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당 이훈익 / 향토사가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24 16:13:13
27.향토사가 서계당 이훈익
인천 향토사가(鄕土史家) 서계당(西桂堂) 이훈익(李薰益·1916~2002).
'…1883년 개항(開港)으로 커다란 충격파를 온몸으로 견뎌내면서 서구열강을 향해 치마폭을 벌려 신문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래 오늘날까지 민족의 영욕을 지켜 보아 온 인천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오래 지켜가야 할 우리의 소중한 것들이 제일 먼저, 가장 빠르게 뿌리 뽑히고 무너져 버려가고 있는 우리 고장이기도 하다…(중략)'.
이훈익 선생이 출간한 향토사료집 8권 가운데 제2집인 '인천지지(仁川地誌·1986년)' 서문에 나와 있는 글이다.
칠순을 바라보던 1983년 인천지방향토문화연구소 문을 열고 타계하실 때까지 향토사(鄕土史) 수집과 발굴에 그토록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잘 드러나 있다.
선생은 향토사 연구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도 분명히 밝혀두고 있다.'…문헌자료(文獻資料)의 정리와 고증을 뚜렷한 사관(史觀)으로 다잡아 정립하는 일은 역사학자 여러분이 하시고 있으므로 나는 나의 한계가 좁음을 느끼면서도 안심하고 내 나름의 지지(地誌)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仁川地誌 서문)'.
이훈익 선생의 채취가 흠씬 배어 있는 인천지방향토문화연구소는 아쉽게도 지금은 문을 닫았다.(사)대한노인회 인천직할시연합회 부설기관으로 출범했지만 선생이 사재를 털어 운영했던 곳이다.
선생이 타계한 직후 연구소에 보관돼 있던 2천여권의 장서와 각종 자료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서구문화원에 기증했다.선생의 3남 3녀중 차남이자 인천 출신의 대표적인 소설가인 이원규(57) 동국대 교수는 “연구소 문을 닫은 것에 대해 돌아가신 아버님은 물론 지역 원로분들에게 죄송할 따름”이라며 그 당시의 결정을 두고두고 아쉬워하고 있다.
“연구소를 어떻게 해야할 지를 두고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향토사를 연구하는 분도 없어서 결국 연구소는 문을 닫기로 했습니다. 인천역사자료관(옛 시장관사)과 화도진 도서관 등에서 요청이 있었지만 아버님이 마지막으로 일하다가 쓰러지신 서구문화원으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천지방향토문화연구소 상임감사로 선생과 10여년 이상 동고동락했던 김교진(77) 서구문화원 초대감사도 연구소 폐쇄에 대해서는 서운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김교진 선생은 이훈익 선생과는 실과 바늘 같은 존재다.이훈익 선생이 도서관을 비롯해 인천 앞다바 섬과 골짜기를 뒤져 자료수집을 도맡았다면 김묘진 선생은 뒷마무리를 맡아서 처리하는 식이었다.“그 양반은 쉴 줄을 몰랐습니다. 인천 앞바다에 있는 섬이란 섬은 모조리 이잡듯 뒤지고 다녔습니다. 이 동네 저 동네 가리지 않고 정말 열정이 대단했었습니다. 연구소가 없어진 것은 정말 아쉽습니다.”
이훈익 선생은 1916년 지금의 서구 연희동에서 태어났다.지금이야 서구청을 비롯한 각종 공공기관이 밀집한 행정중심지로 탈바꿈했지만 70년대초에 전기가 공급될 정도였다고 하니 선생이 나서 자랄 당시에는 인천의 오지 가운데 한 곳이다.
선생은 계양산 자락에 있던 부평보통학교(현 부평초)를 졸업한 뒤 서곶면사무소(당시에는 부천군 소속) 임시직으로 근무했다.그 당시에는 중학교는 졸업해야 정식 공무원이 될 수 있었지만 한문에 조예가 깊고 일본어에 능통했던 선생은 임용연수를 받고 곧 면사무소 서기로 승진 임용된다.
아들 이원규 교수의 증언에 따르면 선생은 1961년 5·16직후 군사정권으로부터 권고사직을 당할 때까지 27년간 공직에 몸을 담았다. 공직에 있는 동안 인천의 각 출장소장(지금의 구청장에 해당) 등을 두루 역임했지만 현재 인천시청이나 경기도청에는 선생과 관련된 인사기록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선생은 이후 인천원예농협 전무로 옮겨 10여년 동안 근무하다 73년 정년 퇴직했다.수집욕이 넘쳐 흘렀던 선생의 한 단면에 대해 아들 이원규 교수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농협에 근무하실 때 아버님은 수석(水石) 수집에 매달리셨습니다. 이유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데 하여간 정부에서 자연보호를 위해 수석 수집을 단속할 때까지 무척 열심히 모으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향토사 연구 공로를 인정받아 선생은 인천교육대상(1983년)과 인천문화상(1996년), 한국향토문화대상(1998년 서울신문사) 등을 수상했다.1997년 4월에는 대한노인회 인천시연합회장으로 당선돼 2000년 3월까지 왕성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노인회장을 그만 둔 뒤 고향 원로들의 간청으로 서구문화원 출범과 인천 서구사(西區史) 출간을 준비하던 선생은 지난 2002년 2월 서구청에서 문화원 창립준비 모임을 주재하다가 쓰러져 운명을 달리했다. 서구문화원은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2002년 4월 창립총회를 갖고 출범했으며 현재는 선생의 장남인 이중규씨가 부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서구사(西區史)는 차남인 이원규 교수가 참여해 2004년 1월 출간됐다.
/ 김도현·kdh69@kyeongin.com
[인터뷰] 이훈익 선생 차남 원규 교수
이훈익 선생이 향토사 연구에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데는 1955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부평향교 전교(全校;향교 책임자)를 지냈던 선친(이현신)의 영향이 컸다는 게 차남 이원규(57) 교수의 회고다.
“선친이 돌아가시면서 부평사(史)를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아마 그 유언이 아버님에게는 평생 짐이 됐던 것 같습니다.”
70대에 앓기 시작한 협심증으로 개심수술(83세)을 포함해 5차례 이상의 대수술을 견뎌내며 향토사 연구에서 손을 떼지 않았던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뛰어난 한문(漢文) 실력과 지칠 줄 모르는 인내력 그리고 오랜 공직생활을 통해 쌓은 지역유지들과의 친분 등도 선생이 향토사 연구에 매진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계기였다.
“고지식한 분이셨습니다. 노래나 바둑·장기 등 잡기는 전혀 즐기지 않으셨으니까요. 모든 에너지를 향토사 연구에 쏟아부으셨던 것 같습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학술적 체계가 조금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아버님에게 부족했던 부분은 후학과 소장 학자들이 채워주리라 믿습니다.”
이 교수는 선친의 '인천지방향토문화연구소'를 지켜드리지 못한 죄스러움에 인천을 무대로 한 창작 소설에 더욱 힘을 쏟고 있다.
해방공간 인천을 무대로 좌우 이념대립을 그린 소설 '황해'를 비롯해 40여편의 소설 가운데 인천을 소재로 한 것이 30여편이나 된다.
“초등학교를 나와 공무원 생활을 하셨던 아버님이 남기신 향토사료집 내용이 학술적 체계가 미진한 것은 당연합니다. 한 자연인의 순수한 향토애(愛)의 열정으로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아버님도 향토사 연구에 밑거름을 뿌렸다는데 만족해 하실 것입니다.”
[이훈익을 말한다] 조우성 시인·인천시사 편찬위원
사실 십수년 전만 하더라도 지역 대학은 물론 인천 출신의 소장 학자들조차 대부분 지역사 혹은 향토사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게 현실이었다.
학자가 연구하기에는 그 분야가 협량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그런 면에서 한 세대를 앞서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던 향토사를 생애를 두고 천착하셨던 고일, 최성연, 이훈익 선생과 신태범 박사 그리고 기전문화연구를 통해 고군분투하셨던 박광성, 김순제 교수와 김양수 선생 등은 선구적인 업적을 남기신 분들이다.
그분들의 인천석금, 개항과 양관 역정, 인천 지명고, 인천충효록, 인천사담 그리고 인천 한세기, 개항 후의 인천 풍경, 기전문화연구 등은 오늘의 '인천학’을 출범케 한 기념비적인 노작들이다.
특히 이훈익 선생은 향토사학자의 일반적 연구 범주를 넘어서 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각사등록 등 여러 사서들 가운데 인천 기사(記事)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후세들에게 남겨 주셨다.요즘은 승정원일기조차 한글로 번역되어 나오는 판이지만, 이훈익 선생의 연구 시대만 하더라도 웬만한 한문 실력이 아니면 범접조차 못했던 분야를 선생은 과감히 파고 드셨던 것이다.
더구나 이훈익 선생은 생전에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자비(自費)를 들여가며 그 많은 저서를 발간하셨는데 이는 끈끈한 지역 사랑이 없인 불가능했던 일이라 생각한다.이제 지역사회는 향토사 연구 분야에 큰 관심을 가져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최소한 인천 지역의 각 문화재단들은 향토사 연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본다.인천 각 지역의 향토사가 튼실해져야 인천의 지역사가 체계를 세울 수 있고, 인천을 비롯한 각 지역의 지역사가 제대로 기술돼야 그것들이 모여 올바른 한사가 이루어질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글/조우성(시인/仁川市史 편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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