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KLO의 한국전 비사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4-09 01:31:45
인천상륙작전...KLO의 한국전 비사
이창건 지음/지성사
얼마 전, 맥아더 동상 철거를 둘러싸고 온 나라가 들썩였다. 진보와 보수 세력의 충돌. 이 과정에서 역사와 정치학계, 지식인층과 대중들 사이에서 맥아더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는 길목을 가로막는 냉전시대의 유물’ ‘자유주의체제를 유지하게 한 결정적 공로가 있는 영웅’이란 시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논쟁을 떠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한국전쟁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맥아더의 평가는 과연 맞는 말일까.
흔히 ‘켈로’라 알려진 한국전쟁 무렵 정보수집과 북파공작 전문 첩보부대(KLO) 대원 출신인 이창건씨(77)는 이 질문에 퀘션마크를 찍는다. 그는 증언집 ‘KLO의 한국전 비사’(지성사)를 통해 인천상륙작전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공했는 지 말한다. 그 작전에 어떤 첩보전이 있었는지, 팔미도를 탈환해 그 등대에 불을 밝히지 못했다면 인천상륙작전 성공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르고,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동상 철거를 둘러싼 논란도 없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1950년 9월 15일. 맥아더가 주도하는 인천상륙작전을 우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버금가는 전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성공엔 KLO 부대원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한 서해안 인천. 이 곳을 통해 연합군이 상륙할 수 있는 시기를 선택하는 정보를 수집하라는 명령을 받은 KLO는 임무를 완수했다.
한밤중 연합군을 인천으로 인도하기 위해선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최규봉 대장이 이끄는 KLO 대원들은 이 곳에 성조기를 꽂았고, 이 성조기는 맥아더에 의해 최규봉 대장에게 선물로 주어졌다가 나중에 미국 맥아더기념관에 기증됐다.
증언집 최규봉 대장의 증언에 따르면 맥아더는 키가 173∼175㎝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가 건장한 미군으로 비치는 것은 사진조작 때문이라고. 증언에 따르면 맥아더가 인천에 상륙할 때 사진기자들을 대동했는데 맥아더 사령부 홍보팀은 맥아더를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자세를 낮추라고 했다고 전한다. 또 인천에 맥아더가 상륙하는 장면이 별로 안 좋아 상륙작전을 한 차례 더 연출해 달라고 요청한 일도 있었다고 증언집은 덧붙인다.
이와 함께 20여 명에 이르는 생존대원들의 증언은 중공군이 어째서 부산까지 밀고 내려가지 못했는지, 북한 지역에 퍼졌다는 흑사병의 정체는 무엇인지 등등 한국전쟁을 둘러싼 생생한 첩보전의 실상을 고발한다.
책은 모두 3부로 구성됐다. 1부는 KLO 부대 고트대 대장이었던 최규봉(현 KLO 참전동지회 회장) 대장의 회고담을 바탕으로 정리한 해방 전후의 활동, 인천상륙작전, 대북 첩보활동, 세균전 의혹 등 한국전 주요 국면과 KLO의 활약상을 세세히 기록했다. 2부는 24명 대원들의 활약상과 휴전 후 사회진출을, 3부는 저자 이창건 박사의 KLO 체험으로 각각 구성됐다.
이창건씨는 증언한다. “그들은 죽기로 싸웠는 데도 유엔군도 한국군도 미군도 아니라 하여 군적과 군번이 없고 따라서 군 경력도 인정받지 못 했다”며 “사망해도 전사자 처리가 안 되고 부상 당해도 국군병원 혜택도 못 받고 애초부터 연금 같은 건 꿈조차 꿀 수 없었다”고. 492쪽. 2만원
/김진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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