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의 연인 왕수복, 北 체제 선전가수가 되다
知識 ,知慧 ,生活/옛날공책
2021-12-18 09:50:20
이효석의 연인 왕수복, 北 체제 선전가수가 되다
평양 기생 출신 첫 유행가수…北 공훈배우로 깍듯한 대접 받아
1935년 월간지 '삼천리' 투표에서 가수 1위로 뽑힌 왕수복. 평양 기생 출신인 왕수복은 이효석의 연인으로도 유명했다.
1935년 월간지 ‘삼천리’가 가수 인기투표를 했다. 연말 10대 가수 선정하듯, 독자 투표로 남녀 가수 각각 5명을 뽑는 방식이었다. 남자 가수 1위는 채규엽. 함흥 출신으로 일본 중앙음악학교에서 공부한 유학파였다. 1930년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봄노래 부르자’를 취입한 ‘직업가수 1호로 당대 스타였다.
여자 가수 1위는 열여덟이던 평양 기생 왕수복이었다. 남녀 1만130표 중 1903표를 얻었다. 채규엽은 1844표를 얻어 남녀 통틀어 1위는 왕수복이 차지했다. 같은 평양기생 출신인 선우일선이 2위(1166),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이 3위(873)였다.
◇몸집 크고 소리 우렁찬 ‘조선의 가수왕’
왕수복은 기생 출신 첫 유행가수였다. 평남 강동군서 화전민 딸로 태어난 왕수복은 열한살 때인 1928년 평양 기성권번(箕城券番)이 운영하는 3년제 기생학교를 다니면서 시, 서, 화와 소리를 배웠다. 1933년 봄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낸 ‘울지 말아요’ ‘한탄’ 등으로 데뷔했다. 폴리돌 레코드사 전속 가수가 되면서 ‘고도(孤島)의 정한(情恨)’ ‘인생의 봄’이 당대 최고의 음반 판매를 기록하면서 스타로 떠올랐다.
왕수복은 체격이 좋은데다 목소리가 우렁찼다. ‘고도의 정한’을 작곡한 전기현은 왕수복의 재능을 높이 샀다. ‘왕수복의 몸집이 건장한 만큼 목소리도 우렁차게 기운좋게 세차게 나옵니다. 특히 평양예기학교를 졸업한 만큼 그 넘기는데는 과연 감탄 아니 할 수없지요. 본 성대가 아니라 순전히 만들어내는 성대이면서 일반에게 환영을 받고 유행되고 많이 팔리기로 전무후무외다.’(’고도의 정한’의 작곡을 하고, ‘삼천리’ 1935년 11월)
1935년 조선의 레코드 판매량은 약 120만장이었다. 이 중 조선 소리판이 40~50만장 정도였다. 바야흐로 유성기의 시대, 유행가의 시대였다. 한 신문은 당시 유성기를 통한 유행가 보급을 ‘엽기적 유행’(‘시대의 감정담은 애수의 유행가’,매일신보 1932년 12월13일)으로 보도할 정도였다.
왕수복이 다닌 평양기생학교. 3년제로 입학금 2원, 수업료는 매달 1학년 2원, 2학년 2원50전, 3학년 3원으로 비쌌다./신동규 동아대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일본 전역 울려퍼진 왕수복의 유행가
1934년 1월8일 오후7시반 왕수복의 목소리가 일본 땅에 울려퍼졌다. 경성방송국 중계로 왕수복의 유행가와 이왕직 아악부 연주가 처음으로 현해탄 건너 일본땅에 방송된 것이다.
‘옥반 굴러가는 구슬 소리같이 맑고도 아름다운 조선 아가씨의 귀여운 노래 가락이 훨쩍 개인 정월 하늘에 전파를 타고 해외를 달리는 귀여운 소식…조선 가수의 은근히 감춘 맑은 ‘청’을 역시 널리 소개하고자 우선 그 첫걸음으로 오는 8일 오후7시반부터 8시까지의 연예 방송 시간에…유행가수로 이름 있는 와수복 양의 조선 유행가를 방송하리라 한다.’( ‘年頭 조선樂 의 비약’, 조선일보 1934년 1월7일)
왕수복은 경성방송국 오케스트라 반주로 ‘고도의 정한’ ‘아리랑’ 등을 불렀다. 한류의 원조(元祖)라 할 만하다.
왕수복이 다닌 평양기생학교의 모던 댄스 수업 광경. 평양기생학교를 소개하는 엽서세트 8장중 하나다./신동규 동아대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진흥사업성과포털
◇유행가 끊고 동경 유학
‘가수왕’으로 인기 절정을 달리던 왕수복은 열아홉살이던 1936년 동경 유학을 감행한다. 성악가였던 벨트라멜리 요시코에게 개인교습을 받으며 메조 소프라노로 변신했다. 훗날 이화여대 예술대학장을 지낸 채선엽이 현제명 권유로 왕수복보다 3,4년 앞서 요시코를 사사했다.
왕수복은 1938년12월1일 동경 군인회관에서 열린 ‘음악과 무용의 저녁’ 공연에서 조선 민요를 서양식 창법으로 불러 화제를 모았다. 한해전 1937년엔 폴리돌 레코드와 결별하면서 유행가와 연을 끊고, 이탈리아 유학을 꿈꾸기도 했다. 오케 레코드 전속가수로 밀라노로 유학을 떠난 테너 이인선이 모델이었다. 유학은 성사되지 못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퀴리부인전’ 읽는 인텔리
성악으로 선회한 왕수복은 평소 책을 많이 읽었던 모양이다. 1939년 3월 어머니 장례 때문에 잠시 귀국한 왕수복의 평양 집에 기자가 찾아갔다. 왕수복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는 중이라고 했다. 1936년 미국서 출간돼 일본에서도 널리 읽히던 베스트셀러였다. 왕수복은 말했다. ‘아메리카의 남북전쟁에 취재한 것이 퍽이나 마음에 끌려요. 문체도 참신하고 묘사도 좋구요.’( ‘이태리 가려는 왕수복 歌姬’, ‘삼천리’ 1939년 6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퀴리부인전’, 이광수의 ‘애욕의 피안’ 등도 왕수복의 독서목록에 올랐다. ‘이런 책까지 서가에 있을 줄 몰랐다’는 질문에, 왕수복은 ‘왜요. 우리는 보아선 안되나요.호호호’하며 능란하게 받아넘겼다.
◇이효석 임종 지킨 최후의 연인
왕수복은 이효석의 최후를 지킨 연인이었다. 1940년 일본 유학 중 잠시 귀국해 언니가 운영하던 평양의 ‘방가로’(放街路)다방을 놀러다녔다. 이효석은 1935년부터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가르쳤고, 1938년 일제 탄압으로 학교가 문을 닫자 대동공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는 등 창작의 전성기를 달릴 때였다. 하지만 1940년 아내와 막내아들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면서 방황했다.
이효석은 평양의 음악다방을 순례하던 클래식 광(狂)이었다. 방가로에서 이효석을 만난 왕수복은 첫눈에 빠져들었다. 왕수복은 남편감으로 ‘(수입은 적어도)문사(文士)가 좋다’고 인터뷰한 적 있을 만큼, 지식인을 선망했다. 꿈같은 연애도 잠시, 이효석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1942년 5월 결핵성 뇌막염으로 입원한 이효석의 곁을 왕수복이 지켰다. 병실을 붉은 카네이션과 흰 글라디올러스 같은 화려한 서양 꽃으로 장식했다. 스물다섯살 왕수복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효석은 눈을 감았다. 신현규 중앙대 교수가 쓴 ‘평양기생 왕수복’에 따르면, 이효석은 소설 ‘풀잎’과 ‘일요일’에 왕수복과의 사랑을 모델로 한 자전적 스토리를 남겼다.
◇'고난의 행군’ 때 여든 살 독창회 개최
왕수복은 해방 이후 고향 평양에 남았다. 열네살 연상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김광진과 가정을 꾸렸다. 김일성대학 경제학부장을 지낸 김광진은 김일성 훈장까지 받았다. 1981년 세상을 떠나자 애국열사릉에 붇혔다. 왕수복은 1953년 가수로 복귀, 1955년 소련에 파견한 예술단에 포함됐다. 타슈켄트와 알마티 공연에서 고려인들은 왕수복의 노래에 열광했다. 왕수복 김광진 부부는 1965년 판문점에 들러 우리 기자들과 만난 적있다. 왕수복은 이난영과 동년배라면서 악극배우로 이름을 날렸던 전옥(배우 최민수 외할머니)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판문점에 나타난 왕수복’, 조선일보 1965년 5월11일)
공훈 배우가 된 왕수복은 북 ‘체제 가수’로 깍듯한 대접을 받았다. 환갑,칠순,팔순을 맞을 때마 김정일이 생일상을 보내줄 정도였다. 여든이던 1997년엔 ‘왕수복 민요독창회’가 TV를 통해 중계됐다(요즘은 유튜브에서 이런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있다). 한복 차림으로 무대에 오른 왕수복은 인사말을 했다.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장군님께서는 얼마전 저에게 은정어린 80돌 상을 보내주셨습니다. 오늘은 또 이렇게 뜻깊은 독창회를 마련해주시니, 정말 생각하면 고목에 꽃을 피워주셨습니다…위대한 장군님의 은정깊은 사랑이 없으면 실현될 수 없는 일입니다. 제 나이가 비록 팔십이지만 젊었을 때처럼 소리를 낼 수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뜨거운 은정에 보답하기 위해 이 무대에 나왔습니다.”
최악의 식량난으로 수백만명이 굶어죽었다는 ‘고난의 행군’을 하던 때였다. ‘조선의 가수왕’이자 북의 공훈배우였던 왕수복은 여든 나이에 ‘김일성 체제’를 선전하는 이벤트에 동원됐다. 2003년 여든 여섯에 세상을 뜬 왕수복은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참고자료
신현규, 평양기생 왕수복, 경덕출판사, 2006
‘레코ㅡ드 가수 인기투표’, ‘삼천리’제7권9호 1935년10월
전기현, ‘’고도의 정한’의 작곡을 하고’, ‘삼천리’ 제7권10호 1935년 11월
‘이태리 가려는 왕수복 가희’, ‘삼천리’ 제11권6호 1939년 6월
조선 뉴스라이브러리 100 바로가기
※'기사보기’와 ‘뉴스 라이브러리 바로가기’ 클릭은 조선닷컴에서 가능합니다.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입력 2021.12.18 06:00
#김기철의 모던경성
'옛날공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모던 경성 젊은이들의 세련된 절망 (1) | 2023.07.08 |
---|---|
녀름情趣, 녀름情緖 / 여름정취, 여름정서 / 별건곤 제14호 (0) | 2023.07.08 |
고무신 (0) | 2023.07.05 |
開發會社 奮鬪史 [개발회사 분투사] (0) | 2023.07.05 |
60년대 격동적인 변화의 풍경들 - 뉴스 (0) | 2023.07.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