清舘 - 청관
이 글이 나가게 될 25일은 바로 음력 설날이다. 요즘은설날이래야 별다른 감흥도 없이 넘어가는 평범한 명절이되고 말았지만 우리가 어렸을 때 맞던 설은 지금과는 딴판인 가슴이 설레는 큰 명절이었다. 때때옷을 입고 새 신을신는 날, 떡국과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먹는 날, 어른을 뵙고 세배절을 올리고 예쁘다는 칭찬과 세뱃돈을 받는 날,아이들끼리 몰려다니며 실컷 노는 날. 일년에 한번 밖에 없는 꿈같은 날이었다. 어찌 기다려지지 않겠는가. 언제든지 필요할 때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요즘 어린이들에게는 상상조차 안되는 그러한 15일간이었다.
이뿐 아니라 仁川에서 자라던 어린이에게는 清舘의 설놀이라는 또 하나의 설잔치가 곁들여 있었다. 除夜놀이부터 시작해서 대보름날 元宵節에 끝나는 春節 15일간 淸舘은 온통 축제 분위기에 휩쌓인다. 꾀죄죄하던 옷을 벗고 깨끗한 설빔으로 새 사람처럼 보이는 淸人들이 큰 길을 서성댄다. 점포마다 문을 닫고 여러가지 迎春吉字를 쓴 빨간 종이를 문짝과 기둥에 붙이고 색등을 단다. 집안에서는 흥겨운 웃음소리와 요란한 꽹과리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온다.
해가 저물면 집집마다 긴 장대 끝에 불딱총(爆竹)을 수백개씩 매달아 놓고 불을 당긴다. 번쩍이는 불꽃과 총알이 터지는 것같은 폭음이 쉴 사이 없이 눈과 귀를 놀라게 한다. 웅성대는 清舘 의 밤거리의 소용돌이를 헤쳐가면서 서성대던 어린이들의 황홀한 기분은 요즘 어린이들이 칼라텔리비젼에서 전쟁영화를 보는 이상이었을 것만 같다. 이른 아침에 동네 악동들과 길가에 흩어져 있는 불발탄을 주으러 가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였다. 조끼 주머니에 가득히 줍는 날에 느끼던 승리감과 집에 돌아가서 터뜨릴 기대감은 대단했다.
대보름날에는 元宵節이라 하여 春節의 클라이막스를 이루는, 시내 대로를 누비는 축제행렬이 있었다. 舞龍이라는 춤추는 용을 중심으로 악대가 따르고 그 뒤에는 <꼬우처 오(高曉)〉라고 부르는 높은 나무다리를 타고 활보하는「三國志」와「西遊記」의 주인공들로 분장한 가장인물 수십 명이 행진을 한다. 당시에는 이 이상 가는 호화찬란한 구경거리는 없었다. 이러한 春節놀이도 1931년에 터진 滿洲事變 전에 자취를 감추게 된 것 같다.
淸館 이란 공식지명이 아니라 한국 사람이 부르던 淸國地界에 대한 통칭이었으며 地界가 폐지된 후에도 이 이름은 계속 사용되었다. 淸國地界는 日本地界와 各國地界에 둘러쌓인 약 5천평의 해변 구릉지대였다. 日本地界와는 현 中央洞과 선린동 사이에 있는 中華樓를 거쳐 <한국회관>에 이르는 언덕길이,各國地界와는 <한국회관>으로부터 中國基督敎會를 지나 오림포스호텔 후면에 이르는 언덕길이 경계선이었다. 善隣洞을 淸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언덕길 사이를 東西로 가로지르는 세 개의 큰 길을 중심으로 시가지를 형성했고 지금 北城洞사무소가 있는 대로가 바로 淸舘의 번화가였다.
이 길에는 1885년에 駐韓總理로 부임한 袁世凱를 따라 들어온 同順泰를 비롯해서 合東・誌興東・東和昌・同順東등 淸國거상들의 광대한 점포가 즐비하게 서 있었다. 벼랑에 붙여 지은 건물이라 도로변은 2층이었으나 후면으로는 5~6층이 되는 고층건물이었다. 6.25 동란 때 파괴되어 지금은 없어졌지만 각국지계 언덕 위에 서 있던 존스톤 別莊,英國領事館,世昌洋行宿舍,吳禮堂 등 우아한 洋과 조화를 이루고 있던 淸 일대는 외항에서 전망하면 아름다운 한폭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뒷길에 있는 淸國領事館이 쓰던 넓은 건물은 華僑學校,華僑自治會,華僑商會 등이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客棧(여관), 잡화상, 음식점, 이발관, 浴池(목욕탕), 주택 등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淸館은 이름 그대로 淸人만이 사는 淸人 마을이었다.
1895년에 日本에 패전하기 전에는 한국에 대한 淸國의 영향력이 막강하여 大國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개항 후 이미 淸日간의 경제전쟁이 仁川港을 무대로 불붙고 있었다. 人口는 日本의 삼분의 일에 지나지 않았으나 무역분야에서는 근해 연안에서 자행하던 밀무역을 합산하면 단연 日本을 압도하고 있었다. 1887년 무렵에는 淸에서 넘쳐 흐른 淸 人이 內里(현 內洞)와 外里(현京洞) 일대로 진출하여 華商을 차렸다. 지금은 平和閣과 永豊樓만이 남아 있으나 1931년에 만보산事件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십여 개의 화상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淸國은 日本을 앞질러 1885년에 서울-仁川, 서울一義州간에 電信線을 가설하여 한때 仁川의 日人은 本國에 보내는 전보를 仁川,서울,義州,天津,上海,長崎를 경유하는 선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다급했던 日本은 기어이 淸日전쟁을 일으켰고 10년 후에는 露日전쟁을 거쳐 드디어 한국을 합방하기에 이르렀다.그후부터 仁川港은 완전히 日本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으나 그래도 淸館에 뿌리를 내린 淸商들은 끈질긴 기반과 뛰어난 상술을 가지고 꾸준히 버티어 나갔다. 韓鹽海運의 전용부두였던 鹽埠頭 앞바다에는 30년 무렵까지 짱크 (戎)라고 부르던 독특한 모습을 한 검은색 중국 풍선이 출입하고있었다. 山東지방에서 가져오는 天日鹽(胡鹽), 고추, 잡곡,지물류를 풀고 乾魚,海蔘, 새우살, 조갯살 등 해산물을싣고 갔다. 그러던 중에 1937년에 中日전쟁이 일어나면서淸館의 상권은 완전히 마비되고 말았다.
20년대부터 淸館은 淸料理로 유명했다. 지금도 오림포스호텔을 마주 바라보며 의연하게 서 있는 고색이 짙은 共和春, 작년에 헐린 中華樓,東洋石油 주차장자리에 있던 同興樓(松竹樓 전신) 등은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일류 청요리집이었다. 그중에서도 中華樓에는 北京에서 온 周師父라고 부르던 일급 주방장이 있어 정통 北京요리로 유명했다.겨울철에 사용하는 白銅 중탕식기와 구리로 만든 백알병은인상적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大觀園(觀水洞)과 金谷園(小公洞)이 있었을 뿐 청요리는 대단치가 않았었다. 서울 사람들이 淸館의청요리를 먹기 위해 仁川으로 원정을 오는 일이 유행처럼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제 청요리가 중국요리로 이름이 바뀐만큼 요리도 많이 변했고 먹는 사람도 달라져서 仁川의 청요리 자랑도 먼 옛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北城洞의 吳炳憲동장과 오랜만에 淸일대를 더듬어 보았다. 옛 모습을 찾기 힘들만큼 모든 것이 변모하고 있었다. 바다를 향한 거상들의 점포가 서 있던 언덕은 함포사격으로 파괴된 폐허 그대로였다. 오림포스호텔 후면에 Chemulpo Tabacco Co. 라는 이색적인 英상호가 페인트로 써 있던 英美煙草會社의 오래된 벽돌건물은 華僑학교 기숙사로 변했고, 전대로 남아 있는 건물이라곤 지금 壽亭이 자리하고 있는 서양 식료품상점 義生盛과 共和春 뿐이다. 몇 집 남지 않은 퇴락한 2층집에는 여전히 중국 사람들이 소리없이 살고 있다.
해방 후에 개정한 善隣洞이란 淸舘의 동 이름도 北城洞 제5통으로 흡수되었고, 2천명이 넘던 淸人이 들끓던 이지역에 지금은 5백여명이 살고 있을 뿐이라 한다. 현재 전국 화교인구가 약 3천명이라고 하니 태반이 각처에 흩어져살고 있는 셈이다.
淸館의 옛 이야기를 들으려고 3대째 이어 내려오는 共和春의 于鴻章주인을 찾았더니 台灣 여행중이라서 華僑協會를들렀다. 40대로 보이는 회장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옛 일을 모르고 있어 몇 가지 현황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젊은세대는 거의 台灣에서 일하고 있거나 美國과 東南亞로 진출하여 의사, 전문기술자, 학자로 활동하고 있고 남아 있는사람은 늙은이와 무기력한 젊은이 뿐이라고 한다. 그중에서 특색있는 한 사람을 소개받았다. 台灣의 본토인 2천만,東南亞의 화교 2천만 도합 4천만이 되는 실향민의 심금을울리고 있는 歌謠「梅花」와 國歌 다음에 부르게 되어 있는「中華民國頌」을 작사 작곡하여 부르고 있는 요즘 자유중국가요계의 제1인자로 꼽히는 劉家昌씨다. 그는 淸館 共和春 옆집 共和棧에서 태어나 유별나게 좋아하던 한국 아이들 사이에 섞여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대만으로 유학을갔다가 음악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자랑할 만한 일이고 淸館출신이라 하여 나까지 덩달아 흐뭇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淸館 은 사람도 건물도 오랜 비바람으로 풍화되어가고 있다. IO0년의 역사를 가진 淸館도 머지않아 活字로만 남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새삼 滎枯盛衰라는 엄숙한 역사의 원칙을 되씹게 된다.
설날의 블딱총 소리가 귀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듯한 환상을 안은 채 옛淸國領事 자리를 지키고 있는 華僑協會에서 씁쓸한 마음으로 빠져나왔다
글쓴이 인천 한세기 - 신태범
# 이 글은 1982년1월4일부터 1983년 3월9일에 이르는동안
44회에 걸쳐 경인일보에 연재한 글을 모아 엮은 글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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