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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사람들의 생각

100년 전 인천, 100년 후 인천

by 형과니 2023. 3. 21.

100년 전 인천, 100년 후 인천

仁川愛/인천사람들의 생각

 

2007-02-22 11:36:47

 

100년 전 인천, 100년 후 인천

 

강옥엽-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음력 설이 지났으니 왠지 이제야 새해라는 느낌이 든다. 사실 1년의 절기마다 농경문화에 맞게 선조들이 지켜온 음력이 양력보다 자연현상의 변화에 더 정확하다는 것을 우리는 매년 느끼고 있다.

 

그러니 지금 새삼 또 한번 한 해의 시작을 음미한다 해도 이미 지나간 두어 달은 2007년 계획의 실행을 위한 준비기간이라 할 수 있으니 어쩌면 덤이라는 생각도 든다.

 

현재 인천은 경제자유구역을 중심으로 첨단산업과 이와 관련된 비즈니스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국제도시 건설을 지향하고 있다.

 

2009년 도시엑스포 개최나 2014년 아시안게임유치 등도 이러한 계획의 일환인 것이다.

 

여기에 경제발전과 발맞추어 역사문화도시 인천의 정체성을 정립하려는 도시재생사업, 문화유산 정비 및 복원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부쩍 인천을 탐구하는 문화집적물들이 축적되고 크고 작은 노력들도 가시화되고 있다.

 

문득, 100년 후 쯤 그때도 여전히 이 지역이 인천이라는 역사·문화적 성격을 간직하고 있다면 인천인의 후예들이 오늘의 노력과 발전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도 인천의 도시 정체성을 끊임없이 과거 인천의 역사·문화 속에서 찾고자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07년 인천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907년이라는 시점은 일본이 1883년 인천항 개항을 강요한 이래, 바야흐로 조선을 강제 병합하는 1910년으로 가는 마무리 단계였다고 할 것이다.

 

개항과 더불어 항구로서의 지리적 이점과 시대적 추세에 따른 경제적인 발전을 이루었을 인천이지만, 1883년으로부터 24년이 지난 1907년 경 모습을 보면, 생각 밖의 다른 도시로 변하고 있음을 여러 자료를 통해 발견하게 된다.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본질이 독점자본과 배타적 민족주의라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가진 탓에 인천항에 몰려든 독일, 영국, 미국과 러시아, 중국, 일본 등 각국은 경제적 이해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일본은 그 주도권을 차지하게 위해 일찍부터 부심하였다.

 

그 최종의 결과가 1904년 러·일전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차단하는 계기가 되었던 러·일전쟁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했던 을사늑약(1905)을 거쳐 드디어는 1907년 세계만국회의에 일본의 부당함을 호소하려고 했던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킴으로써 한국의 내·외정권 대부분을 통감부가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황 속에 당시 인천은 조선인의 인천이 아닌 일본인에 의한 우리(?) 인천건설이 더욱 본격화되고 있었다.

 

이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이 일본 왕세자의 인천방문이었다. 일본 왕세자 요시히토(嘉仁)는 가쯔라(桂太郞), 도고(東鄕平八郞), 이와쿠라(岩倉), 하나부사(花房義質) 등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견학 명목으로 한국을 방문했지만, 당시 순종 황제와 황태자가 직접 인천역까지 마중 나왔으니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구축한(?) 식민지를 자랑스럽게(?) 둘러보고자 한 것이었다.

 

여기에 인천은 그 첫 방문지가 되었던 것이다. 인천거주의 일본인들은 그 영접을 위해 조선인, 중국인, 외국인 등을 총동원하였으며, 자신들의 인천건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 성과를 인천개항 25년사’(1908)라는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천의 이곳 저곳에는 당시 그들이 남긴 건축물과 그 역사적 흔적들이 있고 우리는 그 흔적들의 처리(?)를 두고 고심하고 있다.

 

인천의 발전을 위한 여러 방면에서의 노력은 비단 오늘날 우리의 것만은 아니다.

 

50년대 전쟁 이후의 복구노력이나 60년대 경제개발계획의 실행 등 근·현대에 들어 암울했던 과거를 극복하고 그 시기 시기마다 인천발전을 염원했던 인천인들이 있었고, 그들의 노력에 의해 오늘의 인천이 결과한 것이다.

 

때론 현재의 시각과 다른 결과를 가져와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발전을 지향해 왔던 입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을 것이다.

 

다만, 역사가 증언하는 100년 전 인천과 도래할 100년 후 인천을 생각할 때 인천발전의 방향과 방법론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조화롭게 도시발전을 이루어 나갈 것인가, 거듭 생각해야 하는 것이 현재의 과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