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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풍경

1924년 봄, 월미도 풍경

by 형과니 2023. 3. 27.

1924년 봄, 월미도 풍경

인천의관광/인천풍경

 

2007-03-10 18:42:59

 

1924년 봄, 월미도 풍경

 

 

신문으로 보는 그 시절 인천

 

흐드러진 월미도의 벚꽃,

그러나 조선의 꽃다운 청춘은...

인천에 꽃바다 - 연일 놀이도 많다

 

봄이 깊어갈수록 인천은 꽃의 바다를 이루어간다. 월미도(月尾島)로부터 송림산(松林山)까지 꽃은 웃음을 띄운다.

이때 인천에서 곳곳이 일어나는 꽃놀이는 연일 계속되는 모양인데, 우선 몇 곳의 꽃놀이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426일은 송림산 수도저수지 근처에 부청관앵회(府廳觀櫻會)가 있고 같은 달 27일 월미도에는 조선매일신문 주최의 관앵대회가 있고, 511일에는 용산철도국 주최의 가족 관앵대회가 월미도에서 열릴 터이며, 그 외에 조선신문 지국 주최의 야앵대회(夜櫻大會)가 만개시 10일간 동공원(東公園)에서 열린다고. (동아일보) 1924. 4. 20.

 

1924420일자 동아일보3면 중앙판 소식란에는 연일 놀이도 많다는 부제를 달고 벚꽃으로 꽃바다를 이룰 인천 곳곳을 소개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수도국산(水道局山)이란 이름으로 인천의 대표적인 달동네 지역을 상징했던 송림산의 원래 이름은 만수산이다. 이곳에 1910121일 수도국이 생기면서 수도국산이라 불렸던 것이다. 지금은 그 달동네마저 아파트 개발바람에 사라져 추억의 달동네박물관을 짓고 있지만, 1924년만해도 벚꽃이 볼만했던 모양인지 권세 있는 인천부청의 직원들이 이곳으로 관앵회(벚꽃놀이)를 나왔다.

 

1914년 세워진 인천신사(仁川神社)가 자리했던 동공원은 지금의 인천여상 자리인데 이곳은 철저한 일본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이곳에서 조선신문 주최의 야앵대회(밤벚꽃놀이)가 열흘 간이나 개최될 예정이라는 위의 기사는 우리의 마음을 씁쓸하게 한다. 긴 겨울을 견뎌 피어나는 봄꽃이 반갑기로는 예나 지금이 마찬가지. 진해 군항제나 여의도 윤중로의 야간 벚꽃놀이에 몰리는 많은 인파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왜 하필 신사가 자리한 일본공원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그 시절, 벚꽃의 명소는 단연 월미도였다. 월미도가 공원으로 본격 조성된 것은 1918. 개항 직후 일본과 러시아간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던 월미도는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 의해 조선 전체가 식민지가 되자 그 본래의 아름다운 풍광이 주목되었다. 1918년 풍치지구로 지정되면서 월미도에는 벚나무와 아카시나무가 대대적으로 심어지고 유원지로 본격 개발되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초반부터 봄이 되면 월미도에는 경인 각지에서 상춘객들이 찾아들었고, 각 신문사가 주최하는 관앵대회가 대대적으로 개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월미도의 봄과 벚꽃도 식민지의 백성들에게는 온전히 즐긴 자유가 없었으니 며칠 뒤 발간된 조선일보를 찾아 읽어보자.

 

 

두 여인이 월미도에 익사

 

어제 4일 아침 9시경에 인천 월미도에 있는 조선 사람들 사는 촌락 앞 바닷가에 젊은 여자 시체 둘이 떠있는 것을

지나가던 목선에서 발견하고 곧 수상경찰서(水上警察署)로 보고하였으므로, 수상서에서는 급히 현장에 출장하여 검시한 결과 죽기는 지난 3일 밤 8시경에 물에 빠져 죽은 듯하다 하며 그 두 여자는 인천 내리 일번지 술장사하는 최군일의 집에서 고용하는 여자로 한 여자는 이채운이라는 24살된 여자요, 한 여자는 김채봉이라는 27살된 여자인데 또 이채운은 290, 김채봉은 160원에 팔려와서 그 술집에서 손님이나 대접하고 세월을 보내는 가련한 여자들인데, 그 죽은 원인은 알 수가 없으나 전기 두 여자가 그 날 나가기는 월미도로 꽃구경하러 간다고 나갔었는데 뜻 없는 생활을 비관하여 그와 같이 빠져 죽은 것인 듯하다 하며 두 여자가 수건으로 허리를 서로 매고 빠졌다더라. (조선일보) 1924. 5. 5.

 

동공원의 벚꽃이 만개하여 야앵대회가 개최되고 있었을 53일 화려한 밤, 월미도로 꽃구경을 나왔던 조선의 두 여인은 생활을 비관하여 수건으로 허리를 서로 동여매고 꽃다운 청춘을 스스로 꺾어버리고 말았다. 생활고에 시달려 술집의 작부로, 거리의 들병이로, 카페의 여급으로 몸을 팔아야 했던 조선의 처녀들에게 벚꽃은 그래도 아름다웠을까.

 

그 화려했던 월미도의 벚꽃도 인천상륙작전의 엄청난 포화 속에 잿더미 되어 자취가 없더니, 인천시민에게 50년 만에 다시 돌아온 월미공원에 다시 봄이 왔다. 벚꽃이야 있건 없건, 이제 월미공원을 우리 손, 우리 나무로 아름답고 고귀하게 가꾸어 나가야 한다. 자손만대 물려줄 후손의 땅으로 소중하게, 그리고 천천히

 

글 이희환 (인하대 국문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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