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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성채같은 전도관

by 형과니 2023. 8. 10.

 

 

성채같은 전도관

 

숭의동하면 자연스럽게 ‘109번지가 따라 붙는다. 그 동네는 한때 거칠기로 유명했다. 사람은 밟고 있는 땅을 닮는다고 했던가. 쇠뿔고, 황골고개라는 거친 옛 이름을 가진 이 동네는 지형만큼이나 거칠기로 소문났었다. 창영동 등 아랫동네 아이들은 그곳에 가기를꺼렸다. 109번지는 흔히 옛 전도관 구역을 말한다. 전도관은 한때 인천의 랜드마크였다. 산꼭대기에 성채처럼 우뚝 솟아 있어 인천의 웬만한 곳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의 주인은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맨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알렌이다. 선교사이자 의사로서 초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그1890년 고종황제의 땅 옆에 여름 별장을 지었다. 둥근 타워의 돔을 곁들인 2층 별장이었다. 1907년 알렌은 미국으로 귀국했고 그 자리를 이완용의 아들 이명구가 차지했다. 1927년에는 이화여전 출신의 이순희 남매가 그곳에 계명학원을 세웠다. 흔히들 개미학원이라고 불렀다. 해방 직후에는 서울의 대학 분교가 개교하기도 했다.

 

휴전 후, 한 종교단체의 집회가 남한 땅을 휩쓸었다. 인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5916일 동산중학교 앞 넓은 벌판에 엄청나게 큰 천막이 쳐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천막 안에서 열광적인 집회를 가졌다. 원래 5일 예정이었으나 이틀을 연장하여 22일까지 집회를 가졌다. 그 집회를 인도한 사람은 바로 불의 사자’, ‘동방의 의인이라 불린 박태선 장로였다. 그 종교단체 이름은 한국예수교 전도관 부흥협회이다. 지금은 천부교라는 새로운 교명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공사집’, ‘선교사 집으로 불리던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195710월 전도관을 세운다. “벽돌을 이고 언덕을 오르던 신도들의 모습이 장관이었지. 나중에 엄청나게 불어난 신도들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사방팔방 산 밑에서 개미처럼 꼭대기로 올라오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40여 년간 전도관 주변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의 기억 더듬기는 계속된다.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었잖아. 새벽 4시까지 기도하면 그 소리에 잠을 이룰 수 없었어, 옆집에 살면서 전도관에 다니던 경숙이 엄마는 소사신앙촌으로 들어간다며 이 동네를 떴는데 지금 어디서 사는지” .

 

1978년 전도관은 이곳을 떠났다. 조씨라는 서울사람이 이 건물을 매입했다. 6개월 정도 비어 있다가 신발공장 3개가 세 들어 왔다. 공들이 많아 별도의 기숙사도 있었다. 2, 3년간 운영하다가 공장은 이전했다. 1984년 이 자리에 예루살렘교회가 들어섰다. 다시 열광적인 집회가 이어졌다. 매주일이면 교인을 가득 실은 수십대의 버스가 좁은 골목길을 비집고 꼭대기로 향했다. 주민들이 반복되는 그 혼잡 때문에 들고 일어났다. 결국 버스는 공설운동장에 세워졌. 30여 년전의 모습처럼 교인들은 걸어서 109번지로 올랐다.

 

6년 전 예루살렘교회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 다시 전도관은 비었다. 불 꺼진 성채는 을씨년스럽기조차 하다. 굳게 닫힌 정문열쇠를 보관하고 있는 장춘자(71) 할머니를 수소문해 빈 건물을 둘러보았다. 산꼭대기의 1700여 평 땅은 한없이 넓어 보였다. 건물은 이미 비둘기 차지가 되었다. 주황색의 양철 지붕에 올랐다. 알렌이 왜 여기에 별장을 세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변이 육지로 많이 변했지만 월미도는 물론 멀리 인천 앞바다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 왔다.

 

갯바람이 코에 스치는 듯했다. 어디선가 울부짓는 기도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굿모닝 인천 2010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