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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강화로 - 풍요의 땅 향해

by 형과니 2023. 3. 28.

강화로 - 풍요의 땅 향해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1 17:19:19

 

 

김포는 `평야'`'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곳이다. 지금도 대단한 그 유명세의 중심지 홍도평 평야 뒤로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커다란 담장을 이루듯 에워싸고 있다.

 

사진/조형기전문위원·hyungphoto@naver.com

 

 

 

52.강화로>4< - 풍요의 땅 향해

 

 

#벼농사는 풍년이요, 물고기는 어찌 없으랴

 

개화산에 올라 옛 봉수대 터를 찾아보고 한강을 조망하면 좋겠다고 의논하였다. 그러나 군 부대가 있어 어렵다는 주민의 말을 듣고 답사 계획을 수정한다. 하늘로 날아다니는 봉수로를 확인해보고 한강 수로를 굽어보며 육로와의 관계를 살피려던 참이었는데. 개화산 봉수는 김포의 북성산과 서울의 목멱산 봉수에 응하였다고 하니 중요한 정보로였음에 틀림없으렷다. 또한 한강은 수천 년 동안 민족의 운송로로 쓰이지 않았던가.

 

이 자리의 중요성만큼은 지하철 5호선 개화산역과 김포공항,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및 경인고속도로,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 48번국도 등이 서로 얽혀 있어 어제와 오늘을 증명하고 있다. 개화산 미타사 오른쪽에는 육군전진부대의 호국충혼 위령비가 있는데, 1950626일부터 닷새 동안 개화산지구 전투를 통해 김포공항 사수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위령비 앞으로는 김포공항이 한눈에 보인다. 굉음만 들리지 않는다면 잠자리가 내려앉거나 날아오르듯이 보이는 비행기들, 그 너머로 황금빛보다 더 소중한 가을 들판이 넘실댄다.

 

 

지금은 인천국제공항에 그 역활을 이양했지만 한때는 대한민국 하늘의 출입문 역활을 담당했던 김포공항.

 

 

 

 

#배 한 척 없는 한강에 서서

 

행주대교 아래쪽에 서서 한강을 바라본다. 지난 7월의 큰물을 순전히 몸으로 버텨낸 윗벌을 가로질러 강변에 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동안 흘러왔을까. 행주대교의 두 삿갓 저쪽에는 행주산성이 한강에 그림자를 띄운다. 그러나 정작 한강엔 배 한 척도 떠 있지 않다.

 

수십 년 전만해도 무수히 떠서 오르락내리락하던 배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한강은 아직도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데.

 

140년전 9, 이 물길로 프랑스군 소속의 이양선(異樣船)이 거슬러 올라갔다. 그해에 일어났던 병인박해로 인해 죽음을 당한 자국 순교자들의 희생에 항의하고, 생존한 신부들을 구출한다는 명목이었지만 조선의 굳게 닫힌 빗장을 열어보겠다는 의도도 다분히 있었다. 이양선들은 하필 강화로의 출발점인 양화진까지 진출한다.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마치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아서 잠두봉(蠶頭峰), 혹은 용의 머리 같다고 해서 용두봉(龍頭峰)이라고 했던 곳이다. 주변이 하도 아름다워서 중국 사신이 오면 유람선까지 띄우고 뱃놀이를 했다는 곳이다. 그러나 강화부터의 이 물길은 조선의 자존심이었다. 흥선대원군의 불편한 심기가 폭발한다. ‘양이(洋夷)로 더럽혀진 한강물을 서학(西學)무리들의 피로 씻어야 한다고 하면서 천주교 박해에 박차를 가한다. 특히 아름다운 잠두봉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학살은 그 이름마저도 혐오스러운 절두산(切頭山)으로 바뀌게 하였다. 지금은 천주교 절두산 성지가 돼 성당과 순교자기념관 등이 들어서 있다.

 

배 한 척 떠 있지 않은 한강에 서서 이처럼 수많은 사연을 실어 날랐을 물을 한 번 더 바라본다. 한북정맥과 한남정맥이 한방울 한방울씩 모아온 물이 이렇게 크고 너른 물이 되었다니.

 

비포장의 윗벌을 다시 가로지르려면 또 한 차례의 진통을 겪어야 하리라. 다행히 새로 바꾼 조형기 전문위원의 바퀴 큰차 덕분에 포장은 커녕 전혀 다듬지도 않은 벌판길 답사도 잘할 수 있었다. 새 차에 두텁게 쌓인 흙먼지보다 조 전문위원의 마음은 더 무거웠겠지만.

 

 

 

 

조심태 선생은 수원 화성을 축조할 때 감동당상(총감독)을 지냈으며 묘소는 나진교 옆에 있다.

 

 

#조심태 선생의 묘소

 

김포에는 장릉을 비롯하여 중봉 조헌 선생의 우저서원 등 역사 인물의 자취가 많은 곳이다. 그러나 옛 강화로이면서 지금의 48번국도 나진교 옆에 있는 조심태(1740~1799) 선생의 묘소는 거의 방치되어 있다고 할 만하다. 김포시의 문화유적 명부에도 올라 있지 않으며, 이정표는 커녕 안내판도 하나 없다. 조심태 선생이 누구인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화성을 축조할 때 감동당상(총감독)을 지낸 사람이다. 28개월여 만에 화성을 완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정조 임금의 의지 못지않게 현장책임자로서 조심태 선생의 능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 세계인의 찬사를 받는 화성 뒤에는 뛰어난 무신이면서 화성유수였던 조심태 선생의 역할이 컸던 것이다. 이런 능력 있는 인물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면 김포의 자랑이 아닐까.

 

 

 

#오천 년 역사의 벼 재배지

 

김포는 평야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곳이다. 지금도 김포쌀의 유명세가 대단하여 김포금쌀상표는 밥맛 좋기로 소문이 나 있다. 예부터 북으로는 한강 하류에 임하여 토지가 평평하고 기름져 백성이 살기 좋은 곳이었고, 벼가 익을 무렵의 적정온도와 일교차도 꼭 들어맞아서 논농사에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통진읍 가현리에서 출토된 탄화볍씨이다. 4천 년 전의 유적임이 드러나면서 김포시 한복판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벼 재배지 기념물(2003년 김포미술협회 제작)도 세웠다.

 

 

6.25전쟁당시 개화산지구 전투에서 김포공항사수의 역사를 기리는 육군 전진부대의 호국충혼 위령비.

 

 

지난 31일 경기문화재단의 후원으로 벼재배동우회 회원들과 이곳을 답사하였다. 작물과학원의 박태식 박사는 기후와 토질 등을 들어 김포쌀이 유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역설하였다. 또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발굴된 탄화볍씨는 15천년 전의 재배벼라고 하면서 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라고도 하였다.

 

48번 국도를 중심으로 그 좌우에는 고인돌이 많다. 운양동의 고인돌 무리와 마산리의 고인돌들을 비롯하여 석모리 고인돌과 통진 고정리의 고인돌 등, 강화도에 있는 120여 기의 고인돌과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그만큼 옛사람들이 살기에 좋았던 곳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더구나 그 시기(청동기)에는 집단으로 모여 살면서 농사를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옛 강화로 자체가 청동기시대에도 존재하지는 않았을까? 청동기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일어난 침식 작용이었겠지만 김포반도와 강화도, 석모도, 교동도 등은 원래가 한 몸이었을 것이다. 한강이며 임진강이며 예성강 등이 끊임없이 물을 내려 보내서 분리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이 부근 지도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통진에서 강화로

 

금년 벼농사는 풍년이로세 어촌에 등불이 깜박거린다. 남강에 가을물 줄었다 하니 농어도 게도 그물질할 만하겠지”-서거정의 통진팔영(通津八詠) 가운데 격안어화(隔岸漁火)

 

풍요로운 가을의 정취가 파란 하늘처럼 선명하게 느껴진다. 들판에는 벼가 풍년이니 내년 걱정이 없어질 것이고 물속에 고기들이 살지고 있으니 오늘 당장이라도 별미를 맛볼 수 있겠지.

 

강화대교를 건너 48번국도로 직진한다.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 인진나루에 도달한다. 그러나 나루도 옛 일이 되고 말았다. 창후리로 옮겨간 탓이다. 옛 인진나루 교동도가 바라보이는 초소에서는 북녘의 산하도 보인다. ‘물고기도 오가고 새도 오가건만어느 실향민의 마음인지 글씨가 춤추듯 흔들리고 있다.

 

양성지(梁誠之)의 시에, `지역이 고양(高陽)과 닿았으니 응당 술은 있으렷다. 강이 한수와 닿았는데 어찌 물고기가 없으랴'고 김포를 읊었는데 우리는 물고기 안주 대신 강화도의 젓국갈비에 푹 빠졌다.

 

/염상균 역사탐방연구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