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 경성 젊은이들의 세련된 절망
'묻지 마라 갑자생' 아버지
도대체 이렇게 바보처럼 답답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솔직히 말해서 제가 이 세대를 본격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습니다. 이 세대는 저 같은 중년들의 아버지 세대입니다. 아버지 세대를 생각하면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저도 이제 늙은 모양입니다.
저는 아버지 세대들이 참 불쌍한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필자의 아버지는 1924년생이십니다. 이 말을 꺼내면 같은 또래 노인분들은 대뜸 “묻지 마라, 갑자생이구만." 하십니다. 1924년이 갑자년이었습니다. 바로 그 해에 태어난 아이들부터 일제 말에 강제징병을 당했습니다. 그전까지 조선의 젊은이들은 허울이나마 지원이라는 절차를 거쳐 군대로 보내졌는데,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기울어지니 일제가 1924년생부터 모조리 강제징집을 시행한 것이지요.
딱 1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이런 일이 없었을 터인데, 얼마나 자신의 출생연도가 야속했겠습니까. 지금도 군대에 가기 싫어서 어깨를 탈골시키고 국적을 바꾸고 별 수를 다 쓰는데, 그때는 엄혹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나가면 죽어서 돌아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요. 당시 군국가요로 취입된 <지원병의 어머니>를 들어보면, '기운차게 떨어지는 붉은 사쿠라 그것이 반도남아 본분일 게다', '살아서 돌아오는 네 얼굴보다 죽어서 돌아오는 너를 반기며'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정말 이렇게 떨어지는 사쿠라'가 되어 소지품만 가족 품에 전달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던 거죠.
소화공과학교를 졸업하고 토목기사로 일하던 아버지는 1945년 봄에 징집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울면서 장남을 군대로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북만주에서 군인으로 근무했답니다. 그리고 해방 소식을 듣고 북만주에서 몇 개의 국경을 넘고 소련군 수용소에 잡혀 있다가 탈출하는 등 온갖 고생을 하며 서울까지 걸어왔답니다. 할머니는 거지나 다를 바 없는 몰골로 살아 돌아온 장남의 소지품, 항고(철로 만든 군인용 밥그릇)를 수십 년 동안 버리지 못하셨습니다.
이 세대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5년 후에 다시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이번엔 다른 나라 땅에서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한반도 내에서 총과 포탄이 날아다녔습니다. 일제 말에 징병을 갔던 세대는 이때 나이가 20대 중반이었고, 다시 군인으로 입대한 사람이 많았습니다(다행히 아버지는 해방 후 공무원으로 취직하여 군인 되는 신세는 면하셨답니다). 이 세대는 꽃 같은 20대 청춘을 두 차례의 국제적 전쟁으로 보냈습니다. 무슨 이런 기막힌 세대가 있답니까. 이들 중 일부는 1960년대 말에 돈 벌러 베트남전까지 갔다 온 사람도 있으니, 젊은 날을 온통 전쟁으로만 보낸 참으로 기구한 세대입니다.
'모뽀모걸'을 아시나요
아버지가 바로 트로트의 광팬이십니다. 아버지의 외숙이 상하이에서 사다주셨다는 기타를 들고 일본 엔카 <술은 눈물인가 한숨이랄까>를 연주했고, 축음기와 음반을 사서 이난영, 남인수, 백년설의 대중가요부터 베토벤 교향곡까지 즐겼고, 동양극장과 부민관을 들락거리며 황철이나 심영 등이 출연하는 연극을 보고 사셨던 분입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때 서울로 이사를 와서 1930년대 후반부터 경성에 사셨답니다. 바야흐로 그때의 서울, 아니 경성은 식민지 시대를 통틀어 가장 화려한 시대였습니다. 몇 년 전 영화, 드라마, 책 등에서 ‘경성 붐’이 분 적이 있었지요. 영화 〈모던보이>, <라듸오데이즈>, 드라마 <경성스캔들>이 그것이지요. 마치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의 유럽을 연상시키는 엔틱하고 멋진 거리의 풍경, 카페에 앉아 축음기 소리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는 젊은 신사들의 모습을 자주 비춰주었지요. 이 시대 잡지들을 보면 '모모걸'이란 희한한 단어가 있습니다. '모던 보이, 모던 걸’을 줄여 부르는 말인데, 당시 젊은이들 감각도 요즘 누리꾼 감각 못지않지요? 이런 모뽀모걸들이 모여서 '경성에 댄스홀을 허하라'라는 공개 청원을 낼 정도로 화려한 소비문화를 구가하던 시대가 바로 193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앞서 이 시기를 식민지 후반기라고 부른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우리는 흔히식민지 시대라는 말을 하면 모든 사람들이 일본에 강한 반감을 가지고 일본 경찰에 짓밟히고 분노하고 젊은이들은 독립운동하겠다고 조직에 가담하여 전단을 만들다가 발각되면 만주로 도망가 독립군이 되는, 영화 같은 장면들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지는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의 상황입니다.
1919년 3·1운동이 몇 달에 걸쳐 전국적인 민중봉기로 이어지고 진압된 이후, 1920년대는 다양한 사회운동이 솟아오르던 시기였습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나라를 빼앗긴 지 20년이 채 되지 않았고, 망국 9년 차에 대대적인 봉기를 하여 일제와 한판 붙어본 경험을 갖고 있었으니, 일본에 대한 적개심, 독립에 대한 욕구, 가난한 조선 백성이 잘 사는 혁명의 방안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많이 생각할 때였지요. 때마침 들어온 사회주의도 이런 바람에 큰 기여를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사회와 민족, 혁명을 생각하던 시대였습니다.
1930년대로 넘어가면서 독립운동들은 많이 진압이 되었고, 일본이 승승장구하더니 결국 만주에 허수아비 국가인 만주국을 세우면서 대륙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는 성과를 내놓았습니다. 국내에서는 더 이상 독립운동을 할 수가 없었고, 할 마음도 줄어들어 간 것이죠. 언론들도 자본의 규모가 커지면서 보수화되고 몸을 사리면서 돈 벌 궁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대동아공영권의 시대에 접어듭니다. 국내의 지식인들은 변화한 현실을 받아들이자고 태도를 바꾸었습니다.
지금 생각으로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게 말이 안 돼 보이지만 당시에는 달랐을 겁니다. 서구 앵글로색슨족이 아시아를 식민지배하는 현실에서 힘없는 아시아가 단결하여 대항하자는 일종의 아시아주의였기 때문입니다. 단 그 선봉에 일본 자신이 서겠다는 논리이고, 그것을 만주와 중국, 나아가 동남아까지 점령하겠다는 말과 같았습니다. 조선의 지식인들도, 이제 가능하지도 않은 독립 타령만 계속하느니 차라리 조선인 자치권을 따내는 게 현실적이라며,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 국민과 동등한 의무를 행하고 동등한 권리를 따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창씨개명이니 지원병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런 사고에서 나왔습니다.
신파적 눈물의 세련성
이런 사실은 역사책을 읽으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것은식민지 후반기를 살았던 젊은이와 청소년들입니다. 1930년대에 접어들어 식민체제가 상당한 안정을 이루게 됩니다. 게다가 세대도 바뀝니다. 1930년대 중후반 청소년기에 도달한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나라가 없었고, 일본어가 국어였다는 이야기는 앞서 언급했습니다. 1910년대 중반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은 3·1 운동의 기억도 없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 직후가 그랬듯이, 중고생 시절에 이런 혁명적 상황을 직접 겪은 세대들은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1915년생이나 1920년생쯤 되면 그런 생각이 없어집니다.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해 엄청난 문제의식을 체감하고 살지 않게 되는 거지요.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해방이나 독립은 상상하기 힘든세대였습니다. 그보다는 화려한 '모던 경성'을 누리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한 세대였지요.
화려한 근대적 소비문화를 누리되 사회의식의 수준은 식민지 총독부 체제에 묶여 있던 것이 바로 '모뽀모걸'들이었습니다. 총독을 투표로 뽑는 건 아니니 민주주의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물질적으로는 근대적이나 의식은 근대적이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의 사람들인 것이지요.
이런 사람들에게 신파적 트로트는 마음에 딱 맞는 것이었습니다. 음악적으로도 자신들이 동경하고 있던 일본의 최신 트렌드였고요. 게다가 고소설처럼'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촌스럽고 구태 어린 사유방식을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이 고통은 해결될 수 없어, 그래서 나는 눈물 흘릴 수밖에 없어'라는 나름 세련된 태도를 가지고 있는 거잖습니까. 아직까지 이 시대 젊은이들은 '세상에 윤리가 밥 먹여주냐', 남들이 뭐라 하든, 이게 내 방식이야' 하는 식으로 자신의 이익에 맞춰 논리를 만들고 이로써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바꾸겠어', '운명은 바뀔 수 있어', '세상의 주인은 나야'라는 희망적인 태도, 혹은 '이 불행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이해할 수 있으니 합리적으로 해결해보자'는 식의 진취적이고 합리적 태도도 갖지 못했지요.
게다가 나라도 없는 백성에, 자신도 모르게 해방이 되더니 삼팔선이 생겨 고향에 못 가게 되고, 전쟁으로 가족들이 뿔뿔이 헤어지는 경험까지 온갖 극단적 경험을 하게 되니, 가슴에 절절한 형상화를 해낼 수 있었던 것이 신파적 트로트였던 거지요. 아아 산이 막혀 못 오시나요, 아아 물이 막혀 못 오시나요' (남인수, <가거라 삼팔선>),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중략)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1.4후퇴라는 의미이지요) 이후 나 홀로 왔다' 같은 기막히게 현실적인 가사들이 나오니,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식민지 시대부터 전쟁 즈음까지 신파적 트로트는, 음악으로나 가사 내용으로서나 전혀 촌스럽지 않은 세련된 노래였음이 분명합니다. 신파적 눈물이 결코 촌스럽지 않고 세련된 느낌이었을 것이란 말이죠. 신파적 트로트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푸근하고 편안한 느낌의 노래가 아니라, 당대의 고통을 당대의 방식으로 절절하게 노래한 매우 긴장감 넘치는 새로운 유행의 노래였습니다. - 이 영미의 세시봉 서태지와 트로트를 부르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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