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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민족의식 싹틔운 영화학교

by 형과니 2023. 3. 24.

민족의식 싹틔운 영화학교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02 09:45:15

 

민족의식 싹틔운 영화학교

 

인천의 영화학당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초등교육기관이다.

23세에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던 마거릿 벤젤이 인천에 내려와 제물포 교회(현 내리교회) 존스 목사와 결혼한 뒤 여자아이 한 명을 데려다 키우면서 영화학당의 역사는 시작된다.

 

18924월 영화학당이 설립됐고, 이후 8월 사립학교로 영화학교가 탄생한다. 지금의 영화정보여고와 영화초등학교가 영화학당에서 출발했다.

 

교육에서 철저하게 배제돼 온 여자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출발, 남녀공학에서 다시 남·녀 학교가 분리되는 등 일제 강점기 인천의 인재를 육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영화남학교 학생들은 군사교육이나 고적대 활동을 통해 항일의식을 높였다. 1930년대 이후 이념적으로 나뉘긴 했어도, 이 학교 출신자들은 인천지역의 사회단체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이며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190511월 을사늑약(조약)이 체결되자, 그달 28일 전 참판 홍만식이, 30일에는 민영환이 자결한다. 이에 전국각지에서 항일운동이 촉발되는데, 영화학교에서도 박용내 교사의 주도로 주권수호를 위한 활동을 벌인다.

 

190684일자 대한매일신보는 영화학교 학생들이 지은 여덟수의 충절가를 소개한다. 민영환이 자결한 뒤 그의 피 묻은 옷과 칼을 두었던 방에서 대()가 났다는 말을 듣고 박 교사는 반장이던 이학준, 최영창 등 두 명을 서울로 올려보내 자세히 보고 오라 이른다. 학교로 돌아온 두 학생이 상황을 전하자, 학생 8명이 눈물을 흘리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자결한 민영환을 추모하며 독립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충절가를 지었다.

 

이런 학생들의 우국충절은 19071027일자 황성신문에도 잘 나타난다. 서울에서 열린 관·사립학교 추계 체육대회에 영화남학교 학생들이 참가하게 된다. 당시 보통학교 학생들은 배움의 시작이 늦어 나이가 많은 학생들이 많았다. 달리기 경주에서 1등을 한 영화학교 학생이 다른 참가학생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순위에서 밀려나자 영화학교 학생들이 이를 억울하게 여겨 서울에서 인천까지 집총을 하고 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실린다. 당시 이 대회는 친일단체에서 주관한 것으로, 주관단체가 순위를 조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영화학교에서는 교회유지 청년인 박삼홍이 중심이 돼 학생들을 대상으로 군사훈련을 시켰다. 학생들은 북을 치고, 총을 메고 제식훈련을 받았다. 박삼홍을 비롯해, 하상훈, 최진하, 이동오, 이범진 등 영화학교 출신자들이 이를 주도했다.

 

이런 활동은 당시 학교 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이 주로 배재학당과 정동제일교회에 기반을 두고 활동한 것처럼, 당시 교회는 일제로부터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했다.

 

내리교회 또한 그러했는데, 교육수준이 높았던 이들은 교회란 울타리안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항일의식을 전파하는 전도사 역할을 했다. 이들 교사들은 하와이나 국내 각 지방에서 항일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하와이 이민의 개척자로 꼽히는 안정수도 그런 인물 중에 하나다.

 

1878년 충남 보령에서 양반집 자제로 태어난 그는 신학문에 대한 열망을 안고 1897년 한성 영어학교에 입학한다. 이 곳에서 안정수는 민족의식을 키워나간다. 1899년 졸업, 제물포 해관에 취직한 그는 탁원한 영어실력과 성실성을 인정받는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안정수는 존스 목사와 인연을 맺고 영화학교에서 초급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게 된다. 엡웟 청년회에서도 중책을 맡기도 한다.

 

190211월 미국인 사업가 데쉴러의 하와이 이민 대행 업체인 동서개발주식회사에 입사, 하와이 이민사업에 적극 나선다. 1903년 그는 하와이 교민 공동체를 통한 민족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신민회를 조직한다. 센프란시스코에 정착한 안정수는 교민사회에 한국 상황을 알리며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벌여오다 1940년 급성맹장염으로 사망한다.

 

손승용은 1855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다. 줄곧 고향에서 경전을 가르치던 그는 30세가 되면서 시대변화를 감지하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다. 관직생활을 해 오던 그는 독립협회에 투신,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한다.

 

아펜젤러와 독립신문 일을 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한다. 19005월부터 1년간 존스목사의 초빙으로 영화학당 교사로 활동한다. 당시 인천에는 학자나 선비보다 상인 등 교육수준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대거 몰려드는 시기라 손승용 같이 신문화 지식이 많고 충군애국사상이 투철한 양반출신 교사를 필요로 했다.

 

손승용 또한 독립협회에 대한 탄압으로 활동이 어렵게 되면서 종교활동에 전념하던 시기였고, 특히 교육구국운동 쪽으로 독립협회의 활동상이 변화하면서 영화학교 교사직을 맡게 된 것으로 보인다.

 

손승용은 학교 규율을 엄격하게 정리하고 근대적인 학교로 전환시키기 위해 영화학당의 변화를 주도한다. 학생들에게 충정애국과 개화진보사상을 전파하는데 애썼다. 이런 그의 노력으로 많은 사람들이 영화학당으로 몰리게 된다.

 

손승용은 민족의식을 강화시키는 교육에 전념했다. 1905년 제1회 졸업식 때 학교 교사 앞에 태극기와 십자가를 게양하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다. 19067월 강화읍 잠두교회로 파송되면서 영화학교와 인연을 끊는다.

 

1909년 공주로 내려간 그는 나라를 잃어버린 비통한 현실을 직시하고 교인들에게 민족의 얼과 독립정신을 심어주는 목회활동에 주력했다.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하와이에서 여성교육을 선도한 문그레이스도 영화여학당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이화학당에서도 한글을 가르쳤던 경력을 갖고 있던 그는 하와이에서도 한글교육에 힘쓰며 민족문화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노력했다. 대한부인회를 조직,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 밖에도 영화학교에 몸 담았던 많은 교사들이 국내외에서 선교활동과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다.

 

이런 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영화학교 학생들, 특히 남학교 출신자들은 엡웟청년회 등 인천지역내 많은 단체에서 활동하며 항일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그러나, 후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로 나뉘는 모습을 보여준다.

 

 

충절가

 

    어화우리 학도들아 이내말씀 들어보소

 대한동포 합심기초 민충정의 공로로다 /이학준

  

 나라위해 죽는죽음 영광중에 제일일세

 영생일세 영생일세 민충정공 영생일세 /박수호

 

 빛나도다 빛나도다 정충절죽(貞忠節竹) 빛나도다

 절사(節死)함은 빛나도다 우리독립 위함일세 /최영창

 

 보답하세 보답하세 민충정공 보답하세

 잊지마세 잊지마세 충의두자 잊지마세 /김학인

 

 민충정공 유서말씀 우리심중 색여두고

 문명의꽃 열리세계 말과일과 같이하세 /정순안

 

 우리대한 청년들아 깊이든잠 얼른깨어

 물불속에 빠진동포 어서바삐 건져내세 /김문수

 

 우리들도 강병되어 뇌성같은 한호령에

 번개같이 내다라서 우리나라 지켜보세 /최봉구

 

 우리대한 동포형제 추호반점(秋毫半點) 낙심마오

 하나님이 도으심에 회복할날 가까웠네 /이선경

 

*을사늑약 체결 이후 자결한 민영환의 집에서 대나무()가 자라자, 이를 보고 온 학생들이 민영환을 추모하며 독립의식을 높이자는 의미에서 지어 부른 여덟수의 충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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