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박사 엘리 바 랜디스& 내동교회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3-24 16:18:39
의학박사 엘리 바 랜디스& 내동교회
지난 주말, 인천시 중구 내동 3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교회 마당에는 랜디스(Eli Barr Landis, 한국명·남득시)박사 기념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 랜디스 박사 기념비는 보셨나요?”
랜디스 박사에 대해 기사를 쓰고자 찾아왔다는 말에 인천 내동교회 김철환 사무장은 이 같이 말했다. 그러면서 '인천내동교회 110년사'라는 책을 건네주며 그(랜디스 박사)에 대해 언급된 부분을 참고하라고 했다.
김 사무장은 “사실 랜디스 박사는 정식 선교사는 아니었다”며 “선교활동으로 인천을 찾은 코프 주교와 함께 다양한 활동과 사업을 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의료사업으로 뛰어난 활약을 하신 분”이라며 “성공회가 우리나라에 뿌리내려 토착화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있는 랜디스의 묘를 매년 여기서 관리한다고 한다. 또한 지난해에는 러시아 대사관에서 동판으로 제작한 감사패를 주었다고 한다. 러·일 전쟁 당시 랜디스 박사가 러시아 군인들을 치료해 준 것에 감사를 전한 것이란다. 이 동판은 빨간 벽돌의 옛 병원건물에 붙어 있다.
이 교회 안봉식 관할사제는 “가끔 보면 감사패 밑에 꽃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며 “러시아인이 자국 선원의 희생을 추모하고, 랜디스 박사를 기억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랜디스 박사는 '최초', '처음'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선구자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지난 1865년 12월 1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나 1888년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랭카스터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선교지원운동에 영향을 받아 성공회 부속기관인 제성요양소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그 후 그는 코프 주교와의 만남으로 1890년 9월29일 마침내 인천에 터를 잡는다. 곧 그는 셋집을 구해 약국과 진찰실로 사용하면서 인천사람들에게 의술을 펼친다. 1891년 10월 개원한 성누가병원은 인천 최초의 현대식 병원의 효시가 되었다. 그는 인천 최초의 현대식 병원의 최초로 의료사업을 벌인 서양 의사였던 것이다. 랜디스의 통계에 따르면 1892년 모두 3천594명의 환자를 진료했고, 1894년에는 더욱 늘어나 4천464명의 신규 외래 환자와 방문치료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는 인천에서 1891년 최초로 영어학교를 만들어 인천시민들과 외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으며 1892년에는 고아를 데려와 보살피면서 최초의 고아원을 창시했다. 랜디스 박사는 40명의 학생을 4개 반으로 나눠 일주일에 6일씩 하루 3시간 영어를 가르쳤다. 학생 대부분이 일본인이었고, 이중 6~8명 정도의 중국인도 끼어 있었다. 그는 또한 당시 여섯 살 난 고아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아 길렀다고 '인천 내동교회 110년사' 책자는 전하고 있다.
그의 뛰어난 능력과 자질에는 한국에 대한 애정과 깊은 이해가 있었던 것 같다. 성누가를 기념하는 첨례일에 새 병원에 입주한다 하여 성누가병원이라 이름 지은 것을 두고 그는 “성누가병원이라고 하는 이름은 한국인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며 '선행으로 즐거운 병원'이라고 번역한 '낙선시의원'이라는 간판을 달았다고 한다.
랜디스 박사는 프랑스 신부가 지은 한국어 문법책을 가지고 한국어 선생의 도움을 받았다. 1890년 11월23일 코프 주교는 “랜디스가 심부름하는 아이들과 대화할 수 있다”며 '놀라운 발전'이라고 그의 한국말 실력을 칭찬하기도 했다.
당시 선교사들의 근황을 알렸던 소식지 '코리안 리포지터리(Korean Repository)'의 기록에는 “랜디스가 당시 한국에 있던 외국인 중 우리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를 지칭해 '약대인(藥大人·서양의사)'이라 불렀고, 병원 일대(지금의 자유공원 자락)를 '약대인산(藥大人山, 당시 사람들은 '약대이산'이라고 불렀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인천 한 世紀(세기)'라는 저술의 기록에는 '언덕 아래에 있던 성당보다도 오히려 성누가병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고 나와 있다.
또한 현재 연세대학교에 보관 중인 '랜디스문고'는 그가 한국에 있으면서 한국민속을 연구한 것으로 당시 한국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한다. '랜디스문고'에는 그가 당시 연구를 위해 수집했던 많은 서적들과 집필들 300여권이 있다.
연세의대 의사학교실 여인석 교수는 1897년 홍콩서 발간된 '차이나 리뷰(China Review)'지에 동의보감 내용 일부가 영어로 완역(完譯)돼 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언론에 발표한 적이 있다. 동의보감을 영역한 사람은 랜디스 박사. 여 교수는 “랜디스가 일찍 사망하지 않았다면 동의보감 전체가 완역됐을지도 모른다”고 했었다.
그러나 연세대측과 일반인들은 '랜디스문고'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었으며, 접근 또한 쉽지 않았다. 어떤 서적·집필들이 보관돼 있는 지 알고 싶어 연세대 도서관을 방문했지만 끝내 '랜디스문고'를 찾지 못했다. 도서관 담당자가 의대에도 문의했으나 “잘 모르겠다”는 답변 뿐이었다.
랜디스 박사는 장질부사(장티푸스)에 걸려 1898년 4월16일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의 장례가 있던 날은 천둥과 번개가 몹시도 심했다고 한다. 장례식은 그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한국식으로 시체를 제일 좋은 한복 두루마기를 입혀 안장했다고 110년사 책자에 기록돼 있다. 그의 마지막 숨결이 묻어 있는 인천 청학동의 외국인 묘지를 찾았다.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철문이 굳게 닫힌 것을 보니 사람의 손길이 끊긴 지 오래된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씁쓸했다.
/ 목동훈·mok@kyeongin.com
[인터뷰] 안봉식 내동교회 관할사제
“랜디스 박사는 성공회의 정신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선교는 물론 의료·교육 분야에서 다각적인 재조명이 필요합니다.”
인천 내동교회 안봉식(49·베다) 관할사제는 “성공회는 '전도'보다는 고아원 운영 등 사회선교에 중점을 둔다”며 “랜디스 박사의 활동과 연관이 깊다”고 말했다.
성공회는 전도와 사회선교 활동을 별개로 여긴다. 사회선교 활동이 복음을 위한 이용수단이 아니라는 게 안 신부의 설명이다.
그는 “성공회 교회 가운데 학원·고아원 등과 함께 출발하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며 “성공회 특성상 사회선교 활동에 대단한 활동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영어교육·고아원운영·의료선교 등의 활동을 벌인 랜디스는 성공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안 신부는 호주 시드니에서 목회 연수를 마친 뒤 지난 1999년 12월부터 인천 내동교회 관할사제를 맡았다. 그는 선교역사의 기록을 남겨야 겠다는 의지를 갖고 '대한성공회 인천 내동교회 110년사(1891~2001)' 책자 제작을 추진하게 된다. 이 때부터 랜디스 박사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랜디스 박사를 이 책자에 담으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자료 수집이었다.
“랜디스 박사의 자료를 찾기 위해 영국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모닝캄(The Morning Calm)'을 뒤지기도 했습니다. 쉽지 않더군요.”
그는 교인들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얻기 위해 교회역사와 신앙의 길을 함께 걸어온 원로 교인들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원로 교인 찾기가 쉽지 않음은 물론 그가 만난 교인 대부분이 랜디스 박사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성공회대 도서관이나 성공회 역사연구회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도 충분치 않았다는 게 그의 설명. 랜디스 박사의 증명사진 조차 구하지 못해 단체사진에서 그의 얼굴만 따로 떼어 110년사 책자에 게재했다고 한다.
“성공회가 랜디스 박사 관련 자료를 모아 보전하지 못한 잘못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직자들의 인사이동으로 인해 그를 깊게 연구하지 못한 점도 아쉽습니다.”
그는 “110년사 책자 자료를 수집하면서 랜디스 박사에 관한 얘기를 남에게 전해 들어야 한다는 게 안타까웠다”며 이 같이 말했다.
안 신부는 교회위원회 정책세미나를 통해 랜디스 박사의 흉상을 제작해야 한다고 요구해 놓은 상태다. 그는 또 랜디스 박사의 약력을 동판으로 만들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
/ 목동훈·mok@kyeongin.com
인천 내동교회는?
1890년 인천 중구 내동에 성공회성당이 들어선 것이 한국 성공회의 시초이다.
당시 벤슨 캔터베리대주교는 1887년 중국과 일본에 있는 영국성공회 주교들에 의해 한국에 선교를 시작할 것을 요청받았다고 한다.
벤슨 캔터베리대주교가 한국 초대 교구장 주교로 선택한 사람은 찰스 존 코프. 이들은 인천항에 첫발을 내디뎌 선교활동을 시작했으며, 인천지역 선교 책임은 랜디스 박사에게 맡겨졌다고 한다. 당초 교회 건물은 1891년 9월 30일 준공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됐다. 현재 건물은 1956년 6월 23일 준공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 내동교회 안봉식 관할사제는 “6·25전쟁에 참여했던 병사들이 영국으로 되돌아가 헌금을 걷었다”며 “이 헌금이 교회를 다시 짓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현 내동교회 건물은 한국의 건축미를 잘 살린 건물로 평가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인천의 성공회는 그 곳이 초기의 선교 중심지 중의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만큼 성장하지 못했다고 '인천 내동교회 110년사'는 전한다. 서명원이 지은 '한국교회성장사'를 보면 1900년 통계에는 영세체자수가 겨우 10명, 1915년 123명, 1929년 112명, 1938년 86명 등으로 기록돼 있다. 현재에는 200여명의 교인이 교회에 나올 정도로 교세가 약한 편이라고 한다.
/ 목동훈·mok@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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