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하 이길용,항일 언론투쟁가
仁川愛/인배회
2007-03-23 12:31:22
[인천인물 100인]파하 이길용,항일 언론투쟁가
1988년 '88서울올림픽'이 열리기전 일본 언론사에선 서울올림픽과 관련한 다큐멘터리 제작에 열을 올렸다.
일본 언론이 관심을 보인 것 중 하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 1위를 차지한 조선인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이었다. 당시 동아일보 이길용(1899년~?)기자가 시상식 장면을 찍은 사진에서 손 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를 지워버리고 신문에 보도한 사건은 일본 언론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길용기자의 셋째 아들 이태영(64)씨는 “88서울올림픽 당시 일본 언론인들이 취재 과정에서 총독부의 혹독한 감시 속에서도 민족정신을 되살리고 항일정신을 불태운 아버지의 기자정신에 대해 '용감했다', '기자로서 당연한 일을 했다'고 평가하는 등 일본 내에서도 화제가 됐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우리 나라 항일 언론투쟁사의 최대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파하(波荷) 이길용은 1920년대~30년대 인천에서 활동하면서 체육발전과 항일운동에 나섰던 대표적인 엘리트였으며, 척박한 한국 체육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한국 체육계에 남긴 업적은 우리 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다양하게 연구되고 있다.
이길용은 1899년 9월9일 음력으로는 한가위 날 경남 마산에서 이차상씨와 이복순여사의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마산의 경작지 중 상당 부분을 일본인들에게 빼앗기게 된 그의 가족은 울분을 달래며 고향을 떠나 인천 동구 창영동(옛 인천백화점 건너편)으로 이사한다.
그는 인천영화학교를 졸업하고 14세의 나이로 배제학당에 입학한다. 이 때부터 경인기차통학생회를 통해 인천의 주요 인사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체육활동과 문화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1916년 배제학당을 졸업한 이길용은 일본 유학에 나섰다가 가족들의 만류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 1918년 철도국의 역무원으로 취업한다.
1919년 이른 봄. 이길용은 3·1운동을 전후해 임시정부가 각 지역에 독립운동 조직망을 확산시켜 나갈 때 임시정부의 비밀문서를 철도편으로 운송하는 책임을 맡고 활동하다 현행범으로 체포돼 만해 한용운 등과 함께 3년 형의 실형을 받는다.
복역을 마치고 출옥한 이길용은 인천에 거주하는 배제학교 학생들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인배회'에서 1921년부터 1924년까지 회장과 총무를 번갈아 맡아 활동한다. 비슷한 시기에 문화사업을 목적으로 창립한 '제물포청년회'에도 가입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1922년 이길용은 옥고를 치르다 인연을 맺은 동아일보 사장 고하(古下) 송진우를 만난다. 이길용의 명석한 두뇌와 항일정신, 필력(筆力)을 높이 산 송진우의 끈질긴 설득으로 동아일보에 입사해 인천지사의 일을 함께 보면서 운동부(현 체육부)를 전담한다. 1924년 8월에는 '조선운동기자단(한국체육기자연맹의 전신)'을 조직하고 체육계의 비약적인 발전에 공헌한다.
그는 이후 일본 등지를 돌며 스포츠 취재에 맹활약을 보이다 1936년 8월25일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단 일장기를 지우고 또 다시 옥고를 치른 것으로 인해 해방전까지 병고에 시달리며 암울한 시기를 맞는다.
대한체육기자연맹이 발간한 '일장기 말소 사건 의거 기자 이길용'과 유족들의 증언을 모으면 당시 상황은 이렇다.
1936년 8월 24일 오전. 출근길에 나서던 동아일보 운동부 주임(현 체육부 부장) 이길용은 오사카 아사히 신문사가 매월 2회 발행하는 '아사히 스포츠' 잡지에서 사진 한 장을 도려낸다.
마라톤대회에서 1위로 금메달의 영광을 안은 조선인 청년 손기정 선수가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당당히 서 있는 선명한 사진이었다. 그는 출근하자마자 현진건 사회부장에게 사진을 내보이면서 “손 선수의 가슴 부분을 잘 보이지 않게 보도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고 운을 뗀다. 가슴의 붉은 동그라미(일장기)를 가리키는 것은 현 부장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제안에 부장은 물론 국장, 동료 기자들도 의견을 같이 했다.
이길용은 곧바로 이상범 화백에게 달려가 “붉은 동그라미를 엷게 할 수 있겠나”라고 물었고, 이 화백은 “엷게 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어려우니 차라리 깨끗하게 지워 버리는 편이 간단하겠다”고 답했다.
이날 오후 3시 총독부의 신문 검열을 위해 보낸 1판(版)에는 손 선수의 가슴에 클로즈업되어 있는 붉은 동그라미 마크가 선명하게 비춰져 있었다. 그러나 2판부터는 그 가슴의 일장기 마크가 보이지 않았다. 사진의 수정 사실을 재빨리 포착한 것은 일본군 사령부였다. 사령부가 신문사에 호출을 내린 것은 오후 4시. 동시에 신문의 발송과 배달 중지도 내려졌다. 그러나 이 시간에 문제의 신문은 태반이 발송과 배달이 끝난 때였다.
그러나 이 사건이 처음이 아니라 두번째로 시도된 사건이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길용은 이보다 4년 앞선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대회 때 이미 선수들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지우는 항일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당시 일본 대표로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조선인 김은배 선수가 6위, 권태하 선수가 9위의 전적을 올렸다.
이길용은 이들 선수들 사진에서 가슴에 단 일장기를 감쪽같이 없애 버린 채 보도했다. 사진에는 일장기가 보이지 않고 선수들의 모교인 양정고등보통학교의 영문 머리 글자인 'Y'마크가 표시돼 있었다. 다행히 일본 언론들은 마라톤 참가 선수 중 한국인 선수들의 사진을 한 장도 게재하지 않았고, 조선총독부에서도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이길용과 화백 이상범의 비상한 고안으로 신문사 내에서 은밀히 사진 수정작업을 벌였던 것이다.
한편, 이길용은 두번째 저지른 일장기 말소로 사회부장인 현진건, 사회부기자 임병철, 화가 이상범 등과 함께 연행돼 일제의 가혹한 고문을 받고 40일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언론기관에 일절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모든 사회활동이 금지된 이길용은 이후에도 반일(反日) 발언과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로 4차례나 투옥됐다가 47세의 나이에 해방을 맞는다. 이길용은 이후 김성수, 송진우, 김준연, 조병옥 등과 함께 한민당(韓民黨)을 창당하고 조직부 차장을 맡았다.
그는 동아일보 복간과 아울러 이듬해 사업부 차장으로 복직되면서 체육회의 중책도 다시 맡아 활동하다 6·25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피란하지 않은 그는 한민당과 반탁활동으로 북한군에 끌려가 두 차례 조사 끝에 1950년 7월17일 다시 연행돼 납북됐다. 그러나 납북 이후 이길용에 대한 행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유족은 물론 주위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1989년 7월16일 한국 체육기자연맹 이사회는 독립운동가이자 체육기자로 일장기를 말살해 민족의 기상을 대변한 이길용기자의 불굴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이길용 체육 기자상'을 제정했다. 이어 1991년 8월15일 광복 45주년을 맞아 정부는 이길용기자를 건국훈장에 추서했다.
[인터뷰] 세째 아들 이태영씨
“우연하게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체육부기자로만 33년을 보냈습니다.”
파하 이길용 선생의 세째 아들 이태영(64·88올림픽CC 대표)씨는 한국일보와 중앙일보에서 체육 전문기자를 거쳐 체육부장을 지냈다. 그가 33년간 신문사에서 근무하면서 체육부장을 지낸 세월만해도 14년에 이른다.
“10살 때 아버지가 납북된 이후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모르지만 기억나는 아버지의 모습은 엄하고 강인하셨습니다. 집에서 손님들과 주연을 자주 베푸는 호인이셨다”고 회고했다.
그는 “언론인으로서 선배인 아버지는 지금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개척자 정신이 강하신 분이었다”고 했다.
그가 처음 한국일보에서 근무했을 때 당시 장기영 사장은 틈만 나면 “조상 부끄럽지 않게 하라”는 말씀을 자주했다고 한다. 이길용 선생이 언론계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쉽게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양정모 선수가 해방 후 처음으로 레슬링에서 우승했을 때의 감격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그 때 손기정 선생님과 함께 현장에서 시상식을 지켜봤어요. 처음으로 우리 나라 선수가 태극기를 가슴에 달고 있는 모습도 감격스러웠지만, 손 선생님께서 “아버님 생각이 간절하게 난다”고 하신 말씀이 더 가슴을 시리게 하더군요.”
이길용 선생은 한국체육사를 편찬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하던 중 납북됐다. 그는 “당시 아버지가 준비했던 자료를 바탕으로 언론사 체육부장들과 함께 한국체육사(20권)를 편찬했다”며 “아버지가 준비하시던 작업을 뒤늦게나마 마무리한 것을 가장 보람있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말처럼 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국 체육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체육기자연맹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KOC위원을 비롯해 대한체육회 편집위원장, 서울체육회 이사, 문화관광부 자문위원, 명지대 객원교수로 강의를 맡고 있기도 하다. 그는 “체육단체 활동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운명적인 것 같다”며 “지금도 체육회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서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아쉽고 부끄러운 일이 있다. 납북 이후 아버지의 행적에 대한 문제다. 수십년간 여러 경로를 거쳐 아버지의 행적을 추적했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다만 납북되면서 사고를 당해 돌아가셨을 것이라는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묘소도 마련하지 못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소원은 아버지의 유해를 찾는 것이다.
'6·25납북인사 가족협의회' 대변인을 맡고 있는 그는 “한국전쟁시 납북된 인사만 8만여명에 이른다”며 “정부가 전쟁 후 어민납북자에 대해 신경을 쓰면서도 전쟁전 납북자들은 행방불명자로 취급하고 아예 기억에서 지워버렸다”고 안타까워 했다.
/ 서진호·provi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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