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협궤열차
仁川愛/인천-원조&최초&최고인것들
2007-03-23 12:32:34
우리나라 최초의 협궤열차
`협궤열차는 서서/기적만 울리고 좀 체 떠나지 못한다/승객들은 철로에 나와 앉아/ 봄 볕에 가난을 널어 쪼이지만/ 염전을 쓸고 오는/바닷바람은 아직 맵차다…'
신경림 시인은 `군자에서'라는 시를 통해 지금은 사라진 협궤열차의 그리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꼬마열차'로 불렸던 협궤열차를 한번이라도 타본 사람들은 열차안 승객들의 면면과 객차안의 풍경을 쉽게 떠올릴 것이다.
손수 가꾼 푸성귀나 곡식을 함지박에 가득 담아 팔러 나온 촌로들이나 낚시꾼, 추억 만들기에 나선 젊은 연인들 그리고 자기 몸 만한 책가방을 든 학생 등등 협궤열차 안엔 도농(都農)의 구분도 노소의 칸막이도 없었다.
협궤열차는 바닷가를 따라 달리는 열차답게 흙 냄새와 바닷바람이 고루 어우러져 한숨과 웃음이 평등한 가치로 교환되고 비린내와 땀 냄새가 숨김없이 나눠지고 수선스러우면서도 무질서하지 않았고 시끄러웠지만 귀를 막고 싶은 소리는 없는 어우러짐의 열차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협궤열차인 수인선은 일제가 1937년 이천과 여주지역의 쌀은 물론 인천 소랠남동지역의 소금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수탈하기 위해 남인천∼수원간 총 52㎞의 사유철도로 건설됐으며 해방후인 1947년 국유화됐다.
60년대만 해도 증기기관차가 객차 6량과 화물차 7량을 달고 15개역을 하루 7차례 운행했으며, 1992년 송도∼소래구간이 폐지되고 소래까지만 운행되다 1995년 12월31일 운행이 전면 중지됐다.
협궤열차는 열차 한량이 시내버스보다 작고 볼품이 없었고 탄생배경도 일제의 물자수탈 수단이었지만 반세기 넘게 인천과 수원지역 해안 서민들의 발노릇을 톡톡히 하며 서민의 애환을 실어 날랐다.
표준궤도의 절반인 76㎝에 불과해 작고 힘이 달려 안산 원곡고개 등지에서는 손님들이 내려 걷거나 밀어야 운행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지난 90년 10월에는 화성군 매송면 야목건널목에서 소형버스와 충돌해 열차가 넘어져 지금도 수인선을 이용했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
수인선이 운행했던 역 가운데 소래역과 송도역이 특히 유명했는데 소래역은 연인들의 데이트장소로는 물론 주부들의 밑반찬으로 식탁에 올릴 조개젓과 새우젓 등을 사기 위해 이용됐으며 송도역은 농수산물을 파는 아낙들의 반짝시장으로 유명했다.
역에 들어오는 협궤열차의 뒤뚱거리는 모습은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보여 아슬아슬하기도 했지만 객차내 승객들은 덜컹거릴 때면 맞은 편 승객과 무릎이 닿아 꼬마열차 승객들은 금방 말문을 트고 이야기꽃을 피웠다고 한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협궤열차의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은 소래철교 구간만이라도 협궤열차를 도입해 관광자원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아 당국자들의 정책반영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군자에서 - 신경림
협궤열차는 서서
기적만 울리고 좀체 떠나지 못한다
승객들은 철로에 나와 앉아
봄볕에 가난을 널어 쪼이지만
염전을 쓸고 오는
바닷바람은 아직 맵차다
산다는 것이 갈수록 부끄럽구나
분홍 커튼을 친 술집문을 열고
높은 구두를 신은 아가씨가
나그네를 구경하고 섰는 촌 정거장
추레한 몸을 끌고 차에서 내려서면
쓰러진 친구들의 이름처럼 갈라진
내 손등에도 몇 줄기의 피가 배인다
어차피 우리는 형제라고
아가씨야 너는 그렇게 말하는구나
가난과 설움을 함께 타고난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형제라고
역 앞 장터 골목은 누렇게 녹이 슬고
덜컹대는 판장들이 허옇게 바랬는데
석탄연기를 내뿜으며 헐떡이는
기차에 뛰어올라 숨을 몰아쉬면
나는 안다 많은 형제들의 피와 눈물이
내 등뒤에서 이렇게 아우성이 되어
내 몸을 밀어대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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