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외국인 I 외국인과 인천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16 04:58:42
† 인천의 외국인 I 외국인과 인천
인천의 개항과 선교사
'조수가 11미터나 오르내리는 제물포의 정박지는 낮동안에는 질퍽거리는 진흙뻘과 다름이 없다.
진흙만이 현저하게 눈에 띄고 마을 뒷편의 낮은 언덕은 칙칙한 고동색이었으며 부슬비까지 뿌리고 있었다.
(중간생략) 정박지에서 바라보면 제물포는 바닷가의 한 모서리를 따라 뿔뿔히 흩어져 있는 초라한 집들의 덩어리였다.
이 주택가는 숲이 조금 우거진 가장자리에 불편하고 보잘 것 없는 영국 부영사관 건물이 있는 저지대로부터,
크고 장식적인 일본식 찻집과 정원, 신사가 있는 언덕까지 뻗어 있었다.
독일 상인의 집, 영국교회, 언덕에 있는 코르페(한국명 高耀翰 : Bishop Jdhn Corfe - 필자주)주교의 초라한 선교소,
커다란 일본 총영사관, 몇몇 새로운 공공 건물만이 겨우 두드러져 보였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비숍 여사가 인천에 도착한 시기는 개항이 이루어진지 11년이 지난 때였다.
비숍 여사는 여행가답게 인천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개항으로 변화된 외국인 거주지역의 모습을
사려깊게 비교하여 기록하고 있다.
그 중에서 영국교회와 선교소는 인천 사람들에게 있어서 개항이 초래한 가장 중요한 변화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개항 이전에 서양의 선교사가 교회를 세우고 공식적으로 선교활동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기 선교사들의 대부분이 의료사업과 교육활동을 통해 인천 사람들에게 접근해 갔다.
특히 비숍여사가 언급한 영국교회 곧 성공회의 코르페 주교와 함께 왔던 랜디스(E.B.Landis:한국명 南時得 : 1865∼1898)는 인천사람들에게 인상적인 업적을 남기고 있다.
랜디스는 1888년 미국 펜실베니아 의대를 졸업하고 1890년 영국 聖公會의 선교사업을 위해 인천에 도착했다.
그는 인천에 도착 즉시 집을 전세내어 聖루카병원(속칭 藥大人 병원)을 설립, 의료활동을 통한 선교사업을 시작했다.
뿐만아니라 1891년 영어학교를 개설하고 40여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주 6회에 걸쳐 인천에서는 최초로 조선인 대상의 영어교육을 실시하였다.
특히 랜디스 박사는 1892년에 6세의 어린 고아를 데려다 키움으로써 고아원의 효시를 이룬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또한 그는 한국 연구에도 열중하여서 1895년에는 '念珠經'등 3편의 불교문헌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랜디스 박사는 어떻게 보면 본연의 임무인 선교활동 보다는,
인천의 가난하고 문명의 혜택과는 동떨어진 사람들을 위해 전력을 다하였던 것이다.
인천 사람들은 이러한 랜디스 박사의 탁월한 의술과 드높은 인간애를 존경하여,
성루카병원이라는 정식 명칭대신에 '藥大人'병원(혹은 '약대이'병원)으로 불렀으며,
이 병원이 있던 야산은 '약대이산'으로 불리어졌다.
랜디스 박사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인천에 와서 인천 주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33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랜디스의 유해는 평소 인천을 고향으로 삼고 싶다는 그의 소원대로 인천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랜디스가 의료사업과 사회활동으로 인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면,
교육활동을 통한 선교사업으로 인천에 공헌한 인물로는 全學俊 신부(EUG. Deneax : 1873∼1949)를 특기할 수 있다.
전학준은 부유한 프랑스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 '外方傳敎會'의 선교 사명을 띠고
1900년 27세의 나이로 인천에 도착하였다.
전 신부는 1889년 파리외방전교회가 소속 신부인 洪요셉(Wilhelm)을 인천에 파견하여
터를 마련한 답동성당에서 선교사업을 전개하였다.
전학준 신부는 선교활동 뿐만아니라 교육사업에도 열중하여
주로 빈민층의 자녀를 입학 대상으로 하였던 박문학교를 설립, 답동 천주교성당에서 경영을 맡도록 하였다.
그리고 4년 후, 1904년에는 답동성당의 본당 신부로 취임하여 본격적으로 박문학교의 유지와 경영에 열과 성을 다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어느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재정난과 함께,
西學 곧 천주교에서 설립한 학교라는 주민들의 기피로 한동안은 학생들의 모집과 교육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렇지만 전 신부는 꾸준한 선교활동과 정성을 다한 교육활동으로 1914년에는 학교 내에 여자부 교사 6학급을 신축하였고,
이듬해에는 남자부 교사 6학급을 증설할 정도로 학생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에 1917년에는 남녀 두학교를 합쳐서 '인천박문학교'라 하고 설립자 겸 교장에 취임하였는데,
이 때 전 신부는 학교의 재정을 거의 자신이 물려받은 재산으로 감당하는 교육자정신을 발휘하여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이후 전학준 신부는 나머지 사재를 털어서 용현동과 영종도 등지에 20여만 평에 달하는 농토를 마련하여 보육원에 기증,
보육원 운영의 재정적인 기틀을 세워 놓았다.
이어 1937년에는 현재와 같은 답동성당 건물을 준공하고 3층에는
현대식 병원인 '해성병원'을 개설하여 인천 의료계의 발전과 주민들의 건강진흥에 이바지 하였다.
또한 전학준 신부는 박문학교에 박문유치원을 설립·개원하여 유아교육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처럼 전 신부는 답동성당을 중심으로 천주교 선교와 박문학교를 통한 교육사업,
그리고 보육원과 유치원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사업 등 다방면에 걸쳐 인천지역의 근대화에 노력하다가
7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한편 선교활동을 중심으로 볼 때,
인천지역이 갖는 역사적인 의미는 아마도 한국 최초의 개신교 종교집회가 열렸다는데서 찾을 수가 있다.
1885년 4월 5일 교육선교활동을 위해 입국한 아펜젤러(H.G.Appenzeler)는
7월 19일 제물포에서 역사적인 종교집회를 개최하였다.
이것이 바로 제물포교회(지금의 내리교회)의 기원이며 내리교회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교회로 인정되고 있다.
이어 20세의 나이에 선교사가 되어 1888년 입국한 존스(G.H.Jones : 1867∼1919, 한국명 趙元時)는
1892년부터 1903년 까지 인천지역 선교의 책임자가 되어 11년간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맹렬한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리하여 존스는 '내리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으며, 영화학교를 개설하여 인천의 교육계에도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존스는 1897년 우각동에 선교사 주택을 건립하였으며, 1899년에는 최초로 神學會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인천지역의 선교사들은 그들의 본분인 선교활동 이외에도 교육과 의료사업
그리고 고아원·보육원 등을 통한 사회복지사업에도 방대한 업적을 남겼던 것이다.
글 양 윤 모 (인하대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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