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터널 주변 풍산홍씨 선산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4-02 04:25:43
문학터널 주변 풍산홍씨 선산
왜 인천에? 독립운동가 홍진 묘비 내력 풀렸다
인천시립박물관 소장 유물 중 그 동안 베일에 가려있던 독립운동가 홍진(洪震, 1877~1946) 선생 묘비의 내력이 밝혀졌다.
홍진은 1919년 4월2일 인천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서 한성임시정부의 조직과 조각 등을 확정하고 상하이로 망명,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등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하지만 홍진의 묘비를 왜 인천시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지, 홍진이 인천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해선 전혀 알려진 바 없었다.
시립박물관 윤용구 학예실장은 “인천시의원을 지낸 연수사랑회 정구성(79) 회장의 구술 증언과 홍진의 증조부인 우순(祐順)의 신도비 등을 종합한 결과 연경산 북측 자락인 현 문학터널 주변이 풍산홍씨의 선산이었다”며 “지난 1984년말 인천 학익동에서 국립묘지로 묘역을 이장할 때 그의 묘비가 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1일 밝혔다.
판의금부사를 지낸 우순의 신도비는 1990년대 초반 주변 지역이 개발되면서 없어졌고 현재 탁본만 남아 시립박물관이 보관하고 있다.
홍진은 1877년 8월27일 서울 차동(현재의 서소문)에서 풍산홍씨 재식(在植)과 청주한씨 사이에서 3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충북 충주재판소 검사를 지내다 1910년 경술국치때 사직, 서울에서 변호사로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에 힘썼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한성오, 이규갑, 김사국, 한남수 등과 준비모임을 한 뒤 4월2일 만국공원에서 13도 대표를 모아 한성정부의 조직과 조각을 확정한다. 이는 상해임시정부의 출범에 촉매제 역할을 했다.
홍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에 힘써오다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 1946년 2월 반탁운동 단체인 비상국민회의 의장을 맡아 활동하다 그해 9월9일 69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정구성 회장은 “1984년 인천경찰국에서 세우려던 전경 숙소 부지 인근에 묘 1기가 있었는데, 수소문 끝에 홍진 선생의 묘로 확인됐다”며 “일대가 풍산홍씨의 선산이었고, 일제가 몰수했다는 것이 그 때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라고 말했다.
당시 인천도시개발 사장이었던 정 회장은 그해 말, 현 인천광역수사대 인근에 있던 홍진 선생 묘역의 이장 작업에 주도적으로 관여했다.
정 회장은 “홍진 선생 자손이 당시 국내에 없어 백범 김구 선생이 상주를 맡았고, 그 동안 관리는 광복회가 했다”고 설명했다. 장개석 총통이 썼다는 묘비는 시립박물관으로 옮겼는데, 그 사정이 전해오지 않았던 것.
윤용구 실장은 “현 학익동 68의2 일대가 풍산홍씨 선산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만큼 독립운동가 홍진과 인천의 연관성을 찾는 연구를 벌일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정 회장은 “1919년 4월2일 인천 만국공원에서 한성정부의 기초를 다진, 홍진과 관련된 기념 사업을 인천시가 적극적으로 벌이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주희기자 juhee@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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