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鑛柱式으로 巨富가 된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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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25 01:19:52
金鑛柱式으로 巨富가 된 이들,
崔昌學·方應模·金台原·朴龍雲·柳泳燮·具昌祖·潘福童 興亡史
株式篇
바로 몃칠전 일이다. 大阪每日新聞에 난 것을 보니까 「이도한니」라는 삼십남짓한 젊은 청년이 주식을 하야서 최근 수년에 예금 삼백만원을 거더쥐엇다. 이 소식은 주식시장(株式市場)에 조곰이라도 인연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되엿다. 서울 주식시장에서 백만원이고, 십만원이고 모아 쥔 행운아들은 업는가, 원래 흥망성쇠가 가량 심한 것이 주식 긔미 금점판이라.
여기서는 어제까지 거지 룸펜으로 도라다니는 가난뱅이도 운(運)만 맛처나면 오늘은 十萬長者되고 그 반대로 오늘의 백만장자, 내일은 하로 삼식을 못할 거지되는 수도 잇다. 그런데 지금 조선에서 주식(柱式) 을 가장 크게 하는 곳은 개인보다도 은행이라. 은행에서는 싼리자로 손님에게서 만흔 예금(預金)을 마터노코는 그 돈을 금꼬 속에 그양 매장하여 두어서는 리자손해를 봄으로 유리하고 안전한 주식에 투자한다. 매년 여러 은행회사의 결산 보고서를 보면 제가 사드린 은행회사의 주까 (株價)보고가 실닌다. 은행의 서무과장(庶務課長)이란 주장 이일을 마터하는 사람이다. (사진은 右는 崔昌學, 左는 方應模氏)
들니는 말에 지금 각 은행에서 가지고 있는 주는 조선은행이 칠팔백만원, 상업은행이, 육칠백만원 동일은행(東一)이 사백만원, 한성은행(漢城)이 이백만원, 해동(海東)은행이 백만원 정도씩 가지고 잇는데 이 모든 은행에서는 시세 조흔 때에 자기 가젓든<94> 주를 팔아 리익을 보고 시세 납분 때에 또 새 주를 사드러, 주식매매를 하고 잇는 것이다. 이곳이 금융시장(金融市場)의 실제 형편이다. 그러면 개인편으로는 그 흥망이 엇더한가.
五十萬圓모은 柳泳燮
서울 게동 막바지에 양제 이층의 화려한 집한채가 잇서 행인의 발을 멈추게 한다. 이집이 주식계의 행운아 유영섭씨의 저택이다. 유씨는 엇던분이든가 십여년전 까지는 함흥(咸興)서 경부(警部)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서울 올너와서 무직(無職)쟁이로 생활난에 쪼들니는 한 룸펜이엿섯다. 그때의 고생은 실로 심하엿다. 그러다가 엇지엇지하여 인천(仁川)내려가서 엇든주식 중매점(柱式仲買店)의 사환겸 사무원노릇을 하다가 원래 긔민하고 재조잇는 분이라 실제시장(實際市場)의 공긔를 흡수하면서 수천원의 돈을 모아쥐엇다. 이러케 지반을 닥근 그는 중매점을 나와 긔미(期米)게에 활약하는 한편 주식에도 천분을 발하야 불과 오륙년사이에 50만원의 대리를 보앗다. 인생에는 올니막고개가 잇고 내리막고개가 잇는지라, 이 취세가 언제까지나 갈가를 의심한 씨는 자기돈이 50만원이 되자 주식시장에서 깨끗이 발을 싯고나와서 지금은 다른 견실한 실업방면에서 활약하고 잇다.
百萬圓을 거더 쥔 具昌祖
서울 내자동(內資洞)에 고랫등가튼 호화로운 집을 짓고 사는 구창조(具昌祖)씨 이분도 몃해전 까지는 허잘 것 업는 일개 소상인이더니 재게(財界)의 경긔가, 잘도라가는 때를 마처 얼마 안 되는 전 재산을 기우려 한번 구을니고 두번 구을니는 사이에 천원이 만원이 되고 만원이 십만원 되어 지금은 세상사람들이 백만원은 잇다고 한다. 아마 주식시장으로 도라다니는 여러 수천명 수만명을 부럽게 하는 것은 구씨리라. 그는 여전히 주식게<95>에 활약하고 잇다.
崔OO, 金OO, 李O在
이 박게 일이십만원의 성공자는 수두룩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빼버리고, 큼직큼직한 성공자를 나렬하라면 전라도(全羅道)의 큰부호 김OO씨도 주식에 발을 제치어 약팔십만원의 거리(巨利)를 보왓고 또 평안도(平安道)의 유명한 부자 최OO(崔OO)도 서울 명치정에 잇는 모 주식중매점(柱式仲買店)을 경유하여 싸고 팔고 하는 판에 지금에는 근백만원 가는 리를 보왓다 하며 서울 남대문통 OO상회주 리O재씨도 적은 돈을 눈치 빠르게 리용한 결과 다 상당한 거액을 모아 쥐엇다고 전한다. 이 밧게 모 은행의 과장급 모 학교의 교사, 모 변호사들 모다 주식에 손을 내어 수천 원씩 어더 자신이가 활 정도의 잇는 것은 공연한 사실이다. 조선 사람은 재산이라면 토지나 가옥 밧게 아직 모르고 환물(換物) 환금(換金)하는 긔민한 수환을 부릴 줄 몰나서 만은 돈을 그냥 사장(死葬)하는 데가 수두룩허다. 이것은 다 실제경제(實際經濟)에 어두운 까닭이다.
潘福童의 百萬圓은 飛去夕陽風
흔히 쉽게 버은 돈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례이라는 말이 잇는데 그럴 일은 업겟지만 엇잿든 인천 반복동(潘福童)이라 하면 그야말로 하늘에 헤성이 나타나드시 졸연히 백만장자가 된 행운아라. 불과 십년 내외의 녯적일이니 누구나 모르는 이 사람이 업스리라. 척푼이 업시 인천 미두판과 주식시장을 도라다니다가 조흔 바람을 맛나서 순풍에 돗단 듯 연해연방 잘 마저드러 저도 모르는 사이에 一金百萬圓也가 두손에 쥐어젓다. 그는 인천만국공원 아래 경치 조흔 곳에 양옥 한채를 짓고 인천일색(仁川一色)이라는 미인의게 장가들기로 되어 그 결혼식을 서울 올너와 조선호텔에서 거행하엿는데, 재게의 유수한 인물들이 구름갓치 모힌 속에서 날 보아라 하듯 가장 호화롭게 장가드럿고 그 다음부터는 반복동이가 나타나는 곳엔 지전 뭉치가 풀풀 날렷다. 남의 천만원 부럽지안케 잘 쓰든 이 행운아에게도 불행의 신(不幸의 神)이 엿보고 잇섯든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격으로 그만튼 재산이 안개가치 하로앗츰에 사라저버리고 반은 다시 녯날의 헌옷헌집세기를 끄을게 되엇다. 그 뒤 그는 어듸가 잇는지 지금은 소식조차 아는 이가 업다. 전변 무쌍한 것이 조화옹(造化翁)의 재주라 할가.
金鑛篇
금점판 만치 조선사람의 구미(口味)를 건드린 사업이<96> 근래에 업다. 양복 입은 이 상투쟁이 아이놈 어룬 할 것 업시 저마다 백만장자 될 꿈을 안고 갈팡질팡한다. 서울 장곡*정 측량지도 파는 곳에는 매일 지도 사러드는 사람으로 줄을 서다십히 하고, 총독부 광무과(鑛務課) 문전은 한다하는 대구시장(大邱市場)가치 사람이 안고 돈다. 어듸서 나왓는지 백원 짜리 이백원 짜리 수입인지를 입에 물고 또 서로 말하는 말치를 드러도 일이만원이란 말이 업고 얼필칭 십만원 백만원한다. 이 바람에 녹는 이가 만타. 금광구미에 조선사람 초가집 몃백개가 비거석양풍하고, 조선전래의 땅미지기 몃천 석 거리가 몃만 석 거리가, 고맙단 말 한마듸 듯지 못하고 녹아버렷는지 모른다. 그러나 일장 공성 백만골 (一將功成百萬骨)이라 함은 예서도 정측 인양으로 여러 천명 여러 만명이 망해빠지는 반면에 몃 사람은 날 보아라 하드시 민가부(閔家富)를 부럽다아니할 큰 부자가 되엇다. 우리들은 그 분들을 들추기로 하자.
百三十萬圓의 崔昌學
아마 조선에서 가장 몬저 금광으로 부자라는 일홈듯기도 최씨요, 가장 돈을 만히 버은 이도 최씨일 것이다. 최창학씨는 평북 삼성금광(三成金鑛)을 중추원 참의 모씨의 소개로 삼능(三菱) 재벌에 일백삼십만원을 밧고 팔앗다. 이것으로 수를 보기 전엔 씨도 십여년 동안을 마치 한 개만 꽁문이에 차고 이 금광 저 금광으로 도라다니든 일개 덕대(德大)에 불과하엿다. 그는 평북 구성(龜城) 사람이라. 씨의 현재 재산이 얼마인지는 취측이 구구하지만 아직도 의주, 삭주(義州 朔州)부근에 조흔 광 여러 개를 가지고 잇스며, 풍문에 들니는 말에는 신의주 OO은행지점에 69만원의 예금을 가지고 잇고 조선은행 서울본점에도 거액의 저금이 잇다한다. 엇잿든, 씨는 금광으로 성공한 최초의 제일인자다.
大邱의 金台原
한동안 중앙일보(中央日報)가 쓰려지려 한 적에 안씨란 령남 신사 한 분이 서울로 나타나서 수만의 대금을 써가며 한동안 와자자하게 소문을 날렷다. 그분의 배후에 금광왕 김대원씨가 숨어잇섯다. 김대원씨도 덕대로 도라다니기도하고, 천신만고 끗헤 나종에 경북 어느 고을 잇는 금광 한 개를 잘 맛나서 륙칠십만원에 팔아 버린 뒤 게속하여 삼남각처의 금광에 손을 내어 굉장한 실 세력을 모아 쥐고 잇는 분이다. 올에 50을 상하 하는 아직 中老이다.
社會에 五十萬圓을 던진 方應模
방응모씨는 조선일보 사장으로서 그 일홈이 놉다. 씨가 평북 교동(橋洞) 금광을 일백사십오만원으로 政友會 게통의 삼본조태랑(山本條太郞)에게 팔어버린 뒤 아직도 함남 정평과 풍산에도 백래금광이 잇고, 평북에도 고일청(高一靑)<97>씨 등과 어울니어 하고 잇는 광이 여러 개가 잇다. 방씨는 원래 정주사람이라. 금광으로 성공하기 전에는 대서업(代書業)도 하고 잡화상 포목상(雜貨商, 布木商)도 하엿고 또 금점판에 나서도 처음은 덕대 노릇으로 천신만고 끗헤 오늘의 성공을 본 사람이다.
百三十萬圓의 朴龍雲
신의주에서 신연제철소(新延製鐵所)를 하는 박용운씨 이분도 평북서 나타난 큰 금광주로 이미 세상에 널니 알니워 젓다. 역시 일백삼십만원인가 밧고 삼능 게통에 판 뒤 일약 큰 부자가 된 이다.
方義錫 其外 諸氏
함남 북청(北靑)에 잇는 방의석씨도 여러 곳에 착수하여 수십만원의 리익을 본이요, 한동안 라진 경긔(羅津景氣)로 부자 된 김긔덕(金基德)씨도 금광에 진출하고 잇고, 윤00씨의 게통으로도 성히 금광에 착수하는 이 잇는 등 일이십만원의 리익을 본 사람은 수두룩하다 하리만치 만키에 대략 여기에서 끗치기로 한다.
엇잿든, 매년 삼천만원 어치의 금이 조선의 산 속에서 나온다. 이 모양대로 가다가는 백만원 짜리 부자가 일년에 삼십 명씩은 어렵지 안케 나올 듯 십건만 어듸 세상일이란 반듯이 수판알과 가튼가. 꿈이지, 꿈이야 이제부터는!
잡지명발행일기사제목
삼천리 제7권 제8호
1935년 09월 01일
金鑛柱式으로 巨富가 된 이들, 崔昌學·方應模·金台原·朴龍雲·柳泳燮·具昌祖·潘福童 興亡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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