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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이야기

대각국사 의천은 인천서 태어났다

by 형과니 2023. 3. 31.

대각국사 의천은 인천서 태어났다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6 04:49:41

 

"대각국사 의천은 인천서 태어났다"

 

 

인천에서 태어난 대각국사 의천(義天)과 고려시대 인천의 행궁(御室)

 

  이 형 석(한국땅이름학회장)

 

 ◇관찬 역사서와 민찬 역사서 -의천의 인천출생 기록

 

 고려 제11대 문종(文宗·재위 1046~1083)의 넷째아들이며 해동 천태종을 개창하고 속장경 4740여권을 간행한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1).

 

 의천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김부식이 쓴 영통사 비명의 기록인 을미년(1055) 928,

궁중에서 탄생했다는 내용에 의거, 막연히 개성에서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돼 왔다.

 

 그러나 1933년 인천부가 편찬한 <인천부사(仁川府史)>에는

고려 숙종의 어머니인 인예(仁睿)왕후 이씨의 내향이기 때문에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되었으며 대각국사가 배출된 때문이다. 대각국사는 인천(현 부천군 관교리)에서 탄생했다고 기록돼 있다.

 

 1871년 발간된 <인천부읍지>에는 고려 순종, 숙종 때 군() 객사 뒷편 대청을 어실(御室)로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어

대각국사는 인천의 어실(別宮) 또는 부근에 위치한 외가에서 출생, 대각국사 비문의 기록인 궁중에서 탄생했다는 내용과 일치한다.

 

또 인천(인주) 이씨가 고려 왕실과 인척관계를 맺게 된 것은 이허겸(李許謙) 때의 일이고 이자연 때에 이르러서는 왕가의 외척으로 등장하게 됐다.

 

 인천을 7대 어향(7代 御鄕)이라 부르는 것은 고려 제11대 문종에서 제17대 인종에 이르는 780년간 왕의 외향(外鄕;외가)이거나 왕비의 내향(內鄕;친정)이었기 때문이다.

 

 ()’자는 왕에게만 사용되는 글자로서 어향이란 왕의 고향(뿌리)’이란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1842년 발간된 <경기지>에는 어용고(御用庫)-3, 不知創, 以是 月尾島行宮創置時設란 기록이 보인다.

 

 역사서는 <삼국사기> <왕조실록> <부읍지(府邑誌)> 등 국가나 지방기관(府邑)에서 편찬한 관찬(官撰)역사서와

<성호사설> <연암일기> 등 개인이 편찬한 민찬(民撰)역사서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인천부사> <인천부읍지> 등의 기록은 관찬역사서의 기록으로 객관성과 신뢰성이 높은 기록들이다.

 

 ◇외가에서 낳고 자라는 고려의 출산풍속

 

 1452년 편찬된 <고려사절요> 인종 42, 신유(辛酉)(인종)이 외가에서 생장(生長;나서 자라남)하였으므로

그 은혜를 끊을 수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의 당여가 조정에 가득하여란 기록으로 미뤄 보아

인종은 확실히 외가에서 낳고 자랐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열전 명의태후 류씨조에는 숙종 2년 궁주가 아들을 낳으니(生子) 왕은 사신을 파견하였다고 기록돼 있으며

같은 책 문경태후 이씨조에는 예종 4년 사저(私邸)에서 원자(元子)를 낳으니 그가 바로 인종이다.

왕이 사신을 보내 조서를 내리고 은그릇, 능라 등 선물을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공예태후 임씨도 1127년 의종을 낳았을 때 왕이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다.

 이는 왕의 비빈이 왕손을 친정에서 출산하는 관례가 있었으므로 왕이 사신을 파견, 축하해 주었음을 보여 준다.

 

 고려 때 외가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기른다는 풍속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태종조)29에는 예조에 아뢰기를 전조(고려)의 구속 혼인의 예는 남자는 여자 집에 들어가

자식이나 손자를 낳고 기르므로 외친의 은덕은 중하여 외조부모, 처부모의 복은 30일로 한다고 기록된 것으로 미뤄 고려 때

친정에서 출산하는 일은 당시 생활풍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외할아버지인 이자연은 당시 최고의 벼슬인 시중이었으며 서울인 개성과 친정인 인천은 멀지 않은 거리였으므로 대각국사는 외가인 인천에서 출생했을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고 있다./

 

 

 상자 :<현장보고>의천의 외가는 현 인주초등학교

  -의천 탄생 추정지 표지석 건립

 

  윤 관 옥(중부일보 기자)

 

 대각국사 의천의 탄생지는 인예태후의 친정으로 외할아버지 이자연(李子淵)의 집()인 인천 문학산 북쪽(현재의 남구 관교동 부근)으로 추정된다.

 

 의천이 탄생한 1055년은 이자연(53)이 명상 최 충의 뒤를 이어 재상(시중)이 되어 권세가 높은 때였다.

 

 남구 학익215-12번지에 거주하는 홍종식(洪鍾式·1924년생)옹은

1949, 인천소년형무소 재직시 도서실에서 <인천소년형무소 요람>이란 책자에서

형무소 동쪽 계곡을 속칭 <인주골>이라 하며 이 곳에서 고려시대 문종의 4왕자인 대각국사 의천이 탄생하였다

기록을 확인했다고 증언한다.

 

 학익동 재운리 마을에 거주하는 이영진(李英振)씨가 인주골이 경원 이씨가 거주했던 곳으로 대각국사 의천이 탄생했던 곳이었다고 설명했다고 증언했다.

 

 또 이당 김은호의 사촌동생 김현호(金鉉鎬)옹을 비롯 하영성(河永成), 박세림(朴世霖), 송모옹, 김모옹 등도

그 곳(현 인주초등학교)이 대각국사 의천이 탄생한 곳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인천 향토사학자와 각계 인사들은 2000428일 가천문화재단 강당에서 의천 탄생지에 관한 학술토론회를 개최,

깊이있는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어 의천 탄생지 표지석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해 현지를 답사했으며 같은 해 928일 인주초등학교 강당에서

황수영 동국대 명예교수를 초빙, 특별강연을 듣는 한편 교정에 표지석을 건립하고 헌다식을 거행했다.

 

 이 표지석에 관한 고증자는 황수영·이훈익·홍종식옹이었고 추진위원장은 이성구·김관철·김동순·이귀례·정명환씨였으며

건립 경비는 150여 만원의 시민성금으로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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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 (義天 ; 1055~1101)

 

고려시대의 승려로서 천태종(天台宗)의 개조(開祖)이다. 자는 의천이며 시호는 대각(大覺)이다.

이름은 후()이며 호는 우세(祐世)로서 문종의 넷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이다.

11살 때 왕사(王師) 난원(爛圓) 밑에서 승려가 되어 구족계를 받고, 오관산(五冠山) 영통사(靈通寺)에서

난원으로부터 화엄(華嚴)의 교관(敎觀)을 배웠다.

 

1067년에 최고 승직(僧職)인 승통(僧統)에 올랐으며, 불경에 대한 승려 및 학자들의 저술을 집대성할 것을 맹세했다.

1077년 처음으로 화엄경과 그에 대한 연구서를 강의했다.

 

의천은 불교전적을 수집하고 화엄학과 천태학의 교리상의 차이점을 알아보고자 중국 송()나라에 유학할 것을 결심했다.

1084(선종 1) 1월 유학을 허락해달라고 국왕에게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이듬해 5월에 왕과 태후에게 편지를 남기고 몰래 제자 수개(壽介)를 데리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7월에 송나라 서울 변경()에 들어가 철종(哲宗)을 만나고 계성사(啓聖寺)에 머물렀다.

철종의 추천으로 화엄종 승려 유성(有誠)을 만나 법장(法藏)5교판(敎判)과 지자(智者)4교판의 차이 점에 대해 문답을 나누었다.

송의 관리 양걸(楊傑)을 안내자로 삼아 지방으로 가서 항저우[杭州] 대중상부사(大中祥符寺) 정원(淨源)에게

화엄·능엄(楞嚴원각(圓覺기신(起信), 법장·지자의 불교에 대해 토론했다.

이어 천태종 승려 종간(從諫)을 만나 천태의 교관을 토론하고, 다시 혜인원(慧因院)에 가서 정원을 만났다.

 

혜인원에 머물 때 불교전적 7,500여 권을 기증하고 많은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결과 원래 선종에 속했던 혜인원이 화엄종으로 바뀌었으며, 이름도 고려사(高麗寺)라 하게 되었다.

곧이어 천태산 지의()의 탑을 참배하고 본국에 돌아가 천태교학을 선양할 것을 맹세했다.

 

이와 같이 의천은 송에 머물면서 당시 활동하고 있던 거의 모든 종파의 고승들을 만나 불교에 대하여 토론했다.

의천의 이러한 활발한 교류와 불교전적 수집에 대하여, 당시 관직에 있던 소식(蘇軾)은 몇 차례나 상소문을 올려 비판했지만,

송나라 조정은 오히려 의천을 환대했다.

 

1091년 흥왕사에 교장사(敎藏司)를 설치하고 중국·일본·거란 및 국내에서 수집한 전적 4,000권을 모아

속장경 續藏經간행에 착수했으며, 그 예비목록으로서 신편제종교장총록 新編諸宗敎藏總錄3권을 간행했다.

 

<신편제종교장총록>의 상권에는 경의 장소 5612, 586, 중권에는 율의 장소 142467,

하권에는 논의 장소 3071, 687권이 각각 수록되었는데, 모두 합쳐 1, 0104, 740권이 된다.

 

1094년 홍원사(洪圓寺) 주지가 되었으나, 그해 5월 조카인 헌종이 즉위하고 인주이씨가 집권하자,

인주이씨의 지원을 받은 법상종 교단측이 의천의 천태종 개창을 비판했다.

 

이에 의천은 해인사(海印寺)에서 은거하다가,

1096(숙종 1) 친형인 숙종이 쿠데타로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되어 인주이씨 세력을 숙청하자 다시 흥왕사로 돌아왔다.

이듬해 인예왕후의 원찰(願刹)인 국청사가 완성되자 그 주지직을 겸했다.

 

그뒤 1099(숙종 4)에 천태종의 승선(僧選)을 행하고,

1101년에는 국가에서 대선(大選)을 실시함으로써 천태종은 국가에서 공인한 종파가 되었다.

그리고 110110월에 국사(國師)로 책봉되었으며, 책봉된 지 이틀 만에 입적했다.

 

1101(숙종 6) 105, 문병 온 형왕(兄王) 숙종에게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 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나이 47 , 법랍 36세로 입적하였다. 문도들이 그의 사리를 영통사에 안치했다.

 

고려의 불교가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갈라져 대립하던 당시에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역설하고,

화엄종인 규봉(圭峰)의 학설로 고려의 교종을 통일한 후, 선종의 교리에 입각, 천태종을 개창하여

선종의 종파를 통합하고 원효(元曉)의 중심사상인 일불승(一佛乘)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원리에 입각하여

고려 불교의 융합을 실현, 한국 불교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유학(儒學)에도 정통하였다.

 

한편, 1095(헌종 1)에는 화폐사용을 건의하여 1102(숙종 7) 한국 최초의 엽전인 해동통보(海東通寶)이 주조되었다.

 

<신편제종교장총록>3, <신집원종문 류(新集圓宗文類)>22, <석원사림(釋苑詞林)>250,

의천의 제자들이 그의 행적과 시 등을 모은 <대각국사문집(大覺國師文集)>23권과 <대각국사외집 (大覺國師外集)>13,

<간정성유식론단과(刊定成唯識論單科)>3, <천태사교 의주(天台四敎儀註)>3권 등이 있다.

그러나 이 저술들이 거의 없어지고 현재 는 <신편제종교장총록>3권과 <대각국사문집>, <대각국사외집>의 낙장본,

<원종문류>, <석원사림>의 일부, <간정성유식론단과>만이 전하여오고 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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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 의천의 차선일미와 뇌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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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환 ()한국차문화협회 이사·편집주간

 

승주군 쌍암면 죽학리 조계산(曹溪山)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선암사(仙巖寺)

백제 성왕 7(529)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를 거쳐

고려 선종 9(1092) 대각국사(大覺國師·1055~1101) 의천(義天)3(三創)한 이래

송광사와 더불어 남쪽의 가장 유명한 명찰로 이름이 높았다.

 

육우의 다경에서 차는 남쪽에서 자란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선암사 주변에는 야생 차나무 군락이 즐비하여

옛부터 불가에 유명하였다.

 

우리가 선암사를 주목하게 된 까닭은 선암사의 3번째 중창주인 대각국사 의천의 부도 및 금란가사, 진영이 보존되어 있어

국사의 자취와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차문화협회 이귀례 회장과 일행은 고려의 차승으로 상석에 등장하는 의천의 차선일여의 경지를 살펴보고

뇌원차(腦原茶)’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선암사 대각암을 찾았다.

 

송과의 차문화 교류에 영향 미친 의천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한 대각국사 의천은 고려 문종의 4번째 왕자였다. 하루는 문종이 여러 왕자를 불러놓고 물어 보았다.

너희들 중 누가 출가하여 도()를 닦겠는가.”

침묵이 흐른다.

어째서 말이 없는가.”

이때 4번째 왕자인 후()가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소자가 출가하여 스님이 되겠습니다. 오직 아바마마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문종은 놀랍고 기쁜 얼굴로 후를 바라보았다.

그때 의천의 나이 11살이었다. 의천은 경덕국사(景德國師)를 의지하여 구족계를 받고 출가한다.

출가한 뒤 송나라로 들어가 지자탑원에서 서원을 세운 바와 같이 고려에 들어와 천태종을 개창하고

법안종을 흡수하여 5대 선원을 세우고 선교쌍수의 정신을 이어 나간다.

 

해동 천태종의 시조로만 알려져 있는 의천을 통해 송과의 활발한 차문화 교류가 이루어졌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대각국사가 열반하자 비석이 모두 3곳에 세워진다.

고려 인종 3(1125) 개성 영통사(靈通寺)에 대각국사비가 세워지고

고려 숙종 6(1101)에 개성 흥왕사에 대각국사묘지명과 칠곡 선봉사(僊鳳寺)에도 대각국사비석이 세워진다.

 

최근 북한 정부는 개성 영통사 복원을 일본 대정(大正)대학에 의뢰하여 대대적인 발굴을 한 바 있다.

발굴 결과 대각국사 의천의 석함과 묘탑이 발견되었다.

또 개성 흥왕사에 세워졌던 대각국사묘지명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기도 풍덕군 덕적산 흥왕사터에서 발견되어 조선 총독부 시절에 박물관에 보관되었던 것이다.

길이가 50센티가 채 안되는 이 묘비에는 우리의 눈을 놀라게 하는 대목이 있다.

 

요나라 천우황제(天佑皇帝)가 재차 경책과 다향(茶香) 금백(金帛) 등을 보내어 국사와 사자(師資)의 인연을 맺는다.

 

이 대목으로 보아 중국의 천우황제가 의천을 차의 스승으로 받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송황실에서는 의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왕실 어용차인 용봉단차를 선물하는 등

중국에 17개월간 머무는 동안 극진한 예를 표했던 것만 보아도 범상한 일이 아니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송나라의 어용차 용봉단차

송나라 휘종의 대관다론(大觀茶論)에서도 용봉단차를 천하에 으뜸이라고 하였고

왕우칭(954~1001)용봉차시에도 용봉차의 귀중함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樣標龍鳳號題新 용봉무늬 새겨 새롭게 이름지어

賜得還因作近臣 가까운 신하에게만 하사하셨네.

 

의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용봉단차를 주었으니 의천은 자연 차선일미의 정신에 젖었으리라 짐작된다.

의천이 남긴 3수의 차시 중 승에게 차를 준 것에 대한 화답의 시(和人以茶贈僧)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北苑移新焙 북쪽 동산에 새로 말린 차를

東林贈進僧 동림에 계신 스님에게 선물했네

預知閑煮日 한가로운 차 달일 날을 미리 알고

泉脈冷敲氷 찬 얼음 깨고 샘줄기 찾네.

 

의천이 입송중 누군가에게 차를 선물 받고 고마움의 시를 쓴 것 같다.

북쪽 동산은 복건성 건안현을 말하며 그곳에서 생산되던 용봉단차를 선물 받은 것으로 해석되고

동림은 정토종의 발상지인 혜원법사가 주석하던 동림사를 말한다.

의천이 주석했던 항주 고려사는 중국 차의 대명사로 떠오르는 용정차의 고향으로

자연히 의천은 차와 천태의 사상을 둘로 보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송에서 유학을 마치고 온 의천은 귀국한 뒤 천태산 지자탑원에서 발원한 대로 천태종를 개창하고

선과 교의 진리 속에 차선일미의 정신세계로 젖어 든다.

 

의천의 정신 살아 있는 대각암

 

의천을 통해 고려와 송은 활발한 차문화 교류가 이루어졌다.

송의 용봉단차가 고려로 수입되고 고려의 뇌원차가 송에 수출되는 등 의천이 차문화 교류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고 보여진다.

의천이 활동했던 고려시대에 차문화는 하나의 정신문화로 자리잡는다.

이때 왕이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 중에 차는 귀중한 선물이었다. 의천은 왕실로부터 어차(御茶) 20각과 약 1은합을 하사받는다.

 

의천의 자취를 찾다보면 차와 만나게 되는 곳이 선암사 대각암이다.

대각암은 의천이 말년에 주석했던 곳으로 의천의 부도가 있는 곳이다.

차인들에게 대각암은 의천의 차향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다.

 

선암사에는 차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차유적이 남아 있다.

돌을 깎아 만든 찻물받이 상탕·중탕·하탕이 지금도 석간수를 흘러 내리고 있으며 석간수 위로 대각국사가 채다를 했었다는 차밭이 펼쳐져 있다.

그외에도 응진당 부엌에 조왕신을 모셨던 단이 있으며 차부뚜막은 6~7년 전까지 보존되다가 지금은 아쉽게도 사라지고 없다.

 

절문 안으로 들어서니 암주가 우리 일행을 반긴다.

암주인 묘각스님이 차 한 잔을 내어 놓자 이귀례 회장이 먼저 말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차운동을 하는 사람들인데 의천스님에게 헌다하고자 왔습니다.”

대각국사 종제일도 아닌데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오셨습니까?”

의천의 법향이 숨쉬는 대각암의 부도전에서 차를 올리고 고려 차문화를 이끌어 온 뇌원차의 의미를 새기기 위해 왔습니다.”

 

묘각스님은 반기듯 차를 권하기 시작했다.

필자는 스님에게 고려 뇌원차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대각암의 의미를 설명해 달라고 여쭈었다.

대각국사의 자취가 곳곳에 있지만 특히 이곳 대각암은 아주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국사의 호를 따서 대각이라고 붙였는데 대각이란 깨달음을 뜻합니다.

묘각스님과 차 이야기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송종남 부회장은 어느새 한복을 갈아입고 헌다준비를 하고 있었다.

묘각스님의 인도로 송부회장이 대각국사 부도전에 헌다를 올렸다.

우리 일행은 대각국사의 차정신이 살아 있는 대각암에서 뇌원차의 의미를 되새겼다. 문득 의천의 차시(茶詩) 한 수가 떠오른다.

 

이 술에 젖은 몸동산에서 무엇을 구하려나

밝은 달밤에 차 끓이며

속세의 근심 잊어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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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의 문화인물] 대각 국사 의천

 

문화관광부는 고려 시대 천태종의 개조(開祖ㆍ어떤 일을 처음 시작하여 그 일파의 원조가 되는 사람)

대각 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1)'11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했다.

 

고려의 대표적인 큰 스님이며, 뛰어난 불교 학자로 천태종(天台宗ㆍ법화경을 기본 경전으로 하는 대승 불교의 한 파)을 창설한

의천의 생애를 살펴본다.

 

대각 국사 의천은 왕자로 태어나 10 세에 출가(出家ㆍ집을 떠나 스님이 됨)하고,

36 년 동안 스님으로서 오로지 도를 닦고 끊임없이 불교를 널리 전하며 살다가

47 세에 입적(入寂ㆍ수도승의 죽음을 이르는 말)했다. 참다운 구도자의 삶이었다.

 

그는 아버지 고려 문종과 어머니 인예 태후 이씨 사이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후(), 자는 의천, 대각 국사는 그의 시호(諡號ㆍ죽은 뒤에 생전의 공덕을 기려 임금이 내린 이름)이다.

 

문종이 어느 날 네 왕자를 불러 놓고 물었다.

 

"누가 스님이 되어 나라가 잘 되길 빌어 주겠느냐?"

 

의천이 나서서 뜻을 밝혔다.

 

"아바마마, 제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문종은 기꺼이 허락했다. 1065, 왕은 자신의 스승인 난원을 불러 의천의 머리를 깎게 했다.

머리를 깎은 의천은 난원을 따라 개경의 영통사에서 생활하게 됐다. 그 때 난원은 66 세의 노승이었다.

 

의천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학문을 쉬지 않았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어쩌다 머리털이 이다지도 희었는가/ 학업의 수고로움 쌓이고 또 쌓인 탓이지'라고 고백할 정도였다.

 

18 세 때에는 세자를 대신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긴 교장(敎藏)의 수집을 강하게 주장하는 글을 지었다.

이것은 그 뒤 1086년 흥왕사에 '교장도감'을 설치해 '속장경' 등의 불전을 판에 새겨 4000여 권이나 펴내는 계기가 된다.

 

의천은 또 1084년 정월에 대궐로 들어가, 둘째 형인 선종에게 송나라에 가서 불교를 공부하고 오고 싶다는 뜻을 간곡히 아뢰었다.

선종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 의논했지만 모두 반대했다.

왕자인 의천이 송나라에 들어가면 요나라가 트집을 잡아 문제를 일으킬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108548일 밤에 의천은 왕과 태후에게 편지만 남긴 채 제자 몇 명과 함께 정주(오늘날의 김포)에서 상선을 타고 송나라로 떠났다.

 

그 후 1 년 남짓 송나라에 머물며 여러 고승들을 만났고, 3000여 권의 불교 책을 모아 가지고 다음해 6월에 돌아왔다.

송나라에서 만난 고승들 가운데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은 화엄종의 정원과 천태종의 종간이었다.

 

의천은 송나라에서 돌아온 해에 흥왕사의 주지를 맡았다.

왕사는 2800 칸의 건물에 항상 1000여 명이 생활하는 고려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

1089년 국청사 건립에 착수하는데, 이는 곧 천태종의 첫 출발을 뜻한다.

 

의천은 해인사로 물러났다가 다시 흥왕사로 오게 되고, 국청사에서 천태교학을 강의했다.

이로써 의천은 천태종을 우리 땅에 바로 세우려는 오랜 염원을 이루게 된다.

 

의천은 백성들의 편한 경제 생활을 위해 '돈을 만들어 쓰자'는 주전론(鑄錢論)을 폈다.

그 때에는 쌀과 베가 화폐 구실을 했는데, 그것은 교환과 운반의 어려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11014, 돈을 만드는 일을 맡는 주전도감이 설치됐고, 이듬해 12월 해동통보가 비로소 만들어져 실제로 사용됐다.

 

하지만 의천은 1101105일에 입적, 해동통보를 구경하지 못했다. 그 때의 나이 46세였다.

당시 대각 국사의 이름은 송나라뿐만 아니라 요나라와 일본에도 퍼져 있었다.

일생을 불교 연구에 바친 대각 국사는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신라 불교, 특히 원효 불교를 이으려고 했으며, 고려는 물론이고 동아시아 불교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신편제종교장총록''원종문류''석원사림' 등의 책을 남겼다.

 

김병규 기자 by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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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국사 의천

 

 

신라 때의 초기 불교는 여러 종파로 갈라져 있었으나, 고려에 이르러 불교가 발전함에 따라 선종이 성하였습니다.

더욱이,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서 불교에 일찍 귀의한 의천이 있었으므로 고려의 불교는 부흥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왕자 후는 11살 때 왕사 난원 스님에게 영통사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습니다.

의천은 13살 때 문종에게 '우세승통'을 받았습니다.

우세는 세상을 돕는다는 뜻의 별호이고, 승통은 큰 절에 한사람씩 주는 불문의 최고의 명예였습니다.

 

의천은 그의 형이 제위에 오른 선종 때 송나라에 들어가서 불교를 연구하려 하였으나,

태후가 어린 자식을 먼 곳으로 보내려고 하지 않아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나는 꼭 송나라로 가야 한다.'

 

의천은 몰래 제자인 수개 한 사람만을 데리고 예성강 가로 나가 송나라로 돌아가는 상선을 탔습니다.

이때 의천은 보통 승려가 입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송나라 상인들도 그를 무심코 보아 넘겼습니다.

 

"무엇이라고? 어서 송나라의 배를 뒤쫓아가서 데려오지 못할까!"

 

태후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노하였습니다. 하지만, 고려의 배가 송나라 상선을 따라 잡지 못하였습니다.

의천은 무사히 밀주항에 내려 곧바로 송나라의 서울로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불법의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은 아무도 붙잡지 못했습니다.

송나라의 철종은 나중에야 의천이 고려의 왕자임을 알고는 궁중으로 불렀습니다.

수공전 높은 자리에 황제가 앉아 있고, 대신들이 양쪽에 죽 늘어서 있는 가운데, 의천은 섬돌 아래에서 황제에게 절하고 꿇어앉았습니다.

 

"이리 올라오시오."

 

황제는 의천을 불러 올렸습니다. 의천이 올라가자 황제는 친히 마중하여 고개를 숙였습니다. 통역이 의천에게 일러주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는 외국의 명승에 대하여는 대등한 예로써 맞이하오."

 

의천은 감격하여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습니다. 송나라의 철종은 여러 군신들을 향해 분부를 내렸습니다.

 

"의천이 송나라 천지에서 공부하기 원하는 곳이 있으면, 어디든지 가서 있도록 잘 보살펴 드리시오."

 

이처럼 의천은 송나라에 가서 가장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의천은 황제를 배알한 뒤, 각엄사에서 화엄법사 유성의 제자가 되어 천태종과 화엄종 등에 대하여 연구를 했습니다.

고려의 선종에 만족치 않고 송나라까지 온 의천의 열성은 대단하였습니다.

천태종의 길은 진리를 탐구하면 할수록 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날 의천은 유성과 함께 번화한 거리를 걸었습니다. 밤이므로 거리가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술렁거렸습니다.

술집과 찻집이 널려 있는 거리를 돌자 한 모퉁이에 음식점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고기 국을 파는 곳, 국수를 파는 곳 등이 있었으므로 사람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찌하여 송나라의 서울이 이토록 번화한 것일까?'

 

의천은 거리를 주의 깊게 관찰하였습니다.

이 무렵, 고려에서는 백성들이 아직 돈을 사용하지 못하고 물건과 물건을 바꾸는 거래를 할뿐이었습니다.

 

'송나라는 일반 서민들까지도 돈을 사용하는구나.'

 

그래서 서민들의 생활이 나아졌음을 의천은 깨달았습니다. 의천은 상국사로 옮겨가서 원소종본의 제자가 되어 잠시 화엄을 연구하였습니다.

 

상국사는 번화한 거리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상국사의 절 안에서는 매월 여섯 차례에 걸쳐 물건을 사고 팔았습니다.

그날만 되면, 남녀노소들이 모두 절 경내에 모여들어서 상가와 같은 거리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애국심이 강한 의천은 불경 공부 외에도, 어떻게 하면 고려를 부강한 나라로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려 본국에서는 의천이 송나라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사신을 보내, 의천이 돌아오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의천은 고려 왕의 명령을 받고, 12개월 동안 송나라의 여러 명승 고적을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고는 고려로 돌아왔습니다.

 

귀국할 때, 의천은 불경은 물론 유학 서적까지 가지고 돌아왔으며,

흥왕사와 각지에서 옛날 책을 모아 4,740권이나 되는 책을 갖게 되었습니다. 의천은 한때 국청사에 머물러 있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의천에게 배우려고 1천여 명의 학자가 모인 일도 있었습니다. 국청사는 의천의 어머니가 지었습니다.

의천은 국청사에서 조카인 원명 국사를 삭발시켰습니다.

 

이로써 고려 왕실에서 또 명승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의천은 국사가 된 뒤부터 정치에 참여했습니다.

고려에서도 숙종 때에 이르러 화폐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의천이 건의하여 시행된 것입니다.

의천은 송나라에서 가져온 책과 경전을 보고 <속장경>을 완성시켰습니다.

 

, 의천이 46살로 세상을 떠나자 고려 사람들은 매우 슬퍼하였습니다.

숙종이 의천에게 '대각'이라는 시호를 내리려 하자 중서문하성에서 반대를 하였습니다.

"대각은 곧 부처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의천은 송나라와 요나라까지 알려졌으며,

왕실의 지친이므로 대각의 시호를 내려도 괜찮다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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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의천스님 비석

 

지난해 1225일 중국 산동성 교주시에 건립된 대각국사 상륙지 기념비모습.

 

6세기부터 13세기까지 한국과 중국의 교류 창구였던 산동성 교주시에 의천(1055~1101) 스님의 비석이 세워졌다.

 

지난해 1225일 산동성 교주시에 동아시아연구회 중국불적 답사단’(단장 조영록, 동국대 교수) 19명과

교주시 주재 금병목 총영사관, 교주시 이호 시장, 청도대학 한국연구소 박영희 소장,

현지 한인 기업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의천 스님의 비석이 제막됐다.

 

산동성 교주시의 옛 이름은 판교진(板橋鎭)’으로, (() 시대에 신라·백제인들과 고려인들이 많이 방문했던 곳이다.

1085년 중국에서 불교를 배우고자 몰래 상선을 탔던 의천 스님 역시 이 곳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스님은 북송의 수도인 변경(지금의 개봉)으로 가서 불법을 공부하며,

경전을 모으는 등 한·중 불교사상 교류에 큰 몫을 담당했다.

 

산동성에는 교주시 외에도 의상 스님이 첫발을 내딛은 등주시와 해상왕 장보고의 적산(赤山) 법화원이 있는

문등시 등이 있을 만큼, ·중 불교 교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조영록 교수는 의천 스님의 비석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단절됐던 한·중의 관계를 다시 잇고,

새로운 문화 교류를 약속하는 상징적 의미도 크다고 설명했다.

 

의천 스님의 비석은 대우재단 부설 사회과학원 김준엽 이사장에 의해 처음 제안됐고, 교주시가 이를 수용해 제막됐다.

 

한편 이번 제막식에 초청 받은 조 교수를 비롯해 보광·해주·도업(동국대 교수)스님, 동림(부산 해림사 주지

지연(서울 기원사 주지) 스님 등 동아시아연구회 중국불적 답사단 19명은 행사에 앞서 ·중 경제·문화 교류를 주제로 학술회의를 가졌다.

 

오종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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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태종 발상지 북한 영통사 모습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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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석탑 등만 남은 터에

북쪽서 짓고 남쪽서 지원

마지막 기와 올려11월 완공

 

한국 천태종에서 기와를 제공받아 복원되고 있는 천태종의 발상지 개성 영통사의 전각 29동이 제 모습을 갖췄다.

기와 지원사업을 총괄해온 천태종 나누며하나되기운동 단장인 무원 스님은 30일 저녁

전각엔 기와가 모두 올려졌고, 이제 남은 것은 단청과 불상 봉안 그리고 조경 등 전각 안팎의 정비사업뿐이다라고 말했다.

 

애초 영통사 터에는 대각국사비, 당간지주, 부도 그리고 석탑 3개만 남아 있었을 뿐 전각은 모두 불타고 없었다.

영통사는 11월께 완공될 예정이며, 남북은 천태종 창시자인 대각국사 의천 스님의 열반일(1116)에 맞춰

남북한과 중국, 일본 등의 천태종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영통사 낙성법회와 국제학술대회를 추진하고 있다.

영통사는 고려 11대 문종의 넷째아들로 태어난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출가한 이후 35년간 주석했던 곳이다.

 

천태종은 지난해 1027일 기와 1차분 10만장 지원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6차에 걸쳐 397010장의 기와와 부대 자재를 보냈다.

모두 116천만여원 규모이며, 18t 트럭 88대를 포함해 모두 124대의 차량이 동원됐고, 연인원 177명이 휴전선을 거쳐 남북을 오갔다.

육로 운송에 대해 애초 군에서 반대했지만,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별한 관심으로 허용됐다고 한다.

그러나 대형트럭 20~30대가 줄지어 오가는 보기 드문 행렬에 많은 개성 주민들이 관심을 보였고,

이를 위험스럽게 생각한 북쪽 당국은 한때 물자는 물론 방문단의 개성 통과를 불허했다.

남쪽 관계자들도 연도변의 북한 주민들에게 빵과 과자를 던져주는 등 섣부른 행동으로 북쪽을 자극했다.

 

곽병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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