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 이경성-미술계 산 증인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22 00:43:46
석남 이경성-미술계 산 증인
우리 나라 최초의 미술평론가이자 인천시립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낸 석남(石南) 이경성(1919~). 우리 나라 공립박물관 1호 인천시립박물관 관장을 시작으로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이르기까지 그는 우리 나라 미술계의 '산 증인'으로 일생을 미술과 함께 했다.
미술비평가, 미술관장, 미술대학 교수, 아마추어 화가…. 미술이라는 단어를 빼고는 설명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외길을 걸어왔다. 한평생 미술을 향한 열정으로 예술혼을 불살랐지만 여든일곱의 나이 탓인지 이젠 백발에 병색이 완연한 노인으로 변해 있었다.
지난 22일 오후 8시. 그가 머물고 있는 서울 평창동의 한 노인간호센터를 찾았다. 입원할 정도로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남독녀인 딸(50)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뒤 부양가족이나 변변한 거처도 없어 이 곳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의 미술 인생은 '우연'으로 시작된다. 그 운명적 우연은 몇몇 사람과 닿아 있다. 1919년 2월 인천 화평동에서 태어난 그는 19세 되던 해에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하지만 마중나오기로 한 친구 대신 그곳에서 인천 출신 미술학도 이남수를 만나면서 미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와세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방을 함께 쓰던 친구의 어깨 너머로 화집을 보면서 미술에 대한 꿈을 키웠다. 이때부터 그의 생각은 늘 미술에 가 있었다. 우리 나라 미학미술사의 선각자이자 당시 재경부립박물관장이던 우현 고유섭도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함께 유학생활을 하던 우현의 조카를 통해 서책에 대한 조언과 발송을 교환하며 고유섭에 대한 존경심을 키웠다. 우현에게 띄운 서신 한 구절은 유명하다. “선생님을 존경하는 것이 실례가 되겠습니까?” 답장은 해주지 않았지만 우현은 박물관장이 되겠다는 꿈을 석남의 가슴에 품게 했다.
“아흔을 앞두고 있는 지금 우리 나라 현대미술은 굉장히 좋아졌어요. 한국의 미학이라는 게 서양의 것과 다르거든요. 색도 흰색, 검정색, 이런 것이 원색 같은 것은 도저히 그 사람들을 못 따른단 말이에요. 한국의 철학, 샤머니즘, 종교…. 그래서 우리 미술은 다양한 색채보다는 무색, 검정색 이런 특징이 있어요. 역시 한국적인 게 세계화의 길입니다.”
석남이 미술사학을 전공한데는 일본인 교수와의 운명적 만남이 결정적이었다. 1942년 두번째 일본 유학시절 와세다 대학 미술사학과 아이쓰 야이치 교수가 건넨 격려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단다. “'너희 나라 미술사는 일본인에 의해 연구되어 잘못 해석된 것도 많다. 너 같은 조선 청년들이 직접 조선의 미술을 연구하라'는 말이 내 인생을 결정지은 셈이죠.”
1943년 전쟁 통에 공부를 다 마치지 못하고 인천으로 돌아온 그는 해방직후인 1945년 10월31일 인천시립박물관장으로 임명된다. 5개월여 준비끝에 당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있던 향토관건물(독일인이 지은 세창양행 사택)을 박물관으로 개조해 이듬해 4월1일 문을 열었다.
스물일곱의 나이에 우리 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 관장을 맡아 큰 실수를 하기도 했다. 그는 이곳 저곳을 쫓아다니며 박물관에 전시할 문화재를 수집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당시 웃지 못할 일을 하나 소개했다. “하루는 작약도에 살던 스즈키라는 사람이 일본 패전 후 귀중한 도자기를 영종도에 숨겨 놓았다는 얘기를 듣고는 직접 가서 1천여 점을 압수해왔지. 고려청자로 보이는 3~4점은 박물관에 전시까지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 가짜였어.”
박물관을 둘러 본 고고 미술계 개척자인 우현의 제자 황수영 선생이 당시 '민성(民聲)'이라는 잡지에 인천시립박물관에 가짜 고려청자가 진열돼 있다고 기고하면서 알려졌다. 톡톡히 망신을 당한 그는 요즘 같으면 목이 달아날 일이지만 그 일을 계기로 고미술품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석남은 인천시립박물관 이외에도 홍익대와 이화여대 박물관 등을 새로 개관하고 초대 관장으로 취임했고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을 맡는 등 박물관, 미술관과 인연이 깊다. 1947년엔 우리 나라 최초의 아트센터라고 할 만한 '인천시립예술관'을 만들어 운영을 책임지기도 했다. 인천은 당시만 해도 우리 나라 문화·예술의 요람이었던 셈이다.
젊은 신예 작가들의 발굴에도 힘쓰고 있다. 석남은 1981년 석남미술상을 제정해 20여년에 걸쳐 35세 미만 작가들에게 수상의 혜택을 안겨주고 있다. 또 석남미술재단(1989)을 세워 지금까지 이끌어 오고 있다.
그는 자신을 '아마추어 화가'라고 말한다. 수십차례 개인전을 열 정도로 그림그리기에도 남다른 면이 있다. 작품 소재는 주로 '사람'과 '산'이다.
“사람을 그리다 보면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는 것 같아 텅빈 마음이 조금이나마 메워져요. 병원 생활을 하던 최근에는 병실 밖으로 보이는 산을 주로 그렸죠.”
딸이 3년전 미국으로 이민가면서 홀로 남은 석남은 마음만은 편하다고 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던 그는 한 달도 안돼 도망치듯 다시 돌아왔다. “미국에 갔는데 말이 안되고, 친구가 없고, 직장도 없고, 움직이기도 불편하고 그야말로 바보가 된 느낌이었어요. 딸에겐 미안하지만 남은 생은 고국에서 마치고 싶었습니다.”
아흔 가까운 나이로 몸은 성치 않았지만 석남은 마음만은 여유로워 보였다. 1998년에 출판한 회고록(어느 미술관장의 회상)에서 '나에게 남은 것은 미술 속에 살아가고 또한 미술 속에 죽는 것이다'라고 밝혔듯이 그는 “미술 속에서 행복하게 죽는 것이 소망”이라고 했다.
[인터뷰] 석남 이경성 선생 수양아들 김달진씨
“여성잡지에 실린 미술자료를 모아 관장님께 보여드렸죠. 저를 보더니 '허허'하고 웃으시더라구요.”
석남 이경성이 수양 아들이라고 자랑하듯 얘기하는 김달진(50·김달진미술연구소장)씨. 그는 1977년에 석남과 처음으로 만났다. 당시 석남은 홍익대박물관 관장을 맡고 있었고, 김 소장은 스물 한살의 청년이었다.
“어려서부터 우표, 깡통 등 닥치는대로 모으는 수집광이었는데 중학생이 되면서 부터 '주부생활' '여원'과 같은 잡지에 실린 명화 한 장씩을 뜯어서 모아 미술자료집을 만들었어요.”
김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경복궁에서 열렸던 '한국근대미술 60년전'을 보고 미술자료 수집을 직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고 했다. “일간지와 월간지 기자, 각급 박물관 관장에게 나를 소개하는 글을 보냈는데 관장님만이 '홍대 박물관으로 한 번 오라'고 연락해주셨죠. 뛸듯이 기뻤어요.” 이 인연으로 석남이 초대 국립현대미술관 관장(1981)에 오르자 그는 미술관 자료실 임시직으로 특채됐다.
지금은 피는 나누지 않았지만 더 끈끈한 부자지간이 됐다. 김 소장은 요즘도 일요일 마다 부인과 아들, 딸을 데리고 석남이 머물고 있는 서울 평창동의 노인간호센터를 찾는다. 아이들은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잘 따르고, 부인도 며느리 노릇을 톡톡히 한다고 했다.
김 소장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밖에 없어 죄송할 따름이죠. 세월이 흐르면서 관장님이 사람을 더 그리워하시는 것 같은데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 이우성·wslee@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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