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의 종과 우리탕
인천의관광/인천풍경
2007-02-20 04:19:22
성당의 종과 우리탕
중구 답동 소재 천주교 인천교구 성 바오로 대성당 종신(鐘身)에 중국인 우리탕(Woo Li Tang, 吳禮堂) 씨 부부의 이름이 쓰여 있다는 내용이 실렸었다. 최근 성당 종탑 보수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 이들 부부의 이름자 위에 덮여 있던 한 세기의 먼지가 우연히 걷혀진 것 같다.
우리탕이라면 알려진 대로 영어와 스페인어에 능통한 외교관 출신의 청국인으로 구한말 최초로 우리 보빙사가 미국에 갈 때 역관으로 동행했던 인물이고, 그의 이름 옆에 쓰여 있다는 에밀리아 우리탕은, 그가 스페인 마드리드 주재 자국 공사관에 근무할 때 결혼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스페인 출신 부인일 것이다.
우리탕은 또 인천해관 역관으로도 오래 동안 근무하면서 많은 토지를 소유하기도 했던 부호로서 그의 부인이 늘 대저택을 갖기를 소원하여 1909년, 중구 송학동 2가 16번지에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매우 우아한 저택을 지은 사람이다. 이 저택이 이른바 오례당이라고 우리식 한자 발음으로 부르던 집인데 우리탕의 이름 끝 자가 집 당(堂) 자여서 그렇게 지칭했던 것이다.
소실직전의 오례당
이런 연유로 해서 우리탕은 인천사(仁川史) 한 귀퉁이에 이름을 올린 인물인데 관련 어느 부분에도 그가 구교 신자였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가 근무했던 나라가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인 데다가, 부인이 또 거기 여성이었으니 이미 공사관 근무 시절 자연스럽게 천주교에 입교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따라서 답동 성당이 건축될 때 몇 안 되는, 종을 봉헌한 사람 가운데 자신들의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이렇게 답동 성당의 종과도 관련이 있지만 정작 우리탕의 말년 인천에서의 삶은 그리 평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집을 짓고는 경제적으로 꽤 핍박을 받았으며, 집마저도 준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화재가 나 보험으로 다시 재건축하는 등 곡절을 겪었다. 게다가 부인의 성격이 사나워서 당시 인천 거주 외국인 사이에서도 평판이 썩 좋지 않았다는 기록이 보일 정도이고, 대저택을 짓고 불과 몇 년 만에 세상을 뜨는 운명이었음을 보면 그의 만년이 불운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그의 집이 화마와 뗄 수 없는 무슨 연관이 있었던지, 1968년 주둔해 있던 군 부대의 실화로 끝내 그 아름다운 자태가 소실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인천의 옛모습'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10년대 인천시가지 (0) | 2023.04.23 |
---|---|
개항기 각국 거류지도 첫 발견 (0) | 2023.04.15 |
오포산 기상대 (0) | 2023.03.07 |
인천개항및 이후 사진들 (1) | 2023.03.07 |
인천의 근대건축물사진(1907년 발행 책자) (0) | 2023.03.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