開發會社 奮鬪史 [개발회사 분투사]
知識 ,知慧 ,生活/옛날공책
2021-09-14 15:12:23
1903년 미국 하와이주로 이주하는 첫 한인 이주민 - 한국이민사 박물관에서
開發會社奮鬪史
陸定洙
1. 해외진출의 선구
日俄전쟁이 이러나든 전전해이니 아마 지금부터 26년 혹은 27년 전의 녯날 일인 줄 암니다.미국사람 「때실라」씨와 우리나라 인사가 손을 맛잡고 개발회사라는 회사를 세웟스니 그 뜻은 「조선민족을 널니 해외에 발전식히자! 지금까지는 너무도 鎖國政策에 禍한바 되어 猫額만한 삼천리 강토가 東半島에 잇는 줄만 알고 미국 인도 영국 등 物貨가 殷盛하고 인문이 발달된 너른 세계가 잇는 줄을 모르고 안젓스니 이래서야 쓰랴. 조선민족도 어서 남과가치 문명한 一等國으로 살자면 세계적으로 활약하여야 쓰겟다」하는 생각으로 해외 沃土에 민족을 移植하는 한편 이주된 그 동포를 토대로하여 널니 외국과 물산의 교역 다시 말하면 국제무역을 개시하고 또 저 나라의 문명을 수입하자하는 큰 뜻에서 나온 일이니 이를 터이면 그때 다수한 민간지사들 입으로 불니우든 개국진취운동을 실지로 실천하기 위하야 이러난 특수회사이든 것이외다. 그러나 누구나 히미하게하도 개발회사가 조선민족의 해외진출을 위하야 처음 창시된 것은 알터이나 개발회사가 엇더케 하여서 탄생되엇나 하는 사정은 모르시는 이가 만흘 줄 암니다.
즉 앗가 말한 미국인 「때실라」씨가 이 점에 몬저 착안하고 당시 이 운동을 이르키려하든 民間有志들과 악수하고서 몬저 駐京美國公使 某氏를 식혀 한국정부에 그런 종류의 정부시설이 잇서야 한다고 獻策케 하엿드람니다. 日淸戰爭 후으로 동양정국이 엇더케 도라가는 것을 살핀 그때 정부에서는 크게 깨다른 바 잇서서 국제무역과 해외이민 등 拓殖에 대한 사업을 맛허하는 「緩民院」이란 관아를 내각 안에 새로 설치하고 그 총재로 閔泳煥氏를 또 총무국장으로는 徐炳奎하는 모다 당시 쟁쟁하든 인물을 임명하고서 외국으로 단녀온 新進才士를 모와다가 서양문명의 연구를 식히는 한편 조선 사람의 해외웅비할 곳곳을 택하게 하엿드람니다. 그러나 娞民院 자신이 팔을 거두고 나서서 해외이민가튼 것을 직접하기에 꺼리는 여러 가지 점이 잇섯든지 간접으로 수족이 되는 회사를 두어야 하겟다하야서 결국 이 개발회사를 창립하엿든 것이외다. 지금은 滿洲나 西伯利亞 등지로 이주한 동포가 만흐나 그때도 녯날이라 萬里洋國으로 돈버으려 간다고 붉은 주먹을 내어 두르든 이주동포의 광경을 상상하면 실로미소를<25> 금할 길이 업섯슴니다.
三年間 五千名
개발회사의 본점은 아직 濟物浦라 일컷든 仁川港에 두고 지점을 서울에 두엇섯는데 그때 나는 지금 「세부란스」병원에 게신 宋彦用氏와가치 영어를 알엇든 관계로 「때실라」씨의 통역이 되어 이민에 대한 여러 가지 사무를 직접 취급하엿섯는데 엇쨋든 해외에 처음 이민을 보낼 때에 태평양 바다 속에 잇는 布哇가 제일 조타하야 그리로 보내기로 되엇스니 그것은 그곳이 세계에 유명한 砂糖産地가 되어 사탕밧헤가서 賃銀勞働者가 된다할지라도 만흔 돈을 모을 수 잇스리라하는 생각과 또 布哇에 잇는 미국자본가의 특별한 초청이 잇섯기에 그리하엿든 것이외다. 지금도 이처지지 안슴니다. 그때는 추운 겨을이엇슴니다. 명년 봄 농사에 철이 맛게 보내느라고 국내에 널니 광고하여 제일차 이민 400명을 모집하여서 눈이 푸실푸실 내리는 날에 仁川부두를 火輪船을 타 출발을 식히엇슴니다. 그때 인솔자는 渡布이후 근 30년에 지금은 布哇의 굴지하는 부호가 되엇다 전하는 安鼎洙氏엇는데 400여 이주자는 부두에서 고국을 떠나면서 모다<26> 조곰치도 슬퍼하는 빗을 아니보이고 壯快하게 출발하더이다. 뒤에 아라보니 이민으로 가셋다고 속이고서 實狀은 美本國으로 건너가서 공부할 목적을 품은 청년학생들도 다수히 이 속에 끼엇섯다 하더이다. 實狀 그런 목적을 가지고 布哇로 간 동포중에 대개는 布哇에 몃달 滯在하다가 그 뒤 官憲의 눈을 피하여 美本國으로 건너가서 공부하야 뒷날 일홈을 날닌 이가 만하엿슴니다.
이민은 작고 계속하여 두달에 한번 석달에 한번 엇든때는 한 삼백명식 엇든때는 한 오육백명씩 떠낫는데 그것도 처음에는 仁川港에서만 출발식히다가 나종에는 釜山 元山 등 각 항구에서 선편 잇는대로 오육명 수십명식 실어서 神戶로 가게하여 그곳에서 한데 모아 신체검사 등을 한 뒤에 아조 출발케 하엿든 것임니다.
이리하야 三南 各地를 비롯하야 조선팔도로부터 3년간에 약 5000명의 장정들이 만리의 파도를 차고 해외웅비의 壯途에 올낫든 것이외다. 그러다가 여기 조치 못한 일이 한가지 생기엇든 것이외다. 그것은 大陸新聞을 경영한다는 엇든 일본인이 다수한 조선인 노동자를 先給 200원식 주고 모집하여 布哇로 보낸다 속히고서(아마 저쪽에서도 돈을 바더먹고 그리하엿슴인지) 黑西哥로 그만 보내버렷드람니다. 실상 黑西哥는 노동하기에 조치 못하엿든 모양으로 그곳에 간 동포들은 대부분이 水土不服으로 病人이 되엇거나 勞賃이 박하여 돈을 버으지 못하고 몹시 고생하엿다는데 이 소식이 한번 故國親戚知己에 편지로 또는 풍문으로 오자 이민이란 낫부구나하는 소문이 전국에 쪽 퍼지엇든 것이외다.(布哇에 간 동포들은 다 비교적 큰 고생이 업시 다 잘 살엇다 함니다.) 그러다가 정치의 형편으로 외교권한이 전부 우리의 손을 떠나게 되자 이 개발회사도 영영 중지하게 되엇든 것이외다.
布哇의 成功者
그런데 그때 개발회사에서는 응모하여 오는 이민에게 대하야 布哇에 渡航 后 갑허내라는 조건하에 노자를 전부 대어주고 그리고 또 美本國領地는 下陸費100弗이 업스면 아니되니까 每名에 100弗식 꾸여주엇지요. 그리고 금전거래에 대하여는 「때실라」씨가 「때실라은행」이라는 조고마한 은행 한 개를 설립하고 그 지점을 布哇에 두어서 편의를 도와왓지요. 그래서 실상은 下陸費로 100弗식 주는 것 布哇下陸后 회사에서 도로 찻고 노비 기타 비용은 이럭저럭하면서 한사람도 물어낸 사람이 업섯다함니다. 그 5,000명 이민 중에는 三南사람이 가장 만하엿는데 대개가 지금쯤은 자유로운 곳에서 경제적으로도 넉넉히 지내고 잇스며 그때 건너간 사람들로 그곳에서 生子生孫하고 잘 지내는 이가 만타함니다.
아무튼 30년 갓가운 먼-녯날에 민족발전의 선봉이 되어서 만리해외로 내닷든 동포의 의기를 장하다할 것이외다.
# 西伯利亞 - 시베리아, 黑西哥 - 멕시코, 布哇 - 하와이
# 하와이 이민 사일부, 일본인에 의한 멕시코 이민의 부조리 참고자료
잡지명
삼천리 제5호
1930년 04월 01일
全盛時代 중 제3편 제1편 西北學會波瀾史 崔麟 제2편 畿湖學會前後十年 兪鎭泰
회고·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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