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인물100人]최고 다작 문인 조병화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03 00:53:33
[인천인물100人]최고 다작 문인 조병화
해방 직후 제물포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중학교(6년제) 교사를 지냈고...
국내에서 가장 많은 시집을 내며 최고의 다작 문인으로 평가받는 조병화(1921~2003) 시인. 그가 인천을 대표할 만한 `인천 인물'이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많다. 그가 인천에서 활동한 내용이 일반에 잘 소개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시인 조병화는 고향은 인천이 아니지만 분명 '인천 인물' 임에 틀림없다. 해방 직후 제물포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중학교(6년제) 교사를 지냈고 전쟁 통에도 인천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을 이끌기도 했다. 또 1980년대엔 인하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그의 인천에서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인천중학교 교사 시절 부인 김준씨와 함께 살던 중구 전동의 2층 일본식 건물(당시엔 김준 산부인과병원)은 1980년대 중반 불이 나는 바람에 지금은 콘크리트 2층 건물로 변해 60여 년 전 조병화 시인의 자취를 흐릿하게 전하고 있을 뿐이다.
학창시절 유난히 운동을 좋아 해 유명한 럭비선수이기도 했던 그는 인중에 부임하자마자 럭비부를 창설하는 의욕을 보였다. 수학을 가르치면서 시를 쓰고, 럭비부까지 창단한 것이다. 인천 학생 럭비의 주춧돌을 시인 조병화가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중시절 조병화 시인의 담임반 학생이었던 김양수(73·문학평론가)씨는 “선생님이 우리나라 문단 역사에서 제일 많이 하신 것으로 기록될 만한 게 네 가지나 될 정도로 대단한 분”이라고 말했다. 김씨는 스승 조병화에 대해 생전에 시집을 53권이나 펴냈고, 또 그 시집이 가장 많이 팔려 나갔고, 문학상도 가장 많이 받았고, 각종 세계 문학행사에 `국가 대표'로 참가해 해외여행을 가장 많이 하는 등의 기록을 갖고 있는 것으로 기억했다.
전쟁 중에 인천문화 부흥을 위해 문총에서 총무국장을 맡았고, 서울수복 이후엔 종군문인으로 평양에 까지 직접 갔을 정도로 현장문학을 중요시 했다고 한다.
1921년 경기도 안성에서 5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난 조병화는 7세때 부친의 갑작스런 별세로 이듬 해 모친과 함께 서울로 올라 온 뒤 서울 미동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이 때부터 그의 예체능 자질이 발휘된다. 아동문선과 아동미선에 입선하고, 육상 선수로 활약한 것이다.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을 두 번씩이나 지낸 그의낭만적 성품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특히 아시아 자유문학상(1960), 경희대학 문학상(1969), 한국시인협회상(1974), 국민훈장 동백장(1976), 서울 문화상(1981), 대한민국 예술원상(1985), 국민훈장 모란장(1986), 3·1 문화상(1990), 세계신인대회 공로상(1991), 대한민국 문학대상(1992) 등 수상 이력은 그의 왕성한 활동상을 잘 알게 해주고도 남는다.
그런 조병화 시인이지만 인천에서의 생활 중에서 짚어야 할 부분이 있다. 해방직후 인천교육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중시절 길영희 교장과의 불편했던 관계와 부인과의 불화 문제다.
그는 1943년 경성사범학교(중학교 격)를 졸업한 뒤 곧바로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전문대 격) 이과(물리, 화학)에 입학했다. 경성사범학교 시절에는 중등부 조선럭비대표로 일본에 원정까지 갔다고 한다. 동경고등사범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5년 6월 잠시 귀국했다가 해방을 맞아 국내에 눌러앉고 만다. 해방되던 해 자신이 나온 경성사범학교 교사로 물리와 수학을 가르친다. 그러나 당시 사정상 물리·화학 등과 관련한 연구, 실험시설이 없어 교사로서의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길영희 교장을 만났고, 1947년 9월 인중교사로 부임한다. 길 교장은 젊은 조병화를 끌어오기 위해 일제 때 일본식 2층 건물(적산가옥)을 제안할 정도였다고 한다. 둘을 연결지은 이 집이 결국 둘 사이를 갈라 놓는 동기로 작용했다는 게 제자들의 얘기다. 이 집을 당국으로부터 불하받은 조병화는 길 교장이 자신에게 집을 사게 해줬다고 생각했고, 길 교장은 단순히 빌려줬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길 교장은 집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둘 사이의 다툼이 시작됐다고 한다. 아직도 인중 출신 동문 사이에선 길 교장을 좋아하는 사람과 조 시인을 좇는 사람이 양쪽으로 나뉘어 있을 정도다.
둘 사이는 급속도로 서먹서먹해졌고, 결국 조병화는 1949년 서울중학교로 옮긴다. 서울중학교로 가던 해에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출간하는 데 이 때의 시는 대부분 인중시절에 쓴 것으로 보인다.
길 교장과 조병화 시인 사이의 불편한 관계에 대해 자세히 아는 사람은 몇몇 제자를 제외하고는 많지 않다.
김양수씨는 “물리와 수학을 가르치셨던 선생님은 수업이 끝난 뒤에 칠판 한 귀퉁이에 시를 써놓고는 했는데, 이게 결국 선생님의 시작업 초기 작품이었던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조병화 시인은 산부인과 의사인 김준씨와 1945년 9월 결혼했다. 어릴 적부터 가난한 생활을 계속해 오던 조병화 시인은 생활고를 벗어나고자 여 의사와 결혼했다는 얘기도 있다. 문제는 조 시인의 바람기.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시인에게 따르는 여성들도 많았고, 결과적으로 여성 스캔들이 부부 사이를 안좋게 하는 요인이 됐다고 한다. 그는 또 쥐꼬리만한 교사월급을 받는 자신에 비해 돈을 많이 버는 부인에게 일종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어떤 자리에서건 “부인이 돈을 벌어 걱정없이 생활할 수 있겠다”는 식의 얘기가 나오면 자리를 박차고 나갈 정도로 부인과 관련한 말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특히 어쩔 수 없는 부인과의 동행여행에서도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을 만큼 부부관계가 냉랭했다는 말도 있다. 부인의 성격도 만만치 않았다. 남편이 딴집살림을 차렸을 때 그 집을 찾아가 같이 사는 여자와 멱살잡이를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결국 둘은 이혼까지 했다. 그러나 아들(60)의 눈물어린 재결합 요청을 받고 재결합했다고 한다. 둘 사이는 하지만 끝내 `앙숙'으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1998년 부인이 세상을 떴을 때 문상객들에게 고인의 욕을 했다고 하니 둘 사이가 얼마나 벌어져 있었는 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는 부인 사후 4년이 지나 쓴 시(꽃나무)에서 부인에게 미안함을 절절히 털어 놓는다. `꽃나무(부인이 집에 심은 것)를 심은 그 사람은/ 내를 떠난 지 벌써 4년/ 꽃은 해마다 더욱 화창하게/ 내 가슴에 피어서 아파라/ 중략/ 아, 서운함/ 여보, 정말 미안하오/ 미안했구려…/ 가슴 아프게.'
일본어로 쓴 시가 우리말로 쓴 것보다 더 좋게 받아들여질 만큼 일본어에 능숙했던 조병화 시인은 일본 유학생활에 대한 그의 `반성'도 손자에게 비밀스럽게 얘기한다.
`이 비밀'이란 시에서 그는 우리 말에 서툰 점을 말하면서 `내 나라 사람이면서 내 나라 사람이 아니고'라는 표현까지 쓰며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일본에서 공부한 점을 아파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손자에게 자신처럼 살아선 안된다고 주문하고 있다. `…너는 완전한 우리나라 주인이야/ 하늘이 네 것이고,/ 땅이 네 것이고,/ 사람이 네 것이고,/ 역사와 자연이 완전히 네 것이야/ 네 것으로 살아야 해/ 부끄럽지 않는 주인으로 살아야 해…'
오늘을 사는 이 땅의 모든 이에게 그의 이런 바람은 아직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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