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구산~퇴모산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3-22 00:53:47
`해적' 쫓던 신성한 산자락 '돌아가라' 으름장놓네
재7구간>헐구산~퇴모산
우리나라에서 다섯번째로 큰 강화도는 신성함이 어려있는 곳이다. 매년 11월 ‘개국의 땅’ 강화도 마니산에서 단군대제가 열리는 것도 그렇지만, 옛 지명엔 강화도의 신성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강화’는 고려 초기에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 아주 먼 옛날, 3개의 섬이 하나로 뭉치기 훨씬 전에 강화도는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불렸다. 고구려 때는 ‘혈구(穴口)’, 이후 신라 땅이 된 뒤에는 ‘해구(海口)’라 불리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들 지명에는 모두 ‘구멍’이나 ‘굴’을 뜻하거나, ‘여성(女性)’을 상징하는 단어가 들어가는데, ‘혈(穴)’이나 ‘구(口)’ 모두 그러하거니와 갑비고차 또한 마찬자지다.
‘갑비고차’란 말의 흔적은 현재도 ‘갑곶리’와 ‘갑곶이’로 남아있는데, ‘갑곶이’의 갑(甲)은 여성을, 고지(곶이)는 우리말로 입(口)을 뜻한다고 한다. 갑비고차는 혈구와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위당 정인보 선생은 단군의 성적(聖蹟·성인의 사적 또는 그 유적)이 깃들어 있는 곳에는 굴 또는 구멍을 뜻하는 칭호가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듯 강화는 옛 지명에서 그 신성한 뜻을 찾을 수 있다.
신성한 땅 강화의 중앙에, 높게 솟아 있는 혈구산(466m)을 종주단이 찾은 날은 19일. 오전 8시30분 강화시외버스터미널에 모인 종주단에게 사전 답사팀은 산행지로 가기에 앞서 “길이 없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고려산 자락에서 혈구산으로 이어지는, 연촌에서 강화읍 국화리로 넘어다니는 고개 ‘나레현’(나래현, 나루개)에서 혈구산으로 향하는 첫 발을 내딛었다. 나레현은 늘어진 고개 또는 긴 고개란 뜻을 품고 있다. 고개 정상 부근에서 옆으로 난 소로를 따라 늘어지듯 천천히 산행을 시작한다.
산길 여기저직, 아직 붉은 기운이 덜한 산딸기가 널려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탓인지, 아니면 설익어 따먹지 않은 탓인지, 산딸기가 지천인데도 종주단은 유혹을 뿌리치고 그냥 지나쳐 갔다.
굴곡이 많고, 가파른 능선을 쉬엄쉬엄 올라갔다. 여름철 산의 변화 속도는 빠르다. 2주일전 고려산을 오를 때와는 또다른 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성히 난 나무 잎사귀들이 산 아래 마을을 가리고 있어 영락없이 땅만 보고 걸어갈 수 밖에 없다.
정상에 다다른 시간이 오전 10시30분쯤. 날이 덥고 습해 해무가 잔뜩 낀 탓에 전망이 흐릿했다.
통일신라 말 바닷길을 이용한 대외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신라는 해적에 대비한 진(혈구진)을 이 일대에 설치했다고 전해진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산 아래 안양대학교 강화캠퍼스와 농업기술센터가 자리하고 있다. 특히 안양대가 있는 자리는 풍수지리학상 명당으로 꼽히는 곳이란다. 매립이 있기전, 안양대 앞은 물이 깊은 바다였다. 혈구진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이다.
혈구산에서 남서쪽으로 난 능선을 따라 퇴모산(338m)으로 향했다.
“길이 없다”던 사전 답사팀의 으름장이 ‘으름장’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퇴모산으로 난 갈림길 초입부터 느낄 수 있었다. 산은 그 신성함이 혹여라도 더럽혀질까봐 종주단의 발길을 막아섰다.
퇴모산 정상에 갈 때까지 무성하게 난 잡풀이며 나무 잎사귀에 쓸리기를 반복하며 걸었다. 반바지를 입은 단원들은 이내 후회하며 양말을 무릎까지 끌어올려야 했다. 발 아래 보이지 않는, 나무 줄기가 나지 않은 땅을 발바닥을 더듬이 삼아 더듬더듬 딛어갈 뿐이었다.
힘들게 길을 찾아 정상에 다다른 종주단은 또다시 난벽에 부딛혔다. 길을 잃었다. 사전 답사팀이 오르락 내리락 길을 찾아 걸어둔 비표도 온데간데, 종적없이 사라졌다.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인데 누가 떼어냈을까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안전답사팀이 내려갔다 올라오길 반복하며 다시 길을 찾았다. 때론 바위를 타고 내려오다 미끌어지기도, 때론 가시덤불에 쓸려 생채기가 나기도 하며 어렵게 없는 길을 냈다.
그렇게 내려온 곳이 양지왕방. 길 건너편 마을이 음지양방이다. 조선 건국기,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고수하며 은둔생활을 지낸 전신(全信·고려조 밀직병부상서)을, 그와 함께 수학한 태종이 직접 찾아왔다하여 왕방리(王訪里)라 했다. 왕방리의 양지쪽과 음지쪽을 나눠 양지왕방, 음지왕방이라 부른다.
종주단은 한편에서는 감자를 캐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지런히 대파를 심는 밭을 지나 덕정산으로 향했다. 음지왕방에 땅이 습해 덕정산으로 가는 산길엔 버섯 재배 농가가 있었다.
덕정산은 그러나 정상으로 가지 못했다. 종주내내 정상을 밟아보지 못한 산에는 꼭 군사시설이 있었고, 덕정산 또한 그랬다.
덕정산에서 진강산으로 가는 길 또한 만만치 않다. 강제로 길을 뚫고 나온 마을이 산문(山文). 옛 기록에는 이 마을을 삼문동(三門洞)이라 했으나, 이는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진강산 북쪽 골에 자리잡은, 산 높은 곳에 있다하여 산문(山文·뫼갈마을)이라 한 것 같다.
/김주희기자 blog.itimes.co.kr/kimjuhee
구간 따라잡>혈구진 옛터
통일신라말, 해로(海路)를 이용한 대외교역이 활발해 지면서, 바다에서 출몰하는 해적에 대비하기 위해 신라는 대당항로의 주요기점에 군사기지인 진(鎭)을 설치하고 이를 혈구진(穴口鎭)이라 했다.
신라와 당을 잇는 해로 상에 있던 강화도에 혈구진을 설치한 이유는 강화도의 지리적 중요성에서 찾을 수 있다. 강화도는 한강과 예성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해 있고, 두 강을 통하면 한반도 중부내륙에 닿을 수 있다. 또 서남으로는 바다에 접하여 서해안의 해로와 연결되기도 한다. 더구나 교동도에서 석모도, 장봉도로 이어지는 섬들이 자연스럽게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어 강화를 가리켜 천혜의 요새라 했다.
혈구진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동서의 문지(門址)가 그 지명으로 전해지고 있고, 주변 지형으로 추정할 때 현재 농업기술센터와 안양대학교 강화캠퍼스 부지 사이 어디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지역은 혈구산 남쪽 기슭에 해당되며, 예전에는 물길이 깊어 강화도 동쪽 해안의 대청포와 서해안의 장지포에서 모두 배가 닿았다고 한다. 조선후기 활발한 간척사업으로 물길이 막혀 현재는 완전한 내륙에 속하게 됐지만, 병자호란 직후만 해도 물이 깊어 썰물 때에도 배가 가라앉을 염려가 없었다고 한다. 이와같은 지형에 연유해서 혈구(穴口), 해구(海口)라는 지명이 붙음은 당연하다.
/김주희기자 (블로그)kimjuhee
양지왕방·음지왕방
조선건국기, 고려조에서 병부상서를 지낸 사와(射臥) 전신(全信)은 강화군 위량면 항주동으로 내려가 은둔생활을 했다. 1392년 7월 배극렴 등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자, 신하된 자로 두 제왕을 섬기지 않겠다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키려 한 것이다.
전신과 함께 운곡(耘谷) 원천석 문하에서 수학한 태종 이방원은 1400년 왕에 오르자, 전신에게 조선왕조에 참여해 주기를 여러 차례 권했다. 그러나 전신은 이를 끝내 거절했다.
태종은 이듬해 전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 직접 찾아오게 되고, 이후 이 마을 이름을 ‘왕방리(王訪里)’라 이르게 됐다. 양지왕방은 양지쪽 마을을, 음지왕방은 인산저수지 쪽 응달에 있는 마을을 일컫는다.
/김주희기자 (블로그)kimju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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