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아리랑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0 18:41:44
인천 아리랑...?
미국 옌칭도서관서 발굴 / 선대들의 항일정신 담겨
조우성의 인천이야기/ 인천 아리랑
인천 제물포가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883년 개항 전후였다.
당시 일본을 비롯해 청국·독일·미국·영국 등은 제물포 구릉지대에 무역 상사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조선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제물포는 어느 새 개화의 창구이자 노동 시장으로 급부상하였고,
전국 팔도에서 품을 팔러 온 노동자들로 붐볐다.
낯선 객지에 품을 팔러 온 이들에게 타향살이 애환이 없을 리 없었다.
지금까지 그들의 실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제물포를 '한국 노동 운동의 메카'로 조명하면서
당시 조선·동아일보에 보도되었던 부두 노동자의 파업을 단편적으로
이런저런 논문에 소개하는 데 그쳤던 게 저간의 사정이었다.
그런데 최근 인천 출신의 국문학자인 연세대 허경진 교수가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의 고서들'(웅진 북스 刊)이란 저서에서 그들이 불렀다는
'인천 아리랑'을 소개해 눈길을 모으고 있다.
1894년 일본 동경 박문관(博文館)에서 홍석현(洪錫鉉·훗날 관립한성고등학교 교장 역임)이 펴낸
'신찬조선회화'(新撰朝鮮會話)에 수록돼 있다고 소개된 '인천 아리랑'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천 제물포 모두 살기 좋아도/왜인(倭人) 위세로 난 못살겠네 흥//
에구 대구 흥/단 둘이만 사자나/에구 대구 흥 셩하로다 흥//
아라랑 아리랑 아라리오/아라랑 알션 아라리아(모두 슬픈 듯 부를 것)//
산도 싫고 물도 싫고/ 누굴 바라고 여기 왔나//
아라랑 아라랑 아라리오/아라랑 알션 아라리아(한 번 더 부를 것)//
이에 대해 허 교수는 연세대 학술지 '동방학지' 제115호에서 "(아리랑)가락은 그대로 불리면서
가사는 일본인들의 등쌀을 견디지 못하는 인천 주민들의 아픈 마음을 담아 고친 것이다...
이 노래는 그 뒤 인천 아닌 다른 지역에서도 한동안 불려졌다...
채록 연대가 1894년으로 올라갈 뿐 아니라...근대 민요('아리랑'-필자 주)의 개념을
19세기 일제 침략에 의한 사회 변동과정에서 생겨난 민요라고 규정지어야 할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인천 특유의 '아리랑'이 있었다는 것도 금시초문이요,
한국 '아리랑'사(史)에 '인천'을 편입시킨 것과 그 어느 도시보다도 치안이 삼엄했던
내 고장에서 항일 민요로 불렀던 선대들의 꼿꼿한 풍모를 밝혀낸 것도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이번 발굴은 연구가 일천한 인천의 생활문화사를 보다 풍요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사 연구조차 경직된 '시민 운동'의 한 방편으로 여기는 일부 연구자들에게는 타산지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광성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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