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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옛모습

흘러간 옛 지명

by 형과니 2023. 11. 23.

흘러간 옛 지명 / 신태범 - 인천 한세기

 

요즘 텔레비죤에서 가끔 시청하게 되는 흘러간 옛 노래를 본따서 흘러간 옛 지명이란 프로그램을 짜 보았다. 지명은 사람이 모여 살면서부터 생겼을 것이고 세월과 더불어 전승과 변화를 거듭했을 것이다. 농촌에서는 옛 지명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는 예가 많아도 도시에서는 완전히 잊혔거나 간혹 노인들 간에서나 쓰이고 있을 뿐이다.

 

인천에서도 文鶴,南洞,富平, 西串 36년과 40년에 市域으로 편입된 新市內에는 아직도 예부터 내려오는 자연부락이 남아 있으므로 옛 지명이 그대로 통용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개항 후 1세기 밖에 안되면서도 변동이 대단한 구시내에서는 우리 선대들이 즐겨 사용하던 지명이 이미 완전히 사라졌거나 사라져 가고 있는 중이다. 지명의 기원이 되었던 존재이유가 사라져 그 이름이 풍기던 실감이 소실되었을 뿐 아니라 지명을 전승해 온 토착 인구가 해방과 동란으로 이산 된 후 인천은 급증한 외래 인구로 구성되었으므로 통용 범위가 축소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1~2만의 인구가 발로 걸어 다니며 살던 시절에 통용하던 지명이 120 만의 시민이 차를 타고 뛰어다니는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면 오히려 이상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일전에 한 친구가 만두를 잘하는 집이 <긴담모퉁이> 에 있다해서 오랜만에 긴담모퉁이란 옛 이름을 들어가면서 점심을 든 일이 있었다.

 

높은 돌축대 사이로 뚫린 긴담모퉁이 길은 반세기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여전한 모습으로 있어 옛 이름이 살아 있는 것 같았다. 1907년에 축조된 이 신작로는 新興洞에서 京洞에 이르는 길이다. 京洞을 거쳐杻峴驛(東仁川)으로 가는 요로였다. 한때 花水洞,花平洞,松峴洞 등에 살던 젊은 여자들이 새하얀 머릿수건을 쓰고 新興洞 일대의 정미소단지로 줄지어 출퇴근하던 길이기도 했다. 요즘은 기독병원을 찾는 환자들로 붐비는 길이 되었다.

 

京洞 큰길에서 철로문을 빠져나오면 中央市場 金谷洞초입이 된다. 19세기말까지 이곳에 큰 갯골이 통해 있어 만조 때면 현재 仁川橋 아래처럼 바닷물이 들어왔었다고 한다. 1900 년에 京仁철도가 부설된 후 철로 주변을 개발할 때까지 배가 닿는 다리가 있어 <배다리>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이전에는 배다리를 보았다는 사람이 더러 있었는데 지금은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래도. 배다리란 이름은 아직도 살아 있다.

 

<싸리재>란 이름은 지금도 토박이 사이에서는 통용하고 있으나 희귀조 황새처럼 멸종의 운명이 머지않은 것 같다. 필자도. 택시를 타고 京洞 큰길로 갈 때 운전기사의 나이를 보아 싸리재와 商業銀行 앞을 적당히 혼용하고 있다.

 

4 반세기浦洞 酒店街〈터진개〉, 龍洞 중심가큰 우물거리, 청과물시장 〈참이전거리〉는 花仙莊 뒷골목,吉病院 앞, 청과회사 앞길로 이름이 바뀌어 가고 있다. 〈긴담모퉁이 〉 와 〈배다리라는 특이한 지명은 시가지의 현황으로 보아 얼마간 명맥을 유지할 것 같으나 〈터진개〉, 〈큰 우물거리, 〈참이전거리〉〈참 이전거리〉같은 구수한 지명은 곧 흘러간 옛 지명이 될 운명에 놓여 있다.

 

稅關 (경찰국 옆 시멘스클럽부근)에 있던 仁川府 里程標를 기점으로 향수 어린 흘러간 옛 지명을 찾아볼까 한다. 경찰국. 뒤 해안 일대는 각지에서 실어 오는 볏섬을 받아 올리는 〈칠통마당〉이라 부르던 선창이었다. 개항 이래 1918년에 築港이 준공된 후까지도 번창했었다.

 

마당에 다닌다는 것은 당시 칠통마당에서 활동하던 米穀仲介人을 말하고 있었는데 한국 사람으로서는 가장 돈벌이가 좋은 직업이었다. 마당에 다니는 사람들이 紳商公社,客主組合,勸業所 등을 조직했던 것이다. 한때 黃金市場이었던 칠통마당도 지금은 仁川 內港도크의 한적한 안벽의 일부로 전락하고 있다.

 

築港(전 第1도크)으로부터 仁川女商 언덕 아래를 거쳐 고속도로 진입로 부근까지 매립해서 沙洞新興洞이 생기기 전에는 이곳이 바닷가였는데 <모래말>이라고 했다.

 

이곳에 力武精米所(高麗정미소), 加藤정미소(鮮京창고)日人들의 정미 공장이 모여 있었다. 한국 서민가정에서 온돌 연료로 이용하기 전에는 처치 곤란했던 왕겨를 바다에 내버리던 기막힌 광경을 목도한 사람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이곳에서 배로 실어온 화목과 구들돌, 맷돌 등 석물장사를 한 모래말 부자 李德煥이 말년에 柳洞에서 돈놀이를 하면서 적지 않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西쪽으로는 전 부두와 부두를 지나 大韓製粉공장이 있다. 매립 전에는 북성구지라고 부르던 바닷가였다. 月尾島 둑길이 축조되기 전에는 永宗,江華,長峯 등 가까운 섬에서 조그만 어선이 출입했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그 일대를 북성구지라고 불러왔는데 1938 년에 공장이 서고 나서는 제분공장 앞으로 변해 갔다.

 

露日전쟁 후 협소한 日本地界로부터 진출한 日人이 해안지대를 매립하기 전에는 萬石洞무네미라고 불렀다. 무네미의. 매립지는 계획했던 商街로는 실패했으나 후일 東洋紡績,日本製粉(大韓東洋紡績, 日本製粉(大韓제분 전신), 大成木材 등 공장지대로 발전했다.

 

芍藥島 통선선착장이 <괭이부리 (猫島)라고 부르던 구한말의 砲台자리다.

 

花平洞 큰길에서 工作廠 옆을 지나 바다로 흐르고 있는 큰 개천이 개발하기 전에는 큰 갯골이었다. 이 주변은 넓은 갈대밭 황무지였는데 이곳을 수문통이라고 했다. 1930년대에 商工會議所 會頭 吉田秀次郞仁川府와 제휴하여 이 일대를 매립하여 공장부지를 조성했다.

 

工作廠, 仁川製鐵, 韓國機械, 利川電機日本 군수공장이 설립되었고 매립으로 치부한 吉田松峴國民學校를 창립하는데 진력했다는 이야기가 남아 있다. 이 부근은 지금까지도 지대가 얕아서 큰 비에는 물난리가 날 정도니 이전에는 수문통은 水災의 중심지로 알려졌었다.

 

지금 신축 중인 자리에는 1916~61년 동안 屠畜이 있었다. 때려잡는다는 日語 다따구에서 와전된 <다데기간〉<다진 양념 간〉으로 불렸는데 언덕 아래의 논이 겨울이면 안성맞춤인 스케이트장이 되어 20년대부터 얼음을 타는 학생이 모여들었다.

 

濟物浦역 뒤 대지기〉 와 더불어 다대기간은 스케이트장으로 유명했다. 필자도 겨울방학을 다대기간에서 살다시피 한 덕택으로 大學시절에 아이스하키 선수가 되었었다.

 

善仁體育館 주변이 아담한 농가마을 숙골(禾洞)이고 壽鳳公園 진입로 일대가 도마다리로 부르던 道馬洞이었다. 이 두 동네가 통합되어 지금의 道禾洞이 된 것이다. 숙골과. 도마다리 일대에는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지고 중국인 채소밭이 펼쳐져 있어 참새, 콩새, 산새들이 많아서 툭하면 공기총을 들고 새 사냥을 다녔었다. 지금은 새 수효보다도 많은 집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숙골동산을 넘으면〈번저기〈 나루가 있는 朱安鹽田 갯고랑이 나온다. 갯고랑 넘어가<개건너라고 하는 西串이다.번저기 나루에는 나룻배 대신 웅장한 仁川橋가 걸려 있고 개건너 일대의 야산은 공장지대로 변하고 있다.

 

昌榮洞의 구명은 牛角里라고 했다. 현재 東仁川稅務署東仁川稅務署가 있는 언덕을 쇠뿔고개라고 불렀는데 內洞에서 싸리재를 거쳐 쇠뿔고개를 넘는 길이 옛 京仁街道였다. 철로가 개통한 후 쇠뿔고개는 양단되어 傳道館이 서 있는 언덕은 황굴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황굴고개는 崇義洞 로터리를 통하는 京仁도로가 생기기까지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公設운동장 앞 消防署가 있는 언덕에는 火葬場과 전염병격리병원 德生院이 있었다. 이 언덕 아래를 흐르고 있던 개천에 다리가 있었는지 이 근방을 독갑다리라고 불렀다. 독갑다리는. 서울의 시구문밖(水口門밖)같은 음산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

 

구시내에서 仁川邑內(官校洞)와 먼어금(玉蓮洞,東春洞)으로 들어가거나 도마다리에서 주안 그리고 번저기 나루를 건너 개건너로 가면 옛 지명이 흘러가지 않고 살아 있다.

 

흘러간 옛 지명을 찾아 구시내를 띄엄띄엄巡禮한 셈이다.

 

흘러간 옛 노래를 듣고 감회에 잠기는 사람은 많아도 홀러간 옛 지명에 향수를 느끼는 사람은 얼마 안 될 것만 같다. 헛된. 순례를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흘러간 옛 지명이 풍기는 토속적인 정감에는 흘려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中央路, 開港路, 萬花路도. 하지만 좀 더 구수한 정서적인 이름은 없을까.

 

1983.6.27 초판발행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