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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1945년 8월15일 인천의 모습

by 형과니 2023. 3. 24.

1945815일 인천의 모습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02 09:42:00

 

왜색 짙던 인천도심

해방의 물결 너울너울

 

1945년 당시 일제가 패망하리라고 믿는 인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조선총독부가 눈과 귀를 철저히 가리고 막았기 때문이었다. 총독부의 나팔수였던 경성방송국이 바깥세상의 소식을 제대로 전할 리 없었고, 매일신보를 비롯한 기관지들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이 대동아공영권의 당위성연전연승하는 황군의 소식만을 보도하고 있었다.

 

1942215일 보도 매체들은 싱가폴 함락 소식을 대대적으로 전했고, 이에 따라 인천부(仁川府) 남녀노소 부민과 학생들은 일제의 강권에 못 이겨 횃불을 치켜들고 한밤중에 시가를 행진하며 승전 축하회를 대대적으로 벌였다. 이렇듯 항상 영미귀축(英美鬼畜)’을 물리쳤다는 승전보에만 젖어 있던 부민들에게는 일본이 패망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1945815일 정오. 경성방송국은 경천동지와 같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는 일본왕의 들릴 듯 말 듯한 떨리는 목소리를 전했다. 그 충격은 일거에 세상을 휩쓸어 버리고 간 원자폭탄과도 같았다. 곳곳에서 항복 패닉 현상이 일고 있었다.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를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이 거듭되고 있었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일제의 굴레에서 벗어난 꿈만 같은 현실이었다.

 

‘8·15광복은 그렇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만주 벌판에서 군번도 없이 스러져 간 수많은 광복군의 희생,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몸을 바친 의사, 열사, 지사를 비롯한 모든 독립 운동가들의 피눈물 나는 분투가 그 원천적 힘이었으나, 일제가 이 땅에서 제 발로 걸어 나가게 된 직접적인 요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미국에 의한 것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소위 옥음방송(玉音放送)’에 전율한 것은 한국인만이 아니었다. 식민지 인천에 나와 내선일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위로는 인천부윤(仁川府尹·지금의 인천 시장 격)과 같은 고급 관리에서부터 아래로는 말단 순사에 이르기까지 온갖 수탈과 만행을 저질렀던 일본인들은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에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 경찰은 아직 치안 유지를 핑계로 총기를 소지하고 한국인을 위협했지만, 인천 인구의 절반에 달하는 일본인들은 대문을 걸어 잠근 채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반면, 한국인들은 온통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광복의 기쁨에는 사상과 이념의 벽이 있을 리 없었다. 거리는 태극기와 온갖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로 물결을 이루었다. 부민들은 만세 행렬을 뒤따르거나 문 앞에 나와 박수로 광복의 감격을 나누고 있었다. 만세 행진은 17, 18일까지 전 시가지에서 펼쳐졌다.

 

사태가 사태이니만큼 여차하면 유혈극을 빚을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천 부민들은 놀라운 자제력을 보여 일본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약탈, 방화하는 일이 단 한 건도 없었다. 죄는 미워도 인간은 미워하지 않았던 부민(府民)들의 수준 높은 정신적 자세가 발현되는 순간순간들이었다. 오히려 겁을 집어먹은 것은 일본인들이었다.

 

이 무렵, 인천에 미군이 상륙한다는 소문이 부중에 파다하게 나돌았다. 일본인들은 2, 3일 안에 미군이 도착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어차피 미군이 도착하면 재산권 행사는 물론 값비싼 귀금속이며 가재도구 등을 본국으로 가져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일본인들은 평소 안면이 있는 한국인들에게 이를 헐값에 팔아넘겼고,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서둘러 현금을 우체국을 통해 본국으로 송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친일 인사들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던 일본인들에게서 땅문서 등을 일시 보관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명의를 넘겨받는 사례가 많았다. 그 중에는 아예 공장 자체를 인수받아 후에 그를 밑바탕으로 해서 가업을 일으킨 예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런가 하면 친일 인사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진 김 모씨는 17일 오후 인천부윤 등 일본인 몇 명과 함께 인천신사(仁川神社)에 모여 소위 신체(神體)’를 비밀에 부친 모처로 옮기는 식을 거행하고 일본 항복에 비분강개(?)한 나머지 모두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 후 일본인들이 한 일은 식민지 통치의 죄악상이 낱낱이 드러날 각종 문서를 태우는 일이었다. 각 관공서는 며칠을 두고 각종 문서를 태우느라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피어올랐다.

 

98, 마침내 소문만 무성했던 미군이 인천 앞바다에 나타났다. 팔미도 쪽에서 미군 비행기 편대가 날아와 굉음을 내며 인천 상공을 시위하듯 선회했다. 아직 인천의 치안을 맡고 있던 일경(日警)은 인천부 전역에 통행 금지령을 내렸지만 부민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미군을 환영하러 부둣가로 나갔다.

 

그런데 느닷없이 본정(本町·지금의 중구 중앙동) 교차로 부근에서 총성이 들려왔다. 환영 시위대와 일경이 충돌한 것이다 이때 일경이 쏜 총탄에 인천노동조합 권평근(權平根) 위원장과 이석우 씨 등이 사망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 사건은 인천 군정청(軍政廳)에 의해 수습되고, 10일 시민장이 거행됐다.

 

상인천역(지금의 동인천역) 광장에서 가진 영결 연설에서 한 좌익 인사는 일본 놈을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죽이자!’고 해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케하기도 했다. 이어 시가지를 누빈 장례 행렬에는 민족의 불행한 앞날을 예고나 하듯 태극기, 미국기, 소련기, 붉은기가 저마다 하나의 물결을 이루며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의 눈치를 보며 하루빨리 귀국하려고 애를 썼지만 정작 그들이 인천을 떠나기 시작한 것은 그 해 10월 하순경이었다. 일본인들은 재산의 일부라도 건져내려고 발버둥쳤지만, 미 군정청은 어른 50kg짜리 2, 12세 이하 1개로 화물을 제한하였고, 모든 짐은 조사를 받은 후에야 인천항에 정박 중인 귀국선에 승선할 수 있었다.

 

악몽 같던 일제의 식민 통치는 그렇게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35년간의 피눈물 나는 압제보다도 더 통분할 일은 일제에 의해 배태된 6·25전쟁을 남북이 서로 피하지 못했다는 뼈아픈 역사적 사실이다. 광복 60년을 맞으면서도 삭혀지지 않는 것이 그들의 원죄적 죄 값인데, 그들은 오늘 역사를 왜곡하고,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등 국제적 파렴치를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자행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조우성(시인·인천시 시사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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