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누구나 학창시절이 있지만,
모두가 같은 시절을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변하는 세월 속에서
사람들의 추억은
어떻게 변해왔을까요?
국민학교와 초등학교, 그 변화와 의미
글 김 대식 / 경인교육대학교 교수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에는 나름의 서사가 담겨있다 초등학교라는 명칭도 나름의 서사를 담고 있다. 나는 우리에게 익숙해진 초등학교라는 이름을 낯설게 만듦으로써 그것이 가진 서사를 회상하고자 한다. 이 회상 작업은 현재 우리 교육과 학교, 그리고 교육제도에 대한 성찰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학습자들의 학습을 돕는 학교가 존재해 왔다. 그리고 국가는 이런 학교의 보급과 유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다만, 조선시대까지는 주로 아동보다는 성인 대상의 학교가 국가의 관심사였다. 15세 이상이 된 이들은 국가가 제공하는 향교, 사학, 성균관 등에서 수학하며 학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15세 미만 아이들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이들은 가정이나 지역의 서당 등에서 학습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당시 15세 미만 학습자들의 학업 참여는 의무도 아니었고, 개인적 선택 혹은 가족의 선택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다.
19세기말부터. 서유럽과 미국식 교육이 선교사 등을 통해 조선사회에 알려지면서, 새로운 교육 제도가 출현하고 있었다. 아이들 대상의 학교 제도와 교육 방식 역시 선교사들에 의해 소개되었다. 인천도 매우 일찍 선교사들에 의해 서구식 초등 교육이 싹텄다. 19세기 말 인천 내리 교회에서는 영화학당이라는 초등 교육시설을 설치하여 아동교육을 진행하였다.
조선 정부 자체의 새로운 교육 체제 도입 노력도 새로운 아동 교육 확대에 이바지하였다. 조선 정부는 소학교(小學校)라는 이름의 초등 교육기관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소학교는 새로운 용어처럼 보이지만, 사실 새로운 용어는 아니었다. 조선시대까지는 아동교육을 담당하는 학교를 소학(小學)이라 부르는 관행이 있었다. 갑오개혁기 고종 황제는 6년제 소학교를 법제화하고 소학교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후 전국에 소학교가 만들어졌고, 소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로 한성사범학교의 설립도 이루어졌다. 소학교라는 용어는 이전의 교육 전통을 계승하면서 근대적 색채를 가미한 표현이었다.
그러나 소학교라는 초등 교육기관의 명칭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1905년부터 일본제국의 간섭이 노골화하면서, 소학교라는 명칭은 보통학교로 바뀌고 말았다. 이 변화는 단순한 명칭 변경으로 보이기 쉽다. 그러나 보통학교라는 용어는 소학교라는 용어와 다른 의미를 내포하였다. 보통학교는 보통의 교육 곧 누구나 같은 수준의 교육을 뜻하지만, 다른 면으로는 보통학교 이후의 교육은 필요 없다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었다. 소학교라는 표현이 다음 단계의 교육 곧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에 대한 요구를 함축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실제로 일본은 총독부를 설치해 조선을 강제로 유지하는 상황에서 조선인들의 고등 교육과 중등교육 기회를 최대한 제한하는 정책을 유지했다. 보통교육 역시 일본 총독부 입장에서는 제한의 대상일 뿐 확대나 지원의 대상이 아니었다. 일본은 보통학교의 교육 기간을 이전보다 축소하는 정책을 필 정도였다. 통감부 시기 이후 조선의 보통학교 교육 기간은 4년으로 단축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낮은 수준, 짧은 기간의 보통교육이 일제 교육 당국의 방침이었다.
한면 일본제국은 군국주의를 노골화하면서 조선의 초등교육 기관 명칭을 일본과 동일한 명칭으로 변경하였다. 조선의 보통 학교를 일본 초등 교육기관의 명칭과 동일하게 소학교로 변경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1941년부터 일본에서 소학교 대신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총독부는 조선에서도 1943년부터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하였다. 일본과 조선에서 국민학교는 황국신민의 학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학교 명칭을 일본과 조선이 동일하게 바꾸었지만, 일본과 조선의 초등 교육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일본이 초등단계 교육을 의무교육으로 시행하고 있던 것과 달리, 조선에서는 초등 교육을 의무화하지 않았다. 일본은 20세기 초, 초등단계 교육의 의무화가 완성되었지만, 총독부는 1945년까지 조선에서의 초등단계 교육 의무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 국민학교로 명칭을 변경해 황국신민의 도를 교육 현장에서 강요하면서도 조선의 학습자들에게 의무교육이나 무상교육원칙을 적용하지 않았다. 조선의 학습자들은 자비로 황국신민이 되는 교육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 극적인 변화를 불러온 것이 광복이었다. 광복 후 한국 사회는 새로운 교육을 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미군정 통치 아래 남한에서는 미국식 교육을 참고하면서 새로운 교육을 준비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다른 사회 분야와 마찬가지로 당시 교육계에서도 일제 잔재 청산이 화두가 되었다. 일본의 전체주의 교육과 비교육적 교육에 대한 비판과 극복이 교육관계자들 사이에서 논의되었고, 새로운 교육으로서 민주적 민족적 교육을 표방하는 새교육을 추구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일제강점기까지 제약됐던 교육 기회의 확대가 진행되었다. 해방 후부터 적어도 초등 교육은 의무화한다는 방침이 교육 당국의 핵심정책이 되었다. 사실 초등교육의 의무화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육 원칙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교육에 대한 논의 중에 빠진 잔재가 있었다. 그것은 국민학교라는 초등 교육기관의 명칭이었다. 인제 잔재 청산 속에서 국민학교라는 이름은 잔재로 인식되지 못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국민이라는 표현이 가진 익숙함 탓일지 모른다. 일본은 패전 후, 초등 교육기관의 명칭을 국민학교에서 소학교로 변경했는데도 말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교육 당국은 학교 명칭 변경보다 교육 기회 확대에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전쟁이 있었음에도 초등단계 교육의 의무화 사업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초등단계 교육의 의무화는 일사불란한 국가사업으로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1959년에는 취학아동의 국민학교 취학률이 96%에 이르는 성과를 거두었다. 1960년대에도 학교 신설 및 학급 증설 등의 교육 투자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학급당 학생 수를 60명 이하로 줄이려는 계획은 쉽게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후에도 교육의 질보다 양, 곧 취학률 증대에 초점을 두는 시대가 계속되었다.
일제 잔재 청산 분위기가 다시 고조된 것은 광복 50주년을 맞으면서였다. 군사정권을 청산하고 출범한 문민정부는 광복 50 주년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다. 정부 차원에서 일제 잔재 청산을 선언하였던 것이다. 일제 잔재 청산의 상징적 이벤트는 조선총독부 건물의 철거였다. 조선총독부는 1995년 당시 경복궁 바로 앞쪽에 위치하여 북한산과 경복궁을 가리고 있었다. 이 건물은 해방 후 한동안 정부 청사로 쓰이기도 하였지만, 문민정부 당시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정부는 조선총독부 건물은 철거하기로 하고, 광복 50주년 기념일 인 1995년 8월 15일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시작했다. 일본과의 관계나 반발을 염려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한국 사회의 전반적 분위기는 총독부 건물 철거에 찬성하는 것이었다. 관련 여론조사에서도 정부가 국정을 잘하고 있다는 평가가 이어졌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여론의 주목을 받은 또 다른 일제 잔재가 있었다. 그것은 국민학교라는 잔재였다. 일상에 너무나 깊숙이 그리고 친숙하게 자리 잡고 있던 국민학교라는 이름에 대해 잊혔던 서사가 부각되었다. 국민이. 사실은 황국신민의 줄임말이라는 것. 그리고 해방 후에도 이 이름을 한국사회가 부지중에 사용하면서 제대로 된 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
교육부는 국민학교 명칭 변경을 결정하고, 국민학교 명칭 변경 공청회는 1995년 4월 20일 오후 4시 서울 YWCA에서 진행했다. 공청회 발제를 맡았던 서울대 신용하 교수는 국민학교 명칭의 대안으로 1. 초등학교, 2. 기초학교,3. 어린이학교,4. 새싹 학교, 5. 소학교를 제시하고 각 명칭의 장단점을 논의했다. 그는 초등학교라는 명칭이 초등 교육, 중등 교육, 고등 교육의 3 단계 방식에서 초등교육을 담당하는 학교라는 의미와 완전히 합치하는 것을 장점으로 들었다.
한편 소학교라는 명칭에 대해서 본래 갑오개혁기에 사용했다는 장점이 있다는 전문가도 있었다. 하지만 일제 잔재를 일소하려는 의도로 하는 사업인데, 현재 일본에서 사용 중인 표현을 똑같이 사용하면 일재 잔재 청산의 의의가 약화된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후 교육부는 일반인 1,600여 명에게 국민학교를 대체할 수 있는 적절한 명칭에 대한 설문 조사를 실시했고, 그중 가장 많은 선택을 받은 이름이 초등학교였다.
“교육법 개정에 따라
1996년 3월 1일부터 초등학교 명칭을 공식 사용하게 되었다.”
1995년 8월 11일, 박용식 교육부 장관은 공식적으로 국민학교 명칭 변경을 선언했다. 그는 "일제 잔재를 깨끗하게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라고 국민학교 명칭 변경 목적을 밝혔고 새로운 학교 이름을 초등학교라고 명시했다. 이에 따라 각 국민학교의 간판, 직인, 교기 교체 사업이 진행되었다. 약 21억 원 정도가 소요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되어간다. 그런데 나는 초등학교라는 이름을 우리 사회가 채택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대신 소학교라는 이름을 채택했으면 어떠했을까? 우리가 근대교육을 시작하면서 처음 사용한 학교 명칭이면서 동시에 조선시대까지 아동교육 전통의 맥을 잇는 표현이지 않은가,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를 통해 우리가 경복궁이라는 우리의 전통을 부활시켰듯이, 국민학교를 대신하여 조선시대와 근대화의 맥을 잇는 소학교리는 표현을 부활시켰으면 어땠을까? 그렇게 되었다면, 일제 잔재 청산을 통한 전통의 복원이라는 서사를 초등 교육기관의 명칭에 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출처 박물관풍경 / 2024년 봄호 – VOL.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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