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진의 복원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0 04:20:26
영종진의 복원
지금은 국제공항이 개설되어 나라의 관문이 된 영종도는 예전에도 중요한 섬이었다. 비교적 일찍부터 역사에 등장한다. 이 섬에 인적이 시작된 것은 백제 때부터요 송악이 고려국의 서울이 되면서 지척의 영종도는 그만큼 요충이 되었다. 그때는 자연도라고 했다. 영종도란 조선말 남양반도에 설치되어 있던 영종진이 옮겨오면서 개명된 지명이다.
영종도가 본격적으로 우리역사 무대에 등장한 것은 고려중기이다. 1211년 권신 최충헌이 희종을 폐립 자연도로 내치면서 부터이다. 궁궐에서 최의 살해음모가 있었을때 왕에게 구명을 호소하자 희종은 외면했었다. 마침내 최는 구출되고 왕을 시역하자는 주장에도 그는 왕을 폐출하는 것으로 끝냈다.
영종도가 또다시 역사에 보이는 것은 몽고난중인 고종 때이다. 서울을 강화도로 옮긴 후 강도마저 위태롭게 되자 다시금 남하하여 자연도로 옮길 궁리를 하게 된다. 그 후 조선조 말 외세가 밀려들자 영종진을 설치하고 방어사를 두게 된다. 두차례 양요를 치른 강화도가 바로 머리 위에 있고 영종도 앞바다는 강화도로 해서 한강에 이르는 길목이어서였다.
그러나 일본의 운양호 침략 때는 호되게 노략질을 당하기도 한 섬이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포함외교에 굴복한 일본은 그 수법대로 1875년 해안 측량을 한다면서 군함 운양호를 몰고와 강화도 초지진에 접근하고 우리측의 경고사격에 오히려 반격 영종도로 돌려 공격을 감행 끝내 점령한다. 그들은 살인과 방화 노략질을 일삼고 물러났으나 우리 군사 35명이 전사했다.
그런가하면 이곳에는 한때 흥선대원군이 피신해와 있었다는 용궁사라는 절도 있다. 원래 강화 전등사의 분원이었다고 하며 용궁사 현판은 대원군의 친필이라고도 전한다.
지난 22일 인천문화발전연구원이 영종도에서 ‘영종진 복원을 위한 추도 및 발대식’을 치렀다고 한다. 역사의 현장은 지켜지고 흩어진 흔적은 복원되어야 하며 외래객을 유치 역사의 증언으로 삼음이 당연하다. 인천공항의 국제 통과객들이 가볼 곳이 없어 지루해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