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로- 포구와 다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1 17:34:16
[길, 그곳으로 가다·51]
한남정맥이 만들어낸 크고 작은 川 김포땅 적시우고 한강에 손 담그다
경인일보 webmaster@kyeongin.com
우리말로 `개' `포(浦)'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말한다. 한강에 접한 김포일대에 개가 많은 이유는 한남정맥이 만들어 낸 크고 작은 산들에서 발원한 하천이 제각기 한강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사진/조형기전문위원·hyungphoto@kyeongin.com
51.강화로>3< - 포구와 다리
우리말로 개, 한자말로 포(浦)는 강이나 내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을 말한다. 서해 바닷물이 노량진, 또는 동작진까지 올라왔다고 하는데 그 위로도 두모포(斗毛浦)·개포(開浦) 등이 있는 것을 보면 포라는 명칭이 붙기 위해서 반드시 바닷물이 드나들어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과거 삼개, 즉 마포가 한강 물자유통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배들이 조수의 힘으로 가장 멀리 올라올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한강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개는 북한지역인 북안에는 황강포(黃江浦)이고, 남안에는 강령포(康寧浦)와 조강포(祖康浦)다.
통진의 강령포와 조강포는 한강 및 임진강의 공동 하구로 강폭은 넓고 나루터로도 적합한 곳이지만 비가 많이 오면 물 흐름이 빨라져 물살이 잠잠해질 때가 아니면 배를 운항할 수 없었다. 그래서 평소에도 물때를 기다리기 위해 계류하고 있는 배가 많았던 곳이다. 나루는 한자표기로 도(渡)·진(津), 또는 도진(渡津)이다. 원래 도는 주로 관용(官用) 나루를, 진은 민용(民用) 나루를 가리킨 것이었다고 하나 조선 후기에 이르면 이러한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포구의 폭이 큰 곳은 다리 놓기가 힘들어 나룻배를 이용하여 건넜다.
김포는 개 이름이 행정명칭으로 발전하여 우리에게 친숙한 지명이 되었다. 김포의 원래 이름은 검포(黔浦), 혹은 감암포(甘巖浦)로 현재 위치는 김포시내 북변동이다. 강화로의 중간지점인 김포 주변을 살펴보면 감암포 말고도 그 전후로 굴포(堀浦)와 걸포(傑浦)가 있고 감암포를 지나 강화쪽으로 더 가면 양릉포(良陵浦)가 있다. 실은 그 외에도 이름을 붙이지 않은 작은 개가 사이사이에 더 있다.
김포현의 옛 지도를 보면 북쪽으로 진산(鎭山)인 북성산이 있고, 백석산과 가현산이 현 서쪽에, 천등산과 부정산 및 운요산이 현 동쪽에, 그리고 망산이 남쪽에 있는데, 현재의 산 이름과 일치하지 않는다. 한강에 접한 김포 일대에 개가 많은 이유는 한남정맥이 만들어 낸 이 크고작은 산들에서 발원한 내(川)가 제각기 한강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형상은 마치 손을 물에 반쯤 담근 상태를 상상하면 된다.
▲ 굴포교
▲ 건설중인 인천공항철도
굴포천(堀浦川)은 부평에서 북류하여 고도강(孤島江)을 지나 한강으로 흐르는데, 한강 가까이 갈수록 내의 폭이 넓어져 다리 놓기가 힘들다. 그래서 반대편인 내 안쪽 깊숙한 곳에 놓은 다리가 판개다리, 또는 굴포교인데 강안에서 멀지않은 현재의 굴포교 위치와 다르다. 강화로의 김포구역인 판개다리를 건너면 바로 이어 학교(鶴橋)를 건넌다. 학교를 토교(土橋)로 표시한 지도도 있다.
강화로는 다음으로 천등고개를 넘고, 읍치로 들어가기 전에 절근교(折斤橋)를 만난다. 절근교는 곡근교(曲斤橋)로도 표기하는데, 꺾은다리가 우리말이다. 다음 행로는 곧장 진행되지 않고 향교와 관아가 있는 읍치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 조헌(趙憲·1544~1592)선생을 모신 우저서원(牛渚書院) 못미친 곳에서 굴포천을 건너는 나진교(羅津橋)와 와교(臥橋)를 만난다. 꺾은다리처럼 나진교는 낮은다리, 와교는 누운다리의 한자 표기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굴포천은 포구의 폭이 넓어 다리를 놓는 대신 나루로 건넌 때도 있었음을 양성지(梁誠之·1415~1482)와 관련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다시보는 경기산하' 연재 때도 언급한 바 있지만 양성지의 별서가 양곡면 대포곡(大浦谷)에 있었으므로 그가 서울 출입을 위해 강화로를 자주 이용하였음은 자명하다. 그 당시 양성지가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굴포천을 건너는 다리를 만드는데 매년 많은 비용이 들었음을 알고는 개선책으로 나룻배를 두고 건너게 하였다. 한말에는 꺾은다리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다리 놓는 기술이 발달해서인지 굴포천을 도선(渡船), 즉 나룻배로 건넜다는 기록은 없다.
▲ 굴포천방수로공사
통진으로 들어오면 이름 없는 다리 둘을 건너고 이어 양릉교(陽陵橋)를 만난다. 양릉포교(良陵浦橋)라고 한 표기도 있다. 현재 김포시 양촌면 양곡리의 누산교를 말하는데, 이 다리 역시 개를 건너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이와 같이 김포와 통진에 형성된 포구들을 일일이 건너가야 했던 옛 강화로의 진행 모습은 현재와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넘기 힘든 산은 피해 돌아가야 하고, 폭이 넓은 개는 포구 안쪽 깊숙이 놓인 다리로 건너야 하므로 산을 피해 갈 때는 강안 쪽으로 치우쳐 돌아가다가 다리를 건널 때는 다시 내륙으로 들어와 강안과 멀어진다. 현재 강화대교까지 거의 직선으로 난 48번 4차선 국도와는 달리 과거에는 S자를 그리며 우회하여 간 것이다.
현재 48번 국도는 과거의 강화로를 모체로 하기 때문에 김포와 통진에서는 가장 중요한 도로라고 할 수 있다. 이 길의 역사는 일제시기인 1920년경에 있었던 신작로 개설에서 시작된다. 당시 길을 직선으로 내면서 앞서 언급한 다리들은 대부분 위치 이동을 하여 콘크리트로 만든 새 다리로 대치되었다. 돌로 만든 과거의 아름다운 홍교(虹橋), 즉 무지개다리들은 그간의 무관심으로 이제 그 흔적도 볼 수 없다.
48번 신작로는 오랫동안 비포장 상태로 있다가 1992년말에 과거 양릉교로 불렸던 누산교까지 포장되었다. 이때 굴포교도 4차선 도로에 맞추기 위해 1989년 12월 30일부터 1992년 12월 29일까지 만 3년간 확장공사를 하였다. 2차선 다리 두 개를 나란히 놓은 굴포교 주교 옆으로는 각각 보행자를 위한 철근 부교(副橋)가 설치되어 있다. 이번 답사때 보니 완공된지 14년도 안된 멀쩡한 굴포교 옆에 또 새로 다리를 놓는다고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 용화사 미륵
김포 관내의 지방도로 중에서 교통량이 가장 많은 길은 인천에서 계양을 거쳐 김포시 사우동까지 오는 307번 2차선 도로다. 48번 도로 진행방향이 동서축인 반면 남북축을 이루고 있어 천을 넘어야 하는 일이 별로 없다. 김포 관내의 길은 이 두 길을 중심으로 동서와 남북으로 바둑판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의 지도를 보면 남북으로는 서울외곽순환고속국도가, 동서로는 인천국제공항고속국도가 바둑판을 굵은 `十'자로 나누어 놓았다. 인천국제공항고속국도는 김포와 인천의 경계 부근을 직선으로 달리는데, 이와 병행하여 굴포천 방수로와 공항철도가 건설중이다. 굴포천방수로 공사현장에서 참여정부가 들어서며 철회된 경인운하건설의 꺼진 불씨가 되살아나는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번 강화로 답사에서도 두 기의 석불을 만났다. 하나는 김포공항 북쪽 한강변에 위치한 미타사의 석불이고, 다른 하나는 김포시 운양동 용화사의 석불이다. 미타사 석불은 서 있는 자리가 원래의 위치인지 알 수 없고 그 내력에 대한 기록도 없다. 그러나 용화사 석불의 위치는 과거 감암포 자리여서 포구신앙과 무관하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석불은 제방도로를 타고 강화방면으로 가다가 누산리 평야가 시작되는 지점의 용화사 용화전에 모셔져 있는데, 무릎 부분을 보면 그 밑이 땅에 묻힌 상태로 운양산 자락에서 한강을 바라보고 서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석불과 관련된 전설도 뱃사공이 강에서 석불을 건져내어 모셨다는 내용이어서 이를 간접적으로 뒷받침한다.
/정승모 지역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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