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계 거목 김은하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04 01:00:01
[인천인물100人]정계 거목 김은하
5·31 지방선거 이후 첫 인천시의회 정례회가 지난 5일 시작됐다. 기초의회도 일제히 개원해 있다. 저마다 `민심'을 등에 엎고 당선됐다는 `지방 선량'들이 나름대로의 의정 활동에 바쁘다. 이들은 모두 선거전에서 수십, 수백가지의 공약을 내걸었다. 본인 스스로 일일이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하니 그 `공약'의 얕음이 눈에 보이고도 남는다. 요즘 선거에 나서면서 시민에게 `공약'을 내세우지 않고, 나중 `결과물'로 보여주라고 하면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1952년 초대 인천시의회의원 선거에서 최연소, 최다득표로 당선되고 국회의원 6~11대까지 내리 6선을 지내면서 `야도(野都) 인천'을 일궜다는 김은하(1923~2003) 전 국회부의장. 김 전 부의장은 선거때 공약을 하지않는 정치인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모든 후보자가 선거에 나오면서 열심히 하지 않겠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것이다. 공약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김·은·하' 이름 석자가 인천바닥에선 너무 유명했던 탓도 있었겠지만 묵묵히 `일'로 승부하겠다는 그의 정치철학이 담겼다는게 일반적 평가다.
그는 특히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정확히 알았다. 그는 1988년 4월 26일 치러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돌연 불출마를 선언, 우리 정치계에 `수수께끼'를 던지기도 했다. 당시 언론은 87년 대선에서 야권(YS·DJ) 단일화에 실패해 결국 군부독재를 연장시켰다는 것을 불출마 이유라고 썼다.
김은하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3대 총선에 불출마 이유를 묻는 질문에 야권통합 실패를 거론하면서 “여섯번이나 인천시민들이 나를 국회로 보내줘 이제 중진급이 되었는데, 나로선 시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호소할 용기가 없다. 야권통합이 안되는 것은 야당사람 모두의 책임이며 국민에게 면목없는 노릇이다. 불출마 선언을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물론 그가 총선 불출마 이후 정계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시민에게 표를 달라고 다시 말할 면목이 없어 불출마를 했던 것이지 `민주화'를 위한 일까지 그만 둔다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후 상도동계(YS)나 동교동계(DJ)가 아닌 가운데서도 민주화 추진협의회에 들어가 활동한다. 또 통일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도 참여했고, 1994년엔 인천시의정회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현직 인천시의원들의 모임인 인천시의정회는 그의 손에서 탄생한 것이다.
인천에서 국회의원 6연속 당선의 기록을 세운 김은하의 정치력은 집안 내력에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인천시 남구 숭의동 209. 그가 태어난 곳이다. 지금은 남구청 민원실이 자리잡고 있다. `겸손'의 대명사로까지 불린 그의 부친은 숭의동 일대에서 농장을 크게 했다고 한다. 겨울에도 일거리를 찾을만큼 부지런했고, 흉년들 때면 동네 사람들을 위해 곳간도 열었다고 한다. 학생들이 오가는 길가에 있는 밭에 심은 무 등 먹을거리 일부를 학생들이 맘껏 뽑아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고 한다.
집 주변에서 얼어죽거나 굶어죽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는게 부친의 소신이었다고 막내 아들인 상봉씨는 회고했다.
이처럼 후덕한 김씨 집안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사람이 김 전 부의장이라고 한다. 인천 전역에 소문난 김씨 집안 인심탓에 그의 선거운동이 상대적으로 쉬웠다는 것이다.
창영초등학교와 동산중학교, 동국대학교를 나온 김은하는 1945년 8·15 광복 직후 극심한 혼란기에 `인천 학생응원대장'으로 선출돼 활동했다. 학생응원대는 당시 인천에선 유일하게 `중도우파 계열'의 젊은이 단체였다고 한다. 그해 겨울(12월 27일) 발표된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전국에 반탁운동이 활발했을 당시 20대 초반의 `젊은 김은하'도 인천에서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외에도 전국 학생연맹 서울시연맹 위원장, 경인통학생 학우회장, 국방부 정훈국 인천지구파견대 조사대장, 향토방위대 부대장 등의 직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젊은 시절의 김은하는 지역에서 수많은 활동을 했다.
이런 활약을 펼치던 그는 전쟁통이던 1952년 4월 첫 지방자치 선거에 출마, 최연소 인천시의원으로 당선됐다. 정치무대에 본격 등장한 것이다. 이때가 29세였다. 일부에서 30세로 얘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 언론은 일제히 29세로 보도했다는게 상봉씨의 기억이다.
그는 단순한 정치인이 아니었다. 언론에도 체육에도 관심이 유난했다. 집안에서 물려받은 중구 내동의 건물에 동양통신 사무실을 내고 경기지사장을 맡았다. 또 이 건물에 그는 폭격으로 터를 잃은 각 체육단체가 입주할 수 있도록 했다. 마치 체육단체의 총본산과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직접 경기도(인천)육상경기연맹 이사장·회장, 경기도(인천)체육회 회장 등을 맡기도 했다.
김은하 전 부의장의 `6선 국회의원'이란 화려한 이름뒤엔 그만큼 그림자도 크게 자리잡았다. 1958년 4대, 4·19 혁명 직후 치러진 5대 국회의원 선거에 잇따라 출마했다가 고배를 마신 것이다. 4대 선거에선 지역에서 후보로 선출된 뒤 중앙당에서 `정치적 야합'으로 인한 후보교체 사건까지 겪는 등의 우여곡절 끝에 무소속 출마해 낙선하게 된다. 중앙정치를 위한 시작부터 아픔을 겪었던 것이다. 불과 2년여 뒤 치러진 5대 선거에도 무소속으로 나섰다가 역시 패배했다. 그 1년뒤 5·16 사변이 터졌고, 63년 11월 6대 선거가 치러진다. 이 때부터 내리 85년 2월까지 6선 의원으로 20년 넘게 중앙정치 무대의 전면에서 활동한다. 그는 1985년 12대 선거에 나섰는데, 거센 신당 바람을 이겨내지 못하고 쓴맛을 봐야 했다.
그의 정치력은 75년 10월 신민당 원내총무에 뽑힌 뒤로 두드러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서슬퍼런 독재정권 아래서 야당 원내총무로서 대화와 타협의 귀재로 통했던 것이다.
당시 여당내에선 여·야의 원내총무가 뒤바뀐 것이 아니냐는 농담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이 김 의원의 제안을 상당수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국회부의장을 맡았던 2년간을 제외하고는 죽 교통체신위원으로 한 자리를 지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런 탓인지 그는 인천에 교통·체신 분야 업적을 많이 남겼다. 부천지역이 인천과 같은 전화번호(032)를 쓰게 된 것도, 간이역사이던 제물포 역사가 새로 지어진 것도, `시골'에 불과하던 남동구 만수동에 우체국이 생긴 것도 다 그의 노력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6량에 불과하던 경인전철을 지금처럼 긴 `장대형'으로 바꾼 것도 다 김은하의 역할이었다고 한다.
그는 68년 3선개헌 반대투쟁의 선봉에 서면서 인천에 `야도' 이미지를 심어 놓은 장본인이면서, 인천 정계의 `거목'으로 시민의 가슴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
아들 근영(47)씨는 “아버님은 정치 활동으로 바쁜 와중에서도 가족들에게도 늘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셨다”면서 “아버님은 인천에서도 자신과 같은 정치적 인물이 배출되기를 바라고 계실 것”이라고 말했다.
정진오 schild@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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