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타오른 독립운동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02 09:24:48
인천에서 타오른 독립운동
인천 앞바다 울린 '대한독립만세!'
격동의 개항장 달군 뜨거운 민족애
<3·1절 특집 - 인천에서 타오른 독립운동>
“만세! 만세! 대한 독립 만세!!”
1919년 3월 6일 정오-. 인천 배다리 장터에는 만세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나라의 독립을 열망하며 절규하는 태극기의 물결이 노도처럼 넘쳐흘렀다. 천지개벽과 같은 인천의 첫 ‘만세 소리’에 놀란 부민(府民)들은 너나없이 하던 일을 팽개치고 뛰어나와 배다리 장터는 순식간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인천은 우리나라 근대화의 창구 역할을 했던 개항장이었다. 일제는 개항 직후부터 그 같은 지정학적 조건에 눈독을 들여 조계지(租界地)를 설치한다, 영사관을 연다, 은행을 들여온다, 축항(築港·독)을 만든다…며 인천을 철저하게 식민 통치의 교두보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설들을 보호, 유지하기 위해 경찰 병력에 군인들 까지 주둔시켜 치안 확보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인천은 전국 어느 곳보다도 경계 태세가 삼엄했던 것이다. 각처에서 왕성하게 발흥했던 의병이 유독 인천에서 자리 잡지 못했던 원인의 하나도 이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 같은 위축된 상황 속에서도 인천사람들이 끊임없이 외세에 저항하면서 독립 운동을 펼쳐왔다는 것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역사적 사실이다. 만세의 첫 깃발을 떨쳐 올린 이들은 인천공립보통학교(이하 인보)와 인천공립상업학교(이하 인상) 학생들이었다. 인보 3, 4학년생들은 3월 6일 정오에 학교를 출발, 배다리 철로 너머 인상 학생들과 합류해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했고, 이어 동맹 휴교에 돌입했다. 이들은 다음 날 다시 모여 만세를 부르다가 대거 인천경찰서에 연행됐다. 후에 주동자였던 인보 4년생 김명진은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1년 6개월을 복역했고, 박철준, 이만용은 태(笞) 90대, 손창신은 연소자라 풀려났다.
8일, 인천부 전역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됐다. 특히 노동자의 분발을 촉구하는 격문도 뿌려졌다. 그 이튿날 오후 5시 30분경, 기독교 신자, 청년, 학생 등 3백여 명이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모여 만세를 부르다가 왜경에 의해 강제 해산 당했고, 8시 30분경에는 부내 동쪽 경인가도에서 부민 5백여 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경찰과 충돌해 주동자 여러명이 체포됐으나 만세 운동의 열기는 점점 고조되어 갔다.
12일, 강화보통학교 3, 4학년생들이 칠판에 태극기를 그려놓고 만세를 부른 후 거리로 나서려하자 교직원들이 이를 저지했고, 이튿날 다시 1백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불러 경찰에 연행됐다.
17일 오전 9시 30분, 인상 학생 2백80여 명이 다시 학교 강당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거리로 나섰다. 주동자 17명이 경찰에 체포됐고, 일본인 교장은 직권으로 휴교 조치를 단행했다. 주동자들은 후에 3개월 형을 받았다.
18일 오후 2시, 강화읍내 장터에서 유희철, 황윤실, 장동원, 장명순, 조상문, 유봉진, 고익진 등이 군중에 앞장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의 숫자는 6천여 명에 달했다.
19일 길상면 온수리에서 천도교인 수백 명의 시위를 시작으로 만세 소리는 불은면, 교동면, 삼산면, 서도면, 화도면 등으로 퍼져나갔다.
23일에는 용유면 거주 조명원, 조종서, 최봉학, 문무현 등이 혈성단을 조직하고, 만세 격문 80여 통을 남북리, 을왕리, 덕교리 등에 배포했다.
24일 오후, 부평시장과 계양면 장기리 황어장터에서도 만세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부평에서 군중들은 면사무소를 파괴하며 경찰과 격투를 벌여 부상자가 속출하였다. 장기리 시장의 6백여 군중들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면사무소에 구금중인 심혁성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은선은 이 와중에 심혁성을 구출했으나 왜경이 내리친 칼에 맞아 그 자리에서 순절하고 말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장기리 일대의 만세 시위는 더욱더 격렬해졌다. 시위는 자정까지 계속됐고 장기리 만세 주동자 28명 대부분은 옥고를 치렀다.
3월 하순에 들어서도 만세의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27일 일본인 부윤(현 시장 격)은 한국인에게 상점을 열 것을 협박했으나 한국인 상인들은 문을 열지 않았다. 당시 신문들은 인천의 철시 상황을 보도하면서 ‘해변의 파도 소리만 시가지를 울렸다.’고 전할 정도로 시가지는 정적에 휩싸였고, 민심은 흉흉했다. 강화의 9개 지역에서도 이 날 2천여 명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28일에도 남동과 용유도에서 만세를 부르던 군중들이 왜경에 체포됐고, 특히 29일 밤의 월곶리 시위와 4월 1일 밤 강화 읍내에서의 시위는 송해면을 거쳐 양사면, 하점면에 이르기까지 모두 13곳의 봉화가 연결된 한밤의 횃불 만세여서 장관을 이루기도 했다. 이후의 강화 지역 만세 운동은 대부분 각 동리 단위로 초저녁 산 위나 언덕에서 행한 횃불 만세였다. 인천부 내에서는 30일까지 철시 항쟁이 계속됐다. 이 날 수백 명의 천도교 교인들이 북성 고지로 만세 시위를 벌이다 해산 당했다. 31일 서창리(현 남동구 서창동) 거주 송성용 등이 만세를 모의하다 체포됐고, 4월 1일에는 1천 수백여 명이 월미도에 모여 만세의 함성을 올렸다.
인천의 3·6 만세 운동의 대미는 4월 2일 만국공원에서 펼쳐졌다. 이 날 아침 이민태, 홍진의, 이규갑, 한남수, 홍면희, 김규, 박용희, 이종욱, 권혁채 등은 만국공원에서 국민대회를 열어 조선 가정부를 선포하고, 파리강화회의와 세계 각국이 조선의 독립을 승인할 것을 요구하며 그 취지를 담은 선포문을 일반에게 알렸다. 이 만국공원 대회는 인천의 만세 운동 가운데 가장 조직적이었고, 만세 운동을 국제적 차원에서 행했다는 면이 두드러진다.
인천의 항일 운동은 이렇듯 학생, 노동자, 농부, 상인, 종교인, 지식인 등 남녀노소의 구별 없이 광범위하게 지속되었다. 개항 후 인천사람들의 내면에 축적되어 왔던 항일의 뜨거운 에너지가 마침내는 3·6 인천 만세 운동으로 훨훨 불타올랐던 것이다.
글·사진제공 : 조우성(시인 / 인천시 시사편찬위원)
Incheon@News / 편집팀(enews@incheon.go.kr)
지금도 그 뜨거운 외침이 들리는듯
오늘로 남아 그날을 증거하는 역사적 현장
<3·1절 특집 - 인천에 남은 흔적들>
세월이 흘러도 결코 지워질 수 없고 지워져서도 않되는 역사가 있다. 오늘을 사는 이들이 지난 삶을 살았던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억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열정과 헌신, 용기는 오늘을 있게 한 힘이 분명하다.
인천 곳곳에는 역사적인 사실과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진 이들을 증거하는 흔적들 여럿이 있다. 3·1절과 연관있는 그곳을 둘러본다.
○ 계양구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
계양구 장기동에 황어장터는 1910년대에 가장 번창해 이용주민이 하루 1천여 명에 달하는 인천지역의 대표적인 시장이었다. 이곳은 본래 조선시대부터 잡화 및 곡물뿐만 아니라, 1일 거래량이 500~600두에 이르던 인천지역의 대표적 우시장이기도 했다. 잉어과의 민물고기인 황어의 산지라 하여 그 이름이 붙여진 이곳은 1919년 3월 24일 당시 장날을 이용해 강서지역 최대의 만세운동이 이곳에서 벌어짐으로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지금은 장이 서질 않는 대신 이 자리에는 3·1만세운동을 기념하는 기념탑이 오롯이 서 있어 지난날의 의로운 역사를 대변해 주고 있다. 지난 86년 일제시대에 기록된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원부에는 황어장터 만세운동에 연루돼 수감된 당시 계양면 주민 33명의 신상과 정황 등 긴박했던 만세현장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황어장터 3·1만세 운동’은 장날인 기미년 3월 24일 오후 2시 6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고 심혁성 지사(당시 32세)가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장터에 모인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며 비롯됐다. 당황한 일제는 즉각 진압작전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일본순사가 휘두른 칼에 많은 희생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더욱 격분한 주민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일제 경찰에 심 지사가 체포되고, 몸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이은선 지사(당시 44세)가 일경의 칼에 맞아 순국하고, 윤해영 지사는 중상을 입었으며, 야간집회를 준비하던 100여명이 검거되고 32명이 경찰서로 압송되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후 6개월 뒤 경성지방법원은 검거자들에 대해 이담 지사(당시 41세)는 징역 2년, 임성춘 지사(당시 47세)는 징역 1년, 전원순(당시 45세)·최성옥(당시 48세)지사는 징역 10월, 심혁성 지사(당시 32세)는 징역 8월, 이공우 지사(당시 44세)는 벌금 20원의 판결을 각각 내렸다. 황어장터 만세운동은 서울을 중심으로 강서지방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의거로 기록되었고, 인천지역은 물론, 전국의 만세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을 기려 계양구는 2004년에 총 337평에 한옥으로 된 전시실과 기념탑, 조경시설 등을 갖춘 ‘황어장터 3.1만세운동 기념관’을 건립했다. 이어 기념관이 국가보훈처로부터 현충시설로 지정받음으로써 황어장터와 관련한 역사적 자료가 계양구에 국한된 시설이 아닌 국가의 시설로 그 의미와 가치가 한층 높아졌다.
이용문의 : 계양구 문화공보실(032-450-5871~6)
○ 3·1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 기념비
인천 3·1운동의 불씨는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에서 지펴졌다. 당시 인천의 유일한 공립보통학교였던 4년제 인천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3·4학년들이 3월 6일 정오에 학교를 출발해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학생들과 합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인 것이다.
이를 기념하는 3·1 독립만세운동 인천지역발상지 기념비가 창영초등학교 운동장에 세워졌다. 창영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 당시의 고증 자료를 수집하고 재판 기록문을 입수해 1995년 모교에 건립한 것이다.
이 비에는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옥고, 징역, 부역을 당한 동문의 명단과 현황이 빼곡히 적혀있다. 뒷면에는‘나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바탕한 의사발동이지 범죄가 아니다’라는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김명진의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상고문을 발췌해 새겨 넣었다.
○ 용유동 삼일독립만세 기념비
기미년 삼월일일의 만세운동은 비단 내륙지방에서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다. 인천 앞바다의 용유도에서는 3월 23일 조명원, 조정서 등 열 한명이 혈성단이라는 비밀 항일 투쟁단체를 결성하고 만세 격문을 배포한데 이어 28일에는 관청리 광장에 모여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비록 일본의 무력에 무참히 짓밟혀 옥고를 면치 못하고 독립을 찾지는 못했지만 한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는 바다와 육지에 한결같이 일렁였다.
공항고속도로 신불IC를 거쳐 공항남측도로를 달리다 용유도 방면으로 접어들면 덕교삼거리를 지나 용유중학교 옆에 용유쉼터가 조성돼 있다. 쉼터에는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인 삼일독립만세 기념비가 서 있어 그날의 함성을 기억하게 한다. 기념비에는 ‘애국애족’‘지성보국’이라 적힌 두 기둥위에 검은 대리석으로 만세운동의 현황과 추도시, 용유8경 등이 새겨져 있다.
지영일 편집위원 openme@incheo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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