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포(외포리)의 돌하르방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5 04:29:50
정포의 돌하르방
외포리는 강화도 서안의 작은 포구이다. 석모도로 페리가 오가느라 원근에서 바닷바람을 찾아 오느라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본래의 지명은 정포(井浦)였다. 우물이 있는 포구라는 뜻이듯 예전에는 물이 풍부한 우물이 있어 주민이 애용했다고 한다. 그런것을 일인들이 외포(外浦)라고 했다.
그곳에서 700여년전 전남 진도를 향한 삼별초군의 긴 항해가 있었다. 1270년(고려 고종11년)이었다. 강화도에서 40년간 버티던 고려는 더이상 어쩔수 없어 몽고에 굴복 개경으로 환도한다. 그러자 불만을 품은 삼별초군이 반란 항몽하게 되는데 이또한 장기간 강화도에 체류하지 못하고 떠나게 되는 것이다.
징발한 선박이 1천여척이나 되는 큰 규모였다. 여기에 재화와 부녀자들까지 태우고 출발했는데 어찌나 배의 행렬이 길었던지 맞은쪽 구음(仇音)까지 배꼬리가 이어 닿은 상태에서 서해로 나가 남행을 계속하게 된다. 육지에서는 이산의 통곡소리가 가득했다고 전한다.
삼별초란 몽고란때 강화 천도를 강행한 무신 최우의 사병 조직이었다. 당초 야별초라고 했으나 점차 조직이 확대하자 좌우 별초로 나누고 몽고군에게 포로되었다가 도주해온 병사들로 신의군을 조직함으로써 삼별초라고 칭했던 것이다. 이들이 권신의 사병이었던 것은 사실이나 몽고와의 굴욕외교에 반발 항몽의식에 불탔던 것만큼은 의미가 깊다.
강화도를 떠난 그들은 두달반만에 진도에 도착했다. 그리고 진도를 수도로 정하고 남해 거제 제주 등 30여 도서를 장악 한때 해상왕국을 형성했었다. 그러나 여몽 연합군의 토벌도 본격화되어 제주도로 옮겨 본거지로 삼았으나 이마저 함락 잔여세력은 한라산으로 들어가 막을 내리게 된다.
최근 삼별초의 재조명 움직임이 활발하여 1993년 출항하던 자리에 ‘항몽유허비’를 세우고 2년전에는 강화 진도 북제주군이 합동으로 세미나도 연바 있다. 2일 유허비가 세워진 광장에서 북제주군이 기증한 돌하르방 제막식이 있겠다고 한다. 함께 선인들의 자주정신이 앙양되는 계기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