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조봉암'한국정치사 대표인물'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24 09:30:35
죽산 조봉암'한국정치사 대표인물'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9~1959).
죽산은 2선 국회의원과 2차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한국 정치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그런 그가 이승만 정권 시절 간첩혐의로 구속,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최근 죽산을 기리는 운동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이런 움직임이 시작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91년 국회에서 여·야 정치인 86명이 서명한 '죽산 조봉암 사면복권에 관한 청원'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당시 국회가 여·야 대립으로 파행을 거듭하면서 사면복권이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이런 가운데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이후 죽산을 기념하는 사업이 인천에서 열렸다.
지난 주말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강화역사관 입구. 입구 한편에 세워진 높이 2.5m 가량의 비(碑)가 눈에 띄었다. '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비(竹山 曺奉岩 先生 追慕碑)'. 비에는 큰 글씨로 그렇게 적혀 있었다. 추모비는 지난 2001년 7월 '죽산 조봉암 선생 추모사업회'(당시 회장·유진국)가 새얼문화재단(이사장·지용택)의 도움을 받아 건립된 것이다.
추모비에는 “선생께서 가신 지 42년 만인 2000년 6월 15일 남북의 지도자가 손을 마주잡고 평화적 통일과 민족의 화해를 위해 노력할 것임을 다짐하였으니 이는 선생의 염원이 현실화되는 첫걸음이라 할 것이다(2000년 7월 6일)”고 적혀 있었다.
앞서 기념사업회는 강화에서 죽산 조봉암 선생 탄신 100주년 기념 강연회를 열었다.
또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550 강화읍사무소에 죽산 선생 생가터 표석을 세웠다.
강화에서 추모비 건립을 추진했던 이상태(64·향토사학자)씨는 “당시 죽산 선생의 명예회복을 위해 100명이 넘는 지역 인사와 시민들이 이 사업에 동참했다”면서 “죽산은 간첩이 아니라 이승만 정권에 맞섰다는 이유로 사법살인을 당한 비운의 정치인”이라고 말했다.
(사)새얼문화재단(이사장·지용택)은 죽산을 기념하는 동상을 건립할 계획이다. 동상에는 적게는 5억원부터 많게는 25억원까지 투입될 예정이다. 새얼은 건립비용을 전부 시민 후원금으로 충당할 계획이라고 한다.
지용택 이사장은 “많은 시민의 참여와 후원이 죽산의 명예를 회복시켜 줄 것”이라며 “죽산은 멸공통일을 외치던 시절에 남북 평화통일을 주장한 민족주의자였다”고 말했다.
죽산은 인천 사람이다. 1899년 강화에서 태어났다. 그는 강화공립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정치인 이전에 활발한 활동을 한 독립운동가로 손꼽힌다. 죽산은 1919년 스무살의 나이로 3·1 만세운동에 참여한다. 이후 독립운동으로 해방될 때까지 일본경찰에 3번 붙잡혀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의 독립운동은 사회주의 성향이 강했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 후(1946년) 죽산은 공산당 탈당을 선언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반공노선을 천명한다.
당시 대중일보는 '좌익진영 대난조-조씨 공산당 불원 성명'이란 1면 머리기사를 통해 죽산의 공산당 탈당을 대서 특필했다.
이후 죽산은 정계에 입문한다. 그는 1948년과 1950년 인천에서 2번 국회의원을 지낸다. 또 1952년에는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이게 화근이 됐다. 죽산은 대통령 출마 후 1954년 이승만 정권의 방해로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조차 하지 못한다. 그는 이승만 정권에 맞서기 위해 1955년 진보당(進步黨) 창당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듬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갑자기 사망한 것.
산은 야당 단일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하지만 그는 낙선했다. 이승만은 504만표를, 죽산은 216만표를 각각 얻었다.
나중에 극심한 개표 부정속에서 선거가 치러졌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졌다.
이승만 정권은 1958년 죽산과 진보당 관계자들을 잇따라 체포했다. 또 죽산에게 북한의 공작금을 받았다며 간첩혐의와 진보당에서 내건 평화통일론이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라며 국가보안 위반혐의를 씌웠다.
1심판결에서 재판부는 죽산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만 인정하고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2심과 3심 재판부는 간첩혐의를 인정해 죽산에게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했다.
죽산은 결국 1959년 7월 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됐다. 그는 “이승만 박사는 몇 사람을 잘 살게 하는 정치를 했고 나는 모든 백성이 잘 살게 하는 정치를 했다”는 유언을 남겼다.
오경종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조직국장은 “죽산은 독립운동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까지 많은 공로를 끼친 정치인”이라며 “반드시 명예회복과 간첩혐의에 대한 진실규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 김장훈·cooldude@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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