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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용동 마루턱

by 형과니 2023. 3. 30.

용동 마루턱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5 04:28:09

 

용동 마루턱

 

 인천의 원래 지형을 머리에 그려보자. 그때는 지금 처럼 도로도 철도도 집도 없었다. 다만 산줄기가 이어지고 낮은 골 깊숙이 바닷물이 드나들었을 뿐이다. 그것이 이름으로만 남아있는 수문통이요 터진개이다. 그러니 인천은 하나의 작은 반도형이다. 지금의 간석동 만월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나온 산줄기가 그것을 버텨주는데 처음 수봉산을 만들고 도원동과 율목동 그리고 용동 마루터기로 해서 자유공원으로 이어진다.

 

 이를테면 용동 마루터기는 멀리 백두의 맥에서 마지막 바다 끝자락으로 달려온 산줄기가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용동 마루턱이라고 했다. 마루턱이란 산줄기의 두드러진 턱이며 이 일대가 용의 형국이라 해서 용현이니 용리니 용동이니 하는 동명을 낳았다. 그러나 산허리를 끊어 몇군데 신작로를 내느라 지금 그곳에서 용의 형태를 그려보기는 힘들다.

 

 아무튼 용동 마루턱은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첫번 변화를 가져온다. 개항당시 포구에서 가까운 자리 내동에 감리서가 자리하고 그 뒷쪽 언덕을 따라 잇달아 멋대로 집들이 무질서하게 뻗어나갔다. 제대로 된 도로도 없었다. 그것이 바로 잡아진 것은 1900년이었다. 이훈익옹의 "인천지지"에는 그해에 용동부근 시가지 조성을 위해 민가를 철거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이렇게 해서 줄곧 용동은 인천의 번화가가 된다. 급격한 시대변화에 따라 옛모습을 찾을길 없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인천의 유흥가이기도 했다. 중앙로에서 신신예식장으로 들어서는 골목의 능인포교당은 인천최초의 불교포교당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척에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이던 협율사의 후신인 애관극장이 있다. 또한 개항당시에 있었던 유적지 같은 용동 큰우물은 해방당시만 해도 수도사정이 좋지 않았던 시민에게 큰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칼국수집을 비롯 음식점들이 즐비할뿐 옛 영화(?)를 찾을길 없다. 동의 면적만 보아도 중구관내서 가장 작은 동이 되어있다. 5일자 본보의 용동 마루턱에 설치된 인천 최초의 교통신호등 사진이 금석의 무상함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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