
첫재 金福姬가 입사해서 세상에 처음 알리는 것인 만큼 독특한 것을 내려고 애를 쓴 것임니다.
그래서 구슬프게 가장 애상적인 그 목소리를 배합해서 짓노라고 매우 힘이 든 것이외다.
그 목소리는 보통의 목청이 아니고 갈피갈피의 눈물과 한숨이 섞인듯 軟弱한 여자가 달빛아래 홀로 서서 금푸른 못을 디려다 보는 그 미묘신비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몇날을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작사한 것이나 이것을 金福姬의 목에 마쳐 몇번이나 수정한 지 사실 나로서 힘든 작사에 하나이외다.(사진은 異河潤氏)
그래서 연습을 마치고 吹入해서 테스트판을 듯고 좋다고 해서<154> 거리거리 악기점에서 구슬프게 빼는 애상곡을 듯는 이로 하여금 눈물짓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金福姬는 자기의 妙聲을 완전히 아직은 發해보지 못한 줄로 압니다. 그 목소리에 알지 못할 깊은 점은 언제나 풀릴른 지 앞으로 나올 것을 주목치 안을 수 없읍니다.(사진은 金壽麟氏)
金福姬氏부른 「哀傷曲을」 作曲을 하고
全壽麟
金福姬의 哀傷曲은 실로 나의 고심을 짜낸 것 입니다. 처음에 金福姬가 노래를 우리회사에 와서 부르는 데 그 노래를 드름에 그 몸집같이 휘청휘청 마치 능라도 수앙버들갗에서 그만 그 목청조차 몸 스타이루에 따른 듯 하겠지요. 그래서 그 성대를 드름에 간드러지고 느러지고 흔들리는 것이 애상적이었어요. 그래서 돌아가서 이 멜로디에 만는 曲調를 지어본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金福姬의 노래와 마처보니 아주 적당하다고 보아서 내가 처음 뜻을 발표해 보았스나 되지 안코 해서 마침 異河潤씨에게 작사를 청한 것입니다. 그 느러진 곡을 조선에 情調를 나타낸 것이었읍니다. 이 애상곡의 있어 그 처분처분 넘어가는 것을 대중이 퍽 좋아한 모양입니다마는 나로서는 나에 힘이 부족했더라도 장차 金福姬가 부러낼 노래에는 더욱 그 묘한 점을 완전히 발표할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사진은 王平씨)
金龍煥氏의 부른 朝鮮行進曲을 짓고서
王平
우리가 조선에 있어서 레코-드로서 첫 사람이라고 하겠읍니다. 그 전까지는 조선에 오날같이 레코-드가 나오지 안은 것이외다. 그래서 조선에서 처음으로 포로톨-조선지점을 세우게된 것이 즉 金龍煥李景雪 우리 몇몇 사람인데 그때야 다른 사람에 作詩나 작곡을 청할 곳 조차 없는 조선유행계에 어두움이었지요. 그래서 우리 몇 친구는 손을 맞잡고 나가는데 金龍煥氏도 가수란 것 보다 작곡 作詩를 겸한 천재이지요. 본시 음악을 좋아했고 연구하던 만큼 지금은 그지반 자기에 부를 노래를 자기가 작곡을 합니다. 그런데 내가 지은 노래 중 조선행진곡에 있어 엇제야 저 꿈임없는 우렁찬 목소리로 청산유수와 같이 시원시원하게 부르게 만들까하고 퍽 애를 써서 지은 것이외다. 그것이 내가 작사을<155> 잘 했다는 것보다 잘 불러준 관계이라고 봅니다. 음악이란 것는 첫재 그 몸이 건강해야 합니다. 金龍煥씨가 어릴 때에 좀 약하던 모양이시나 그후 건강을 도은 관계로 우리 회사에 입사한 후 한번 아른 바 없는 건강체로서 몸집이 富大합니다. 그래서 그 성량이 좋습니다. 왼밤을 불러도 고달픈 것이나 힘드러 하지 안코 그냥 가슴 속에서 울려나오는 그게는 아주 남이 가지지 못할 特才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지은 것보다 저- 두만강 배ㅅ사공이라던가 또 국경에 밤에 있어 삼천리강산을 찬미할 驍特이 아니랄 수 없는 바이외다. 내가 지여준 것을 金龍煥씨에게 주면 자기에 성량대로 작곡해서 吹込을 드러가는 데 우는 듯 하소연할 때면 곁에 있는 사람마저 따라 울게 만들며 길게 가늘게 꺽거넘길 때도 그져 하는 것이 없고 힘차게 세차게 부르며 또한 어떤 많은 청중앞에서라도 확대기를 쓰지 안읍니다. 어떤 이는 성량 이 부족해서 애를 쓰는 일이 있지만 金龍煥씨만은 절대로 확대기를 쓰는 분이 아니이니 여기에서 참 노래를 그냥 드를 수 있는데 마치 綠陰동산에 뻑국새같이 삼천리강산을 진동하고야 말며 한번 金氏에 판이 세상에 나오면 청춘남녀의 가슴을 躍動시키고야 마는 것이외다.
姜弘植氏의 부른 「朝鮮타령」
全基玹
즐겁다. 조선을 축복하세.
내가 첫번에 마움이 마진 노래이외다. 많은 노래 중에 많은 작곡을 내었으나 사나히다운 것을 늘상 원한 바었읍니다. 그러다 마츰 그때인즉 내가 콜럼비아로 넘어간 첫번인데 첫번 닥디련 것이 조선타령에 작곡이외다. 내가 포리톨에서 孤島에 情恨까지 작곡하고 나온 것임에 이때는 벌서 나로서도 경험이 있었다고 보아도 관계치 안을 따름이외다. 그래서 조선타령이 시인 劉道順씨에 力作인데 그야말로 유감없이 조선에 정기를 그린 劉道順씨의 일대 걸작이외다.
이 노래는 우리 삼천리 반도강산의 행복을 축원한 노래임니다. 백두산에서 정기뻐쳐 남쪽끝 제주도 漢挐山까지 삼천리강산은 비단폭을 느리운 듯한 기름진 錦繡江山임에 세계에 자랑인 아름다운 동산이외다. 이것을 우리가 차지하고 있으면서 우리의 것을 우리가 슬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 劉道順씨의 지은 것으로 그 노래가 활기롭게 작사가 된 것인데 여기 아주 꼭 더러만는 姜弘植氏가 그 우렁차고 활기있고 남성적인 목소리에다가<156> 조금이라도 남에게 오즉 칭찬받겠다는 그 목젓청을 내인 것 없는 아주 씩씩한 남자에 노래를 유감없이 발휘한 名曲絶唱인데 이것이 나오자 반도가 진동해 버렸읍니다.
지금 시내 모 여학교에서도 배우고 있는 것은 유행가로서의 姜弘植씨에 조선타령뿐일 것입니다. 그 구절구절 마디마디 넘어갈 때에 억개춤이 절로 나며 우렁찬 목소리로 청산유수와 같이 시원시원하게 부른 노래는 과연 힘을 주고 蘇生을 줄 노래의 하나입니다. 여기에 그 작사를 보아도 알 것입니다.
高福壽氏의 부른 「타향사리」를 지을 때에
金陵人
포연히 나의 고향 황해도 김천을 떠나온 지 이제 벌서 11년! 「他鄕」을 것던 작년 가을이 꼭 漂泊생활 11년째 되는 가을이었읍니다. 푸른 하눌 호르는 구름에 애듯한 향추를 띄우고 旅窓에 기대어 있노라니 때마침 황혼인데 거리에는 등불조차 외로운 듯 가로수에 낙엽은 웨 그리 처량하였던지 까닭없이 눈물이 홀러 옷깃을 적시더이라. 이렇게 되어 「他鄕사리」의 詩는 순전히 나의 솔직한 고백이었읍니다. 이제까지 100여편에 유행가사를 지어왔읍니다만 대개 책임상을 여짓노라고 한 것이 대반이어서 그야말로 문자유희라고 보는 것이 옳은 중에 이 「타향사리」마는 시적 가치는 어떨른 지 美文妙句를 넣어 놓지 안코 나에 양심대로 썻던 것입니다. 다행이 이것도 나의 친한 벗이며 한 회사에서 가치 일보는 孫牧人군에 동감을 얻어 적절한 曲을 얻게 되고 또다시 高福壽군이 자기 신세와 비슷한 점이 있었던지 구성지게 몹시 불러 주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이 노래를 알게된 것이외다. 마침 이 타향사리가 많이 팔인것만은 나와 같을 漂泊생활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의외에도 많은 것을 생각할 때 그리 좋은 감상을 가질 수 없읍디다.
高福壽氏의 부른 「타향사리」를 作曲할 때에
孫牧人
너! 나! 할 것 없이 집이 있어도 있는 것 같지 안은 우리네에 신세!
타향사리의 작사를 볼 때에 우연히 심회가 솟아올라 내가 외국에서 본 노래에 나일강변에서 불르든 그 어떤 시인에 심회를 생각했읍니다. 그래서 동감에서 그 시를 보구보구해도 싫지안어서 이것을 작곡해 보겠다고 아마 몇날동안 우는 마음으로 작곡한 것입니다. 이것이 마침 高福壽씨가 첫 번 터스트<157>한 것입니다. 나로서는 어떤 理想에 고향을 연상하여서 그리쯤에 마쳐 작곡한 것임니다.
李蘭影의 부른 「봄마지」를 作曲하면서
文湖月
봄맞이를 尹石重씨에게서 볼 때 그 노래가 참 좋읍디다. 그래서 그것을 봄의 기분으로 노래하며 소생에 동산이 되려고 하여 한껏 흥에 겨울 때 마침 李蘭影을 불러 연습시켜보니 목소리가 마질듯해서 아주 봄동산에 파무친 기분으로 듯고 또 그 妙曲을 생각하면서 興奮된 때 그냥 작곡한 것이 오히려 이틀 사흘 가면서 작곡한 것보다 인기를 끌었구면요. 무엇이던지 그 기분에서 을어나와야 하는 법인가 합니다. 실은 때나, 기분이 나뿔 때는, 아무리 잘하려해도 아니됩디다, 作詩가 되고 작곡이 된 후에 노래부르는 이가 잘해야하는 법이야요. 그야말로 도적도 손이 마져야 한다고 조선에 있어 비록 街頭의 꾀꼬리가 부르는 노래일망정 대중 앞에 내어놓는 것이니 作詩, 작곡, 가수, 모두 같은 기분이면 듯는 사람도 또 같은 기분이 되는 법인가 바요. 그기서 모두 봄마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尹石重씨의 지은 봄마지는 그야말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밑에서 푸릇푸릇 돋아오르는 작은 꼿 종달이 우는 봄동산을 그린 것으로 묵은 근심 다 사라지고 甘美 경쾌한 메로디를 그냥 넣은 것인데 李蘭影에 노래는 어리고 연합니다. 그리고 영리한 맺힌 노래로서 마치 玉珠를 굴리는 듯 자연스러운 美音玉聲이외다.
첫재 이 노래를 드를 때 누구나 봄에 취한 듯 흥이나고 힘이나고 기뻐집니다. 이런 소리는 우리 교육계에도 좋다고 해서 童劇에도 蘭影의 목소리는 아주 적합합니다.
누구나 李蘭影의 노래를 듯고는 어린 것을 알게 되고 그 사랑서러움이 드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童謠童劇을 많이 吹込해 잇스나 아직 조선은 없읍니다. 장차 李蘭影은 조선교육계를 위하야 아동창가 동극까지 너흘 모양입니다. 나는 이 어리고 연약하면서 사랑스러운 간얄푼 목소리를 드르면 드를사록 듯고십허 함니다. 꼿봉오리가 버러지려하고 잔디는 푸릇푸릇한데 청춘에 봄마지는 즐거운 행복과 환락을 노래한 봄마지에 미칠듯 醉할듯 청춘에 봄마지를 과연 李蘭影아니고는 그러케 기뿌게 못넣을 것입니다.<158>
全玉氏의 부른 「가을밤」을 作曲하고
全基玹
내가 본시 규측적으로 작곡법을 못배웟슴을 한탁합니다. 내가 15세 때에 지금 大阪시민음악 콘탁으로 게시지만 고때 조선 게시면서 나에게 개인교수하신 선생이 잇소이다. 그후 내가 생활로 인하야 仁川府廳에 드러가 7, 8년 잇으면서 도라와서는 작곡법을 연구하고 하든 중 마침 지금 포리돌-에 王平씨에게 포부를 말하매 그가 나를 소개해서 포리톨에 입사한 것이외다. 그래서 입사한 첫번이면서 全玉씨도 입사하야 첫번 취입이외다. 그래서 全玉씨의 목청을 드러본 즉 그 사람된 것과 갓치 량순한 편입듸다. 그 목소리도 양순하고 장식이 업고 그것 꾸임이 업는 애련한 목소리인데 그때 마침 내가 황해도 신천온천에 갓다가 가을달밤 산들산들 부러오는 바람은 나의 소매를 치고 은빗달은 푸른 하늘 중특에 매여달렷는데 뭇별은 감읏감읏하고 잇는 가을밤! 그 밤에 련상을 그려내어 내가 作詩한 것으로 그때 련상을 그냥 가지고 全玉씨의 그 애련한 목소리에 마쳐 작곡한 것인데 마침 나의 작곡이 全玉씨의 소리의 마처서 가을밤이 레스트하여 드를 때는 과연 조왓습니다. 그래서 팔린다 팔린다 하는 것이 그때에 두손이 밧벗다고 합디다. 그 가을밤이 그때만 팔렷는가 하면 그른 것이 아니라 지금도 작고 팔린다고 합디다. 과연 全玉씨의 그 노래가 일반적으로 야! 조타하고 또 에이 납부다 할, 비판을 밧을 목소리는 아니고 그 목소리는 萬年歌姬의 목소리외다. 언제 듯든지 실치 안코 몃십년 몃백년 후에라도 역시 일반적으로 조화할 노래이외다.
나는 全玉씨의 노래로 내가 작곡한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되고 全玉씨도 역시 나의 작사 작곡으로 세상에 알리운만큼 피차에 출세판이 「가을밤」이외다.
이러한 관계로 내가 첫번 입사해서 첫번 지은 것인 만큼, 나의 힘도 만히 쓴 작품이외다.
崔南鏞氏 부른 「情恨의 버들」을 작곡하고
李基英
별로 드릴 말슴도 업슴니다마는 貴社에서 무르시는 말슴이니 몃마디 살외 드립니다.
半島레코-드 歌壇에서 中堅적 존재로서 이미 爀爀한 명성을<159> 가지고 잇든 崔南鏞씨가 某社에서 職을 辭하고 내가 잇는 태평회사와 握手를 하게 된 것이 바로 지나간 3월이엇습니다. 처음 입사햇슬 때에는 具龍布라는 폔네임으로 작품을 발표햇섯스니 누구시던지 응당, 일종에 호기심으로 그 작품을 括目하섯슬 것입니다. 그래서 입사 제1회 작품으로 변변치못한 나의 작품으로 情恨의 버들이라는 유행가를 발표햇는데 그것이 적지안은 호평을 밧게된 것은 모름직이 그의 인기의 힘인가 할 뿐입니다.
나는 그때 그를 위하아 작곡을 하기로 햇는데 작곡자로서는 누구나 공통적으로 맛보는 고심이지만 가수의 성량과 특기를 모르는 데서 은근히 적지 안은 힘이 듭니다.
그후부터 허다한 나의 작품을 그가 노래로 불러오는 동안에 지금은 완전히 그의 기랴을 잘 알게 되엇습니다. 그는 극히 성대가 명확하고 우렁차면서도 고흔 편이요 곡의 施律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뎨서 능난한 재조가 잇습니다.
얼마 전부터 大阪본사에 請으로 작곡을 하기 시작햇는데 역시 나와 그의 콤비로 제1회 작품을 「古里たつぬて」라는 日本盤으로 발표해 보앗습니다. 그것이 의외에도 센세이슌을 이르켜습니다. 결국 자기과장을 느러논 세음이 되엇습니다마는 어쨋던 작곡이란 그다지 쉬운 것이 아니라 함은 斯道를 거러보시는 이로서는 누구나 다 아실 것이외다. 압흐로는 그의 조흔 재조를 마음껏 발휘하도록 나의 변변치못하고 부족한 역량을 힘껏 기우려보려고 할 뿐입니다.<160>
<150-160>
색인어이름 : 蔡奎燁,全基玹,金岸曙,李면상,鮮于一扇,王壽福,全基玹,金福姬,異河潤,金福姬,全壽麟,異河潤,金龍煥,王平,金龍煥,李景雪,姜弘植,全基玹,劉道順,姜弘植,高福壽,金陵人,孫牧人,李蘭影,文湖月,尹石重,全玉,全基玹,崔南鏞,李基英,具龍布
단체 : 半島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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