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작가와 함께 걷는 인천 길 - 이순향 여행작가
https://youtu.be/kaDKXH8Oh0g?si=TMLXrqv0kwlr49HA
답사 코스 :
인천역(1번출구 광장) -- 축항선과 철로 —- 하인천어시장 -— 대한제분 -- 연초회사 -— 중부경찰서(부두_첫 수녀도착지) -- 하버파크호텔(미군기지) 마루보시사택자리 - 신흥초등학교 -- 청일조계경계계단 — 복림원(작가의 집_중앙동1가19번지) -- 일본조계지 -- 자유공원(맥아더장군 동상) -- 청국조계지(중국인거리) -- 인천역
참가회원 : 여행작가 온새미님(이순향) 카페지기님, 사과님,괜찮아님, 그루터기.
참고 도서 : 중국인 거리_오정희_1979
작가 오정희 :
1947년 서울 사직동 출생(77세). 이화여자고등학교.
1970년 서라벌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1968년 대학2학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등단.
주요작품 : 저녁의 게임, 유년의 뜰, 동경, 옛우물 등 다수
작품 배경 : 1955년~1959년 인천
작가의 말 : 인천 차이나타운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한다. ‘내가 무엇인가’라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될 때면, 이곳 중국인 거리에 살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고 한다.
1. 축항선과 철로 (폐허 속 아이들의 놀이터)
1959년 축항선 개통. 석탄과 건축 자재등을 전국 각지로 수송. 현재는 폐선.
소설 속 첫 시작을 알리는 장면
[시를 남북으로 나누며 달리는 철도는 항만의 끝에 이르러서야 잘렸다]
전쟁 직후 폐허가 된 인천, 그리고 궁핍했던 사람들. 이는 어린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아이들의 모습은 처참하지도 처량하지도 않다. 배고픔에 굶주린 아이들은 화차의 바퀴 사이로 기어들어가 조개탄을 훔쳐낸다.
아이들에게 이것는 배를 채우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놀이이기도 하다.
훔친 조개탄은 가락국수, 만두, 찐빵, 군고구마, 딱지, 사탕 따위가 되기도 했다.
2. 하인천어시장 (어머니를 향한 사랑으로 달려가던 곳)
1900년대초부터 어시장 역사 시작. 1890년 서울에서 인천으로 내려온 정홍택씨 형제가 신포동 부둣가에 어물전을 짓고 수산물 도매시장을 설립했고, 1900년 초부터 인천 해안 매립 공사 시 작되면서 어시장 활성.
1936년 어업조합연합회로 흡수되어 북성동 하인천 부둣가로 옮겨 옴.
1975년 연안부두 인근으로 옮기면서 지금의 인천종합어시장 탄생 함.
어린 ’나‘는 어머니가 제발 동생을 그만 낳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매일 아침 부두로 간다. 입덧이 심한 어머니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싱싱한 굴과 조개뿐이였기 때문이다. 어린 ’나 가‘ 찾아가던 하인천어시장은 지금의 인천역 뒤편과 대한제분 사이에 있는 우회고가교가 있던 곳이다.
3. 대한제분 (폐허 속 아이들의 놀이터)
1935년 일본제분주식회사. 1952년 대한제분주식회사.
유엔은 6.25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대한민국에 경제 분야의 원조를 실시. 밀은 식량과 곡물 원 조의 많은 양을 차지.
원조 받은 밀로 식량을 만들기 위해서는 밀은 밀가루로 만들기 위한 시설이 필요했다. 밀가루를 가공하여 민족의 배고픔을 해소하겠다는 사명을 갖고 창립한 제분 공장으로 인해 소설 속 아이들도 배고픔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폐허가 되고 모든 사람들이 굶주렸던 1950년대이지만 그 속에서도 아이들은 도시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아이들의 뜀박질이 곧 인천의 생명력이 되고, 그렇게 성장한 아이들이 곧 인천의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의 인천을 만들어 낸 1950년대의 모든 인천 사람들에게 위로와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4. 부두 (첫 선교수녀 도착지 기념비) 서양 종교가 첫 발을 디딘 곳
1888년 샬트르 성바오로수녀회에서 4명의 수녀 파견. 120주년 기념 2007년 비석 건립.
서양문물이 드나드는 관문의 역할을 했던 인천은 서양의 종교가 가장 먼저 발을 디딘 곳이기도 하다.
1885년 아펜절러 부부와 언더우드 선교사 인천 처음 도착. 1889년 제물포성당 건립(답동성바오 로성당)
미군 부대 테니스코트에서 죽은 고양이 시체를 들고 다리던 아이들이, 고양이 시체를 던졌던 부두일 것으로 추정된다. 소설 속에서 성당의 종소리가 들린다. 아이들은 성당의 종소리를 들으며 수녀의 죽음을, 그리고 죽은 고양이를 떠올린다. 또 어머니를 잃는 제니가 가게 된 성당의 고아원도 답동 성당의 고아원이다. 1950년대 말 답동성당은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꽤 많은 혼혈 고아들이 답동성당 고아원에 맡겨졌다고 한다.
오정희 작가도 학교 재학생의 10퍼센트 정도가 고아원에 사는 아이들이었으며, 버려진 혼혈아이들이 고아원에 몰렸다고 회상한다. 작가는 여전히 성당의 종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2014년 방문시) 아픈 상처를 지닌 인천의 아이들을 돌보고 위로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 당시 답동성당과 그 종소리였던 것이다.
5. 미군기지 (6.25 전쟁의 흔적)
1945년에 인천항에 상륙했던 미군은 인천항과 월미도에서부터 부평까지 미군기지 벨트를 형성하 였다. 주한미군의 가장 오래 주둔지인 인천을 배경으로 한 만큼 소설 속에는 미군과 미군 부대 의 모습이 곳곳에 등장한다. 지금의 인천항 부근에 미군 부대가 있었으며, 현제 베스트웨스턴 하 버파크호텔 자리 부대 내 테니스코트가 있었다.
PX에서 암암리에 나온 미제 물자는 시중으로 흘러들어가 양키시장을 형성.
아침에 치옥이네 집에 가면 양공주인 매기 언니와 함께 있는 흑인 병사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미군 부대의 테니스코트에서 칼 던지기를 하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을 마음 졸이며 구경하기도 한다.
미군 부대와 공생하는 사람들의 삶은 달콤하면서도 서글프다. 매기언니의 비스킷을 몰래 꺼내 먹고, 향수를 뿌려보는 치옥이는 ’양갈보가 될 거야‘하는 말을 되풀이하며 매기 언니와 같은 삶을 꿈꾼다.
미군부대는 전쟁 직후 궁핍했던 인천 서민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 인천의 역사에도 미군에게 살해당하거나 다치는 일을 겪었던 수많은 ’매기언니‘가 있고,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보육원에서 자란 수 많은 ’제니‘가 존재한다. 부인할 수 없는 인천의 아픈 상처이다.
6. 청일경계계단
1884년 청국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일본조계지와의 경계에 자연스러운 경사로였던 공간에 후일 계단 설치
140년 역사를 간직한 계단은 중국과 국교가 수립되고 청국조계지 일대가 관광특구로 지정되며 새롭게 정비, 역사성과 장소성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1호로 지정. 소설 속 ’나‘와 친구들의 자유공원을 가기 위하여 언덕을 오르던 계단이다.
7. 복림원_작가의 집 (작가의 유년 시절을 품은 곳)
중앙동1가 19-1번지, 현재는 복림원이라는 중식당으로 운영
해인초 냄새를 맡으며 중국인 거리 곳곳을 누비던 어린 오정희 작가의 집이다.
2014년 인천을 찾았던 오정희 작가는 옛집의 모습을 살펴보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었다. 조금만 걸어가면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돼지고기를 사러 가던 푸줏간도 있다. 현재의 청화원이다. 중국인 가게들이 있는 언덕의 초입에 있는 곳이라는 작품의 표시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카페였다가 중식당으로 바뀐 현재의 복림원에서 오정희 작가가 살던 과거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복림원의 식탁에 앉아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상상해 보자. 주방으로 들어가는 저 좁은 통로가 혹시 오정희작가가 뛰어 들어가던 골방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을까?
미군 병사에게 살해당하고, 중풍으로 죽고, 차라리 죽여 달라고 울부짖으며 여덟 번째 아이를 출산하는 전쟁 직후의 불행한 여성들 틈바구니 속에서 ’여성‘이 된 자신을 확인했던 어린 소녀의 그 골방.
오정희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중국인 거리>속 어린 자신을 다시 만난다면 ”뚜벅뚜벅 걸어가 봐. 네 마음대로 가 봐. 많이 슬퍼하고 많이 아파하고 그래도 괜찮아.“라는 말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어두운 벽장 속에서 절망감과 막막함을 느꼈을 어린 소녀가 여기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오정희 작가의 말을 속으로 되뇌어 본다.
8. 자유공원 (어린 소녀의 마음을 위로하는 곳)
1888년 각국조계 각국공원 조성. 1914 조계폐지 서공원으로 불림. 1945년 해방 만국공원.
1957년 인천상륙작전 7주년 기념, 맥아더 동상 세워지며 자유공원으로 개칭.
작가의 옛 집터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계단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면, 인천 시가지 전체를 내려 다 보이는 곳이다. 소설 속 ‘나’가 아이들과 놀러가던 곳이며, 할머니와의 이별, 인생에 대해 생 각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다음 날 나는 아무도 몰래 반닫이를 열고 손수건 뭉치를 꺼냈다. 그러고는 공원으로 올라가 장군의 동상에서부터 숲 쪽으로 할머니 나이 수대로 예순다섯 발짝을 걸어 숲의 다섯 번째 오리나무 밑에 깊이 묻었다]
어린 ‘나’가 치르는 나름의 장례식이자 할머니와의 기억을 간직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린 ‘나’는 자신의 성장을 체감한다. (2년 뒤에는 예순 걸음도 걸리지 않았던 것) 자신의 성장을 깨닫고 바다를 바라보며 어린 소년는 ‘인생이란......’이라는 말을 중얼거린다.
할머니의 유품을 묻은 오리나무를 찾는 기준점이 되었던 동상이 자유공원의 맥아더장군 동상이다.
--> 70년 전 이렇게 걷던 한 소녀는 이제 ‘혼란에 가득 찬 어제와 오늘과 , 수없이 다가온 내일들을 뭉뚱그릴 한마디의 말을 찾았을까요?
9. 중국인 마을 (진정한 만남과 어울림의 공간)
1884년 청국영사관이 설치되면서 본격적으로 형성. 치외법권의 청나라 조계지. 1910년경 인구 1만여 명.
6.25전쟁 후 한국과 중공이 단교하며(1992 중국수교) 화교는 한국 사회에서 외면과 차별.
외국인 부동산 소유제한, 1957년 무역법(화교상인 대외무역 어려움), 1953,62년 화폐개혁(현금 보유 화교 큰손실) 1970년대에 20만명 이상 한국화교들 외국으로 이주
소설 속 중국인 마을의 모습은 지금의 번화한 모습과 사뭇 다르다. 소설 속 중국인 거리는 한국 사회로부터 완벽하게 고립되어 있는 타자의 공간이다. 당시 차이나타운은 한국인과 미국인, 중국인, 혼혈아 등 다양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지만, 작품 속 인물들은 중국인들을 향한 거부와 차별의 태도를 보인다. (뙤놈들, 오랑캐, 밀수업자, 아편쟁이, 백정)
그러나 작품은 어린 ’나‘와 ’이층집 젊은 남자‘의 만남을 통해 차별을 넘어서 새로운 만남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어느 순간 자꾸 마주치는 젊은 남자를 보며 ’나‘는 알지 못할 슬픔을 느낀다.
[나는 골방에 들어가 문을 잠근 뒤 종이 뭉치를 끌렀다. 속에 든 것은 중국인들이 명절 때 먹는 세 가지 색의 물감을 들인 빵과, 용이 장식된 엄지손가락만한 등이었다. 나는 그것들을 금이 가서 쓰지 않는 빈 항아리 속에 넣었다.]
타지에 사는 이방인으서 겪는 젊은 남자의 아픔과 성장기의 성숙을 겪는 ’나‘의 아픔이 서로를 위로하는 장면이다.
이 둘의 눈빛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에는 다른 국적도, 다른 언어도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만남만이 존재할 뿐이다.
차이나타운은 이제 주말만 되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공존하는 공간이 되었다. 소설 속 ’나‘와 젊은 남자가 그랬듯 다양한 모습을 지닌 사람들이 마음과 마음으로 소통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10. 인천신흥초등학교 (작가 오정희의 탄생)
1884년 아사히소학교(사정심상학교)로 개교. (일본인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
1946년 인천신흥국민학교로 개교
오정희 작가는 초등학교 2학년부터 5학년까지 약 4년을 다녔다.
학교 역사관(별관 2층) 벽면을 가득 메운 사진들 속 어딘가에는 오정희 작가의 발자취도 남아있 을 것이다.
소설 속 어린 ’나‘는 매일 아침 치옥이를 기다려 학교에 간다.
운동장을 둘러보면 학교 숙직실에서 아이들 몸의 탄가루를 씻기는 담임선생님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 아침을 먹지 않아 빈속인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가 선생님이 주는 회충약을 먹고 있을 것 같다.
오정희 작가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난생 처음으로 글을 잘 썼다는 칭찬을 받고 글쓰기에 재미를 붙이며, ’글 잘 쓰는 아이‘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해(1956년) 작가가 경기도 백일장에서 쓴 산문이 특선으로 뽑히고, 이 후 작가는 소설가의 꿈을 꾸기 시작한다.
1956년 인천신흥초등학교에 근무하며 오정희 작가의 글쓰기 솜씨를 알아봐 준 그 담임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오정희 작가가 있었을지 생각해 본다.
11. 마루보시사택 (일제 강점기 노동자들의 휴식처)
1920년 이후 조선의 하역운송업을 도맡아 했던 조선운송주식회사 마루보시(환성). CJ대한통운 주식회사의 전신
조선운송주식회사의 노동자들이 살던 집. 부두 하역 작업에 투입되었던 노동자들의 집. 인중로 164번길에 있는 이곳은 도시 환경 정비사업으로 인해 철거 예정이다.
오전반 수업이 끝나고 하교하는 두 소녀의 발걸음을 따라 가면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의 아름다운 담벼락으로 이어진다. 팔판로라고 불리웠던 담벼락 길을 쭉 따라 걷다보면 골목길에 위치한다.
인천으로 이사 온 어린 ’나‘가 이른 새벽의 집 앞 골목에서 처음 맞닥뜨린 것은 부두로 해물을 받으러 가는 장사꾼, 그리고 제분 공장으로 향하는 노무자들이었다. 개항 이후 커다란 중공업단지가 조성된 산업도시로 변모한 인천은 어느 지역보다도 일찍 노동자 계층이 형성된 도시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 노동자의 애환을 담고 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등교하는 [중국인 거리] 속 ’나‘와 치옥이가 출근하는 이 집의 노동자들과 스쳐 지나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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