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대의 풍경과 아메리칸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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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10 01:15:56
50년대의 풍경과 아메리칸 아가씨.
1945년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때부터 양키 물품이 쏟아져 나왔다. 서울 남대문 시장은 일본 군수품이 자취를 감추고 미군 물품이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부터는 더 극심해졌다. 도시고 농촌이고 간에 서민들이 입고 먹고 하는 것들은 죄다 미군수품, 피엑스의 물품들이었다. 모든 생산시설이 파괴되고 조업이 중단된 상태에서 피엑스는 우리나라 경제의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였다. 짙은 녹색의 지엠시, 드리쿼터, 지프에 실려 나오는 군수물자들은 미군들이 서두를 때 즐겨 사용하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곧잘 따라서 한 “허바허바”라는 말처럼 아주 빠르게 우리의 의식주 생활에 파고들었다.
이른바 “피엑스 경제”는 1950년대 후반 내내 우리나라 경제의 그 자체가 되었으며, 60년대 경제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피엑스 경제가 발흥하는 것은 몇 가지 통로를 통해서였다. 우선 양공주를 통해서이다. 양공주들은 기지촌에서 미군과 동거를 하며 미군이 가져 나오는 물건으로 쏠쏠한 재미를 본다. 미군들은 부대 안의 물건을 훔쳐오거나 피엑스에서 물품들을 사와 양공주들에게 팔면 그녀들은 다시 원가에 두세 곱을 붙여 되판다. 담배, 커피, 술, 통조림, 옷가지, 라디오, 전축, 텔레비전, 냉장고 따위들이 취급된다. 이렇게 흘러나온 물품들은 다시 기지촌의 주민들을 통해서 도시로 빠져나간다. 그 다음에는, 기지촌의 '어깨' 가 중심이 된 폭력단이 부대 안으로 들어가 물자를 훔쳐낸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폭력단과 미군 헌병이 서로 총질하는 사태가 자주 빚어졌다. 좀 더 전문화된 통로는 부대 밖의 한국인과 부대 안의 한국인 종업원, 그리고 피엑스 관리를 맡은 미군이 서로 짜고 물품들을 빼돌리는 경우이다. 이런 경우 창고에서 물품이 빠져 나가거나 수송트럭에서 도중에 빠지기도 하였다. 아예 창고 바닥에서 부대의 담 밖으로 땅굴을 뚫어놓기도 하였다.
한국 정부는 줄곧 단속을 벌였지만 늘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그 유출량마저 파악하기 힘들었다. 피엑스 운영은 군사 규정에 따르는 것이므로 그 규모와 내용이 미군 안에서도 공개될 수 없었다. 말썽이 생기면 그때에는 한해에 유출량이 2백억 원어치니 3백억 원어치니 하는 어림짐작 수치들만 들먹거려졌다. 그러나 군수품이 한국시장으로 빼돌려지는 피엑스 경제의 책임을 미국 자체에 묻는 사람도 많았다. 미국은 원조물자를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상품을 사들이기에 앞서 자국의 상품을 살 것을 요구하는 정책을 설정하였고, 그것은 피엑스 운영에도 적용된다는 것이다. 미군은 필요한 물자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가져다 놓았다. 1965년 무렵 송탄에서는 불도저 5대가 한꺼번에 미군부대에서 빠진 일도 있었다.
미 군수품 유출구멍은 기지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매춘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기지촌 문화는, 미군정기에도 남한에 주둔한 모든 미군부대에 물자와 인력을 대는 미군 제61병기 사령부가 자리 잡은 부평 등지에서 성행되기도 하였지만, 한국전쟁 이후 휴전이 기정화 되면서부터 그 정착이 본격화되었다. 부평과 부산 일대는 대표적인 후방 기지촌이었다.
전방 기지촌은 일명 “용주골”로 불려진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연풍1리가 가장 유명했다. 이밖에도 동두천, 영북면 운천리, 의정부, 서울의 후암동과 이태원 등지를 비롯하여 송탄, 오산, 대전, 대구, 왜관, 군산, 목포, 진해 등등 전국 각지에서 기지촌문화가 번성하였다. 기지촌 문화는 양공주, 술집, 외제품 판매책, 암달러상, 포주 등을 핵으로 하여 그 주변에 미장원, 세탁소, 양복점, 양품점, 사진관, 기념품점, 초상화점, 오락장, 당구장, 국제결혼 중개업 사무소, 환전상 따위들이 설치되면서 번성하였다.
기지촌에서 흘러나오는 군수물자들은 식품이나 의약품 등 가릴 것 없이 모두 짙은 카키색의 깡이나 보르박스에 담겨 나왔다. 초콜릿이나 추잉껌은 미군의 대명사 노릇을 하였고, 럭키 스트라이크, 필립 모리스, 체스터 필드 같은 담배는 애연가에게 필수적인 이름들이었다. 다이아 찐, 디디티, 페니실린, 오레오마이신 따위의 약품들은 그야말로 기적의 약이었다. 카키색 군복과 베이지색 장교복은 젊은이들이 즐겨 입었다. 그러다가 미군복을 입는 것을 정부에서 단속하자 검은색이나 감색으로 염색하여 입고 다녔는데, 그 때문에 서울의 남대문시장이나 변두리의 크고 작은 시장들에서 군복 염색공장들이 범람하였다. 미군복 가운데 야전 점퍼는 가장 인기 있는 고급품목이었다. 군복, 내의, 담요, 침낭 등과 각종 일용품이 우리 생활 깊숙이 침투하였다. 철모 안의 화이버는 시골에서 똥바가지로 이용되었다. 경제가 아주 초라한 상태에서도 유행의 첨단을 걷는 부류가 있었으니, 그들을 말하여 사람들은 “양공주”라 하였다. 양공주들은 매니큐어로 손톱 화장을 하여 보통 여자들과 차이가 돋보였다.
물자들은 여러모로 활용되었다. 알맹이는 알맹이대로 껍데기는 껍데기대로 다 요긴하게 쓰였다. 빈 깡통들은 크기에 따라 밥그릇도 되고 기계 부속품이 되기도 하였으며, 하나하나 펴지고 이어지게 되면 판잣집 지붕 덮개로 거뜬하게 제 구실을 하였다. 드럼통의 철판은 선술집에서 곱창이나 돼지고기 따위를 구워내는 조리대로 활용되었다. 드럼통과 고철들을 수집하여 지프차와 버스까지 조립하는 사람도 있었다. 깡통들마저 일상생활에서 필수품으로 활용되다 보니까 그것들은 어느새 경제를 적극적으로 일으키는 자원이 되었다. 고철과 넝마주이의 변증법은 한국경제의 뿌리이기도 하다. 전북 정읍 출신의 임대홍이 일으킨 미원의 터전은 빈 드럼통이었다. 그는 피난지 부산에서 빈 드럼통으로 보일러를 만들어 동아화성 공업을 세운 것으로 알려진다. 뒷날 일신제강의 모체가 된 신생산업을 세운 주창균 역시 부산에서 고철을 원료로 주전자를 만들어 팔았었다. 이들이 무대로 한 부산의 국제시장은 전시경제의 중요한 터전이 되었고, 여기서 한몫 잡은 상인들은 뒷날 원조물자 배분과 폭리를 둘러싸고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부정축재를 일삼으며 이른바 경제개발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
사람들과 물자의 이동, 수송에서도 군수품은 중요했다. 당시의 버스는 거의 전부 군트럭을 개조한 것이었다. 군차량도 후생 사업이란 명목으로 공공연히 민간인들을 상대로 영업행위를 하였다. 드리쿼터라 불린 3/4톤 차량은 시골 장터에서 장꾼들을 실어 날라 돈을 벌었고, 지엠 시라 불린 2.5톤 차량은 전국을 쑤시고 다녔다.
군수품 외에도 구제품과 밀수품이 판쳤다. 구제품은 주로 교회 계통으로 들어왔는데, 천주교회에서는 “밀가루신도”라는 달갑잖은 말까지도 생겨났고 게다가 구제품의 분배에서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하였다. 밀수품은 화장품, 고급 옷감, 각종 생필품에 걸치면서 밀수 경기를 흥행시켰다. 특히 부산, 마산, 여수 등지의 항구도시는 밀수의 전초기지로 악명을 떨쳤다.
식품, 의복, 약품, 전자제품, 화장품 따위들이 사람들에게 소비되면서 한두 회사의 제품이 꽤 오래 나돌게 되면 그 회사의 제품 상표이름은 제품 전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로 둔갑해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우유는 으레 “카네이션”으로 불렸고, 라디오 하면 "제니스", 색안경 하면 “라이반”, 만년필 하면 “파커”, 비누 하면 “아이보리”나 “럭스”였다. 여대생들, 직장여성들, 가정주부들에게 양말 하면 “로이 열”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미제”는 생활 풍속도의 상징이 되었다. 일제 때는 바다 건너 온 귀한 물건이라 해서 “하꾸라이”로 불려졌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Made in U.S.A.”라는 문자가 사회계층을 초월하여 소비욕을 자극하는 기호가 되었다. 끈기와 여유 있는 여자들 경우에는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완벽하게 미제로 치장할 수 있었다. 국산품이 전혀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품질에서 월등하게 나았기 때문이다. 미제에 현혹되다 보니 가짜들도 버젓이 설쳤다. 양주나 화장품 같은 것들은 빈병이나 곽을모아 가짜 내용물을 집어넣거나 약간의 진짜에다 가짜를 섞는다. 국산품에다 가짜 외제상표를 도용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외제상품을 살 때“진짜냐 가짜냐”라고 묻던 언어습관이나 시장상인들 사이에서 가짜를 “짜가”라는 은어로 널리 사용하게 된 것은 아마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미군 수품은 피엑스 경제라는 파행적인 경제를 창출하면서 한국경제의 자립적인 물적 토대를 계속 유보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것은 미국이 원조를 설탕, 제분, 시멘트, 섬유 등 소비재에 치중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더구나 그것은 ‘양공주’로 상징되는 기지촌 문화를 적극화시켰는데, 기지촌 문화는 자본주의의 퇴폐적 문화와 미국적인 이데올로기가 극단화되는 공간이었다. 그 공간은 한국문화의 현대적 성장을 철저히 왜곡하였다. 물론 거기에는 미군들의 섹스 놀이에 유린당한 한국 여성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기도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사람들의 생존 욕망이 치열하게 뻗쳐진 곳이기도 하다.
기지촌 문화를 타고 미군들의 폭력, 범죄, 방화, 살인, 강간 들이 숱하였지만 한국 정부는 대응할 능력이 없었다. 1966년에 조인된 한미 행정협정은 범행 미군들에게 오히려 면죄부를 합법화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한미 행정협정은 그 내용이 너무 굴욕적이어서 많은 반대에 부딪쳤지만 결국 통과되었다. 지금까지 미군이 한국에서 저지른 범죄에 대한 처벌과 미군 기관에 고용된 한국인 노동자들의 파업이 거의 불가능했던 것도 이 협정 때문이었다.
미군 수품과 기지촌 문화는 그 공간 안팎에서 한국사람들의 육체, 마음, 심리, 경제, 문화, 언어들을 사로잡아 미국화하고 미국적 이데올로기로 식민화하는 첨병의 역할을 하였다. 굳세어라 금순아」(1953), 「이별의 부산정거장」(1953), 단장의 미아리고개(1956)의 정서가 말해주듯 가장 황폐하고 가장 절박한 상황의 한가운데에서 한국의 대중들에게 친미 의정서는 반사적으로 강한 유혹과 환상으로 먹혀들었다. 전쟁 중인 1953년에 나온 「샌프란시스코』는 그 극한이었다.
비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곤대는 별그림자
금문교 푸른 물에 찰랑대며 춤춘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는야 꿈을 꾸는 나는야 꿈을 꾸는 아메리칸 아가씨
샌프란시스코-백설희(1953)
#우리 시대의 언어게임 #고길섶 #언어로 쓰는 한국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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