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항일운동사-(4)노동자 조직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1 09:16:52
인천의 항일운동사-(4)노동자 조직
1924년 이후 노조설립 줄이어
인천의 항일운동사-16.노동운동 (4)노동자 조직
‘며칠 후에 간난이는 공장 뒷담 밑에 뚫린 수챗구멍으로 긴 나무쪽 끝에 새끼를 매어 밖으로 밀어 내 놓았다. 그 후로는 여공들이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자리 밑에서나 방 한구석에서 이상한 종이조각을 발견하곤 하였다. 그 종이에는 전날 밤 야학에서 감독이 연설한 것을 한 조목, 한 조목씩 띄어 쓰고는 그에 대한 해설이 알기 쉽게 써 있었다. 그들은 이 종이조각을 발견할 때마다 머리를 맞대고 재미나게 읽어보았다’(강경애 ‘인간문제’ 중)
인천에 나타난 최초의 노동자 조직은 1920년 6월에 건설된 조선노동공제회 인천지부다. 이전의 노동운동은 조직화하지 못한 채 지역 단위에서 ‘노동자 운동’의 형태로 진행돼 왔다.
그해 4월 서울에서 조직된 조선노동공제회의 인천지부로 인천노동공제회가 생기면서부터 노동운동은 본격적으로 조직화의 길을 걷게된다.
팽한주를 비롯해 800명이 모여 성황리에 설립된 인천노동공제회는 이후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보통학교학회를 조직하고, 각종 강연회를 개최한다.
9월 인천 축항사에서 개최한 강연회에서는 오상근이 ‘현하 노동문제와 오인의 희망’에 대해서, 신백우는 ‘노동생활의 근본인식’이란 주제로 강연해 청중의 환호와 갈채를 받았다.(동아일보 1920년 9월12일자)
이 시기 노동자를 대상으로 야학도 활발하게 일어난다. 1920년 7월4일자 동아일보는 ‘인천노동야학유망’이란 제하의 기사에서 하선운씨외 9명이 노동자를 대상으로한 야학을 만들었고, 그 회원이 130여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해방노동자그룹이 1920년 6월 설립한 ‘소성야학회’ 또한 같은 활동을 벌인다. 그러나 해방노동자그룹은 1923년 6월 노동계급의 단결을 도모하고자 소성야학회를 ‘인천소성노동회’로 개편한다. 박창한이 회장을 맡았고, 역시 노동강연회를 잇따라 개최하며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고양시키는 사업에 주력했다.
1923년 8월 서울 노동대회본부의 주최로 인천 축항사(현 애관극장)에서 열린 강연회에서는 최창익과 김영만, 장적파 등이 나와 ‘무산계급과 노동운동’ ‘노동계급의 신사명’, ‘노동자의 생존요구’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동아일보 1923년 8월26일자)
이에 앞서 조선일보도 8월25일자에 같은 행사를 자세히 보도하는 기사를 게재한다. 조선일보는 입추의 여지 없이 많은 청중치 축항사에 들어찬 가운데 연사들의 연설이 이어졌다고 보도했다. 또한 ‘(일본 경찰의)엄중한 경계 중에 주의와 중지가 여러차례 벌어졌지만, 여러 연사들의 열렬한 사자후는 현재 여러 불합리를 성토했다’고 보도한다.
각 직업별 노동조합이 생겨난 때는 1924년이다. 11월에 인천선미여공조합, 하역인부조합, 정미직공조합 등이 잇따라 조직됐다. 1925년 1월에는 서울철공조합의 지원으로 인천철공조합이, 8월에는 인천목공조합이 각각 설립됐다. 1928년 인천의 양랍(양초) 직공들이 조합을 조직하려다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이들 노동조합은 조선노동공제회와 달리, 파업투쟁을 조직하고 지도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이들은 8시간 노동제 실시나 임금인상, 임금인하반대, 단체교섭권 확립, 노동조건 개선 등을 노동자들의 당면요구로 내세웠다.
조선노동총동맹이 1924년 4월 건설되면서, 인천소성노동회도 박창한을 위원장으로 해 ‘인천노동총동맹’으로 개편한다. 1924년 5월7일자 동아일보에는 인천노동총동맹이 회관 건립을 위해 각 신문사의 후원으로 가부기좌에서 노동연극제를 열었다는 기사가 실린다. 인천노동총동맹 회원들과 노동야학 학생들, 제물포청년회원들이 사회극과 함께 동·서양 음악, 무도 등을 공연했다. 인천노동총동맹은 노동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노동자의 권익 보호에 앞장섰다. 각종 파업에 적극적으로 나서 경찰의 경고를 받기도 했다.(동아일보 1924년12월1일자)
1924년 11월 선미여공조합과 하역인부조합, 정미직공조합 등이 인천노동총동맹에 가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인천노동총동맹의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경찰의 탄압도 강화된다. 경찰은 치안유지법을 내세워 집행위원회를 방해하고, 정기총회도 금지시킨다.
조선노동총동맹이 노동단체와 농민단체로 분리하는 것을 결의하자, 인천노동총동맹도 1926년 4월 인천노동연맹으로 조직을 개편한다 여기에는 정미직공조합, 신문배달부조합, 마차부조합들이 참여했다. 개인적으로 참가한 회원들은 노우회(勞友會)를 조직했다. 1926년 6월 외리에 있는 노동연맹회회관에서 첫번째 정기총회를 연다. 인천노동동맹은 인천청년동맹과 함께 월간지 ‘정의’를 발행하는 등 청년들의 문맹퇴치 및 의식함양을 위해 활동한다.(동아일보 1926년 11월3일자)
인천이 노동운동은 1927년 중반 들어 침체에 빠진다. 노동운동이 조직적으로 발전했지만, 이들 노동단체들은 빠르게 혁명화하거나 의식화해가는 노동자들과 호응하지 못했다. 지도부는 노동자들을 혁명적으로 조직화하기 못했을 뿐더러, 일제의 탄압에 합법주의적 입장을 고수했다. 파업이 발생하는 경우, 노동자들에게 조정을 권고하고 자본가, 경찰 및 총독부에 타원하며 중재를 청하기도 했다.
이로인해 노동자들은 조직적인 뒷받침없이 파업을 벌인 경우도 많았고, 동맹파업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여성 노동자들이 실직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사정이 이러하자 이른바 ‘적색그룹’이라 불리는 혁명적 단체가 등장한다. 공산주의자들과 선진적 노동자들은 합법적 노동단체들의 개량주의적 상층부를 반대하고, 혁명적 노동조합 건설을 위한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한다.
이는 인천에서도 벌어진다. 1927년 6월 인천노동연맹은 집행위원회를 열어, 지도부의 타협적이고 배신적인 전술을 체계적으로 비판하고 불신임한다. 새로운 지도부가 선출될 때까지 산하단체로 부터 임시위원 7인을 선출해 집무할 것을 결정한다.
권평근, 김성규, 이창식 등이 합법적인 조직인 인천노동조합을 혁명적 조합으로 전환시키려 했고, 또 신보현, 김찬옥 등 부두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적색노동조합사건도 벌어진다.
김형선을 비롯한 정갑용, 김만석, 백봉흠 등이 인천적색노동조합을 건설하고, ‘공장뉴스’ 등 출판물을 간행해 노동자들을 계급적으로 조직하려고 했다.
강경애 소설 ‘인간문제’의 무대가 된 동양방적 인천공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박영선 등이 검거된다. 1935년 5월에도 이 회사에서 활동하던 적색그룹 회원 4∼5명이 검거된다.(조선중앙일보 1935년 5월7일자 및 8일자)
1930년대 들어서 각종 선전물 등이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뿌려져 일본 경찰을 긴장시킨 일도 많았다. 격문은 반일(反日)·반전(反戰)이나, 혁명적 계급의식을 전파하는 내용을 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 많은 청년들이 구속됐으며, 죄목은 출판법과 치안유지법 위반이었다.(중외일보 1930년 3월13일자)
1933년 메이데이를 앞두고 인천경찰서가 경계를 강화한 가운데, 예비 검속이 이어진다는 보도(조선중앙일보 1933년 5월1일자) 또한 눈에 띈다. 이날을 전후로 인천의 공장지대에 해외에서 인쇄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량의 격문이 배포, 경찰이 비상경계에 들어가 이튿날 ‘인천격문사건’으로 남녀 직공 및 학생 등 40여명이 붙잡혔고, 이 중 20여명만 풀려나기도 했다.(조선중앙일보 5월1일, 2일, 5일자).
일제하 노동자들은 스스로 노동계급으로서 계급적 이해를 깨우치고, 노동단체로 결합, 노동조합을 건설한다.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 투쟁에 나서지만, 크게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천의 노동운동은 독자적인 조직화의 길을 걷기 보다 서울의 조직체계가 변화함에 따라 함께 변화하는 길을 걷는다. 파업의 횟수나 강도도 지역적으로 비교할 때 서울이나 평양, 부산에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정미업 노동자들과 부두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한 노동쟁의를 보여준다. 이들은 임금인상을 요구하거나 임금인하 반대, 노동조건 개선 등에 나서기도 했으나, 일본인 감독들의 민족적 차별대우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김주희기자 blog.itimes.co.kr/kimju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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