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과 인천(하)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02 09:37:32
백범과 인천(하)
"축항엔 내 피와 땀 배어 있다"
인천의 항일운동사-22.백범과 인천
광복군의 국내 진입작전을 준비하던 상해임시정부는 뜻을 펼치지 못한채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는다.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11월23일, 중경을 거쳐 상해에 머물던 김구는 임정 요인들과 함게 개인자격으로, 망명생활 26년만에 조선땅을 밟는다.
장준하는 귀국행 비행기안에서 본 김구의 모습을 이렇게 전한다. “김구 선생은 눈물지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뒤에 기대고 있을 뿐, 눈물을 닦으려하지도 아니했고, 입을 비죽거리지도 않았으며,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하나의 거대한 돌부처처럼, 우는 돌부처처럼, 그런 모습으로 주먹을 쥐어 무릎 위에 얹은 채 새로운 앞일을 감당하고 있었다.”
귀국후 진정한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바쁜일정을 보내던 김구는 1946년 전국순회 길에 나선다. 전국순회 길을 인천에서 시작한다.그해 4월14일 김구는 내리교회를 찾아 청년강연회를 한다. 다음날 대중일보는 그의 사진과 함께 ‘인천축항의 노역죄수 김구, 지금은 전국 도상의 거인 김구 주석’이란 제목으로 이날 강연회 내용을 자세히 보도한다.
이날 김구는 ‘치하포 사건’을 계기로 인천과 인연을 맺고, 이어 ‘105인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를 거쳐 인천감옥으로 이관돼 축항공사장에서 노역을 한 이야기 등을 술회했다.치하포 사건으로 인천감옥에 수감된 김구는 당시 인천에서 꾀나 유명새를 탔다.
인천감옥에 수감되기까지 혐의를 부인하던 김구는 인천재판소에서 진행된 첫 신문에서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구 한명을 때려 죽였다”고 당당히 나선다. 당시 모진 고문에 간수에 엎혀 재판정에 들어갈 정도로 몸은 상했지만, 일본 순사에게 일갈하고, 조선 관리들을 훈계하는 기개를 펼쳐보였다.
당시 김구의 첫 신문을 맡았던 조선 관리는 김윤정. 그는 김구의 훈계에 짐짓 절개있는 조선관리의 모습을 보여준다. 재판과정에 불만을 품고 항의하는 일본인 관리를 ‘내정 간섭’이란 이유로 나무라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1910년 한일병합(경술국치)이후 친일파의 길을 걸어 중추원 참의·고문이 되었다.김구의 호통에 조선 관리들이 당황해하던 모습은 순식간에 입에서 입으로, 인천 전역에 퍼진다.
“해주 김창수라는 소년인데 민 중전 마마의 복수를 위해 왜놈을 때려죽였다나? 그리고 아까 감리사를 책망하는데 그도 아무 대답을 못하던 걸.”
김구의 옥바라지를 위해 박영문의 집에서 동자꾼(식모) 노릇을 하던 김구의 어머니에 대한 대우도 달라졌다. 연일 김구를 걱정하는 인천사람들이 인천감옥을 찾기도 했고, 돈이나 음식을 들여보내 격려하기도 했다. 김구의 사형 확정 소식이 전해지자 물상객주들은 긴급회의를 열어 돈을 거둬 몸값을 지불하자고 결의하기도 했다.
모진 고문에 자살까지 시도했던 김구는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다진다. 옥중에서 책을 읽으며 사상의 깊이를 더했다. 같이 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교육을 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사연을 대서해주기도 했다.
1898년 2월15일자 독립신문은 김구로 인해 변한 인천감옥의 모습을 상세히 보도한다. 김창수가 옥살이를 한 지 3년, 스스로 주야로 학문을 독실히하고 다른 죄인들을 교육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인천감옥을 ‘인천감리서학교’라 부르고 있다고 설명한다.이런 김구의 모습에 반해 많은 사람들이 김구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조선 정부에 석방을 청원하기에 이른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주경이다.
강화에 살고 있던 김주경은 강화에서 군수품 창고지기로 있던 인물이다. 젊은 시절 투전으로 돈을 모아, 그 돈으로 하급관리를 매수해 놓고, 인근에서 용기와 지략이 있는 사람들은 거의 자기식구로 만들기도 했다. 양반들이 비리만 저지르면 간접적으로 혼을 내주기도 했다고 김구는 기억한다.
당시 강화에 두 사람의 인물이 있는데 양반 중에는 이건창이요, 상놈중에는 김경득(김주경)이라고 할 정도였다.김주경은 김구를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쓴다. 소송에 전력하기를 7∼8개월, 김주경은 결국 가산을 탕진했으니 그 열의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김주경은 당시 법부대신인 한규설을 찾아가 김구의 석방을 청원했지만 일본 정부의 눈치만 보는 모습에 한탄하고 돌어선다. 더 이상 석방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김주경은 시 한수를 지어 김구에게 탈옥할 것을 권한다.
‘조롱을 박차고 나가야 진실로 좋은 새이며(脫籠眞好鳥)/
그물을 떨치고 나가야 예사스런 물고기가 아니리(拔扈豈常鱗)’
인천감옥을 탈옥한 뒤 1년간 절에서 숨어지내다 고향에 돌아온 뒤 김구는 강화 김주경의 집을 찾아간다. 그러나 김주경은 김구의 탈출을 위해 여러사람과 배를 훔치다 관아에 쫓기는 몸이 돼버렸다. 김구는 이후 김주경을 재회하지 못했다.김구는 신분을 숨기고 김주경의 집에 3∼4개월 정도 머물면서 아이들을 교육한다. 김주경의 김구 석방운동을 뒤에서 물심양면 도와준 김포사람 이춘백을 만난다.
이춘백은 다시 김구를 부평 유씨 유인무(혹은 완무)란 양반을 소개한다. 유인무의 집에 머물던 김구는 다시 유씨의 소개로 충청동 연산의 이천경을 만났고, 다시 이천경의 소개로 무주의 이시발, 그리고 지례군 천곡의 성태영 등과 인연을 맺는다. 이들은 함께 젊은 인재를 찾아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때 전국을 돌며 청년 김창수는 ‘김구(金龜)’라 이름을 바꾼다. 후에 `김구(金九)'로 개명했다김구가 다시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신민회 활동을 하다 ‘105인 사건’의 발단이 된 ‘안악사건’으로 또다시 옥살이를 하면서다. 잔여 형기를 2년 남겨둔 채 인천감옥으로 이관된 김구는 치하포 사건으로 탈옥한 사실이 들통날까 노심초사한다.
당시 인천감옥은 죄수들은 공사가 한창이던 인천항 축항 공사장에 동원된다. 어찌나 고역이 심했던지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죽을 결심을 했다. 그러나 같이 쇠사슬을 마주 맨 자까지 죽이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며 죽을 힘을 다했다고 술회한다.김구는 당시 축항공사장 인근 박영문과 안호연의 집앞을 지날 때마다 달려가 인사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음을 밝히고 있다. 물상객주인 박영문은 첫 옥살이 때 김구의 어머니를 도운 인물이며, 안호연 역시 그의 부모를 극진히 대접한 인물이었다.
김구는 “나는 (축항공사장)출입시 종종 마음으로 절하고 지냈다”고 백범일지에 썼다.김구는 두번째 옥살이 때 검여 유희강과 인연을 맺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범의 모친은 검여의 집에 머물며 아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김구는 1919년 3월 중국으로 밀항하기 전까지 서구 시천동 검여의 생가에서 숨어지냈다. 검여는 김구의 도움으로 중국에서 10년간 유학했고, 이후 서예의 대가로 이름을 높인다.
1949년 6월26일 김구는 안두희가 쏜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둔다. 조선의 자주독립과 진정한 통일국가를 꿈꿔오던 거인 김구의 느닷없는 죽음 앞에 온 국민이 슬퍼했다. 1949년 6월28일자 대중일보는 한독당 인천시당에 마련된 김구의 빈소에 조문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김구는 인천에 대한 강렬한 기억을 백범일지에서 이렇게 전한다.“나는 38 이남만이라도 돌아보리라 하고 제일 먼저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 깊은 곳이었다. 스물두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스물세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한살적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다. 저 축항에는 내 피와 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옥 중에 있는 이 불효를 위해 부모님이 걸으셨을 길에는 그 눈물 흔적이 남아있는 듯하여, 마흔아홉해 전 기억이 어제런 듯 새롭다. 인천에서도 시민의 큰 환영을 받았다.” /김주희기자
1996.10.23일 안두희의 피살보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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