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의 옛모습

채미전거리

by 형과니 2024. 1. 6.

채미전거리 - 인천한세기 / 신태범

 

198265일자 京仁 7면에 '인천의 名所——開港이래 시장의 효시참외전거리가 없어진다는 제목으로동인천역 ~숭의동간 1.9km 의 도로가 1985년까지에 30~35m 로 확장된다는 지사가 실려 있었다.

 

6·25 동란 후 참외 시장이 사라진 이래 그래도 남아 있던 참외전거리라는 이름마저 이제 없어지게 된 모양이다.

 

이 거리는 동인천역에서 배다리 철로문을 통해 金谷洞 昌榮洞 松林洞으로, 청과회사 쪽으로 뚫린 샛길을 통해 龍洞 京洞 栗木洞 柳洞 그리고 배다리를 지나 桃源洞 崇義洞에 이르는 중요한 간선도로다.

 

1900 년에 京仁철도가 개통한 후 한국인 거주지역에서 杻峴(현 동인천)을 왕래하기 위해 생긴 길이었다. 당시 철로 양편은 논과 미나리밭이었다고 한다. 많은 남녀 기차통학생이 참외전거리를 이용했다.

 

당시 인천에 근교농촌이던 長意里(崇義洞), 道禾里(도마다리 현 道禾洞)와 가장 가까운 시내 요지였으므로 이곳으로 참외를 비롯한 청과물이 모이게 되어 이 길을 사투리로 채미전거리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910 년대까지는 인천에 이렇다 할 과일이 별로 없었다.근교농가에서는 벼와 보리농사가 위주였고 채소농사는 淸人이 맡고 있었다.

 

19 세기 말부터 일인이 소규모나마 과수재배를 시작한 것이 인천에 과일이 생긴 시초였다. 顯原(에바라)농원 (1897~1930,松林洞 東山학교자리)北浦농원 (1905~1945, 大憲학교)그리고 東山농원 (1908~1920,崇義洞 고급주택지)에서 배를 재배했다.仲野농원(1891~1920, 桃源洞 光星학교 일대)에서는 털복숭아를, 평산농원 (1904~1945,龍現洞 독쟁이 고개)에서는 사과와 벗지를 생산했다.

 

栗木공원 자리에 있던 徐丙義씨의 유일한 한국인 배밭은1902 년에 日人墓地로 팔렸고 일부 흔적은 최근까지 남아있었다. 좌우간 과일 생산은 미미한 상태였다.

 

1910 년대에 이르러 한국인 인구가 15천이 넘게 되어 재래식 일용물자의 수요가 급증했다. 따라서 여름철에는인천을 목표로 근교에서 참외재배가 성행했고 멀리 오류동에서까지 달기로 이름난 오리골 채미가 들어왔다.

 

참외 바리가 모여들던 곳이 바로 현재 채미전거리 철로변中央日報지국 뒤에 있던 미나리에 둘러싸인 기다란 습한 2백평 가까운 공터였다. 군데군데 1(1백개씩 쌓아올린 무더기가 즐비했고 바리에 실은 채 서 있는 황소도 있었다. 홍정은 바리 ( 나 접 단위였다.

 

거의 모두가 재래종 청채미고 간혹 속이 노란 감채미와 하얀 사과채미가 있었다. 사탕채미라고 하던 일본종 조그만 노란채미 (깅 막가와 개구리 채미 (성환참외)가 선을 보인것은 30 년대의 일이었다.

 

소가 일시에 십여 마리씩 들락거렸으니 물량도 상당했었다. 20~30 년대가 참외전의 전성기였다.

 

6·25 동란 후 농촌의 황폐로 재래종 참외가 멸종하다시피 되었다. 60년대에 지금도 있는 줄무늬가 있는 노란 일본종 銀泉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요즘 것과 달라서 달고 아삭거리는 맛이 일품이었다. 오죽하면 나일론참외란 귀한 별명이 생겼겠는가. 웬셈인지 요즘 것은 맛이 형편이 없고 그외의 몇 가지 참외와 참외의 사촌격인 멜론이 있는데 모두가 신통치 않다.

 

여름이 되면 청채미를 포식하면서 자라난 우리 세대는그 시절에 채미전거리에 버리다시피 흩어져 있던 청채미에 아련한 향수를 느낀다.

 

동란을 계기로 참외도 없어지고 채미전 터마저 판자집이들어서게 되어 허울좋은 거리 이름만 남게 되었다.

 

현재 채미전거리는 철로변에는 과일도매상과 농약 종자상이 빽빽하게 서 있고 건너편 청과회사 쪽에는 넓은 야채시장과 제수를 파는 모전, 고추 마늘 도매상이 즐비하게자리하고 있다.

 

채미전 대신 들어선 청과물시장 때문에 아직도 채미전거리는 명실공히 청과물 거래의 중심지로 군림하고 있다.

 

인천에는 닭전거리, 큰 우물거리, 채미전거리라는 제각기 특색을 가진 거리라고 부르던 번화가가 있었다.

 

닭전거리는 花仙莊에서 銀星다방을 거쳐 슈퍼마키트까지를 가로지르는 길 이름이었는데 이 길가에는 닭전,고기 가게, 과일전이 가즈런히 있었고 슈퍼마키트는 생선전이 모여 있는 魚市場이었다.

 

닭과 계란이 지금과 달리 강화도등 근해 도서와 충청도에서 배편으로 오기 때문에 선창에 가까운 터진개 (花仙莊뒤 일대) 어귀에 닭전이 자리를 잡았던 것 같다.

 

銀星다방 자리에 제일 큰 닭전이 있었다. 닭과 계란은 늘 있었고 겨울에는 참새 꿩 오리 그리고 간혹 노루 산돼지도 눈에 띄었다. 중학생 때 공기총을 가지고 참새를 잡으러 다녔었는데 많이 잡았을 때는 한마리에 3전으로 팔아한 통에 30 전 하던 총알을 사 쓰기도 했다.

 

그때 고맙게 대해주던 닭전 주인 裵用根씨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통제경제와 물자부족으로 40년대에 닭전은 폐업하고 그후 재건되지 않았다. 닭전거리란 이름은 해방과 더불어 사라지고 지금은 옛 노인 몇 사람에게나 통할 것이다.

 

병원 뒤 龍洞 사거리에 커다란 우물이 지금도 있는데 이 주변을 큰 우물거리라고 불렀다. 이 우물은 개항 이후 수도가 보급되기까지 오랫동안 龍洞 일대에 식수를 공급했었다.

 

우물이 생기자 이 근처에는 현재 음식점과 술집이 모여 있듯이 목로술집 방술집 국밥집 냉면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사람의 왕래가 빈번했다.

 

개항 이래 큰 우물거리는 술과 계집의 거리로 유명했던 곳이다. 앞으로도 이 거리는 유흥가로 발전하겠으나 큰 우물거리라는 토속적인 이름은 닭전거리처럼 곧 사라질 것 같기만 하다.

 

韓一은행 뒤로부터 큰 우물거리를 내려가면 별궁다방 동산치과를 지나 채미전거리로 빠지게 된다.

 

못미쳐서 바른편으로 꺾이면 가조원과 은행을 거쳐 역시 채미전거리로 나오게 된다.

 

싸리재 (京洞) 큰길에서 금성탕으로 내려서면 세 갈래 길로채미전거리에 이어진다. 큰 우물거리와 이 여러 골목에는채미전거리가 살아있는 동안 색주가가 흥청대던 내외주점이 밀집해 있었다. 한 순배에 50 , 10 순배면 색주가가 경품으로 붙던 그런 방술집이 30년대까지 우글거리고 있었던 곳이다.

 

닭전거리 큰 우물거리 채미전거리의 이름은 사라져가고 있지만 옛적과 다름없이 지금도 약동하는 서민생활의 중심지 구실을 하고 있다.

 

일전에 몇 친구와 함께 옛 모습을 잃게 된다는 참외전거리를 유심히 걸어보았다. 동인천역을 중심으로 뻗쳐있는 간선도로이니 만큼 버스와 택시가 붐비고 있었는데 또한 밤중에서 새벽까지는 대형트럭이 밀려든다고 한다.

 

인천시의 계획대로 철로변 일대의 건조물을 일체 철거하고 노폭을 확장하는 공사는 초급한 문제라고 충분히 수긍이 간다.

 

당시 채미전과 미나리논이 있던 채미전거리와 철로 사이에 터가 어떻게 변했나 하고 발을 들여 놓았다.

 

어느 지방이나 역전에 있게 마련인 젊은 여자들이 진을 치고 있는 수십개의 판자집에 가까운 여인숙이 독버섯처럼 꽉 차 있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복잡한 골목길을 물어가면서 간신히 동인천역 가까이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인천에 살면서도 처음 와보는 채미전거리 뒷골목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채미전거리는 채미전을 잃고 대신 얻게된 독버섯을 이번 기회에 일소하고 청결하고 우아한 인천직할시의 철로관문으로 재건되면 채미전거리란 이름이 역사적 명칭으로 돌아가는 한이 있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인천한세기 / 신태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