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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연구,자료

강화도 역사 문화 탐방 교안

by 형과니 2023. 4. 6.

강화도 역사 문화 탐방 교안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4-04 15:53:58

 

강화도 역사 문화 탐방 교안

 

 

 

1. 강화 도착 (12:15)

 

1) 식당 집결. 숟가락을 들자 합창

 

2) 점심 식사.

 

 

 

2. 등나무 집결 (12;45)

 

1) 인원 파악 및 역사문화 탐방 해설사 인사.

 

안녕하세요 식사 줄겁게 드셨습니까? 오늘 강화도 역사 문화탐방 활동에 여러 화원님을 모시게된 X X X입니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역사 축소판 이자 박물관입니다. 섬 전체가 선사시대로 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 중요한 역사의 맥이 살아 숨 쉬는 곳입니다.

 

강화는 구석기시대 이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처 찬란한 문화을 이루어 왔고 우리나라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 곳이다.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고인돌과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단군이 하늘에 제을 올렸다는 마니산 첨성단을 비롯한 만은 유적들을 남겼고 고려시대에는 우리 문화의 절정 인 팔만대장경. 고려상감청자. 금속활자등을 강화도에서 처움 만들었다.

 

 

 

. 등나무

 

콩과(Fabaceae)에 속하는 낙엽 만경식물. 10까지 길게 뻗으면서 자란다. 잎의 앞 뒤에 털이 있으나 자라면서 없어지고 잎가장자리는 밋밋하다. 꽃은 연한 자주색이고 5월 에 가지끝이나 잎겨드랑이에 총상(總狀)꽃차례를 이루어 핀다. 잔털이 있는 협과(莢果)9월에 익으며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그 속에 들어 있던 씨들이 멀리 퍼진다.

 

흰 꽃이 피는 백등나무 겹꽃이 피는 겹등나무 등도 흔히 심고 있다.일이 까다롭게 뒤얽히어 풀기 어려울 때 '갈등'(葛藤)이란 낱말을 쓰는데, 갈은 칡을, 등은 등나무를 가리키는 한자로 등오른쪽으로, 칡은 왼쪽으로 감아 올라 가므로 이 두식물이 한곳에서 만나면 서로 먼저 감아 올라가려 하기 때문에 일이 뒤얽히게 된다는 것이라 한다.이전에는 섬유나 종이 또는 그릇을 만들어 썼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쓰지 않고 있다.

 

 

 

. 강화의 역사.

 

강화군은 멀리 국조 단군성조의 개국과 그 역사를 함께하며 도서 특유의 지정학적 숙명으로 고금을 통해 왕실의 흥망성쇄가 곧 강화군의 역사를 이룬 것이라고 하겠다

 

. 강화의 옛 이름은 갑비고차라 불리웠고, 고구려 시대에 이르러 군제를 두어 혈구군이라 칭하였으며, 신라때에 이르러 해구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를 주재시켰다.

 

고려조에 이르러 태조 22년에 현으로 개편되고 이어 현재 지명인 강화군으로 불리웠다. 강화는 국가에 커다란 변란이 있을 때마다 제 2의 서울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조정에서는 강화로 천도함으로써 강화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강화는 39년간이나 사실상의 고려조의 왕도 역할을 하게 되었고,그 후에도 수차의 천도가 있었던 바 처음으로 강화에 천도한 것은 고려 23대 고종이었다. 그 해 대륙에서 득세한 신흥 세력인 몽고군이 송경, 지금의 개성에 침범하자, 당시의 권신 최우의 권유로 8월에 천도하였고, 그 다음 대의 원종도 강화에 머물러 전후 39년간 강화는 사실상 고려의 서울이었다.

 

그 뒤 25대 충렬왕은 재위 1712월에 또다시 거란군의 화를 입어 강화에 들어 왔다가 2년 후에야 겨우 송도로 환도하는 등, 강화는 양차에 걸쳐 고려 정치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고려는 고종때의 천도를 계기로 당시의 서울인 송도를 폐하고, 강화를 항구적인 도읍으로 삼으려 했던 모양이다.

 

고려 제23대 고종은 그해 8(6)에 송도에서 강화로 옮기면서 이령군으로 하여금 국도의 방어선인 내성의 축조공사를 일으키는 한편 궁전 구장과 사찰, 사직 등을 모두 당시의 왕도인 송도를 모방케 하고, 궁전 배후의 산에 송악이라는 산 이름까지 짓게 했던 것이다. 내성이 완공되자 익년 겨울에 외성을 쌓게 했고, 229월에는 연안의 방비를 강화하였으며 2412월에는 외성 등을 또 중수했다.

 

그러나 몽고병의 세력이 날로 강화되어 강화도의 임시 왕도 방어가 위태롭게 되자 마니산 남쪽에 별궁인 흥왕이궁을 마련했고, 5월에는 가궁과 혈구사를 삼랑성에 창설하는 등 갖은 노력을 다 하였으나 끝내 강화는 몽고군에게 유린 되었고, 태자는 볼모가 되어 466월에 몽고 내지로 납치되는 비극이 일어났던 것이다. 태자를 몽고로 보낸채 고종은 강화에서 천명을 다했고, 뒤를 이은 24대 원종도 강화를 서울로 이어받을 생각이었으나 몽고의 압력으로 이를 실현치 못하였다. 이로써 강화는 천도이후 39년간 고려의 국도가 된 셈이다.

 

그러나 강화서울의 수난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25대 충렬왕 10년에는 원나라의 반적, 흡단의 내구로 충렬왕이 일시 강화로 피했던 일이 있고, 고려 말의 공민왕 10년에는 또 홍두적의 난을 당해 강화천도가 논의된 일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태조, 정종, 태종의 3대왕이 일시적이나마 강화에 잠행한 일이 있고, 특히 태종은 강화에 도호부사를 두어 방어를 강화했으며, 14대 선조도 강화의 방어에 주력해 왜병을 근접치 못하게하여 남북간 적병의 연락 차단에 성공했던 일도 있다. 병자호란 때도 인조는 제 1차의 난에서 40일간을 강화로 몽진, 겨우 난을 피했었고, 남한산성에서 농성한지 45일만에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맺고 제 2차 내침 때에도 강화도의 몽진이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남한산성으로 방향을 옮겼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조선17대 효종으로 하여금 성의 축조와 군량 보충을 강화케 했고, 19대 숙종은 인조시대부터의 유수에 진무사를 겸하게 했을 뿐 아니라 수비를 강화하기위한 진,보를 증설하고, 각 진에 돈을 설치하여 분담 수비하게 하였으며 문수산성의 축성 등 모든 방비를 강화시켰다.

 

강화도의 수난은 현대에 까지 미치는데 조선 고종3년의 프랑스 군함사건과 동 8년의 미국 군함사건, 12년의 일본 군함사건 등 조선 최후의 비극을 연출시킨 도화선이 되었던 곳이 곧 강화도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별도로서 또는 요새지로서의 중요한 임무를 지녀온 강화인만큼 당시의 왕궁을 중심한 고적과 유적이 전도에 산재해 있을 뿐 아니라, 도처에 승경이 있어 어디를 가나 왕도를 찾는 기분이 충만해 있다.

 

이상과 같은 윤곽 만으로도 다난한 역사를 지닌 강화를 인식하게 될것이고 옛곳을 한번 찾아 볼만한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강화섬 남쪽 마니산 주변의 전등사와 정수사, 강화읍 서쪽의 고려산 언저리에 자리한 백련사와 적석사. 전등사는 강화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절로 대웅전, 약사전, 범종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마니산 동쪽에 소박한 모습으로 들어선 정수사는 신라 선덕여왕 8(639)에 창건됐다는 고찰로 마당에서 시원스런 바다를 조망 할수있다. 백련사는 고구려 장수왕 4(416) 창건됐다. 적석사 역시 백련사와 연대 를 같이 하며 인근 낙조봉에 오르면 서해를 붉게 물들이는 낙조의 장관을 감상할 수있다

 

 

 

. 역사 탐방 시작.

 

) 강화는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에 있다..

 

마니산에서 한라산 백록담. 백두산 천지 길이가 같다고한다 단군 성조의 개국과 더불어 그 역사을 같이하고 있는 곳으로 역사의 고도이며 개국의 성지이다.

 

단군께서쌓았다는 첨성단과 곳곳에 산재되어있는 고인돌을 비롯한 수많은 문화 유적은 강화의 오랜 역사을 보여 주고있다.

 

 

 

) 강화의 문화.

 

강화는 세계사에 빛나는 민족문화의 황금기을 꽃피운곳.고려는 몽고항쟁의 천도시기에 민족문화의 정도라고 할수있는 팔만대장경 판각 고려청자 제작. 금속활자 주조등이 이루어 졌다. 또한 전국적으로 유명한 화문석 강화반닫이 등의 공예 문화도 발달하였다.

 

) 강화의 전쟁사.

 

강화는 고려시대이후 여러 차례의 외침으로부터 나라을 지켜온 국난 극복의현장이다. 고려시대는 몽고의 침략에 39년간 고려의 도읍으로 끈질긴 대몽항을 벌였으며 조선시대 강화는 수도 한성의 관문이자 방위 전초기지였다.

 

정묘호란. 병자호란 당시는 조정의 피난지로의 역할했고. 근대에 들어 서구 열강의 친입으로 병인, 신미양요을 겪게되었다.

이후 운양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 갑곳진에 상륙한 일본은 마침내 조일 수호조약 (강화도 조약)를 체결하게 되었고 이로서 조선도 일본과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

 

1876(고종 13)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불평등조약.

 

공식 명칭은 조일수호조약이며,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 한 일본은 이미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프랑스·미국 등에 왕정복고를 통고하는 한편, 대마도주 무세[宗義達]를 외국사무국보(外國事務局輔)로 임명하여 조선에 대한 국교의 재개를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왔으나 조선은 서식과 직함이 다르다 하여 국서의 접수를 거부했다. 그러나 일본은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생겨난 사족(士族)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고, 또 구미 제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다른 나라의 문호를 개방시키려 했으며 조선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한편 국내에서도 개화세력들에 의한 문호개방의식이 자라고 있었고 민씨정권으로서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국과의 분쟁을 피하고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청국도 조선에 미국·프랑스와의 국교수립을 권고하고 일본의 대만정벌 소식을 접하고는 조선의 대일본정책의 전환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세에 편승한 일본은 부산항에서 함포시위를 벌여 조야에 충격을 준 후, 강화도에서 운요호사건을 유발함으로써 마침내 1876227일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특명전권판리대신 구로다 기요다카[黑田淸隆] 사이에 12개조로 된 강화도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 5, 조선은 부산 이외의 두 항구를 20개월 이내에 개항하여 통상을 허용한다. 7, 조선은 일본의 해안측량을 허용한다. 10, 개항장에서 일어난 양국인 사이의 범죄사건은 속인주의에 입각하여 자국의 법에 의하여 처리한다. ·일조약(1858)을 모방한 이 조약의 체결로 조선은 일본에 부산·원산·인천의 3개 항구를 개방하고(5) 치외법권을 인정했으며(10), 일본화폐의 통용과 무관세 무역을 인정했다(통상장정).

 

또 제1조의 내용은 조선과 청국과의 관계를 끊고 일본이 조선에서의 우위를 차지하려는 저의가 담긴 것이고, 7조는 군사작전시의 상륙지점을 정탐하려는 것이었다. 이후 일본의 적극적인 조선진출을 견제하려는 청국의 주선으로 미국과도 통상조약을 체결하고(1882), 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과 우호통상조약을 맺음으로써 세계자본주의 질서에 본격적으로 편입되어갔다.

 

 

갑곳 돈대 안내판으로 이동

 

 

 

3. 갑곳 돈대 안내판 (강화 역사관 정문)

 

안내판 앞에서 오늘 탐방 코스 계획 전달한다. 금속활자 증흥 기념비로해서 비석군.

 

강화 역사관. 갑곳 돈대. 외성터에서 탐방 마치고 역사관 앞 계단에서 기념 찰영하고

 

고인돌로 출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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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진. 덕진진. 광성보는 강화의 서쪽을 지키는 국방요새다

 

강화에는 57538포대 8봉수 4요망대가 설치되었으며 이중 일부가 복원되었다.

 

""""는 군사상 중요한 지역인 해안변방에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던 군사주둔 지역으로 "()"은 오늘날 대대병력이 주둔하던 곳이고 "()'는 중대병력이 머물렀으며 진이나 보에 포대가 소속되어 있었다. "돈대(墩臺)"는 조금 높직한 평지에 초소가 있던 곳을 말하며 "()"은 전투를 하거나 야영을할 때 군사가 머물러 둔()을 치는 곳이며,

 

"포대(砲臺)"는 적탄을 막고 아군의 사격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견고하게 쌓아 만든 화포(火砲) 진지 즉 포루(砲樓)이며, "봉수(烽燧)"는 봉화(烽火)를 말하는데 변란(變亂) 따위를 알리기 위하여 봉홧둑에서 올리는 횃불을 말한다.

 

"요망대(瞭望臺)"는 높은 곳에서 적의 동정을 살피며 바라보는 곳이라 한다

 

 

 

4. 세계 금속활자 발상 증흥 기념비.

 

강화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을 만든 곳으로 고종 21(1234) 최의가 금속활자로

 

삼정고금예문 28부을 인출한 사실이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후집에 기록되어있다. 서양보다 200년 앞서 금속활자를 만든것을 기념하여 세운 비이다.

 

 

 

재료에 따라 놋쇠활자[靑銅活字구리활자[銅活字납활자[鉛活字쇠활자(鐵活字아 연활자(亞鉛活字)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합금이 아닌 순수한 금속만으로 활자를 만 들어 쓰면 녹이 자주 나거나 오래 견디지 못하므로 오래 견딜 수 있도록 합금으로 만든다. 활자를 주조할 때에 글자 획을 제대로 내게 하거나 끓여서 녹힌 다음 식혀 서 뒷 마무리를 제대로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도 합금으로 활자를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금속활자라 하면 어느 성분이 많은가에 따라 명칭이 정하여지지만, 주성분 이외의 다른 금속 성분도 어느 정도는 섞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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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활자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쓰여졌다는 것은 사실이다. 금속활자의 기원에 대해서는 고려시대 기원설과 조선시대 기원설로 크게 나누어진다. 고려시대 기원설 은 문종(1047~83 재위) , 숙종 7(1102), 고종 6~16(1219~29)3가지 설 로 나눌 수 있고, 조선시대 기원설은 1403(태종 3)을 주장하는 안춘근(安春根)의 설이 있다. 이중 1403년의 설을 따른다고 해도 독일의 J. 구텐베르크가 마인츠에서 1435~45년 사이에 활자를 주조했던 때보다도 40여 년이나 앞서는 일이다. 더구나 고려 때의 활자 실물이 국립중앙박물관과 개성박물관에 1과씩 남아 있어, 앞서서 제 작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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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금속활자 중요무형문화재 제101호로 지정하여 조선시대 이후 급속히

 

쇠퇴한 금속활자 인쇄술의 복원과 연구에 힘쓰고 있으며 기능보유자로

 

오국진(吳國鎭)이 있다.

 

 

 

5. 강화 비석군.

 

 

 

1) 하마비(下馬碑)

 

왕조 때, 말을 탄 사람이 그 앞을 지나갈 때에는 누구나 말 에서 내리라는 글을

 

새겨 세운 비석. 대궐이나 종묘 향교 앞 같은 데 세웠습니다.

 

한자로 대소인원 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새겼음.

 

 

 

2) 송덕비

 

고을 삿도나 원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송덕비(頌德碑)라는 것을 세웠는데, 이 송덕비 는 서민의 눈에 곱게 보일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비석에 대고 욕설을 하거나 발길질로 비석을 차면서 평소 쌓인 울분을 폭발시켰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시작된 비석치기가 점차 놀이화되어 어린이 놀이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하 여, 비석치기는 돌맞히기’ ‘바사치기’ ‘비사잭기’ ‘돌치기라는 순수한 우리말이 있는 것을 보면, 비석치기의 비석은 송덕비의 비석이 아니라 돌을 가지고 던져 맞히는 놀이란 뜻에서 날아다니는 돌[飛石]이 더 적합하다고 여겨진다.

 

인천 향교에 을사 오적 중 하나인 박 재순 송덕비 철거되었습니다. 철거가 잘된것인지 그 냥 놔두는게 잘하는 일인지는 여러분이 결정하세요. 청량사 입구 황부사 송덕비는 특이하 게 큰 바위에다 만들었습니다.

 

 

 

3) 금표비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보호헌장입니다..

 

방생축자장일백 기화자장팔십즉 가축을 놓아기르는자는 곤장 100대를치며

 

쓰레기릉 버리는 자는 곤장 80대를 친다는 경고비로 조상들의 자연보호정신을

 

읽을수 있는 비석이다.

 

 

 

6. 1층 강화 역사관.

 

이후 조선시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시 인조임금의 파난 수도 이기도 했으며 조선말기에는 대원군의 쇄국정치와 천주교의 탄압으로 빚어진 프랑스 함대의 침입 사건인 병인양요, 그 리고 신미양요 그 후 운양호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체결등풍운을 겪어낸 역사의 산실로 강 화도전역에 14개의 대소사찰과 103점의 문화재를 간직한 역사의 고장입니다.

 

국난을 극복한 강인한 민족의 저력과 슬기로운 문화를 계승시켜 민족항쟁의 위업을 선양 하고 호국정신의 함양을 위하여 1984년부터 5개년 사업으로 167천만원을 투입하여 1988914일 강화역사관을 개관하였습니다.

 

 

 

1층 입구. 개국서원 전시장.

 

(입구에서 좌측 전시장)

 

 

 

1) 선사시대[先史時代, prehistory]

 

선사시대의 유물 선사시대부터 인간의 활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된 지역

 

으로 하정면 장정리. 화도면 사거리. 동막리 부근에서 발견된 쌍날 찍게등

 

구석기시대의 유물은 약 2만년 전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문자의 발명과 그에 따른 기록이 남겨지기 이전의 시대.

 

문자기록이 남겨진 뒤의 시대를 역사시대로 부르는 데 대한 상대적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이 말은 1851D. 윌슨이 고고학과 스코틀랜드의 선사시대 연대기 The Archaeology and Prehistoric Annals of Scotland를 쓰면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문자의 발명과 사용은 세계 여러 지역마다 다르고, 아직 문자를 사용하지 않은 지역의 역사들이 문자사용권에서 기록되어 남겨진 경우도 있어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를 뚜렷이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런 경우에는 원사시대(protohistory)라는 말을 사용하여 선사시대와 역사시대의 중간단계로 보기도 한다. 선사시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선사시대 연구는 고고학 발굴에서 나온 유적과 유물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고고학에서는 물질자료에 근거하여 석기시대·청동기시대·철기시대로 구분하고 있는데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일부가 선사시대에 포함된다. 문자의 발명이 가장 빠른 곳은 서남 아시아의 수메르 문명으로 청동기시대에 속한다. 청동기시대는 도시화·문명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로 선사시대로부터 역사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양상이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선사시대는 국가 성립 이전의 단계로 볼 수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조선 건국 이전을 선사시대로 본다.

 

 

 

2) 삼국 시대

 

삼국사기 에는 신라가 BC 57, 고구려가 BC 37, 백제가 BC 18년에 각각 건국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신빙성이 없다. 고구려는 BC 3~2세기에 그 실체를 중국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1세기경에 이미 성립했다. 백제와 신라는 1세기 이후에 성립했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 삼국시대는 삼국 형성 때부터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668년까지를 말한다.

 

 

 

. 삼국의 형성

 

삼국은 철기의 보급으로 농업생산력이 증대하고, 여러 정치세력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격화된 시기에 성립했다. 삼국의 성립시기와 그 과정은 세 나라마다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유역에 거주하던 맥족(貊族)이 세운 국가이다. 압록강 지류인 훈장 강[渾江]과 그 유역 일대에는 BC 4~3세기 무렵 이후 철기의 보급으로 사회분화가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이때 맥족들은 유력한 친족을 중심으로 계곡이나 하천 유역에 거주하면서 정치집단을 형성하여 그곳에 성을 쌓고, 그 촌락들을 홀··구루(溝婁)라고 칭했다. 이렇게 고유한 음()으로 표기한데서 고구려의 '구려'라는 명칭이 나왔다. BC 108년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구려지역에 현도군(玄兎郡)을 설치하자, 이 집단들은 그에 예속했다. 그러나 고구려인은 그들의 직접적인 지배에 저항했고, BC 75년에 현도군을 요동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때 고구려의 여러 정치집단들은 소노(消奴) 집단의 장을 왕으로 하는 연맹체를 구성했다. 후에 주몽을 중심으로 한 계루집단이 세력을 강화하여 소노집단을 누르고 주도권을 장악했는데, 이 시기가 BC 37년경이었다. 이 무렵 계루집단이 집권적인 정치력을 구축함으로써 고구려지역 전체를 통합하는 강력한 고대국가를 형성했다. 백제 건국의 중심세력은 북에서 내려온 부여계·고구려계 이주민집단들이었다. 백제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고구려에서 남으로 이주해온 비류(沸流온조(溫祚) 형제가 각각 미추홀(彌鄒忽)과 위례(慰禮)에 자리잡았다가, 뒤에 형 비류가 이끌던 미추홀집단이 온조집단에 합류하면서 백제라는 국가를 건국한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한강유역에 자리잡은 부여계·고구려계 이주민들이 한꺼번에 옮겨와 정착한 것은 아니었고, 기원 전후 시기에 소집단별로 정착했다. 한강유역 각지에 자리잡은 이들 집단은 그 지역의 토착세력과 연합하여 정치집단을 형성했다가 그뒤 모두 통합하여 백제국가를 성립했다. 신라는 진한(辰韓) 12국의 하나였던 사로국(斯盧國)을 모체로 성립했다. 신라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경주지역에 살던 6(六村) 세력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으로 추대하여 세웠다고 한다. 이 설화는 고조선이 멸망한 뒤 대규모 이주민이 경주지역으로 내려왔고, 그들과 그 지역의 토착세력인 6촌세력이 연합하여 신라를 건국한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경주지역 유적에서 1세기 무렵의 고조선계 철기유물이 대량 발견되고 있는 점은 철기문화를 보유한 고조선계 이주민이 토착세력에게 영향을 끼쳤고, 이들 2개의 집단들이 연합하여 신라를 건국했음을 확인시켜주는 증거다.

 

 

삼국은 여러 지방에 산재해 있던 주변의 여러 소국(小國)들을 정복·병합하면서 강력한 고대국가로 성장했다. 고구려는 초기에 한나라와 투쟁하는 과정에서 성장했고, 그를 발판으로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여 1세기 무렵에는 압록강과 퉁자 강[佳江] 유역 일대를 차지했다. 또 태조왕 때에는 동옥저(東沃沮)를 복속시켜 영역을 동해안지역에까지 넓히고 풍부한 물자를 공물(貢物)로 받아들였다. 2세기 무렵에는 요동지방으로의 진출을 적극적으로 꾀했고, 한의 요동군과 현도군을 집중 공격했다. 3세기 동천왕대에는 중국이 위((() 3국으로 분립한 유리한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남쪽의 오나라와 적극 교류하면서 위나라를 견제했다. 이때 위나라의 영토인 서안평(西安坪)을 고구려가 선제공격했지만 오히려 위나라 장수 관구검(毋丘儉)의 역습을 받아 국내성(國內城)이 함락당하는 위기를 맞기도 했다. 4세기에 고구려는 중앙통치조직을 14관등 체계로 정비하고 태수(太守(() 등을 지방에 파견하여 국내의 통치기반을 튼튼히 다지는 한편, 중국이 다시 516국으로 분열된 틈을 타서 재차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여 탈취했다. 이때 고구려는 대동강유역으로 진출하여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했다. 이로써 평양지역을 완전히 장악하여 배후의 위협세력을 제거할 수 있었다. 고구려는 이후 요동의 중심지인 서안평을 발판으로 영토를 확대해나갔다.

 

 

 

백제는 북방의 낙랑·말갈 세력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동시에 남쪽의 마한지역으로 진출하면서 팽창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시조 온조왕대에 마한의 목지국(目支國)을 병합했고, 영토가 북으로는 예성강, 동으로는 지금의 춘천, 남으로는 지금의 공주, 서쪽으로는 서해안지역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3세기 후반 고이왕대에는 넓어진 영토와 주민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중앙의 통치조직을 정비했다. 6좌평제도와 16관등제도는 이때 정비되었다. 더욱이 4세기 이후에는 중국의 요서지방을 공격하여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며, 계속해서 중국의 산둥[山東] 지방이나 일본으로도 진출했다. 신라는 초기에 박··김의 3개 성씨 세력이 돌아가면서 왕위를 차지했다. 이는 여러 세력이 합쳐서 건국된 결과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1세기 무렵부터 신라가 주위의 소국들을 정복하고 통합하면서 팽창했다고 한다. 신라는 먼저 남동쪽 해안에 있던 울산과 동래지역의 소국을 정복했다. 이 지역들은 뱃길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해주는 중요한 곳이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동해안지역과 낙동강유역의 소국을 차례차례 정복하여 복속시켰다. 삼국사기는 이때가 2세기 초반 무렵이었다고 전하나 그대로 믿기 어렵고, 대략 100~200년 정도 아래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4세기말 무렵 내물마립간 때에 왕권을 강화했고, 왕의 칭호도 대수장을 의미하는 마립간(麻立干)으로 바꾸었다. 이때 남쪽 지방에 왜가 쳐들어 오자,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도움을 받아 물리쳤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한 단계 더 발전할 수 있었다. 6세기 초반 신라는 처음으로 신라라는 국호를 칭했고, 왕이라는 칭호도 사용했으며 순장제도를 금지했고, 얼마 뒤에는 국가의 기간이 되는 법령을 반포했다. 이때 신라는 관위체계로서 경위 17관등과 외위제를 마련했다. 6세기 초반에 이르러 고구려·백제와 정립하는 강력한 고대국가로 성장했다.

 

 

 

. 삼국의 문화

 

삼국시대 초기에는 천신·일월신·산신 등 여러 신을 모시는 원시신앙과 점술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주위환경에 대한 합리적인 사고능력이 높아지면서 원시시대의 신앙체계는 차츰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에 고대국가로 성장한 삼국은 새로운 사상체계로서 불교를 적극 받아들였다. 불교는 이전의 원시신앙을 배제하지 않고 그것을 포섭하면서 발전했다. 따라서 불교는 이전의 사상체계와 큰 마찰 없이 복잡해진 고대의 사회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철학을 삼국민에게 제시했으며, 여러 나라의 고대문화를 전달하는 길잡이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로써 삼국은 국제정세에 대한 자각과 중국의 선진문화에 대응할 수 있는 탄력성을 가질 수 있었다. 삼국시대 대표적인 승려로서는 고구려의 낭법사(朗法師), 백제의 겸익(謙益), 신라의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을 들 수 있다. 한편 도교도 고구려와 백제의 귀족사회에 널리 퍼졌다. 특히 고구려 보장왕 때 연개소문은 불교세력을 억누르고 도교를 장려하기도 했다. 삼국시대에는 유교와 한학도 발달했다. 고구려는 372(소수림왕 2)에 태학을 세워 귀족자제들에게 유학을 가르쳤으며, 백제도 박사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유학교육 기관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 진흥왕 순수비에 나라에 충성을 드높이는 유교적 이상정치를 지향한다는 내용이 나오며,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에도 신라의 청년들이 유교경전을 공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문자는 중국의 한문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쓰였으나 우리말과 맞지 않아 상당한 불편을 주자, 고구려에서는 일찍이 한자의 음이나 뜻을 따서 우리말을 나타내는 표현을 발견했고, 신라의 설총(薛聰)은 이를 발전시켜 이두를 만들어냈다. 또한 삼국시대의 문학으로서는 가요와 설화가 특히 발달했다. 설화는 주로 전설적인 것이 많았는데, 당시 평민층의 진솔한 사랑과 감정을 표현한 작품이 많이 전한다. 한편 가요로는 정읍사(井邑詞)를 비롯하여 노동요인 회소곡(會蘇曲풍요(風謠) 등이 전한다. 삼국시대의 회화미술로서는 특히 고분벽화가 많이 남아 있다. 당시 사람들은 죽어도 영혼은 영원히 살아남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귀족들은 살아서 누리던 호화롭고 사치스런 생활을 죽은 뒤에도 누릴 수 있다는 종교적인 관념에서 출발하여, 살았을 때의 생활환경과 똑같이 무덤 속을 꾸며놓거나 신비로운 짐승인 청룡·백호·현무·주작의 4신도(四神圖)를 그렸다. 특히 벽화고분은 고구려에서 가장 발달했다. 삼국시대의 회화미술은 일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삼국의 화가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걸작품을 남긴 사람들도 있다. 일본 최고의 걸작품인 쇼토쿠 태자상[聖德太子像]과 호류 사[法隆寺] 금당벽화 등은 백제인이었던 아좌태자(阿佐太子)와 고구려인 담징(曇徵)이 그린 것이었다

 

 

 

. 삼국의 항쟁

 

삼국은 주변의 소국들을 정복하여 강력한 고대국가로 성장한 뒤 서로 장기간에 걸친 항쟁을 지속했다. 삼국간의 항쟁은 통일전쟁이 본격화하기 전까지 대략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제1기는 고구려가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압박하던 4세기 중반에서 5세기 중반까지의 시기이다. 백제는 4세기 중반 근초고왕대에 마한지역의 소국을 정복하여 영토를 서남해안지역까지 확대했다. 그리고 다시 북쪽으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의 고구려군을 격파했다. 백제에게 치욕을 당한 고구려는 소수림왕 대에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설치하는 등 국내체제를 정비하는 데 주력했다. 이를 기반으로 왕위에 오른 광개토왕은 신라에 쳐들어온 왜를 무찔러 신라를 고구려의 영향권 아래에 두고, 이어서 백제에 대한 보복공격을 전개하여 58개 성과 700여 개의 촌락을 빼앗았다. 또한 광개토왕은 북쪽으로 군사를 돌려 후연을 공략했고, 계속해서 북부여와 말갈을 쳐서 동북방으로 우수리강 유역과 연해주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차지했다.

 

 

 

2기는 고구려가 남진정책을 추진하자, 신라와 백제가 연합하여 고구려에 대항한 5세기 중반에서 6세기 초반까지의 시기이다. 427년 고구려 장수왕이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겼다. 이때 백제는 고구려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신라와 적극적인 동맹을 추진했다. 신라 또한 고구려 남진정책의 추진에 위협을 느끼자 고구려와의 우호관계를 끊고 백제에 접근했다. 433년 백제와 신라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어 고구려의 남진에 공동 대응했다. 고구려는 여러 차례에 걸쳐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역을 침략하다가, 475(장수왕 63)에는 백제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고구려 군대는 남쪽으로 진격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살해했다. 백제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수도를 웅진(熊津지금의 공주)으로 옮겨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 이때 신라는 고구려의 침략사실을 듣고 군대를 파병했으나 도중에 백제의 패배소식을 전해 듣고 되돌아왔다. 백제는 무령왕 때에 국력을 회복하고 성왕 때에 사비로 천도하여 부흥을 모색했다.

 

 

 

3기는 6세기 중반 이후 신라가 급팽창하던 시기이다. 신라는 5세기말에 전국의 큰 도로를 정비하고, 여러 곳에 중앙과 지방 사이를 연결하는 우역(郵驛)을 설치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그리고 지증왕·법흥왕 때는 지방통치조직과 율령을 반포하는 등 국가의 지배체제를 새롭게 정비했으며, 532(법흥왕 19)에는 금관가야를 병합했다. 신라의 진흥왕은 안원왕(安原王) 말년 왕위계승 분쟁으로 고구려의 국력이 매우 약화된 551년에 백제 성왕과 연합하여 한강유역을 무력으로 차지했다. 이때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을 점령했고, 백제는 하류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얼마 후 신라는 백제가 차지한 한강하류 유역마저 불시에 기습하여 차지했다. 이에 격분한 백제의 성왕이 백제·가야 연합군 3만 명을 이끌고 신라의 관산성(管山城지금의 옥천)을 공격했으나 신라의 장군 김무력(金武力)에게 대패했다. 이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했고, 그후 백제는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신라는 또 562(진흥왕 23)에 대가야를 정복하여 가야지역을 완전 병합하는 한편,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함경남도 이원(利原)까지 영토로 편입했다.

 

 

 

. 신라의 삼국통일

 

삼국의 통일전쟁이 시작된 시기는 고구려가 수(()의 침략을 막아내고, 백제와 연합하여 신라를 압박하던 7세기 중반 이후부터이다. 이때는 삼국항쟁의 제4기에 해당한다. 고구려와 백제는 때로는 개별적으로, 때로는 합동으로 군사작전을 전개했다. 백제는 의자왕 초기에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642년 백제의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하여 서쪽 변방의 40여 개 성을 빼앗았고, 장군 윤충(允忠)은 대야성(大耶城지금의 합천)을 공격하여 성주 김품석(金品釋)과 그의 처자를 살해했다. 위기에 몰린 신라는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사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군대를 지원해줄 것을 호소했다. 더욱이 643년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백제가 신라의 관문인 당항성(黨項城지금의 남양)을 점령하려고 하자, 신라는 더욱 적극적으로 당에 접근했다. 648년 신라는 김춘추를 당에 보내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 공격을 위한 출병을 약속받았다. 신라와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국내정세가 매우 혼란한 시기였던 660년과 668년에 각각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이를 실현했다. 이후 당나라는 동맹국이던 신라까지도 병합하려 했으나 신라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했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 이남의 한반도를 차지하며 삼국 통일했다.

 

 

 

3) 선사시대 생활 전시.

 

선사시대의 생활상

 

선사시대는 구석기시대부터 고대국가의 형성단계인 초기철기 시대 까지를 말한다. 각 시대의 생계를 보면 구석기시대는 수렵과 채집, 신석시대는 어로와 원시농경이 주가 되며, 청동기시대 이후에는 본격적인 농경 생활로 접어든다. 사냥은 구석기시대부터 창이나 도끼 등의 근거리 사냥도구가 사용 되었으나, 중석기시대 이후부터 활과 화살의 발명으로 날짐승의 사냥 까지도 가능케 되었다.

 

 

 

어로도 초기단계에서는 창으로 직접 잡는 방식이었으나, 점차 낚시와 그물을 이용하는 방법으로 발전하였다. 신석기시대의 생활은 주로 어로에 의존한 것 으로 보이는데, 부산 동삼동의 조개무지 등에서는 각종 어류와 뼈와 함께 조가비가 출토된 바 있다.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도토리가 많이 출토되어 중요한 식량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한 도구로 갈판과 돌확이 출토되고 있는데, 청동기시대 이후 절구와 시루에 밀려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각종 열매나 뿌리와 줄기, 버섯 등 다양한 식용식물 들의 채집이 있었던 것 같다. 농경생활은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조 중심의 밭농사가 시작되었으며, 돌이나 동물의 뼈로만든 낫, 돌보습, 돌괭이 등 다양한 농구가 출토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에는 벼·보리···수수 등의 다양한 곡물이 재배되기 시작하며, 대표적인 수확구로는 반월형돌칼을 들 수 있다.

 

 

 

토기는 정착생활이 이루어진 신석기시대부터 사용된 저장 도구이다. 진흙으로 빚은뒤 야외에서 낮은 온도로 구웠기 때문에 대부분이 적갈색을 띠며, 표면이 덧무늬나 각종 기하학무늬를 새겼다. 청동기시대에는 거의 무문토기이며, 붉은색이나 검은색으로 윤택을 낸 것도 있다.

 

 

 

 

 

구석기 시대

 

 

 

구석기시대란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한 때부터 빙하기가 끝나고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전까지를 말한다. 구석기시대의 인간은 수렵 채취를 기본으로 하는 완전한 자연의존 경제생활을 영위하며 끊임없는 이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구석기시대 유적은 평양, 전곡, 부산,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대구ㆍ경북지역에서는 아직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정식으로 조사된 바 없다. 그런데 최근 낙동강의 중ㆍ하류지역인 밀양 고례리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조사되었고, 상주 신상리에서도 구석기가 채집된 바 있어 낙동강의 중ㆍ상류지역에 해당하는 대구ㆍ경북지역에서도 구석기 유적은 존재하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신석기 시대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전 쯤에 빙하기가 끝나면서 지구의 기후는 점차 따뜻해졌으며 이에 따라 동ㆍ식물상이 바뀌고 해수면이 높아지는 등 자연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구석기시대는 끝나게 된다. 그리고 기원전 7천년 경, 시베리아 일대에 거주하던 고()아시아족의 한 갈래가 북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이주해 오면서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가 시작된다.

 

 

 

신석기시대는 사람들이 정착생활을 하면서 간석기[磨製石器]와 토기를 사용하고 농사를 지으며 가축을 기르는 등 식량 생산단계에 접어 든 단계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고기잡이와 사냥, 야생 열매 등에 의존하는 정착생활을 하다가 점차적으로 농사를 시작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은 그들이 살던 움집 또는 바위그늘유적, 먹고 버린 조가비가 쌓인 조개무지, 그리고 무덤이 있다. 움집은 지하에 일정한 넓이의 구덩이를 파고 위에는 지붕을 덮었는데 서까래가 땅까지 닿도록 하였다.

 

 

 

바닥은 맨바닥 또는 진흙을 깔아 다진 바닥인데 이 위에 풀이나 짐승가죽을 깔고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바닥 가운데에는 돌이나 진흙을 돌려 화덕을 만들었으며 바닥 한쪽 구석에 토기를 거꾸로 두어 저장시설로 이용한 예도 있다. 경북에서 조사된 신석기시대의 집터로는 김천 송죽리 움집터와 바위그늘, 청도 오진리 바위그늘 유적이 있다.

 

 

 

조가비는 이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쌓인 곳인데 여기에는 조개껍데기나 생선뼈 외에도 쓰다버린 각종의 토기, 석기, 골각기 등 많은 유물이 섞여 있기 때문에 당시의 생활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들의 무덤은 돌무지무덤, 동굴무덤, 집단구덩무덤 등이 있다. 울진 후포리에서 조사된 집단구덩무덤은 지름4m 정도의 구덩이 안에서 다량의 석기와 40여구의 사람뼈가 겹쳐진 상태로 조사되었다. 이들중에는 시신을 곧게 펴서 눕히고 그 위에 돌도끼 등 껴묻거리를 묻어둔 경우도 있었으며 시체를 썩힌 후 머리와 팔다리뼈만을 골라내어 묻어둔 경우도 있어 죽음과 장송의례에 대해 다양한 인식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청동기 시대

 

 

 

기원전 10세기경에 만주와 몽고지방으로부터 퉁구스계에 속하 는 새로운 종족이 한반도로 진출하여 왔다. 이들은 선주민들을 청동기문화 속에 동화시키면서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현대 한국인의 조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시대에는 움집생활 (竪穴住居)을 하면서 청동제 각종 의기 및 도구와 간석기 (磨製石器), 다양한 종류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 등을 사용 하였다. 또한 새로운 무덤형식인 고인돌과 돌널무덤(石棺墓)을 만들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농경과 목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생산력의 증가에 따라 사회 내부에 신분적 차이가 발생하 였다는 점이다. 농경의 존재는 송국리유적 등 한반도 내의 여러 유적에서 출토된 탄화미와 농사관련 도구 등으로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농경문청동기의 문양에 나타나 있듯이 괭이나 따비를 이용한 밭농사가 성행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전시된 청동기시대 생활문화의 모형 은 현재까지 발굴된 유적이나 유물 등을 토대로 하여 그 당시의 생활문화상을 복원한 것이다.

 

 

 

청동기시대는 인류가 처음으로 구리에 주석이나 아연, 납 등을 섞어 만든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새로운 기술적 진보를 가져온 시기이다. 우리나라의 청동기시대는 대략 기원전 10세기경에 북방문화의 영향으로 형성된 요녕식 문화에서 시작되었다. 이 시대는 본격적인 농경의 성행과 목축에 의한 생산력의 증가로 빈부의 차이가 발생하게 되며, 이것이 계층의 분화를 가져와 점차 신분적 차이로 발전하게 된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강가의 언덕이나 내륙의 구릉지에 움집을 지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그리고 마을의 아래쪽에는 경작지인 논과 밭이 있었으며 이들의 무덤도 마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이들이 남긴 유적으로는 집자리, 조개더미 및 무덤 등이 있고, 유물로는 다양한 종류의 간석기와 민무늬토기[無文土器], 그리고 각종 청동기가 있다.

 

 

 

우리고장의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대구 월성동(月城洞), 김천 송죽리(松竹里), 경산 조영동(造永洞), 경주 황성동(隍城洞), 천군동(千軍洞) 유적 등에서 집터 등 생활유적이 조사된 바 있고, 대구 이천동[구 대봉동(舊 大鳳洞)], 상인동(上仁洞), 진천동(辰泉洞), 시지동(時至洞), 김천 송죽리, 안동 지례동 등에서 무덤유적이 조사된 바 있다.

 

 

 

우리나라의 농경은 신석기시대에 시작되나, 청동기시대가 되면 본격적으로 농경생활에 바탕을 둔 사회로 들어선다. 이 때의 농경문화는 최근 활발한 조사 활동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드러나는 당시의 논과 밭, 그리고 각종 농경도구 및 농경문청동기, 곡식낱알자국이 있는 토기 등의 유물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곡식은 쌀ㆍ보리ㆍ콩ㆍ팥ㆍ조ㆍ피ㆍ수수ㆍ기장 등이 있어 이미 오곡(五穀)이 갖추어졌다.

 

 

 

농기구는 주로 석기가 남아 있는데 반달돌칼[半月形石刀]과 낫이 대표적이며, 목제농기구도 널리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벼농사는 여주 흔암리, 평양 남경, 부여 송국리유적 등에서 발견된 불탄쌀과, 볍씨자국토기, 돌낫, 반달돌칼로 보아 늦어도 지금부터 약 2,700년 전부터는 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고장에서 확인된 농경유적으로는 평양 남경유적, 경기도 여주 흔암리유적, 부여 송국리유적 등에서 탄화된 쌀이 출토된 바 있고 그 외 여러 유적에서 볍씨자국이 남아있는 토기가 발견된 예가 있다. 그리고 이 당시의 논이 조사된 곳으로는 충남 논산 마정리, 울산 옥현동 등이다.

 

 

 

농경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생산경제단계로 발전한 청동기시대에는 사냥이나 물고기잡이 등에 의존한 채집경제단계의 신석기시대와는 달리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되어 독립된 하나의 마을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게된다. 이때의 마을은 대개 강가나 하천 주변의 농경지가 잘 내려다 보이는 평탄하고 나즈막한 구릉 위에 있으며, 주변이 잘 바라다 보이는 산꼭대기에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마을 주위에는 나무 울타리나 방어용 도랑을 돌리기도 하였으며 마을에서는 토기ㆍ석기ㆍ청동기 등 생활에 필요한 각종 도구를 만들었다. 또한 마을 안의 집과 멀지 않은 곳에 무덤을 쓰기도 하며, 마을 주변 경사면 아래의 평지에는 경작에 필요한 논이나 밭을 만들기도 하였다.

 

 

 

집터는 방형(方形), 장방형(長方形), 원형(圓形) 등이 있으며 내부에는 대체로 화덕자리[爐址]가 있고 지붕을 받치기 위한 기둥구멍이 뚫어져 있으며 출입시설과 저장시설을 갖추고 있다. 우리 고장의 이 시기 주요 유적으로는 대구 월성동, 서변동유적과 김천 송죽리, 경주 황성동유적 등이 있다.

 

 

 

 

 

4) 신석기. 구석기. 청동가 시대

 

. (舊石器時代) 구석기시대

 

석기(石器) 시대(時代) ()에서 가장 오래된 시대(時代)로 원시(原始) 인류(人類)가 타제(打製) 석기(石器)와 골각기를 만들어 고기를 잡아먹고 살던 시대(時代). 지질(地質) 시대(時代)로는 홍적세에 해당(該當)

 

 

 

. (新石器時代) 신석기시대

 

고고학(考古學) () 구분(區分)에 의한 문화(文化) 발전(發展) 단계(段階)의 하나. 구석기(舊石器) 시대(時代) 다음, 금속기(金屬器) 사용(使用) 이전(以前)의 시대(時代)로서, 석기(石器) 문화(文化)의 최성기(最盛期). 주로 마제(磨製) 석기(石器)를 사용(使用)하였으며, 수렵(狩獵) 이외(以外)에 농업(農業), 목축을 영위(營爲)하는 한편, 토기(土器)도 만들고 거석(巨石)에 의한 주거(住居), 분묘(墳墓) 등의 건축(建築)도 행하기 시작(始作)하여, 씨족(氏族) 사회(社會)를 낳게한 것이 특징(特徵)

 

 

 

.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고고학에서, 연모의 재료에 따라 구분한 인류 발전의 한 단계. 석기와 철기 시대의 중간 단계로, 청동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연모를 만들어 쓰던 시대.

 

靑銅器時代청동기시대

 

인류(人類) 발달(發達)의 제2단계(段階), 청동기(靑銅器)를 제조(製造)ㆍ사용(使用)한 시대(時代)로서, 석기(石器) 시대(時代)의 뒤, 철기 시대(時代)의 앞

 

 

 

. (鐵器時代) 철기시대

 

석기(石器) 시대(時代)ㆍ청동기(靑銅器) 시대(時代)에 뒤이어 철기를 사용(使用)한 인류(人類) 문화(文化) 발전(發展)의 제3 단계(段階). 광의(廣義)로는 현대(現代)까지도 포함(包含)

 

철기시대

 

 

 

. (철기시대) 鐵器時代 고고학에서, 연모의 재료에 따라 구분한 인류 발전의 한 단계. 석기·청동기 시대의 다음 단계로서 철을 이용하여 여러 가지 연모를 만들어 쓰던 시대.

 

 

 

5) 강화 고인돌 분포도

 

. . 강화고인돌유적

 

강화지석묘(사적 제137)

 

내가지석묘(인천광역시기념물 제16)

 

강화 대산리고인돌(인천광역시기념물 제31)

 

강화 부근리점골지석묘(인천광역시기념물 제32)

 

 

 

6) 강화 고인돌 (지석묘) 공사 현장

 

 

 

7) 첨성단.

 

단군이 하늘에 제사을 올리던 제단으로 전해지는 이곳은 해마다 10/03일 개천절날 하늘 에 제사을 지내는 한편 1953년 제 34회 전국체육대회때부터 칠선녀에 의해 성화 채화되 어 대회장으로 봉송되고있다.

 

한반도에서 기가 제일 센곳이다.

 

 

 

마니산 영()체험

 

마니산은 해발468m의 높이로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있어 먼곳에서 보면 그 모양이 아름답고 웅장한 명산으로 참성단은 그 중간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올라서서 보면 남쪽으로 서해의 여러섬이 보이고 맑은날에는 북쪽으로 개성의 송악산이 보입니다.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은 고려사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하고 있는데 경주의 첨성대처럼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아 하원상방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단군은 북한의 묘향산에서 출현하여 그후 평양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고 다음에 기자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산신이 되었다라고만 되어있어 마니산과 참성단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으나 여지승람에는 단군이 평양에 도읍한 후 황해도에 있는 구월산에 옮겨 산신이 된후에 이 마니산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나와있습니다. 또한 단군 왕검께서(BC2282) 민족 만대의 영화와 발전을 위하여 춘추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역대 왕조가 거행했던 이곳 참성단의 행사를 보면 고구려 유리왕 19년에 사슴과 돼지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냈고 백제의 비류왕은 몸소 현지에 나와 제사를 지냈으며, 현재는 근세에 이르러 융희 황제때까지 해방후에는 전국체육대회가 부활되고 이곳에서 성화를 점화하였습니다. 성화채화시 군수가 제주가 되어 제천을 올린뒤 7선녀에 의해 태양열을 화경으로 인화하거나 흐린날에는 부싯돌로 성화를 점화하는데 7선녀의 유래는 단군께서 단을 쌓아 제천하실때 神女가 합그릇을 받들고 있었다는 기록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 마니산 참섬단***

 

 

 

강화 마니산(摩尼山)의 참성단(塹城壇)은 국조 단제(檀帝)께서 직접 명하여 제단을 쌓게 하시고 손수 제천보본(祭天報本)의 전통윤리를 수범(垂範)하신 곳으로 우리 민족과 한울과의 연결고리 구실을 해주던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의 원리를 간직한 제천단이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적 유적으로 그 가치성은 무한하다.

 

마니산은 "머리산(마리산)"이란 뜻으로 숭고하고 거룩한 성산임을 상징한다. 고려조의 전기 문헌에 마리산(摩利山) 또는 두악(頭岳)으로 기록돼 있으며,세종실록지리지에도 마리산으로 적혀 있다. 그 뒤에 불교문화의 영향을 받아 마니산으로 바뀌었으나 그 "()"자도 석가모니나 공자를 뜻하는 중니(仲尼) 등으로 성자를 지칭할 때 끝에 붙여진 것으로 성스러운 산이란 뜻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강화 사람들은 여전히 마리산으로 부른다.

 

마니산의 행정구역은 강화 남단인 화도면(華道面)에 속하며, 산의 높이는 469m로 강화군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산세가 가파르고 주산로에는 918개의 계단이 놓여 있을 만큼 오르내리기가 쉽지만은 않다.

 

마니산 참성단은 개국 51(戊午)에 축성되어 3년 뒤인 개국 54(辛酉) 3월에 단제께서 직접 이곳에 임하시어 천제를 받드셨다. 개국기원이 서기전(B.C.) 2333년무진(戊辰)년이므로 참성단을 쌓은 해는 서기전 2283년이 된다.

 

제단은 원방각의 형태로 조성되어 우리 민족의 고유사상인 천지인(天地人)사상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신단실기에는 동사(東史)를 인용하여 "제단은 17자인데, 돌로 쌓아서 위는 모나게 아래는 둥글게 만드니 사방이 각각 66치이며, 아래는 각각 15자로 둘려 있다. 혹은 말하기를, "마니산(摩尼山)은 강과 바다의 모퉁이로서, 땅이 한적하고 깨끗하고 조용하고 깊어서, 신명(神明)한 자리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지내는 자리를 만들어서 상제께 제사지낸다."하고, 또 말하기를, "하늘은 음()을 좋아하고 땅은 양()을 좋아하기 때문에 단()을 반드시 물 가운데 있는 산에 설치했고, 위가 모지고 아래가 둥근 것은 땅과 하늘의 의리이다."라고 했다.

 

문헌비고(文獻備考)에도 고려 고종 46년에 교서랑 경유(校書郞 景瑜)가 말하기를 "대궐을 마니산에 세우면 가히 나라 운수를 늘인다"하여 임금의 명령으로 이궁(離宮)을 산 남쪽에 세웠다고 전한다.

 

또한 고려가 고종 19(1232)에 강화로 천도하여 40년간이나 항몽(抗蒙)투쟁을 계속하면서도 강화문화를 꽃피웠다는 것은 강화가 단순한 섬이 아니라 민족의 영성이 깃든 신명한 곳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역대로 계승되어 내려오면서 제단을 보수하였고 제천의식(祭天儀式)도 끊이지 않았다.

 

근세 조선조 인조(仁祖) 17(1639)에 제단을 고쳐 쌓았고, 숙종 26(1700) 5월에 다시 보수하고 강화유수 최석항(崔錫恒)이 중수비(重修碑)를 세우니 참성단 동쪽 조금 밑에 현존해 있다.

 

참성단은 단순한 제단이 아니고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될 수 있는 바로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이 서린 천단(天壇)으로서 천지신명의 감응을 얻고 근본에 보답하는 보본의 윤리를 깨우쳐 주는 신령스러운 곳이다.

 

예전에 이 마니산 일대는 고가도(古加島)라는 섬으로 이곳에는 외적을 막기 위해 군병을 두둔시켰으며 삼랑성(三郞城)이 쌓여진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한때(1437)는 역관(曆官)을 파견하여 측우기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마니산 바로 앞바다 강화만(江華灣)은 세계에서 간만(干滿썰물과 밀물)의 차가 가장 심한 곳으로 온 바다 조수(潮水)의 기점이라고 하는 대자연의 신비로움을 간직한 곳이다. 참성단이 백두산과 한라산의 정중앙에 위치함도 예사로 넘길 일이 아니라고 본다.

 

고려산

 

고려산(436m)의 옛 명칭은 오련산입니다. 고구려 장수왕 4(416)에 천축국 스님이 고려산에 올라 다섯색의 연꽃이 피어있는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송이의 연꽃을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는데 적, , , , 흑색의 다섯색깔의 연꽃이 떨어진 자리에 적련사(적석사), 백련사, 청련사, 황련사, 흑련사를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고려산은 그 인근에 130여기의 고인돌을 품고 있으며 고려산 북편 시루미산은 연개소문의 출생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8) 고려 시대

 

고려高麗 [명사] 우리나라 중세 왕조의 하나. 태봉의 장수 왕건(王建)이 개성(開城)에 도읍하여 세운 나라. 후백제를 멸하고 신라를 항복시켜 후삼국을 통일했으나 공양왕 (恭讓王) 때 이성계(李成桂)에게 멸망함. [918~1392]

 

 

 

. 고려 궁지.

 

승평문을 정문으로 하는 고려궁지는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이다. 12326(음력) 고려 고종(1213-1259 재위)은 지세가 험한 요새지 강화도에 도읍을 옮기고 2년간에 걸쳐 궁궐과 관아의 건물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몽골의 강화 조건에 따라 1259년 산성부터 헐기시작하여 1270년 개경으로 환도후 궁궐, 관아등 모두 헐어야 했다. 몽골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려 궁터만이 전해질뿐이다.

 

 

 

현재 고려궁지에는 조선시대 강화유수부 동헌, 유수부이방청, 강화부동종각, 외규장각 건물이 있다.

 

2004년 강화유수부 동헌 지붕이 교체되었다. 2003년 복원한 깨끗한 외규장각 건물은 조선시대 왕립보존도서관으로 행차도, 어필, 어보등을 보관하였다고 하는데 지금 이 책들은 하나도 없고 텅빈 건물만 있다. 병인양요때 많은 책들을 프랑스가 가져갔기 때문이다.

 

외규장각 잔디밭 끝에 400년된 회화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궁궐이나 서원등 이름있는 곳에 심는 나무로 전해진다. 궁지밖 600년된 은행나무와는 서로 바라보며 삼정승 나무의 역할을 하고있었다.

 

강화부종각안에는 새로 지은 종이 들어있다. 숙종때 제조한 원래의 종은 1995년 종신에 금이가 더 이상 타종할수 없어 강화역사관으로 옮기고 2000년 똑같이 복제한 종을 만들어 경축 행사용으로 사용하고 있다.

 

 

 

숙종때 강화동종은 어디에 쓰려고 만들었을까?

 

고려궁지는 조상들의 힘든 삶을 눈으로는 볼수 없으나 마음으로 느끼는 곳이다. 이방청은 있으나 형방은 없고 고려궁지 밖에 남아있는 형옥만이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를 일깨우고 있다.

 

 

 

 

 

. 고려 홍능.

 

 

 

9) 조선시대 양반 복장.

 

 

 

10) 조선시대.

 

. 강화 유수부 동헌.

 

이 건물은 강화 유수부의 동헌으로 오늘날의 군청과 같은 관아 건물이다.

 

조선 인조 16(1638)에 유수 김신국이 개수하였으며, 영조 45(1769) 유수 황경원이 현윤관(顯允觀)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현재는 명위헌(明威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글씨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인 백하 윤순(尹淳)의 글씨라 한다. 이 건물의 규모는 정면 8, 측면3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1971년 강화 중요 국방유적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충열사.

 

이 사당은 조선 인조 14(1636병자호란시 종묘(宗廟)의 위패(位牌

 

)를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하였으나 청군(靑軍)이 강화도를 함락하자 강화산성 남문 누각에서 화약에 불을 붙여 순절한 선원 김상용 선생

 

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배향으로는 공조판서 이상길 외 26분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조선 인조 19(1641) 건립하여 현충사(顯忠祠)라 하던 것을 유수 허휘가 조선 효종 9(1658) 왕으로부터 충렬사

 

(忠烈祠)로 사액 받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후 신미양요(1871)시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 어재순 형제분을 추가 위패를 봉안하여 현재는 총 29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 용흥궁.

 

용흥궁(龍興宮)은 조선 제25대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거처하던 잠저(潛邸)이다. 조선 철종 4(1853)에 초가집이던 것을 강화유수 정기세가 현재와 같은 기와집으로 개축하고 용흥궁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이 용흥궁의 배치는 서울에 있는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으로 지어 질박한 느낌을 준다. 경내에는 철종이 머물던 옛 집터임을 표시하는 비()와 비각(碑閣)이 있다

 

 

 

11) 근대.

 

. 성공회

 

성공회(聖公會, The Anglican Domain)18909월 조선에 처음 전파되었는데, 강화에는 1893년 봄 코프(C. J. Corfe) 주교가 갑곶에 거점을 마련하면서부터 이다. 7월 워너(L. O. Warner) 신부가 파송되어 본격적으로 강화에서 성공회 선교가 시작되었다.

 

현재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 트롤로프(趙瑪可, M. N. Trollope) 주교가 설계, 감독하여 건축한 것이다. 건물의 배치는 외삼문과 내삼문, 성당, 사제관으로 구성된 한옥건물이다.

 

외삼문은 정면 3, 측면 1칸으로 이루어졌는데, 위에는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문에는 태극문양을 본뜬 큰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내 접하는 십자가를 시문하였다. 외삼문 안에는 성당건축 당시 강화지역선교의 중심역할을 담당했던 성공회 제2대 주교 터너(端雅德, A. B. Turner)와 성당건축을 직접 설계 감독하였던 제3대 주교 트롤로프의 영세기념비가 있다.

 

내삼문 역시 외삼문과 마찬가지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과 1칸이며, 안에는 1945년 일제에 의하여 징발되어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서양식 종을 대신하여 1989년 새로 제작된 종이 걸려 있다. 그런데 이 종의 형식은 우리나라 전통의 범종양식을 띠면서 외삼문의 대문에 도안되어 있는 태극과 십자가 무늬가 시문되어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의 건물은 정면 4, 측면 11칸의 장방형 2층 팔작집이며, 지붕 위 용마루 양끝에 십자가를 올린 것이 특색이다. 건물 정면에는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성당의 내부구조는 입구인 앞툇칸, 회중석(會衆席), 지성소(至聖所), 소제대(小祭臺), 제대, 예복실로 배치되어 있으며, 내부에 석제 성수대(聖水臺)가 있는 소위 바실리카양식이다. 사실 바실리카양식의 기본형식은 회랑풍의 앞뜰이 있고, 건물 내부에 전실(前室), 열주(列柱)로 구성된 내당(內堂)과 내당의 양쪽에 측랑(側廊), 제단과 후진(後陣)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바실리카양식을 한옥에 적용하여 지은 것이 바로 이 건물이다. 그것은 건물의 앞쪽에 툇마루를 만들어 전실의 효과를 두고 있고, 안에는 2층으로 이어지는 고주(高柱)를 열주로 하여 내당을 만들고 그 앞쪽에는 지성소를 모셨으며, 역시 뒤에 후진의 공간을 만들어 예복실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내당을 좌우로 지나갈 수 있도록 측랑을 구성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형태는 전형적인 바실리카양식을 한국 건물에 맞춰 설계한 한옥화된 서양식 건물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종교의 건물이 한옥으로 지어진 것은 특이한 예이지만, 성공회 강화성당에서 보이는 한옥 고유의 전통은 이 건물만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지붕 용마루의 양끝에 위치하는 취두(鷲頭)를 대신하여 십자가가 배치된 것이나, 우동마루에는 궁궐 건축에서 보이는 용두(龍頭)를 올린 것 그리고 건물 정면의 우주(隅柱)와 탱주()를 주련(柱聯)으로 장식하고 있는 것 등은 한옥건물의 전통을 무시하지 않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주련에는 다음과 같이 기독교적인 성구가 적혀져 있어서 전통가옥 혹은 사찰에서의 주련과는 내용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처음도 끝도 없으니 형태와 소리를 먼저 지은 분이 진실한 주재자이시다 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

 

인을 선포하고 의를 선포하니 이에 구원을 밝히시니 큰 저울이 되었다 宣仁宣義聿照拯濟衡

 

삼위일체 천주는 만물을 주관하시니 참 근본이 되신다 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하느님의 가르침이 두루 흐르는 것은 만물과 동포의 즐거움이다 神化周流庶物同胞之樂

 

복음을 널리 전파하여 백성을 깨닫게 하니 영생의 길을 가르치도다. 福音宣播啓衆民永生方

 

성당 내부에는 성수대와 지성소가 있는데, 성수대는 직경 180cm의 팔각형 석판 위에 4개의 화강암 기둥을 세우고 사방 80cm의 큰 성수대가 놓여있다. 성수대 정면에는 중생지천(重生之泉)”이라는 명문이 있어 거듭나는 샘물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고, 그 맞은 편에는 수기(修己), 세심(洗心), 거악(拒惡), 작선(作善)이라 새겨져 있다. 이 성수대는 신자가 회개하고 영세를 받을 때 사용한다.

 

 

 

강화성공회성당은 1981년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 111호로 처음 지정된 이래 강화군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면서 인천지방유형문화재로 변경되었다가 200114일 국가사적 424호로 변경 지정되었다

 

 

 

. 연무당.

 

강화산성 서문 건너편에 있는 연무당 옛터는 1876년 강화도조약이 최종 조인된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는 부산,인천,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였습니다.

 

 

 

연무당 옛터의 비문

 

역사는 간단없이 흘러가되 교훈은 남는 것이니 연무당은 그 역사의 교훈을 듣는데다.

 

일찍이 여기에서 강호부의 군사들을 훈련했었고 최근세 1876년 고종 13226일 이른 바 병자년 한일 수호조약을 체결했던 집이다.

 

이미 그 전년에 일본의 군함 운양호가 들어와 침략적인 야욕을 품고 초지진 포대를 공격하고 영종도에 내려 살육과 약탈을 자행하고 갔었다.

 

이듬해 봄 다시 군함과 수송선을 이끌고 와서 한국과 일본이 수호조약을 체결하자고 강요하자 우리는 거기 따라 부산 원산 인천을 개항하여 그로인해 서구문명을 받아 들이기는 햇지마는 실상은 도둑에게 문을 열어주었던 것과 같아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이 시작되어 마침내 망국의 쓰린 역사를 맛보고야 말았었다.

 

1976년 박정희 대통령께서 친히 돌아보시고 이 연무당터야말로 민족의 역사적 시련장이며 자주적 역량만이 사는 길임을 보여준 곳이므로 이곳을 길이 보존하도록 하라는 분부를 내려 문화공보부와 경기도가 그 깊은뜻을 받아들어서 페허를 쓸고 깨끗하게 꾸며 놓았거니와 우리는 여기에 와서 스스로 깨닫는 것이 있다.

 

그것은 오직 제 힘을 키우고 기른 다음에 라야 어떤 고난이든지 능히 이길 수 있는 것이기에 그 뜻을 돌에새겨 자손 만대에 길이 전한다

 

 

 

19778월 일 이은상 짓고 김충현 쓰다.

 

 

 

12) 강화 인물사.

 

 

 

(입구에서 우측 전시장)

 

13) 갈화 문화 유적 사진.

 

. 고인돌

 

. 첨성단

 

. 궁지.

 

. 봉천대.

 

문화재명 : 봉천대 (奉天臺) 시도기념물 제18(지정일 1995.03.01)

 

설명 : 봉천산 꼭대기에 설치하여 하늘에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평안을 빌었던 곳으로, 벽돌을 쌓아올려 위로 갈수록 좁아드는 사다리꼴 형식을 하고 있다. 강도지에 의하면, 고려 때에는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던 곳

 

 

 

14) 강화 지도.

 

 

 

15) 강화 문화 유적 사진.

 

. 남문.

 

. 서문.

 

. 삼랑성.

 

이 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이 성의 이름을 삼랑성 또는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이 성의 길이는 2,300m에 달하며 자연활석을 이용하여 축조된 성이다. 성내에는 고구려 소수림왕 11(3841)에 창건 된 유서깊은 전등사가 있으며 고려 고종 46(1259)에는 이 성안에 궁궐(이궁)을 지었으나 현재는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으며, 조선 현종 1(1660)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할 사고를 설치 하였다. 무너진 것을 1998년 강화군에서 복원하였다. 조선 고종 3(1866) 병인 양요시 양헌 수장군이 이 성을 침입하는 프랑스군을 무찌른 전승지 이기도 하다. 이 성에는 동...북에 4대문이 있고 남문을 제외한 3개 문에는 문루가 없었다 하나 영조 15(1739)에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였다 한다

 

 

 

정족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높이는 약 700척이고 세 봉우리로 되어 있고 그 산에 폭 9척 높이가 7척의 석성으로 에워 쌓여 있다. 기나긴 세월이 흘러 이 성터는 삼랑성이라고 불러왔고 또는 정족산성이라고 한다. 이제는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되어 버려 옛날의 모습은 희미할 뿐이다. 옛날에는 동서남북의 큰 문을 갖춘 보기좋은 성이었다.

 

그 성문의 하나는 지금 전등사 입구에 홍예문으로 남겨져 있고 남문만이 정화 복구되어 옛 면모를 유지하고 있는데 성벽 곳곳에는 망대가 있었다고 한다.

 

 

 

. 여미지.

 

. 향교.

 

이 향교는 고려 인종 5(1127)에 내가면 고천리(고읍)에 건립되었다 한다. 고려 고종 19(1232)내가면 고천리에 있던 것을 강화읍 갑곶

 

(먹절)로 이전하였다가 고종 46(1259)서도면 볼음도리로 재이전, 조선 인조 2(1624)에는 유수 심 열이 송악산 기슭으로 옮겨 졌으며 인조 7(1629)에 유수 이안 눌이 위패를 모시고 명륜당을 세우는 등 비로서 향교의 완전한 체제를 갖추어 학궁이라 하였다 한다.

 

현종 14(1673) 유수 민시중이 남산골로 이전하였으나 영조 7

 

(1731)에 또다시 유수 유척기가 지금의 위치로 이전 복원 하였다.

 

경내에는 중국의 오성과 우리 나라 18유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강학하던 명륜당, .외삼문, '98년에 복원한 동.서무 등이 있다.'

 

16) 강화 문화유적 사진.

 

. 광성보.

 

광성보는 조선 효종 9(1658)에 설치 되었으며, 숙종 5(1679)에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돈대가 축조되었다. 영조 21(1745)성을 개축하면서 성문을 건립하고 안해루(按海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고종 3(1866) 프랑스의 극동함대와 치열한 격전(병인양요)을 치르었으며, 고종 8(1871) 신미양요당시 미국의 아세아함대가 이 성을 유린하였으며, 우리 수비군은 탄환 및 화살이 떨어지자 어재연장군 이하 전 장병이 백병전으로 맞서 용감히 싸우다 전인원이 장렬히 순국한 곳이다.

 

광성보 내에는 신미양요시 순국한 순무천총 어재연, 동생 어재순의 쌍충비와 무명용사들의 합장 묘인 신미순의총 그리고 1977년 전적지를 보수하고 세운 강화 전적지 보수 정화비 등이 있다.

 

 

 

 

 

::: 국방유적으로서의 광성보

 

광성보는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해안에 소재하고 있으며 김포와 마주보고 있다. 고려시대의 성을 1618(조선 광해군 10)에 외성을 보수하고 1656년 광성보를 설치했다. 이 보의 돈대는 1679년에 축조된 것이며 오두돈, 화도돈, 광성돈대와 오두정 포대가 이보에 소속되었다. 그러나 완전한 석성으로 개축된 것은 1745년이다.

 

 

 

이곳은 신미양요의 가장 격렬했던 격전지로서 18714월 미국의 로저스가 통상을 표방하면서 아세아 함대를 이끌고 1230명의 병력으로 침략하였을 때 상륙부대가 초지진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 이르러 백병전을 전개하였다. 조선군 지휘관인 어재연 장군이하 전용사가 용감하게 싸웠는데 포탄이 떨어지면 칼과 창으로 싸우고 칼과 창이 부러지면 맨주먹으로 싸워 한사람도 물러서거나 포로가 되지 않고 모두 장렬히 순국하였다.

 

 

 

당시 미국의 병기는 9인치 포와 8인치 포등 85문의 대포와 최신무기로 남북전쟁과 스페인 전쟁을 겪은 백전노장인 1230명의 정예군인데 비해서 우리 조선군은 심지에 불을 당기는 화승포 3문과 구식장총 몇 정과 화약 4000근 군량미 100석에다 300명 미만의 전투 경험이 적은 미약한 병력이었다.

 

 

 

이후 미군들은 물리전에는 이겼으나 정신전에는 졌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신미양요때 성책과 문루가 파괴된후 폐허가 되어 있는 것을 1977년 광성돈, 안해루, 용두돈과 59명의 무명용사의 신미순의총, 어재연장군 형제의 쌍충비각들이 보수 정화되었다.

 

 

 

병인양요 당시 순무중군인 어재연 장군이 우리는 이제 피할 곳도 없다. 적병은 이 포대를 좁혀오니 죽기로써 싸워라고 독전하여 앞장서서 싸웠으며, 이때에 군인도 아닌 동생 어재순이 달려와 합세하려 하므로 형 어재연 장군이 말하기를 군인은 군인의 갈길이 따로 있으니 너는 어서 네 갈길로 가거라하고 말하니까 나라가 위급한 이때에 어디를 갑니까?하고 합세하여 전군을 지휘하며 분전하다가 두형제가 순국하였다.

 

 

 

이두 형제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쌍충비각을 세우게 된 것이다. 무명 용사의 신미순의총은 광성보안에 있는 쌍충비각에서 좀 떨어진 아래 등성이에 있다. 1871년 신미양요때 용감하게 적과 싸우다 순국한 59인의 이름없는 무명용사들을 7개의 분묘에 합장한 것이다.

 

 

 

천연의 요새 용두돈대는 광성보 성문에서 고개를 넘어 10분쯤 가면 바다로 용의 머리처럼 쑥 들어낸 돌출부의 암반위에 세워진 절묘한 돈대로 언덕에서 내려다 보면 한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병인 신미양요때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져 성곽이 파괴되었던 것을 1977년 복원하였다.

 

. 갑곳 돈대.

 

강화읍 동단에 위치하여 강화 대교를 사이에 두고 김포 문수산이 바라보이는 곳으로 한강으로 드나드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가 1232년부터 1271년까지 39년간 강도에 도읍을 옮겨 몽고에 줄기찬 항전을 계속할 때 이곳은 강도의 외성으로 강화 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며, 세계를 재패한 몽고군이 수차의 침공으로 빤히 바라다 보고도 발을 구르다 되돌아간 곳이다. 갑곶진이란 이름의 유래를 보면 "우리 군사들의 갑옷만 벗어 메워도 물길을 건널 수 있다. "라고 몽고군은 발을 구르며 안타까와 했다.

 

 

 

그래서 갑옷() 궬곳()자를 넣어서 甲串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왔다는 설도 있다. 1656년 강화에 여러진이 설치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돈대의 축조는 300여년 전인 1679년에 이룩되었다. 갑곶 돈에는 8문의 대포를 설치한 갑곶포대가 있었다.

 

 

 

186697일 병인양요때 로즈제독이 지휘하는 프랑스 연합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에 상륙하여 강화성 문수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이 거느린 용맹한 조선군의 습격을 받아 1013일 패주하고 말았다. 이곳은 옛 강화의 관문이며 한강을 지키는 중요한 보첩이다. 돈대내에는 고려시대에 몽고와 외교관계를 맺던 이섭정이 있고 조선시대의 대포가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그 뒤에도 교역을 표방한 서구의 침략세력이 선박을 이용 접근할 때 이 천연 요새에는 양이와 싸우지 않는 것은 화친을 뜻하는 것이요 매국적 행위라고 단정 목숨을 걸고 싸웠다. 이곳에 피뿌린 우리 선조가 얼마이며 이곳에 쓰러져간 우리 어버이가 그 얼마이던가? 강물은 흘러 말리 없고 그 자리는 고 박대통령의 분부로 복원 정화되어 교훈장으로 전하고 있으나 이 곳을 지나는 손이여 옷깃을 여미고 저들 무명의 촌부와 병사들 앞에 머리숙여 진정한 애국의 충혼을 배움직 하지 않은가! 지금은 김포를 연결하는 694m 의 강화대교가 이 역사의 현장을 가로 질러 놓여 있으나 저들의 고귀한 죽음은 만고에 푸르리라.

 

 

 

유수 홍중보가 세운 것이다. 남으로 용진까지가 2400m로 소관 돈대는 망해, 제승, 염주, 갑곶 등 네곳이다. 배치 인원은 병마 만호 1, 군관 36, 사병 100, 돈군 24명이다. 군량미 157, 첨향미 103, 간장 6, 진선 8, 군기와 군용품 약간이었다.

 

. 성공회 .

 

 

 

. 연무당 옛터.

 

 

 

강화 문화 전시실 (2 전기실)

 

 

 

17) 팔만 대장경 판각.

 

. 팔만대장경.

 

고려 고종때 몽공의 침입에 대항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1251년까지 16년간 판각하여 만든 목판경으로 현재는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국보제 32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고종대에 판각되어 현재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대장경 국보 제32. 목판본은 1,516종에 6,815권으로 총 81,258매인데 이 가운데 후대에 판각된 15종의 문헌은 보유판(補遺板)이라고 한다.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과 속장경(續藏經)이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된 뒤 1236(고종 23) 당시의 수도였던 강화에서 시작하여 12519월에 완성되었다. 이 사업은 대장도감(大藏都監)에서 주관했으며, 제주도·완도·거제도 등에서 나는 자작나무를 재료로 사용했는데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먼저 나무를 바닷물에 절인 다음 그늘에서 충분히 말려 사용했다. 이 대장경은 조선 초기까지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해인사로 언제 옮겨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1398(태조 7)에 옮겼을 것이라는 학설이 가장 유력하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이때 2,000명의 군인들이 호송하고, 5교양종(五敎兩宗)의 승려들이 독경(讀經)했다"라고 한다.

 

 

 

이것은 현존하는 세계의 대장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체재와 내용도 가장 완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보관함의 순서는 천자문 순서대로 배열했으며, 오자(誤字)와 탈자(脫字)가 거의 없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색에 의해서 그 내용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첫째, 인류 최초의 한문대장경인 송나라 관판대장경(官板大藏經)의 내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며, 현재 전하지 않는 거란판대장경(契丹板大藏經)의 내용을 짐작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특히 대승법계무차별론 大乘法界無差別論1은 어느 대장경에서도 볼 수 없다. 둘째, 사전류의 저술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법원주림 法苑珠林·일체경음의 一切經音義·속일체경음의 續一切經音義등 중요한 전적과 대승보살정법경 大乘菩薩正法經·제법집요경 諸法集要經등 중요한 대승경론이 포함되어 있다. 셋째, 자체(字體)의 예술성이다. 하나의 목판에 대략 가로 23, 세로 14행으로 310자 내외를 새겼는데 그 정교한 판각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조선의 명필인 한석봉은 이를 두고 "육필(肉筆)이 아니라 신필(神筆)이다"라고 경탄했다. 이 팔만대장경은 뒤에 5차례나 간행·유포되었다는 역사기록이 있는데 고려말에 이색(李穡)이 인출한 대장경 1부가 여주 신륵사에 봉안되어 있으며, 조선 초기까지 왜구들이 빈번하게 침략해와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대장경판을 요구했는데 1389~1509년에 83차례나 요구했지만 대부분 거절하고 간혹 인본(印本)을 주었다고 하며, 1410(태종 10)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 관찰사에게 도내에서 생산되는 인경지(印經紙) 267묶음을 해인사로 보내 인경(印經)하도록 명했으며, 세조는 신미(信眉수미(守眉학열(學悅) 등으로 하여금 해인사 대장경 50부를 인출하여 각 도의 명산 거찰에 나누어 봉안하도록 했으며, 1898년 용악(聳岳)4부를 인출하여 통도사·해인사·송광사 등에 1부씩 봉안했다. 고려 중반부터 장경도량(藏經道場)이라는 이름으로 봄·가을에 6, 7일씩 거의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었으며, 현재 해인사에서는 1년에 1번씩 대장경판을 머리에 이고 탑 주위를 도는 행사를 하고 있다.

 

 

 

팔만대장경의 특수성은 첫째, 사상적인 것으로 국토가 유린된 상황에서 이 커다란 불사(佛事)를 통해 경전을 수호한 호법적(護法的) 성격을 띠었다는 것이다(호국신앙). 이규보(李奎報)군신기고문 君臣祈告文은 이 대장경조조의 사상적 의의를 천명한 글로 몽골을 야만시하고 문화적 긍지를 드러내고 있다. 둘째, 경제적인 것으로 대장경의 역사(役事)에 대한 막대한 경비를 정부가 부담하므로 국민에 대한 재투자적인 면이 고려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내용적인 것으로 과학적인 배열과 엄격한 자료수집으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이다.

 

고려대장경 이후에 편집된 중국판 빙가장경, 일본판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등은 모두 이것을 모본으로 하여 판각된 것이다. 즉 이 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한문대장경의 완벽한 '연원'이라고 할 수 있다.

 

 

 

1976년 동국대학교에서는 팔만대장경의 원본을 영인 축소하여 영인본 47권과 전대장경에 대한 내용·주소(註疏번역자·연구서 등을 상술한 해제 색인본 1권을 합쳐서 총 48권을 간행했다. 또한 1967년부터 이 한문본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한글판 대장경을 간행하고 있는데 현재 120권이 출판되었다.

 

 

 

18) 목판 인쇄 방법 체험장.

 

 

19) 고려청자 전시.

 

. 민족문화늬 정수이자 강화 3대 문화 유산 중 하나로 고려상감 청자를

 

들 수있다. 청자의 은은한 밫깔은 우리 선조의 얼을 느낄수가 있으며 전시된

 

자기류는 고려및 조선시대의 유물이다.

 

 

 

상감기법은 세계 각지에서 기원을 전후로 하여 목칠(木漆금속공예품·유리공예품 등에 사용된 시문기법으로 일반화되어 있던 것이지만, 자기질(磁器質) 청자에 유약(釉藥)을 입히기 전에 시문한 것은 고려시대에 창안된 독자적인 기법이다. 상감청자는 상형된 기명(器皿)의 표면에 우선 문양을 음각하고 그 부분을 태토의 성분과 유사한 백토니(白土泥)나 자토니(土泥)로 메운 다음 표면 위로 넘친 백토와 자토를 제거하면 음각으로 파여진 부분에 백토의 색과 자토의 흑색이 남아 의도했던 문양이 나타난다. 그후에 1차 번조(燔造)를 하고 유약을 씌운 다음 2차 번조를 하면 상감청자가 완성된다. 따라서 청자는 표면에 두께의 차이가 생기거나 문양이 탈락되는 경우가 없다.

 

 

 

 

 

. 전성기의 상감청자

 

12세기 후반부터 13세기 후반까지는 상감청자의 전성기로서 현존하는 대부분의 양질 상감청자는 이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상감청자는 공예의장 화한 문양 소재에서 회화적인 소재로 변모한다. 명종(1131~1202)의 지릉(智陵)에서 출토된 청자류 중에 청자상감여지문대접은 내외면이 모두 상감기법으로 되어 있으며 기이(己已1269)라는 간지가 새겨진 청자상감간지명대접(靑磁象嵌干支銘大) 등이 이 시기에 속한다. 14세기부터 상감청자는 조질화되어갔지만 한편으로는 다량생산되었다. 정해(丁亥1347)명청자와 지정(至正1341~67)명청자는 조질화되어가는 상감청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특히 공민왕비(?~1365)의 정릉(正陵)명상감청자대접에서 쇠퇴기의 상감청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국 청자의 조형미에서 12세기까지 음양각 중심의 비색청자가 맑고 조용한 불교적 이상세계의 아름다움이라고 한다면 상감청자는 밝고 명랑한 현실세계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감청자의 기술적 전통은 조선시대 상감분청사기와 상감백자로 계승되어 15세기까지 한국도자의 특징적인 장식기법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20) 정족산 사고.

 

21) 금속활자.

 

22) 외규장각.

 

. 규장각.

 

규장-(奎章閣) 조선 시대에, 역대 임금의 시문·서화·유교(遺敎고명(顧命)등을

 

보관하던 관아. 정조 원년에 설치함.

 

 

 

23) 화문석.

 

꽃돗자리라고도 한다. 신라시대부터 제작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인삼과 함께 외국에까지 널리 알려진 우리의 특산품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화문석의 수요가 급증했으며 장흥고(長興庫)에서 수요를 담당했다.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등의 문헌에 의하면 옛날의 고급스런 화문석은 용수초(龍鬚草)로 만들었으며, 문양에 따라 황화석(黃花席잡채화석(雜彩花席오조룡석(五爪龍席국화석(菊花席오채룡문석(五彩龍紋席) 등으로 불렸다.

 

 

 

제작방법은 강화 화문석으로 대표되는 완초(莞草) 화문석을 직조하는 노경소직법(露經疎織法)과 등메를 제작하는 은경밀직법(隱經密織法)으로 크게 나뉜다. 먼저 사초과에 딸린 1년생 풀인 왕골(완초)을 거두어들여 찬이슬을 맞혀가며 3, 4일 동안 바짝 말리는데, 물을 들이는 부분은 중간대이다. 다음에 하루쯤 물에 담갔다가 속을 칼로 훑어내고, 문양에 따라 뽑아 쓰기 좋도록 죽으로 엮어 건조한 곳에 걸어둔다. 화문석 제작시에는 염색한 왕골로 무늬에 따라 뜸으로 박아 엮는 꽃자리로 날을 고드랫돌에 감아 가루장목에 늘여놓고, 자리날을 대면서 날실이 겉으로 드러나게 엮어나간다. 세 사람이 너비 6, 7자의 화문석 1장을 짜는 데는 5일쯤 걸린다. 화문석의 형태는 정사각형이나 직사각형이며 문양으로는 용() 문양, () 문양, 원앙과 봉황 문양, () 문양, 매화 문양, 모란 문양, 문자 문양 등이 있고, 근래에는 주로 거북·사슴·학 등 장생동물과 수복강녕(壽福康寧만수무강(萬壽無疆구름·소나무 등이 도안된다

 

 

 

화방석

 

유래 : 고려시대 교동면 화개사의 스님들이 불공을 드릴때 앉았던 방석으로서 유래된 것으로 교동의 공한지에서 자생하던 완초의 이용가치를 높이기 위하여 완초(왕골)을 이용한 방석을 제작하기 시작하였으며 현재의 화방석으로 승격된 것은 대한제국시대 후기부터 무늬를 가미한 방석 제작으로부터 이다.

 

특징 : 화방석은 여느 방석과는 달리 여름철에 완초가 지닌 성분으로 습기를 흡수하여 주므로 오래 앉아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으며 완자, 봉황, 태극무늬등 고전적 무늬를 수놓아 장식용으로 또한 품위가 뛰어나다.

 

용도 : 화방석은 주로 의자에 많이 이용되고 있으며, 고전적 무늬를 수놓은 장식용품으로 활용가치가 매우 높다.

 

 

 

 

 

24) 강화 반닫이.

 

나무를 짜서 물건을 넣어두는 장방형의 단층 궤로 앞널의 위쪽 절반을 상하로 여닫는 데서 생긴 명칭이다. 주로 옷가지나 문서·서책·제기(祭器) 등을 넣어 보관하는 데 쓰였고, 서민층에서는 천판 위에 침구를 얹거나 생활용구를 올려놓을 수 있어서 일반가정에서 가장 요긴하고 폭넓게 쓰였던 실용성 높은 가구이다. 따라서 재료도 질기고 단단한 느티나무·느릅나무·참죽나무·가래나무 등을 사용해 두꺼운 판재로 켠 다음 판재의 이음새는 사개물림으로 튼튼하게 결구하고, 무쇠나 놋쇠로 만든 경첩을 앞널에 넓게 붙여 견고도를 높였다. 반닫이의 일반적인 형태는 비슷하지만 재료와 문양이나 장석(裝錫)의 쓰임새 등이 지역에 따라 다르다. 평안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 반닫이로 크게 나뉘며, 박천·평양·강화·고흥·밀양·진주 반닫이 등으로 세분된다. 이 가운데 강화 반닫이는 느티나무와 소나무를 재료로 쓰며 무쇠와 놋쇠의 장석, 호리병 경첩, 문판 중심에 걸리는 지선형 뻗침대를 특징으로 하는 대표적인 반닫이로 꼽힌다. 밀양 반닫이는 비교적 낮은 크기에 옆으로 긴 형태이며, 병영·고흥 반닫이는 반대로 높이가 높고 폭이 좁은 형태에 구름문양과 거멀장석을 특징으로 한다. 제주도 반닫이는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지방의 형식을 혼합한 것으로 느티나무에 무쇠장식을 붙여 육중한 느낌을 준다

 

반닫이는 장방형으로 짜서 물건을 넣어두는 커다란 가구를 궤라 하는데, 궤 가운데 앞면의 반쪽을 여닫을 수 있게 만든 가구를 반닫이라고 합니다. 반닫이는 대부분의 민가에서 두루 사용되었고, 안방에서부터 광에 이르기까지 가장 요긴하게 사용된 다목적가구였습니다. 반닫이는 사용된 나무의 재질이나 금속장식, 기본 형태와 짜임 등에서 지역적인 특성이 강하게 보이면서 다양하게 발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두껍고 넓은 판재를 손깍지 끼는 듯한 모양의 사개물림 등으로 튼튼하게 짜며, 또한 각 모서리나 연결부위에 감잡이와 경첩 등으로 한층 견고하게 보강하는 등 견실함 위주의 가구라는 것은 공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반닫이는 무늬결이 좋은 넓고 두꺼운 판재에, 무쇠로 된 큼직한 장식들이 어울려 단순 후박한 멋을 주는 건강미를 갖고 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강화반닫이의 구조적 특징은, 첫째 대부분의 반닫이가 목리가 좋은 느티나무를 사용하는데 반하여 소박한 재질인 소나무를 즐겨 사용하며, 둘째 폭에 비해 높이가 높아 시원하며, 셋째 두꺼운 무쇠장석에 만()· 아자(亞字)를 투각하여 장식성을 높이고, 넷째 중심의 표형(瓢形) 경첩과 그 아래 배꼽장식이 있으며 자물쇠앞바탕 좌우의 조그마한 원형 장식으로 자물쇠 개폐시(開閉時) 앞판재가 상하는 것을 막아 주고 있다. 아래 강화반닫이는 호암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아마 우리나라에사 가장 고가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다. 어쨋든 전형적인 강화반닫이 형식으로 느티나무 자연 목리의 아름다움을 한껏 발휘하고 있으며 단순하고 또렷한 문양의 두꺼운 금속장석과 함께 건강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다. 내부 상단에는 무쇠로 제작된 천도형달개지쇠가 달린 세 개의 서랍이 있다.

 

 

 

25) 강화 동종.

 

. 보물 제 11-6

 

이 종은 조선 숙종 14(1688)에 유수 윤지완이 소종(小鐘)으로 주조한 것을 37(1711)에 유수 민진원이 현재와 같은 종으로 정족산성에서 재 주조한 종이다.

 

전통적인 한국 종의 형태에서 벗어나 옆띠를 몸체의 중앙에 두어 위(), 아래()

 

구분하였으며 어깨 부분은 턱이져 있다.

 

꽃무늬로 장식한 독립된 4개의 유곽이 있고 그 안에는 연꽃으로 표현한 9개의 유두를 배치하였다. 이 동종에는 주조 사실 등을 알 수 있는 명문이 양각되어 있으며, 고종 3(1866)병인양요시 강화도를 침입한 프랑스군이 약탈하여 가려 하였으나 너무 무거워 중 도에서 포기하였다 한다. 강화읍 관청리 416번지 상에 있던 것을 1976년 강화 중요 국 방유적 복원정화사업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가 1999년 영구보존을 위하여 강화 역 사관 내부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강화 성 문을 여는시간 닫는 시간을 알리는데 쓰던종이다.

 

 

 

. 사인비구주성동종(思印比丘鑄成銅鍾)이라고도 한다.

 

강화 고려궁지에 보관되어 있는 조선시대 동종.

 

보물 제11. 높이 176, 지름 145, 두께 21. 종신(鐘身)에 있는 명문(銘文)을 통해 1711(숙종 37)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의 정상부에 있는 용뉴()에는 쌍룡이 조각되어 있고, 종신을 상하로 구분하는 중앙의 횡대(橫帶)는 한국종의 전통형태에서 벗어난 이례적인 형식이다. 어깨부분에 비스듬히 나온 턱이 있는데 이는 고려동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입화형(立花形)의 퇴화형식인 것 같다. 윗부분에는 4개의 유곽(乳廓)이 있는데, 보상당초무늬가 장식된 넓은 유곽대(乳廓帶)가 있고 그 안에 연꽃으로 표현한 9개의 유두(乳頭)가 있다. 종신에 당좌(撞座)가 없는 점, 어깨부분의 입화장식이 퇴화한 점, 유곽이 어깨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점, 용뉴에 음관이 없는 점 등은 조선 후기 동종의 특징이다.

 

 

 

26) 강화 행열도 (13:20)

 

18496월 조선 24대 왕 헌종의 왕위를 계승하게 될 변(철종, 哲宗)을 모시러 오는 왕 실의 행렬을 그린 역사기록화입니다. 지형에 따라 구불구불 길게 늘어선 긴 행렬과 강화 의 전경을 12폭 병풍에 담았습니다. 위엄 있고 성대한 행렬을 화면중심에 배치하면서 여 러 성곽과 크고 작은 건물들, 섬사람들의 생활과 바닷가의 풍경을 섬세하게 표현하여 당 시의 현실을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비록 인물들이 작게 그려져 있으나 농민들, 어부들, 장사꾼들과 양반사대부들, 승려, 그리고 노인들과 아낙네들, 어린이들에 이르기 까지 각 계층 인물들의 모습이 비교적 생생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선과 점, 피우기를 기본으로 하는 조선화의 표현기법을 능숙하게 활용하여 그린 우수한 작품이며 한 화폭 에 방대한 내용을 이야기 형식으로 표현한 전형적인 작품입니다.

 

 

 

2층 역사관 전시실 (13:20)

 

 

 

1, 계단.

 

1) 신미양요 조선군 사령관 장수기.

 

한미관계의 출발점, 미국에 뺏긴 수자기

 

. 강화역사박물관의 2층 계단 벽면에는 대형 수자기(帥字旗)가 걸려있다.

 

이 수자기는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 사령관의 장수기로서 광성보 전투에서

 

미함대에 패한 후 빼앗긴 것이다.

 

그 기는 현재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있는 것을 복제한 것이다.

 

 

수자기

 

역사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위 천정벽에 걸려있는 "()"라고 쓰여진 이 기는 18716월 신미양요때 광성보전투에서 어재연장군이 지휘했던 조선군의 사령관기(장수기)입니다. 신미양요 당시,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조선과 통상교역을 요구하며 1230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공해 왔는데, 미해병대는 우세한 병력과 화력으로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한 후, 광성보에서 우리 조선군과 치열한 백병전을 전개하게 됩니다. 350여명의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의 지휘아래, 단 한명도 후퇴하거나 적의 포로가 되지 않고 용감하게 싸우시다가 모두 장렬히 순국하셨습니다. 광성보전투에서 미군이 노획해간 수자기는 미국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Annapolis)소재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 강화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모조품입니다.

 

 

 

2. 강화 전쟁사 전시실 (3전시실)

 

(입구에서 좌측 전시실.)

 

 

 

1) 몽고의 침략.

 

. 몽고의 침입 과정

 

) 고종 임금 시대에 몽고에 쫓긴 거란족이 고려에 침입하여 평양 부근에

 

몰려 있었다.

 

이때 고려와 몽고는 이들을 함께 소탕하였다. 이 일을 빌미로 몽고는 고려에

 

무리한 공물을 요구하였고 두 나라는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 몽고의 침입 :고려에서 공물을 받아가던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근처에서

 

피살되자 책임문제를 둘러싸고 국교가 단절되고 이후 6차례나 고려를

 

침입하였다.

 

 

 

2) 강화 천도 [江華遷都]

 

1231(고종 18) 몽골군이 고려에 침입한 그 이듬해에 최씨정권이 국권을 유지하기 위해 개경(開京)에서 강화도(江華島)로 수도를 옮긴 사건.

 

당시의 집권자 최우(崔瑀)가 강화도로 천도할 것을 구상한 것은 비교적 이른 때였다. 그는 몽골의 제1차 침입이 한창 진행중이던 123112월에 승천부(昇天府) 부사 윤린()과 녹사(錄事) 박문의(朴文) 등이 강화가 피난지로 안성마춤이라는 건의를 하자 그들이 먼저 가서 살펴보도록 조처했다. 그뒤 고려 조정이 천도문제를 공식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몽골군 철수 직후인 12322월이다. 그리고 천도방침이 확정된 것이 616, 국왕이 강화로 옮긴 것이 77일의 일이었으므로 논의에서 확정 및 시행에 이르기까지는 불과 반년도 걸리지 않았다. 강화로 천도하는 것에 대해 최우의 몇몇 측근 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관리들은 반대했다. 12326월에 최우가 자기집에서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었을 때에도 참지정사(參知政事) 유승단(兪升旦)은 몽골에 사대(事大)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여 천도에 반대하며 화친론을 들고 나왔고,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 김세충(金世沖)은 힘써 싸워 적과 대결하자고 주장하며 역시 천도론에 반대했다. 이에 최우는 김세충을 처단하여 위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도읍을 옮기는 쪽으로 논의를 확정하고, 7월에 국왕이 강화에 당도함으로써 천도가 단행되었다.

 

최우는 강화로 천도하는 방침이 확정되자 곧 성안에 방을 붙여 5부 인호(五部人戶)는 정해진 날짜 안에 강화도로 옮길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군법에 따라 처벌하겠다고 엄명했다. 각도에도 사람을 보내어 백성들을 산성과 해도에 입보(入保)토록 조처했다. 새로운 수도로 선정된 강화는 수전(水戰)에 약한 몽골군의 약점을 이용할 수 있는 데다가 조석 간만의 차가 크고 조류가 빨라 공격이 쉽지 않은 곳인 반면에, 고려에게는 개경과 가깝고 지방과의 연결 혹은 조운(漕運) 등이 매우 편리한 곳이었다. 그러므로 지배층들은 이곳으로 옮겨와 점차 새 수도로서의 시설을 갖춘 강도(江都)를 건설하고, 개경에서와 큰 차이가 없는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이러한 강화천도에 대한 평가로는 2가지 견해가 있다. 장기적으로 항몽전을 전개하려는 감투정신의 발휘인 동시에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처사였다는 긍정적 견해가 있는가 하면, 그보다는 최우가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데 더 큰 목적을 두고 있었다는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그러나 강화천도는 2가지 요인이 아울러 작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최씨정권이 강화도로 천도한 이후에는 그곳의 방위에만 주력했을 뿐 다른 지역이 침략받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책을 강구한 면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천도한 후 취한 일련의 조처는 몽골을 크게 자극했을 뿐만 아니라, 식량부족과 몽골군의 살육·약탈로 인해 최씨정권은 초적(草賊)을 비롯한 지방 군현민(郡縣民)들로부터 직접 위협을 받았다

 

 

 

3) 대몽 항쟁.

 

 

 

4) 강화 외성 축성 공사 재현.

 

. 강화외성의 축성.

 

고려는 1232년 고종 19년 몽공의 침략에 대응 하기위해 강화도로 천도한 후

 

내성 중성 외성등의 여러 방어 시설들을 만들었다. 이 중 강화외성은 강화의

 

동쪽 해안선을 따라 쌓은 토성으로 길이는 약 23Km이다.

 

 

 

5) 축성 노래.

 

 

 

6) 삼별초의 항쟁 (三別抄 抗爭)_

 

. 1270년 고려정부가 몽고에 굴복하자 삼별초가 대몽항쟁을 위해 강화을 떠나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는 모습이다. 삼별초는 귀족 고관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고 떠났는데. 이때 동원된 배가 1,000척에 이르렀다고한다

 

. 삼별초란 원래 도적을 지키기 위하여 만든 특별 부대와 몽고군에 잡혀갔다가

 

탈출한 병사들을 합쳐 만든 부대였다.

 

. 몽고군의 침략에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항쟁하던 고려 정부가 마침내

 

강화도를 포기하고 개경으로 돌아가려 하자 삼별초는 굴욕적인 항복이라고

 

주장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다짐하였다.

 

. 강화도에서 진도로 옮긴 삼별초는 세력을 키워 백성들과 힘을 합쳐 몽고군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몽고군의 대규모 공격으로 제주도로 자리를 옮겨 저항하였

 

지만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 몽고군의 침략에 대한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인의 꿋꿋한 기상을 보여준 민족

 

정신의 본보기가 되었다.

 

 

 

. 공민왕의 자주 운동

 

고려가 몽고에 굴복하자 몽고는 더 많은 재물과 사람을 빼앗았고 심지어 북쪽

 

땅까지 빼 앗았으며 여러 몽고 풍습을 따르게 하였다.

 

공민왕은 몽고에 빼앗긴 땅을 찾자’, ‘몽고말을 쓰지 말고 풍습도 따르지 말라고 하여

 

자주 의식을 굳게 하였다. 그리하여 몽고 것을 버리고 고려의 풍습을 되살리는 일에

 

앞장서서 몽고식 제도를 다시 고려식으로 고치고 몽고가 빼앗아간 땅을 되찾아 원래

 

주민에게 돌려주었으며, 몽고에 빼앗긴 북쪽 영토도 모두 되찾았다.

 

 

 

7) 삼별초 항쟁 전시.

 

1270(원종 11)~73년에 일어났다.

 

 

 

 

 

삼별초는 경찰로서의 치안유지 및 무인집권자들의 정권유지 기반의 역할을 했다(무인정권). 또한 대몽항쟁기에 모든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최씨정권이 붕괴된 이후에도 무인집권자들의 권력쟁탈에 큰 영향을 미치는 세력이었다. 고려 왕실은 대몽강화를 주도하면서 무인집권기에 빼앗겼던 권력을 장악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무인정권의 무력기반인 삼별초를 해체했고, 이는 곧 삼별초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이어서 삼별초가 봉기했다. 한편 대몽강화 후 국왕 측근의 문신들이 몽골과 친선유대를 강화하여 왕권을 확고히 하는 동시에 무인들의 집권을 방지하려 한 데서 비롯된 무인들의 반발과, 몽골의 압력에 의한 일본원정 준비로 고려가 입는 막대한 피해와 희생도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 항쟁에는 몽골에 대한 고려의 종속을 막자는 의도도 있었다. 1270년 장군 배중손(裴仲孫)은 지유(指諭) 노영희(盧永熺)와 함께 삼별초를 이끌고 항전을 일으켰다. 양반과 백성들을 강화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한편, 왕족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왕으로 삼고 관부(官府)를 세웠다. 그러나 양반관리들과 군사들이 강화도를 빠져나와 육지로 도망함으로써 사태가 불리해지자, 선박을 모아 재물과 백성·노비 등을 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도(珍島)를 근거지로 삼았다. 진도로 옮긴 삼별초 정권은 그 기세를 크게 떨쳐 남해(南海창선(彰善거제(巨濟제주(濟州) 30여 개 섬을 지배하는 해상왕국을 이룩했다. 육지에도 세력을 뻗쳐 육지의 물자를 진도로 옮겨 항전의 태세를 굳게 하고 장흥(長興합포(合浦지금의 馬山금주(金州金海동래(東萊) 등 연안 요지를 비롯하여 전라도 등지를 공격하여 그 위력을 떨쳤다. 이에 따라 조운(漕運)이 막힌 개경 정부는 경제적으로 큰 위협을 받았다. 이렇게 삼별초가 진도에 웅거하여 세력을 떨치자 주군(州郡)이 호응하여 진도까지 가서 알현했으며, 육지의 봉기세력 또한 이들의 영향을 받는 형편이었다.

 

 

 

 

 

한편 개경 정부는 삼별초가 진도로 들어가자 김방경(金方慶)을 역적추토사(逆賊追討使)로 삼아 몽골군과 함께 이를 쫓게 했으나 힘이 미치지 못했다. 이에 새로 김방경을 전라도토역사(全羅道討逆使)로 삼아 몽골원수 아해(阿海)와 함께 진도를 공격했다. 그러나 완강히 저항하는 삼별초의 기세를 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아해는 겁을 먹고 후퇴했다. 몽골은 아해를 소환하고 흔도()로 대체시키는 한편, 군대를 증강했다. 고려에서도 양반·백정(白丁잡색(雜色승도(僧徒)를 징발하고 다시 지방군까지 동원하여 병력을 증강했다. 이리하여 고려와 몽골 연합군은 12715월에 진도에 대한 총공세를 폈고, 진도는 이들에게 함락당해 승화후 온과 배중손이 여기에서 죽었다. 이에 삼별초는 다시 김통정(金通精)을 중심으로 그 근거지를 탐라(耽羅濟州道)로 옮기고 마지막으로 항거 했다. 개경 정부는 몇 차례 회유했으나 실패하자 김방경을 중심으로 다시 고려와 몽골 연합군을 편성, 탐라를 공격하여 1273년에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했다.

 

 

 

 

 

삼별초의 항쟁은 몽골과 강화한 뒤 민란으로 인해 민의 성숙한 사회의식이 고조된 상황에서 왕실, 친몽골파 귀족들과 대립되는 친무인파와 기존의 반외세·반정부의 기치를 든 일반민중의 참여로 일어난 13세기 후반의 가장 방대한 항전이었고, 고려 정부와 원에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삼별초 항쟁의 좌절은 민의 역동적인 사회변화 의식을 저하시키고, 이로 인해 14세기 민의 움직임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8) 임진왜란과 강화

 

9) 임진왜란 전황도.

 

10) 의병장 우 성전

 

 

 

11) 병자호란.

 

12) 병자호란 전황도.

 

. 병자호란.

 

병자호란 (丙子胡亂) 조선 인조 14(1636.병자)년에 청나라가 침입해 온 난리.

 

[이듬해 정월에 청과 굴욕적인 화약(和約)을 맺음.]

 

1636(인조 14) 12월부터 16371월까지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하여

 

일어난 전쟁.

 

. 발생 배경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丁卯胡亂) 뒤 후금(後金)과 조선은 형제지국(兄弟之國)으로서 평화유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조선은 해마다 많은 액수의 세폐(歲弊)와 수시의 요구에 응하기 힘들었으며, 당시 집권층의 강한 숭명배금(崇明排金) 사상으로 북쪽 오랑캐와의 형제관계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후금은 조선침략의 다음해에 내몽골의 챠하르[察哈爾] 지방을 공격하고, 1632년에는 만주와 내몽골의 대부분을 차지한 뒤 베이징[北京] 부근을 공략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에 더욱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태종은 사신을 보내 '형제지맹''군신지의'(君臣之義)로 고치려 했고 세폐도 늘려 금 100, 1,000, 각종 직물 12,000, 3,000필 등과 정병(正兵) 3만 명까지 요구했다. 이에 조선측은 세폐를 대폭으로 감액하는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그 다음달에는 후금으로부터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량을 공급하라고 요구받았다. 이처럼 후금이 무리한 요구를 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절화(絶和)하는 한편 군비(軍備)를 갖추어야 한다는 논의가 격해졌다. 그러던 중 1636년 용골대(龍骨大마부대(馬夫大) 등이 인조비 한씨(韓氏)의 조문(弔問)을 왔을 때 후금 태종의 존호(尊號)을 알리면서 군신의 의()를 강요했다. 그러자 조정 신하들은 부당함을 상소하며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척화할 것을 주장했고, 인조도 후금의 국서를 받지 않고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후금의 사신들은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도망갔다. 정부에서는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의주를 비롯한 서도(西道)에 병기를 보내고 절화방비(絶和防備)의 유서(諭書)를 평안감사에게 내렸는데, 도망하던 후금의 사신이 그 유서를 빼앗아 보고 조선의 굳은 결의를 알게 되었다. 또한 16364월에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고치는 한편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개원하고 태종은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는 존호를 받았는데, 이때 즉위식에 참가한 조선 사신인 나덕헌(羅德憲)과 이곽(李廓)이 신하국으로서 갖추어야 할 배신(陪臣)의 예를 거부했다. 이에 청태종은 귀국하는 조선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 국서를 보냈는데, 자신을 '대청황제'(大淸皇帝)라고 하고 조선을 '이국'(爾國)이라고 하면서 조선이 왕자를 보내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大軍)으로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이 국서에 접한 조정은 격분하여 나덕헌 등을 유배시키고, 척화론자(斥和論者)들은 주화론자(主和論者)인 최명길(崔鳴吉이민구(李敏求) 등을 탄핵했다. 이러한 정세를 살펴보던 청태종은 그해 11월 조선의 사신에게 왕자와 척화론자들을 압송하지 않으면 침략하겠다고 거듭 위협했다.

 

 

 

. 청의 친입

 

청태종은 163612월에 직접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청태종은 명나라가 해로(海路)로 조선을 지원을 못하게 하기 위해 별군(別軍)으로 랴오허[遼河] 방면을 지키게 하고, 122일에 만주족·몽골족·한인(漢人)으로 이루어진 2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9일에는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때 청은 맹약을 위반한 조선을 문죄(問罪)하는 것이 침략의 명분이었으나, 사실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복종시켜서 후일 청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게 될 때 후환을 없애기 위한 대비였다. 청군이 압록강을 건넜을 때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굳게 방비하고 있었으므로, 청나라의 선봉인 마부태(馬夫太)는 이 길을 피하고 서울로 직행하여 선양[瀋陽]을 떠난 지 10여 일 만에 개성을 지나서 서울 근교에 육박했다. 조선 조정은 1213일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의 계문에 의하여 청군이 침입해서 이미 안주(安州)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대책을 서둘렀다. 14일 승지 한흥일(韓興一)에게 묘사(廟社)의 신주를 가지고 강화로 향하게 하고,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안찰사, 부제학 이민구를 부사(副使)로 정하여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봉림대군(뒤의 효종), 인평대군을 배호하여 강화로 향하게 했다. 또한 강화유수 장신(張紳)이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여 강화를 방비하게 하고 심기원(沈器遠)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정했다. 그날 밤 인조도 세자와 함께 강화로 가려고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이미 청군이 양철평(良鐵坪마포대안으로 추정)에 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 최명길을 보내어 적정을 살피게 하는 한편, 다시 수구문(水口門)으로 나와 밤늦게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다음날 새벽 인조는 산성을 떠나서 강화로 향했으나 산길이 얼어 미끄러웠으므로 산성으로 돌아갔다.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어영대장 이서(李曙), 수어사 이시백(李時白), 어영부사 원두표(元斗杓) 등에게 성 안의 군병 13,000여 명으로 성을 지키도록 하고, 8도에 교서를 내려 도원수·부원수 및 각 도의 감사·병사로 하여금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다. 이때 성 안에는 군량이 도합 23,800여 석이 있었는데, 이 분량은 군병과 백관을 합하여 14,000여 명이 있었으므로 약 50일분에 해당하는 양식이었다. 청군의 선봉은 16일에 남한산성에 이르렀고, 뒤이어 많은 군사들이 남한산성으로 몰려왔다. 성 안에서는 비록 큰 전투는 없었으나, 적의 포위 속에서 혹한과 싸워야 했으며 점차 식량마저 떨어져 성 안의 상태가 비참해져감에 따라, 각지에서 오고 있는 원병이 산성의 포위망을 배후로부터 끊어주길 기대했다. 그러나 도원수·부원수, 감사(監使병사(兵使)의 군사는 대개 도중에서 적과 접전하다가 흩어졌다. 그중에서 전라병사 김준룡의 군사가 용인에서 적장을 죽이고 기세를 올리기도 했으나, 역습을 당하여 후퇴했다. 민간에서도 의병이 일어났으나, 거의 무력하거나 진군 도중이었다. 조선이 기대했던 명나라의 원병은 국내의 어려운 사정으로 적은 수를 보냈는데, 그나마 풍랑 때문에 되돌아갔다. 10여 만 명의 청군에 포위당한 채 고립되자, 성 안의 조선 조정에서는 차차 강화론이 일어났으며, 주전파도 난국을 타개할 별다른 방도를 내놓지 못했다. 청태종은 이듬해 정월 1일에 남한산성 아래의 탄천(炭川)에서 12만 명의 청군을 결집하고 있었다. 2일에 인조는 청군에 보내는 문서를 작성하게 하여 청의 진영에 보냈는데, 청은 조선이 청과 개전할 준비를 하는 등 맹약을 깨뜨렸으므로 출정한 것이라는 등의 매우 강압적인 답서를 보냈다. 그뒤 20일에 청나라는 인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하되 먼저 주전의 주모자 2~3명을 가두어 보내라는 국서를 보냈다. 이틀 후에는 청군에 의해 강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강화에는 세자빈궁과 두 대군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피난해 있었고 안찰사 김경징과 유수 장신 등이 방비를 맡고 있었는데, 결국 패전하여 빈궁과 대군 이하 200여 명이 포로가 되어 남한산성으로 호송되었다.

 

 

 

 

. 항복과 강화

 

모든 정세가 불리해지자 인조는 항복할 결심을 하고 130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의식을 행했다. 이때 항복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청나라와 조선은 군신의 의를 맺고, 명의 연호를 버리며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명나라에서 받은 고명책인(誥命冊印)을 청나라에 바칠 것, 인조의 장자와 다른 아들 및 대신들의 자제를 인질로 할 것, 청나라의 정삭(正朔)을 받고, 만수·천추·동지·원단과 그밖의 경조사에 조헌의 예를 행하며 사신을 보내어 봉포하되 이들 의절은 명나라에 하던 것과 같이 할 것,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 원군을 보낼 것이며 청군이 돌아가면서 가도()를 정벌할 때 조선은 원병과 병선을 보낼 것, 조선인 포로가 만주에서 도망하면 다시 잡아가며 대신 속환(贖還)할 수 있다는 것, 통혼(通婚)으로 화호(和好)를 굳힐 것, 조선은 성을 보수하거나 쌓지 말 것, 조선 안에 있는 올량합인(兀良哈人)을 쇄환할 것, 조선의 일본과의 무역을 종전대로 하고 일본의 사신을 인도하여 청나라에 내조하게 할 것, 매년 1번씩 청나라에서 정하는 일정한 양의 세폐를 바칠 것 등이다.

 

 

 

이는 정묘호란 때의 조건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굴욕적이고 가혹한 것이었다. 화의가 이루어지자 청태종은 돌아갔으며, 소현세자와 빈궁, 봉림대군과 부인 그리고 척화론자인 오달제(吳達濟윤집(尹集홍익한(洪翼漢) 등의 대신들이 인질로 잡혀 선양으로 갔다. 청군은 돌아가던 중 가도의 동강진(東江鎭)을 공격했고, 조선은 평안병사 유림과 의주부윤 임경업으로 하여금 병선을 거느리고 청군을 돕게 하여 동강진의 명나라 군대는 괴멸되었다

 

 

 

. 전후의 대청관계

 

병자호란 후 조선은 청에 대해서 사대(事大)의 예를 지킴에 따라 조공(朝貢) 관계가 유지되었다. 중국에 가는 사신의 주요임무는 세폐와 방물(方物황제나 황후에게 따로 보내는 조선의 공물)을 바치는 일이었는데, 이로 인해 조선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보았다. 사행(使行)의 내왕시 일정한 한도 내에서의 교역이 공인되어 개시(開市)와 후시(後市)가 행해졌는데, 이 또한 조선 정부에 경제적 손실을 끼쳤다. 이외에 전쟁 때 청으로 잡혀간 백성들을 데려오는 데 드는 속환가가 비싸서 속환문제가 심각했다. 이와 같이 조선은 표면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숭명배청의 사상이 전쟁 전보다도 굳어져갔다. 그리하여 강화조건에 포함되어 있는 청나라의 출병요구에 대해서는 1639년에 거절한 바 있으며, 이듬해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임경업에게 전선 120척과 병사 6,000명을 주어 출전하게 하고 군량미 1만 포를 조운하게 했는데, 임경업이 중도에서 일부러 30여 척을 파괴하고 풍운을 만나 표류한 틈을 타서 명나라에게 청나라의 사정을 알렸다. 1643년에는 조선이 명나라와 통교한 사실이 드러나 최명길과 임경업이 선양에 붙잡혀갔다. 이듬해 청은 베이징[北京]으로 천도하고 1645년에 선양에 잡혀갔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최명길, 척화론자인 김상헌을 돌려보냈다. 그러자 인조는 인평대군을 보내어 사의를 표함으로써 병자호란의 전후처리는 일단락되었고, 종전 직후 무리하게 책정되었던 조공품목들은 조정되었으나 조선에게 불리한 조공관계와 무역은 계속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1649년에 즉위한 효종의 주도 아래 강한 배청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북벌론(北伐論)이 대두되었다.(북벌론, 정묘호란)

 

 

 

 

 

입구에서 우측 전시실

 

 

 

13) 외세 침략과 강화

 

 

 

14) 강화 산성. [江華山城]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

 

사적 제132. 고려가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천도할 당시 궁궐과 함께 축조되었다. 원래 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3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성이 규모있게 궁궐의 내성으로 축조된 것은 1234(고종 28) 1월부터였고, 당시의 성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이었다. 그리고 이 내성을 방어하기 위한 중성이 축조된 것은 1250(고종 37)으로, 둘레가 약 7에 달하는 토성이었다. 또 중성을 둘러싸는 외성은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1235년에 전국 주(()에서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인 결과 동쪽 육지를 바라보는 선을 따라 37,070척에 달하는 성이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

 

고려시대의 강화 내성에는 고려 궁궐과 관청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규모나 배치를 모두 송도(松都 : 지금의 개성)의 것을 옮겨놓은 듯이 비슷하게 하여 왕족과 귀족들은 송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다. 궁궐의 정문은 정남향의 승평문(昇平門)이었다. 한편 중성에는 모두 8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송도의 것을 그대로 본떠 동에 선인문(宣仁門), 서에 선기문(宣祺門), 남에 태안문(泰安門), 북에 북창문(北昌門)을 두었고, 동남에 장패문(長覇門), 서남에 광덕문(光德門), 서북에 선의문(宣義門), 동북에 창희문(彰熙門)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의 강화가 성립되어가던 1259(고종 46) 몽고의 요구로 내성이 헐리게 되었고, 외성도 허물었다. 그리고 고려정부가 완전히 송도로 환도하는 1270(원종 11)에는 궁궐도 헐리어 현재는 궁궐터마저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1627(인조 5)에 정묘호란이 있자 인조가 잠시 피난했으며,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빈궁(嬪宮)들과 신하들이 피난했으나 청군에 의해 강화성이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외침이 잦자 조선정부는 이후 수차에 걸쳐 강화성을 개축하여 화강암의 석성으로 바꾸고 여장(女墻 :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도 설치했다. 이렇게 하여 강화성은 4개의 성문과 4개의 암문(暗門), ··서쪽의 장대(將臺)2개의 수문(水門)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현재 북악과 남산을 연결하는 지역에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와 성문은 거의가 조선시대에 축조되어 1970년대에 보수된 것이다. 동문은 망한루(望漢樓)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그리고 서문은 첨화루(瞻華樓)1711(숙종 37)에 건립되어 그동안 퇴락되었다가 1977년에 개축되었다. 남문은 안파루(晏波樓)1711년에 건립되었으나 1955년 홍수 때 무너진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북문은 1783년에 건립하여 진송루(鎭松樓)라 했으나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조선시대에는 성내에 많은 관아(官衙)가 들어서 있었으나 1866(고종 3) 병인양요 당시 많은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는 고려 궁터에 동헌(東軒)과 이방청(吏房廳) 등이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서문 근방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조인되었던 연무당(鍊武堂)터가 있다.

 

 

 

15) 정묘 호란.

 

16) 정묘 호란 전황도.

 

. 정묘호란.

 

정묘호란 (丁卯胡亂) 조선 인조 5(1627.정묘)년에 후금(後金)이 침입해

 

온 난리. 왕과 조신(朝臣)들은 강화(江華)로 피난하였다가 후금과 평화 조약을

 

맺어 형제국이 됨

 

1627(인조5)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약 2개월간 지속되었던 후금과 조선

 

사이 의전쟁.

 

. 인조반정 후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을 표방하던 조선에 후금(後金)3만 명의 대군을 파견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후 만주의 여진족은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흥기했으며, 1616(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차지하기 위해 남하함에 따라 명과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러던 중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奴爾哈齊)'7대한'(七大恨)을 내세우며 명의 변경요지(邊境要地)를 공격하여 점령하자, 명은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명의 원정군을 일으키고 조선에도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여 조선은 1619년 강홍립(姜弘立) 등이 이끄는 1만 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당시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흥기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강홍립에게 형세가 불리하면 후금에 투항하는 것도 주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강홍립은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심하(深河)전투에서 패배한 뒤 후금군에게 투항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의 출병요구에 부득이 응했다고 해명했다. 누르하치는 그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조선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광해군 때에는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정권은 요동 등주(登州)의 명군과 연계하여 동남쪽 후금군을 괴롭히는 가도()의 모문룡(毛文龍) 군대를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정책을 내세웠다. 한편 후금에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太宗)은 즉위 전부터 중국본토 침입 때 자신들의 배후를 칠 우려가 있는 조선을 미리 정복하자고 한 주전론자(主戰論者)였다. 따라서 조선과 후금의 충돌은 예상되는 것이었다. 또한 후금은 명과의 교전(交戰) 때문에 경제교류의 길이 막혀 야기된 심한 물자부족 현상을 타개해야 했는데, 마침 이괄(李适)의 난이 실패한 후 후금으로 도망간 이괄의 잔당이 조선의 병력이 약하고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지졸이라며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후금의 태종은 침략의 뜻을 굳히고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것 등을 구실로 16271월 아민(阿敏) 등에게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부대는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안주·평양을 거쳐 125일 황주에 이르자 인조를 비롯한 조신(朝臣)들은 강화로,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난했다. 한편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했는데, 정봉수(鄭鳳壽이립(李立)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 그런데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다가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점과, 명을 정벌할 군사를 조선에 오랫동안 묶어둘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강화(講和)의사를 표시했다. 이에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했던 조선의 조정은 후금의 제의를 받아들여 양국 사이에 33일 화의가 성립되었다. 화약(和約)의 내용은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 화약이 성립되면 곧 군사를 철수시킬 것, 양국 군대는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조선은 금과 강화해도 명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 등의 내용이었다. 이 화약은 비록 형제의 국()을 규정하기는 했지만 후금군을 철수시키기로 한 것과 명과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후금군의 무력에 굴복한 일방적 조약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비록 군사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후금군이 장기적으로 주둔할 수 없다는 약점을 잘 활용한 협상이었다. 이후 조선은 친명배금정책을 계속 추진하면서 그것을 뒷받침할 군사력 배양에 주력하여 수어청의 창설, 어영청의 증강, 훈련도감의 증액 등에 힘쓰게 되었다. 그러나 후금은 군사를 철수시킨다는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켜 모문룡의 군대를 견제하면서 세폐(歲幣중강개시(中江開市) 등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으며,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君臣)의 의()'로 양국관계를 고칠 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絶和)의 태도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636년 다시 후금은 국호를 ''()이라 고치고 사신을 보내 태종의 존호(尊號)를 알리고 신사(臣事)를 강조했다. 조선이 청과의 싸움을 결정한 후 같은 해 12월 청나라의 침략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했다

 

 

 

복도. 강화 전쟁사 전시실 (4 전시실)

 

( 좌측 전시실 )

 

 

 

17) 강도 지도.

 

18) 강화 지도.

 

19) 양 헌수 장군 전시.

 

1816(순조16) 1888(고종25). 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남원. 자는 경보. 부사정 종임의 아들이다. 이항로의 문인으로 무예를 익혔다. 1848(현종14)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철종 때에는 삼상관에 올랐다. 1865(고종2) 제주 목사로써 전 판관 배기호의 탐학을 징치하도록 하여 제주도민의 칭송을 받았고, 이해 가을 극심한 태풍의 피해를 복구하는 한편, 진휼을 요청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한해를 더 잉임하였다.

 

1866년 어영청의 천총으로 준천사의도청을 겸하다가 병인양요를 당하여 정족산성의 수성장이 되었다. 순무중군 이용의 명령에 따라 별군관 이현규와 함께 17명의 초관과 경초군 121, 표하군 38, 포수 367명을 이끌고 광성진 의 손돌 목을 건너 정족산성을 지키던중 103일 프랑스함대의 로즈 제독이 해군대령 올리비에의 부대 160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 6명을 죽이고 많은 부상자를 내었으며 대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세워 프랑스군이 패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병사로 재직중이던 1871년에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신설한 별위사제도의 격려방안으로 매년 도시를 시행하여 성적에 따라 우대하고 곡식과 연포로 포상하였으며 이와 같은 치적이 인정되어 특별히 1년을 더 잉임하였고 이듬해에는 당시 황해도 연안에 출몰하던 해적 일당을 체포하여 효시하기도 하였다.

 

1875년 어영대장에 임명되었고, 1874년 좌변포도대장을 지냈다. 18752월 형조판서가 주어졌으나 실제로 부임하지는 않았던 듯 하며 8일 뒤 금위대장이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김병학, 홍순목, 이용희 등과 함께 개국을 반대하는 척화론을 끝까지 주장 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집권한 대원군은 민비의 상을 치르는 한편 척족세력을 제거하는 인사를 단행하면서 삼군부를 다시 설치하였는데 이때 조영하, 김병시, 김기석 등과 함께 지삼군부사에 임명되었다.

 

1884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1887년 독련사가 되었다. 시호는 충장이다. 정족산성에서의 전투는 서양국가와의 최초의 전쟁으로 당시 서양 세력이 동양인을 깔보고, 식민지 정책을 확장하던 때인지라 이 한마당 싸움으로 그들의 높은 콧대를 납작하게 하여준 쾨거라 하겠다. 당사 프랑스는 동양함대를 앞세우고, 종교적으로(천주교) 민심을 사고 무력으로 안남제국(월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석권하고 인도네시아의 넓은 영역을 제압한 프랑스는 본국의 50배도 넘는 영토를 식민지로 경영하면서 그 위세를 영국과 더불어 세계 만방에 떨치며 오만 방자하게 약소국가를 위협하고 괴롭혔다.

 

 

 

이 프랑스군이 갑곶에 상륙하여 강화성을 공략하고, 양민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여 성안은 아비규환 그것이었으며, 당시 강화성에는 외규장각이 있어 국보급 장서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강화행궁 안에는 금, , 보화와 진귀한 보물이 꽉 차 있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반출 도적질하여 가지고 갔으며, 그 외 것은 불질러 다 태워버리고 성안의 궁궐, 민가 할 것없이 닥치는 데로 불살라 버리고 도주하여 강화성은 황폐화되었다. 현재도 프랑스와 외교적으로 타협하여 국보급 문화재 반환 교섭을 하고 있으나 프랑스의 무성의로 반환이 이루워 지지 못하고 있다.

 

 

 

전등사 동문 안에는 그의 위대한 호국승전을 기리기 위한 승전비가 있다. 정족산성 남문 바로 왼쪽에 밑글텅만 남은 썩은 고목나무 한그루가 현재까지도 남아있는데 나라에 위험이 닥칠 때마다 울었다고 한다. 프랑스군의 동양함대 침공이 있었던 10월의 밤에도 이 나무는 밤새워 울었다고 한다. 양헌수 부대는 이 나무의 울음소리를 듣고 프랑스군의 침공을 미리 감지하고 만반에 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20) 정족산전투 장면 전시.

 

 

 

21) 병인 양요.

 

. 병인양요.

 

정족산 전투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정족산성에서 벌어진 프랑스군과의

 

치열한 전투모습이다. 이전투에서 프랑스군은 60-70명의 사상자을 내었으나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자 1명과 부상자 4명 뿐이었다고 한다.

 

1866(고종 3) 프랑스가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강화도를 침범함으로써 일어난 사건.

 

 

 

. 18661월초 대원군은 쇄국양이 정책의 하나로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이때 탄압을 피하여 탈출했던 3명의 프랑스 신부 가운데 리델이 7월 청나라의 톈진[天津]으로 탈출해 프랑스의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천주교 탄압 사실을 알리고 이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1846, 18472차례 조선을 침략했다가 실패했던 프랑스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는데, 프랑스의 실제 속셈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는 데 있었다. 리델의 보고와 보복요청을 받은 주중 공사 벨로네는 "조선 국왕이 우리 불행한 동포에게 박해를 가한 그날은 조선 왕조의 최후의 날이다"라고 단언하면서 로즈 제독에게 조선 침략을 명령했다. 로즈는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한 서울까지의 뱃길을 탐사할 목적으로 3척의 군함을 이끌고 1866810~22일에 제1차 원정을 단행했다. 프랑스 군함은 서울의 양화진·서강까지 올라와 수로탐사를 한 뒤 물러갔다. 이에 조선 정부는 황해도와 한강 연안의 포대를 강화하고 의용군을 모집하는 등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해안 방어대책을 강화했다. 같은 해 915일 로즈는 전함 3, 포함 4, 병사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해왔다. 이때 길잡이는 리델과 조선인 천주교도 3명이었다. 침략군은 16일 강화를 점령하고 서울에 이르는 주요보급로를 차단하여 조선 정부를 궁지에 몰아 항복을 받을 속셈으로 한강을 봉쇄했다. 강화를 점령한 로즈는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했으니 조선인을 죽이겠다고 하면서 속히 관리를 자신에게 보내 통상조약을 맺게 하라고 조선 정부를 협박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경하·이용희·양헌수를 각각 대장·중군·천총에 임명하여 강화를 수복했다. 920일 문수산성에서 다시 패한 조선군은 우세한 프랑스군의 화력을 이겨내고 강화도를 수복하는 데에는 기습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01일 밤 양헌수가 549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해협을 몰래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가 잠복하여 103일 정족산성을 공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프랑스군은 전사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가 났으나, 조선군은 전사 1, 부상자 4명뿐이었다. 조선군의 정족산성 승리는 프랑스군을 물러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1개월이 넘는 원정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정족산성의 패배에 따른 사기 저하 등으로 105일 강화도에서 철수했는데, 이때 대량의 서적·무기·금은괴 등을 약탈해갔다. 이 사건은 이후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22) 돈대 위치 표시.

 

 

23) 신미 양요[辛未洋擾]

 

. 신미양요

 

1871(고종 8) 미국 함대가 조선에게 통상조약체결을 강요하기 위해 강화도 침략한 사건.

 

조선과 미국은 1855(철종 6), 1865(고종 2), 1866년에 미국 배가 각각 조선의 동해안 통천, 영일연해, 선천군에 표류함으로써 3차례의 접촉이 있었는데, 이때마다 조선은 미국의 배를 청나라로 호송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18667월 평양경내의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무력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하고, 청국정부에 사건의 조사를 의뢰했다. 또한 1866년에는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켰던 프랑스에게 공동원정군을 편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자고 제의했으나, 당시 프랑스는 프로이센과의 전쟁 전야에 있었으므로 거절했다. 1867년 미국은 슈펠트 중령으로 하여금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의 황해도 연안을 수색했으며, 1868년에도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에 대해 손해보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황해도·평안도 등지를 배회하며 지방관과 회담하다가 성과 없이 돌아갔다. 미국 국무부는 조선과의 통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군함을 거느리고 무력시위를 하는 것만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1871년 조선측과의 교섭책임을 주청 특명전권공사 F. F. 로에게 위임하는 동시에 아시아 함대 사령관 J. 로저스에게 조선원정을 지시했다. 로와 로저스는 상하이[上海]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이르러 휘하의 함대를 집결시킨 뒤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포함 2, 대포 85, 병력 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했다.

 

 

 

 

 

. 미국 함대는 그해 43일 경기도 남양부 풍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수로를 측량하면서 48일에는 물류도(勿溜島) 앞바다에 이르렀다. 조선정부는 남양부사로부터 이러한 급보를 전해 듣고 어재연(魚在淵)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이창회(李昌會)를 강화판관에 임명하여 현지로 파견하는 한편, 서울에 있는 각 영()으로부터 군대를 차출하고 대포·화약·군량미를 수송했다. 그해 414일 조선정부에서 한학역관(漢學譯官)을 파견하자 로는 미관(微官)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상대하지 않고 고관(高官)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날 오후 로저스는 해군 중령 블레익으로 하여금 소선 4척과 포함 2척을 거느리고 염하(鹽河) 일대를 측량하게 했는데, 이들이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津)으로 나가려고 할 때 연안을 경비하고 있던 조선 포대는 포격을 가했고, 덕진진(德津鎭) 초지진(草芝鎭)에서도 합세하여 공격했다. 그결과 미국측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해 415일 대원군은 진무사 정기원(鄭岐源)을 시켜 미국의 불법침략을 문책하고 통상조약교섭을 거절하게 했다. 로는 무단공격의 책임은 조선에 있고 3, 4일 내에 협상하지 않으면 미국은 자유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해 423일 로저스는 공격작전을 지시하여 450명의 해병대가 물류도를 출발하여 초지진에 상륙했으며 이튿날 아침 미국 해병대는 전진하여 덕진진을 공격·점령하고 이어 광성보로 육박해왔다.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윤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는데, 수륙양면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이 격전에서 조선측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 53명이 전사하고, 강화부 별무사 유예준(劉禮俊) 24명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미군은 전사자 3, 부상자 10명을 내었다. 광성보를 빼앗기고 중군 어재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으나, 대원군은 지구책(持久策)을 강구하면 프랑스 함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함대로 퇴각할 것이라 생각해 양이(洋夷)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고, 전국 중요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 이러한 조선측의 반응은 패전한 조선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것으로 예기하던 미국측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미국측은 다시 교섭을 요구했으나, 조선정부가 응하지 않자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로와 로저스는 당시 대규모의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또한 대규모 군사행동은 본국으로부터 받은 훈령 외의 일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으로부터 철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해 515일 조선측에 공문을 보내 외교교섭의 책임을 갖고 있는 특파대원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논하고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되었을 경우에는 구조·보호해달라고 요청한 후, 다음날 전함대를 거느리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관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충천했고 배외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인의 쇄국 및 배외의 태도는 더욱 견고해졌다

 

 

 

미국 함대는 그해 43일 경기도 남양부 풍도 앞바다에 정박하여 수로를 측량하면서 48일에는 물류도(勿溜島) 앞바다에 이르렀다. 조선정부는 남양부사로부터 이러한 급보를 전해 듣고 어재연(魚在淵)을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이창회(李昌會)를 강화판관에 임명하여 현지로 파견하는 한편, 서울에 있는 각 영()으로부터 군대를 차출하고 대포·화약·군량미를 수송했다. 그해 414일 조선정부에서 한학역관(漢學譯官)을 파견하자 로는 미관(微官)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상대하지 않고 고관(高官)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날 오후 로저스는 해군 중령 블레익으로 하여금 소선 4척과 포함 2척을 거느리고 염하(鹽河) 일대를 측량하게 했는데, 이들이 손돌목을 지나 광성진(廣城津)으로 나가려고 할 때 연안을 경비하고 있던 조선 포대는 포격을 가했고, 덕진진(德津鎭) 초지진(草芝鎭)에서도 합세하여 공격했다. 그결과 미국측은 더이상 북상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그해 415일 대원군은 진무사 정기원(鄭岐源)을 시켜 미국의 불법침략을 문책하고 통상조약교섭을 거절하게 했다. 로는 무단공격의 책임은 조선에 있고 3, 4일 내에 협상하지 않으면 미국은 자유행동을 취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해 423일 로저스는 공격작전을 지시하여 450명의 해병대가 물류도를 출발하여 초지진에 상륙했으며 이튿날 아침 미국 해병대는 전진하여 덕진진을 공격·점령하고 이어 광성보로 육박해왔다. 광성보는 진무중군 어재윤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엄중히 수비하고 있었는데, 수륙양면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이 격전에서 조선측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 53명이 전사하고, 강화부 별무사 유예준(劉禮俊) 24명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미군은 전사자 3, 부상자 10명을 내었다. 광성보를 빼앗기고 중군 어재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관민들은 긴장하고 두려워했으나, 대원군은 지구책(持久策)을 강구하면 프랑스 함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미국 함대로 퇴각할 것이라 생각해 양이(洋夷) 매국지율(賣國之律)로 다스리겠다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고, 전국 중요도회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이러한 조선측의 반응은 패전한 조선정부가 당연히 교섭에 응할 것으로 예기하던 미국측에게 의외로 받아들여졌다. 이에 미국측은 다시 교섭을 요구했으나, 조선정부가 응하지 않자 대규모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고는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로와 로저스는 당시 대규모의 침략전쟁을 감행할 수 있는 병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또한 대규모 군사행동은 본국으로부터 받은 훈령 외의 일이었으므로 결국 조선으로부터 철퇴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그해 515일 조선측에 공문을 보내 외교교섭의 책임을 갖고 있는 특파대원의 접견을 거절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논하고 장차 미국 국민이 조선 내에서 조난되었을 경우에는 구조·보호해달라고 요청한 후, 다음날 전함대를 거느리고 청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서울의 관민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의기충천했고 배외의식이 더욱 강화되었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인의 쇄국 및 배외의 태도는 더욱 견고해졌다.(제너럴 셔먼호 사건)

 

 

 

. 운요호 사건[雲揚號事件]

 

. 운요호 사건

 

1875(고종 12) 920일 일본 군함 운요호가 조선의 강화해협에 불법침입하여

 

포격을 가하고 살육·방화·약탈을 자행한 사건.

 

 

 

. 국내외 정세

 

1873년경부터 일본에서는 조선문제를 둘러싸고 정한론(征韓論)이 크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대외적으로는 '탈아외교'(脫亞外交)의 일환이었던 서구열강과의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노력이 실패하면서 오는 실망과 좌절감에서, 대내적으로는 당시 일본 전국에 충만하고 있던 유신과 개혁에 대한 불평·불만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이끄는 정한론자들은 이와쿠라[岩倉오쿠보[大久保] 등 내치(內治)의 우선을 주장하는 점진적 정한론자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대규모 정치분쟁 이후 정부에서 총퇴진했다. 이후 메이지[明治] 정부는 사이고 다카모리 퇴진으로 야기된 무사계급과 국민의 감정을 무마하고 그 관심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1874년 타이완 침략을 단행했다. 한편 이 시기 조선에서도 강경한 쇄국정책을 고수하던 대원군이 실각하고 187312월부터 고종의 친정과 이어 민씨척족정권의 집정이 시작되는 등 중대한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한반도에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려는 일본에게 유리한 조건이었다. 더구나 조선정부는 1874년 청()나라로부터 일본이 장차 타이완을 침략한 것과 같이 한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경고가 담긴 자문(咨文)을 받고, 대원군의 심복으로 대일교섭을 담당한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 등을 처벌하고 양국간의 관계개선을 위해 우호적인 태도를 일본 측에 전달했다. 한편 교섭재개를 위하여 이미 부산에 파견되었던 모리야마[森山茂]는 이러한 조선의 우호적 태도가 대원군의 실각에 수반한 정국의 혼란과 정부의 약화에서 유래했다고 파악하고,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조선에 대하여 약간의 힘과 압력을 가하는 것'이라고 외무성에 보고했다. 또한 그는 1875년 부산에 거듭 파견되어, 415일 강경한 대한포함외교(對韓砲艦外交)를 주장하는 건의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했다. 결국 이러한 모리야마의 강경책은 일본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고, 마침내 군함을 파견하기로 결정되었다.

 

 

 

. 경과

 

군함파견 결정에 의해 운요호와 제이정묘호(第二丁卯號)가 각각 525, 612일에 부산에 입항했다. 그들은 조선의 항의를 무시하고 연안을 탐측하면서 무력적 포함시위를 단행했고, 614일에는 부산훈도(釜山訓導) 현석운(玄昔運) 등 조선관리가 관람차 승선하자 불시에 발포연습을 감행함으로써 일본의 대한포함외교정책을 강행할 것임을 과시했다. 이후 남해안과 동해안을 탐측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던 운요호는 920일 강화도 동남쪽 난지도(蘭芝島)에 정박했고, 함장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이하 수십 명의 해병은 보트에 나누어 타고 초지진(草芝鎭)으로 침입했다. 강화해협을 방어하던 조선수비병은 침입해오는 일본 보트에 포격을 가했고, 이에 이노우에는 운요호로 철수하여 즉각 초지진에 대대적인 포격을 가했다. 이어 제물포 해안의 영종진(永宗鎭)에 포격을 가하며 상륙작전을 벌여 일대 격전이 벌어졌는데, 조선수비병은 근대식 무기를 휴대한 일본군을 대적할 수 없어서 첨사 이민덕(李敏德) 이하 400~500명이 패주했다. 일본군은 무기를 약탈하고 영종진에 대해 방화·살륙·약탈을 자행한 뒤 나가사키[長崎]로 돌아갔다.

 

 

 

. 역사적 의의

 

이 사건으로 조선은 일본의 무력 앞에 무기력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일본에서는 다시 정한론이 대두하여 운요호사건에 대한 조선정부의 사죄,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내세웠다. 곧이어 일본정부는 6척의 군함과 800명의 군대에 호위된 전권(全權)대표단을 파견하고 1876227일 강화도에서 조선과 전문 12조로 된 한일수호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일본의 강압적 위협에 의하여 맺어진 불평등조약이었다. 결국 운요호사건은 일본의 한반도침략의 일환으로 계획되었으며, 일본은 불평등조약 체결을 계기로 조선식민지화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 정묘호란.

 

정묘호란 (丁卯胡亂) 조선 인조 5(1627.정묘)년에 후금(後金)이 침입해 온 난리.

 

왕과 조신(朝臣)들은 강화(江華)로 피난하였다가 후금과 평화 조약을 맺어 형제국이 됨

 

1627(인조5)1월 중순부터 3월 초순까지 약 2개월간 지속되었던 후금과 조선

 

사이의 전쟁.

 

 

 

인조반정 후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을 표방하던 조선에 후금(後金)3만 명의 대군을 파견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임진왜란 후 만주의 여진족은 조선과 명의 국력이 약화된 틈을 이용하여 흥기했으며, 1616(광해군 8) 후금을 세우고 비옥한 남만주의 농토를 차지하기 위해 남하함에 따라 명과의 무력충돌은 불가피했다. 그러던 중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奴爾哈齊)'7대한'(七大恨)을 내세우며 명의 변경요지(邊境要地)를 공격하여 점령하자, 명은 양호(楊鎬)를 요동경략(遼東經略)으로 삼아 10만 명의 원정군을 일으키고 조선에도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구하여 조선은 1619년 강홍립(姜弘立) 등이 이끄는 1만 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당시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흥기하는 동아시아의 정세변화에 따라 강홍립에게 형세가 불리하면 후금에 투항하는 것도 주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강홍립은 조명연합군(朝明聯合軍)이 심하(深河)전투에서 패배한 뒤 후금군에게 투항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원해준 명의 출병요구에 부득이 응했다고 해명했다. 누르하치는 그러한 상황을 인정하고 조선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임으로써 광해군 때에는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정권은 요동 등주(登州)의 명군과 연계하여 동남쪽 후금군을 괴롭히는 가도()의 모문룡(毛文龍) 군대를 지원하는 등 친명배금정책을 내세웠다. 한편 후금에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太宗)은 즉위 전부터 중국본토 침입 때 자신들의 배후를 칠 우려가 있는 조선을 미리 정복하자고 한 주전론자(主戰論者)였다. 따라서 조선과 후금의 충돌은 예상되는 것이었다. 또한 후금은 명과의 교전(交戰) 때문에 경제교류의 길이 막혀 야기된 심한 물자부족 현상을 타개해야 했는데, 마침 이괄(李适)의 난이 실패한 후 후금으로 도망간 이괄의 잔당이 조선의 병력이 약하고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지졸이라며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후금의 태종은 침략의 뜻을 굳히고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것 등을 구실로 16271월 아민(阿敏) 등에게 3만 명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했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부대는 의주를 돌파하고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안주·평양을 거쳐 125일 황주에 이르자 인조를 비롯한 조신(朝臣)들은 강화로,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피난했다. 한편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거나 군량을 조달했는데, 정봉수(鄭鳳壽이립(李立)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평산까지 진출한 후금군은 계속 남하하다가 후방을 공격당할 위험이 있다는 점과, 명을 정벌할 군사를 조선에 오랫동안 묶어둘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강화(講和)의사를 표시했다. 이에 화전(和戰) 양론이 분분했던 조선의 조정은 후금의 제의를 받아들여 양국 사이에 33일 화의가 성립되었다. 화약(和約)의 내용은 형제의 맹약을 맺을 것, 화약이 성립되면 곧 군사를 철수시킬 것, 양국 군대는 서로 압록강을 넘지 않을 것, 조선은 금과 강화해도 명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것 등의 내용이었다. 이 화약은 비록 형제의 국()을 규정하기는 했지만 후금군을 철수시키기로 한 것과 명과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후금군의 무력에 굴복한 일방적 조약이라고는 볼 수 없으며, 비록 군사적으로는 열세였지만 후금군이 장기적으로 주둔할 수 없다는 약점을 잘 활용한 협상이었다. 이후 조선은 친명배금정책을 계속 추진하면서 그것을 뒷받침할 군사력 배양에 주력하여 수어청의 창설, 어영청의 증강, 훈련도감의 증액 등에 힘쓰게 되었다. 그러나 후금은 군사를 철수시킨다는 약속을 어기고 의주에 군사를 주둔시켜 모문룡의 군대를 견제하면서 세폐(歲幣중강개시(中江開市) 등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으며, 1632년에는 '형제의 맹'에서 '군신(君臣)의 의()'로 양국관계를 고칠 것을 요구하면서 많은 세폐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경제적 부담이 되어왔던 세폐에 대해서는 절충을 시도했지만,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은 것도 굴욕적으로 여기는 분위기에서 '군신의 의'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절화(絶和)의 태도를 굳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636년 다시 후금은 국호를 ''()이라 고치고 사신을 보내 태종의 존호(尊號)를 알리고 신사(臣事)를 강조했다. 조선이 청과의 싸움을 결정한 후 같은 해 12월 청나라의 침략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했다

 

 

 

24) 광성보 전투 장면 전시.

 

 

 

26) 이 재연 장군 전시.

 

1823(순조23) 1871(고종8). 조선 후기의 무장. 본관은 함종. 자는 성우이며, 용인의 아들이다. 1841(헌종7) 무과에 급제 충청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66년 프랑스 로즈함대(프랑스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 (병인양요)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을 수비하였다. 이어 회령부사가 되어 북쪽 변경지방의 비적을 토벌 치안을 보함과 동시에 장시를 개설하는 등 변경무역을 활성화하였다.

 

 

 

1871년 미국 아세아 함대의 강화도 내침으로 신미양요가 발발하였다. 61일 손돌목 포격사건이 발생 한미간에 최초의 군사충돌이 발발, 위급을 고하자 진무중군에 임명되어 광성보로 급파하여 6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 부임. 미군과 대치하였다.

 

 

 

610일 미군은 강화도 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을 점령하였고 611일 덕진진을 함락시키고 마지막으로 광성보 공략에 나섰다. 이때 광성보에 수자기를 게양하고 침공해 오는 미군을 격퇴할 태세를 취하였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양면 작전을 개시, 해상에서는 함포사격, 지상에서는 야포사격으로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광성보로 돌입한 미군과 어재연군은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그는 임전 무퇴의 결의로 칼을 손에 잡고 적을 무찔렀고 대포알 10여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장열하게 전사하였다. 전쟁이 끝난 후 병조판서지삼군부사에 추증 되었으며 시호는 충장이다. 강화충렬사에 배향되었다.

 

27) 병인 신미 양요 당시 병기 전시.

 

28) 근대 화기 전시.

 

 

 

입구에 우측 전시실

 

 

 

29) 암행어사 절복.

 

30) 강화지

 

31) 강화 돈대 표시.

 

32) 덕진진 경고비

 

. 대포 2문 전시.

 

33) 강하 의병운동.

 

34) 강화 3.1 항일운동.

 

 

 

야외 전시장.

 

1. 탱자 나무(역사관 나아서 왼쪽) ((13:35)

 

천연기념물 78. 갑곳리의 탱자나무는 남한 서해안에서 자랄수있는 북방 한계선이

 

됨을 증명하는 귀중한 자료다. 강화도에서 탱자나무는 성벽 밑에 적병의 저븐을 막기

 

위해 철조망 대신으로 심어젔다.

 

 

 

2. 갑곳 돈대와 홍이포

 

이 돈대는 고려 고종 19(1232)부터 원종 11(1270)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후 조선 인조22(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이 돈대는 숙종 5(1679)에 죽조 되었다. 고종 3(1866) 97일 병인양요시 프랑스 극동함대가 600 병력을 이 끌고 강화산성, 문수산성등을 점령하였다. 동년 1013일 프랑스군은 삼랑성(정족산 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의해 패주 하였다. 이때 강화성 내에 있던 강화동 종을 가져가려 하였으나 무거워 가져가지 못하고 성내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등을

 

약탈하고 조선궁전 건물은 불을 질렀다.

 

 

 

홍이포.

 

최장거리 700m. 포신 2.6m.로 포구에 화야과 포알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여 폭팔하는 힘에 의하여 날아간다 . 포알 자체는 폭팔하지

 

않으므로 살상능력은 거의없다. 명중에 의하여 배에 구멍을 내는 정도다.

 

홍이포(紅夷砲)16세기 네덜란드 인에 의해 명나라에 전해진 신형 대포이다. 병자호란 당시 청의 부대가 홍이포를 사용하여 강화도를 함락시키면서 위력을 떨쳤다. 병자호란 이후 중국에 다녀온 사신 및 하멜 등의 외국인 표류자들에 의해 조선에서도 홍이포가 제작되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지형에 맞게 개량되어갔다. 특히 영조 7년 새롭게 제작된 홍이포는 그 사거리가 4Km에 달하였다고 한다. 홍이포는 신미양요 직후 강화도에 축조되었던 포대에 설치되어 해방의 임무를 담당하였던 무기였다.

 

 

 

3. (앞 왼쪽에) 문수산성[文殊山城]

 

.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포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축산성.

 

. 사적 제139. 둘레 약 2,400m, 면적 약 208. 김포시에서 가장 높은

 

문수산의 험준한 산줄기에서 시작해 해안지대를 연결하고 있다. 강화의

 

갑곶진(甲串鎭)과 마주보면서 강화도 입구를 지키던 산성으로 1694

 

(숙종 20)에 쌓고, 1812(순조12)에 대규모로 중수했다. 산성 안에

 

문수사(文殊寺)라는 절이 있어,

 

이로부터 문 수산성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성벽은 다듬은 돌로

 

튼튼하게 쌓았고, 그 위에 성가퀴[女墻낮은 담]를 둘렀으며, 성문은취예루

 

(取豫樓공해루(控海樓) 3개의 문루와 3개의 암문(暗門)이 있었다.

 

이 가운데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강화에서 육지로 나오는 관문 구실을 했다. 1866(고종 3)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침입해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이때의 전투로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가 모두 파괴되어

 

없어졌고 지금은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곽만이 남아 있다

 

 

 

4. 이섭정.

 

고려 때 몽고와의 협약에서 우리측이 이롭게 되기를 염원하여 지은 팔각

 

정자로서 조선 태조 7년 강화부사 이성이 복원하였다.

 

 

 

5. 갑곳 돈대.

 

사적 306. 고려때 강화의 외성으로 강화 해협을 지키는 중요 요새였으며

 

조선 인조 22(1644) 강화의 여러 진이 설치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

 

로서 숙종 25(1679)에 축조되었다. 또한 고종 3(1866/09/07)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처들어온 곳. 강화의 가장 중요한 관문이다, 극동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 강화성. 문수산성 등을 점령하였으나 그해 10/13

 

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 패하여 물러났다.

 

돈대는 해안가 높은 언덕위의 요새입니다.

 

강화에는 5753돈대가 있어 그 전체가 하나의 요새역할을 했습니다.

 

해안가에서 적을 감시하기 위해 지었기 때문에 돈대들 하나하나가 모두 경치좋은 자리에 지어졌습니다.

 

강화를잘 아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기존 관광지와 다른 모습을 찾고 싶으신 분들은 구석구석 숨어있는 돈대를 하나하나 찾아가는 즐거움을 느껴보세요.

 

 

 

- 관광코스

 

갑곶돈대15-용진진15-광성돈대,용두돈대,손돌목돈대10-덕진돈대15-초지진20-택지돈대15-분오리돈대20-미루지돈대20-망양돈대10-삼암돈대20-계룡돈대20-망월돈대

 

 

 

6.. 바닷가 외성터.

 

 

 

7. 해선망 어선.

 

고려때 시선배이 변형이며 조선시대 후기에 사용되던 배로 강화에서는

 

곳배라 부르며 새우을 잡는 한국형 고유 어선이다.

 

 

 

8. 역사관 앞 기념 사진 촬영 준비 .(13:45)

 

 

 

9. 화장실 다녀오세요.

 

 

 

9). 고인돌(지석묘) 출발 (13:51)

 

사적 제 137. 청동기 기대의 대표적인 묘제의 하나로서 2000

 

1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으며 높이 2.6m 개석의 길이 7.1m

 

너비 5.5m 무게 50ton으로 북방식중 남한 최대 크기를 자랑하고있다.

 

청동기시대 족장의 무덤이다.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시대의 무덤으로 거석 문화의 일종이다.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지만 공동무덤을 상징 하는 묘표석 혹은 제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支石墓(지석묘)라고 부르고 중국에서는 石棚(석붕)이라하며 기타 지역에서는 돌멘(Dolmen)이나 거석(巨石, Megalith)으로 부른다.

 

 

 

고인돌은 인류가 농경문화를 시 작한 이래 남긴 거석문화 유산으로 유럽, 아프리카, 아 시아 등 전세계에서 확인된 고인돌수는 약 55,000 여기에 이르며 그 중 26,000여기가 우리나라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이는 전세계 지석묘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우 리나라가 지석묘의 중심국가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준다.

 

탁자식 고인돌 전북 고창군 아산면 상감리에 있고

 

바둑판식 고인돌은 경남 창영군 영산면에 있습니다.

 

고인돌에도 여러 가지 형태로 축조되었나 봅니다.

 

 

 

1. 강화 특산물 소개.

 

 

 

1) 화문석.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어 가내수공업으로 발전된 것으로 100년전 조선왕실로

 

부터 화문석의 도안을 특수하게 제작하라는 하명을 받고, 당시 백색자리의

 

생산지인 강화군 송해면 양오리 한 충교씨가 연구한결과 도안에 의한 화문석

 

제작에 성공 다양한 도안개발과 제조 기술개발로 오늘에 이루고 있다.

 

 

 

. 화문석 특징

 

화문석은 왕골(완초) 자체가 여름철에는 시원하면서 수분을 잘 흡수하고 겨울에

 

냉기를 방지해 주며 오래 사용하여도 윤기가 강하고 부스러짐이 없고 질기다.

 

 

나 화문석 용도

 

화려하면서도 소박한 무늬와 더불어 우아하고 정교한 수공예품으로 거실에 접빈용 으로 사용하거나 경사,제례용으로 사용하였으며 품위와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다.

 

 

. 화문석 제작과정

 

왕골(완초)을 이용한 제품으로 왕골에 염색을 하여 화문석 틀을 이용하여 무늬를 수놓으면 나일론 실로 한올한올 엮어나가는 것으로 화문석을 엮는데 2-3인이 7~10일간에 걸쳐 하나의 제품을 완성한다.

 

 

2) 인삼.

 

강화인삼은 고려인삼의 원산지로서 고려 고종(1232)때부터 재배가 시작되었으며, 한국전쟁이 터지자 인삼의 본거지인 개성사람들이 이곳에 피난와 1953년부터

 

본격 재배가 이루어 졌다. 인삼은 기후,토양 등 환경조건이 무척 까다로운바

 

세계적으로 우리나라가 적지이며, 그중 강화군은 6년근 인삼이 최적지이다

 

 

 

. 인삼 효능

 

원기를 보하고 혈액생성을 왕성하게 하며 폐기능을 강화 시키는 한편, 체내의

 

독을 제거하는등 신비의 영약으로 알려져 있다.

 

 

 

. 인삼의 종류

 

인삼은 가공방법에 따라 수삼, 홍삼, 백삼으로 분류된다.

 

수삼 : 16년근 인삼을 채굴하여 건조시키지 않은 인삼으로 생삼이라고도 한다.

 

홍삼 : 6년근 수삼을 껍질을 벗기지 않은채 증기로 쪄서 햇빛에 건조시켜 특수가 공하여 제조된 암갈색을 띤 저장성이 좋은 인삼이다. (보관유효기간 : 10)

 

백삼 : 35년근 수삼을 원형 그대로 또는 껍질을 벗겨 건조시킨 미황백색을

 

띤 인삼이다.

 

강화 인삼을 제일로 손꼽는 이유는 '내공' '내백'이 없이 육질이 단단해 홍삼 제조시 최상급으로 인정받는 천삼, 지삼의 생산 비율이 높기 때문이다. 강화는 인삼 재배에 알맞은 천혜의 기후 조건과 토양을 갖추고 있다. 강화 인삼은 고려 고종(1232) 재배를 시작해 1920년대에 특별 구역으로 지정되기도 했으며 6·25 동란시 개성에서 인삼을 재배하던 개성인들이 피난해 인삼 재배 적지를 찾 던중 토질과 기후 조건이 맞아 떨어지는 강화도에서 인삼을 재배하게 된 것 이 강화도 6년근 인삼이다..

 

  강화 인삼은 씨를 틔워 심은 후 1년 간 키우고 이를 채종한 후 우량 종자만 선 택해 땅힘이 좋은 다른 지역에서 인삼을 재배하게 된다. 이렇게 심어진 인삼은 잔류 독성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유기질 비료로 5년간을 더 키우 면 6년근 강화 인삼이 된다.

 

 강화 인삼은 피로회복 체력증진은 물론 빈혈, 저혈압, 심장쇠약을 치료하고 노이로제 자율신경에 좋으며, 진액을 윤활하게 하며 당뇨병에 좋다. 또 폐결핵과 천식, 위장염, 설사, 변비, 식욕부진을 개선, 독을 제거해 상처를 아물게 하는데 효험이 있다는 인삼 칠효설이 있다. 

 

 

 

인삼은 무게를 표시하는 것도 특이하다, 인삼이 귀하던 시절부터 약방에서 약의 무게를 달아주던 식의 무게단위가 굳어진 것으로 1차로 표기하는데 이는 20냥에 해당되며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단위로는 750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3) 순무

 

다육질의 뿌리와 부드럽게 자라는 줄기를 먹기 위해 기르는 내한성이 있는 2년생 식물.십자화과(十字花科 Brassicaceae)에 속하는 순무(Brassica rapa)와 호무. (Bnapobrassica) 2()이 있다. 진짜 순무는 아시아 동부와 중부가 원산지로 이 곳에서 기르기 시작해 온대지방으로 재배되어나갔다. 순무 뿌리는 어린식물의 1차 뿌리와 바로 위의 어린줄기가 같이 굵어진 것이다. 줄기는 첫해에는 짧게 자라며, 잎은 뿌리 끝에 로제트 같은 다발을 이루는데 연두색이고 거친 털이 달린다. 다음 해에 로제트 가운데에서 싹이 나와 튼튼하고 가지를 치는 곧은 줄기로 자라는데, 이 줄기에 엷은 청록색의 부드러운 잎이 난다. 줄기와 가지 끝에 밝은 노란색의 작은 꽃이 무리지어 핀 후 짧은 부리를 가진 부드럽고 길쭉한 씨 꼬투리 생긴다

 

 

 

한국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확실하지 않으나, 고려시대에 씌어진 향약구급방에 순무로 보이는 만청(蔓菁) 또는 무청(蕪菁)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순무를 재배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호무는 루터베이거 또는 스웨순무로

 

부르고 있는데, 언제부터 재배해왔는지 확실하지 않다. 순무와 호무는 주로 젖 소를 비롯한 가축의 먹이로 쓰기 위해 심고 있다.

 

원산지 : 아프카니스탄 지방과 유럽 서남부 해안지방.

 

 

 

. 유 래 :

 

유럽과 시베리아의 반온대지방이 원산지이며 우리나라

 

  에서는 중국에서 도입되어 삼국시대 부터 재배하였다는 재배설이

 

  있고, 조선중엽 허준선생의 동의보감 기록에도 있다.

 

 

 

. 특 징 :

 

생김새는 팽이모양의 둥근형이며, 색깔은 자적색이고

 

맛은 감미롭고 고소하며 겨자향의 인삼맛(배추꼬리맛)이 난다.

 

 

다 건강 식품 :

 

동의보감에 의하면 "순무는 맛이 달고 오장이 이로우며 소화를 돕고 종기

 

(암 으로 추정 됨)를치료한다"고 했으며, "눈과 귀를 밝게 하고 황달을 치료하며 갈증을

 

해소시킨다." 고 했다.

 

 

 

. 미용 식품 :

 

순무는 예로부터 "밭의 화장품"으로 피부미용에 좋다고 알려졌다.

 

어린이 성장발육 식품.

 

반찬이나 간식, 과일 대용의 후식으로 좋다. 술안주 좋은 순무.

 

 

 

. 순무김치 종류 :

 

순무배추속김치, 순무밴댕이김치, 순무비늘김치, 순무석박지, 순무동치미

 

순무김치 담그는 요령. (순무석박지) :

 

순무, 젓갈(새우, 밴댕이),생강,고춧가루,마늘,

 

순무를 통째로 넙적넙적 하게 썰어넣고

 

,마늘,생강을 다져 넣은후 젓갈과 함께

 

버무려 김치국을 삼삼하게 부어서 익힌다

 

 

 

4) 강화 '속노랑고구마'

 

다른 지역 밤고구마와 달리 속이 노랗고 당도가 높으며 소화도 잘 돼 속이 편안하다는 특 징을 갖고 있다. 속이 일반 고구마 보다 더 짙은 노란색을 띠고 있어 강화 속노랑고구마라 이름이 붙여졌다. 원래 고유명칭은 생미 였는데 여러 사람들이 고구마속의 색깔로 구분하 여 속노랑 고구마, 호박고구마, 당근 고구마, 꿀고구마등 갖가지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속노랑고구마' 라는 명칭은 강화주민들 뿐만 아니라 강화를 거쳐간 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소문이 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에 19985월에 강화 속노랑고구마 작목반이 브랜드 화를 위한 상품명을 고민하던 끝에 '속노랑고구마'라 공식화하였다

 

 

 

5)강화도 전설

 

 

 

.강화 전등사 전설

 

전등사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裸女像)이 추녀 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설화가 전해진다.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과 집물 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무렵 주모는 그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여자를 본뜬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했다. 그 까닭은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녀를 경고 하는 본보기로 삼게 하기 위함이었다.

 

 

 

. 전등사 은행나무 전설

 

배불숭유의 정책을 폈던 조선에 들어오면서 전국의 사찰은 조정으로부터 여러 가지

 

박해를 받게 되었다.

 

 

 

승려는 성곽을 쌓거나 다리를 놓는 일에 사역을 나가야 했고, 사찰에서는 제각기 특산물을 공물로 바쳐야만 했다.

 

강화도에 있는 전등사에서는 매년 은행을 공물로 바치도록 명령했는데 절어귀에 큰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서는 열매가 가장 많이 달릴 때에 열가마니 정도 은행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해에는 스무 가마니를 공물로 바쳐야 한다고 관아에서 명령해 왔다. 전등사의주지 스님과 그 밖의 스님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풍년이 들어야 열 가마니인데 스무 가마니를 공물로 내라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외부에서 은행을 사드릴 재력도 없었다. 스님들의 걱정은 더 커졌다.

 

 

 

"은행이 많이 수확되도록 염불을 올립시다." 주지스님의 제의에 따라 은행나무 밑에 제단이 차려지고 3일 기도회가 열렸다. 이 소문이 절 아래 마을들에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기도제를 구경하려고 모여들었다.

 

 

 

관가에서도 이 말을 듣고 신기하게 여기며 몇몇 포졸들을 파견했다. 주지 스님의 염불이 한창 진행될 때 포졸 한 놈이 스님에게 모독적인 언사를 했다. 곧 벼락이 치드니 포졸 한 놈이 꼬꾸라졌다.

 

 

 

"이 은행나무에 제발 은행이 열지 않게 해 주십시오. 나무관세음보살." 주지스님은 이 은행나무에 향후 천년 만년 은행이 열지 않게 해 달라고 기원을 했다. 그러자 벼락과 뇌성이 울리면서, 은행나무에 달렸던 은행 알은 모조리 떨어지고 기도회를 드리던 제단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그후 이 두 그루의 은행나무에는 은행이 열리지 않게 되었다

 

 

 

6). 강화 사자 쑥(비비면 박하향)

 

''은 단군신화를 시작으로 우리 겨레와 함께 해온 식물이다. 삼국유사 (三國遺事) "時神遺靈艾一炷 蒜二十枚日(시신유령애일주 산이십매일)" , '쑥 한 묶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라는 말이 나온다.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 먹었던 것이 마늘과 쑥이라는 이야기다.

 

쑥은 보통 들판의 양지바른 풀밭에 나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서 38종이 있다. 각각 모양과 향기, 성분 등에서 차이가 난다.

 

우리 겨레는 어린 쑥으로 떡을 해먹었음은 물론, 갖가지 형태로 조리해 먹거나 뜸, 목욕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이용해왔다. 그뿐만 아니라 쑥은 악귀를 물리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쑥은 무엇보다도 약초이다. 쑥은 뛰어난 약효 때문에 '의초' 또는 '천연초'라는 이름으로도 불렀다. 그것은 폐허에서도 잡초처럼 살아남는 쑥의 끈질긴 생명력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 땅 어디고 쑥이 돋아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쑥의 생명력은 유명하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원자폭탄이 떨어졌던 히로시마의 잿더미 속에서 가장 먼저 피어오른 식물이 쑥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그중 뜸쑥은 애엽(艾葉), 애호(艾蒿), 황초(黃草), 구초(灸草)라고도 하며, 한방에서는 중요한 약초로 쓰인다. 최근에는 쑥차나 쑥환 등 다양한 건강식품으로 개발되어 쓰임새가 넓어지고 있다. 뜸쑥은 일반 쑥(나물 쑥)과는 달리 줄기와 잎 뒷면이 거미줄 같은 흰털이 빽빽이 덮여 있고 줄기의 윗부분이 조금 누렇다.

 

 

 

그런데 그 쑥 중에서도 '사자발'을 닮았다 해서 '사자발쑥(사자족애 : 獅子足艾)'으로 불리는 쑥이 강화도에 있다. 사자발쑥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2- 경기[7]-[강화도호부]'에 사자 발바닥 모양 같은 쑥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 후기의 의서(醫書) 방약합편(方藥合編)에도 사자발쑥 기록이 보인다. 조선시대 사자발쑥은 강화도의 특산품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 사자발쑥은 그 동안 문헌에만 존재할 뿐 거의 전설처럼 남아있을 뿐이다. 그러던 것이 강화도의 한 농민이 15년 전 발견해 다시 재배하기 시작해 주목받고 있다.

 

원래 강화에는 예부터 마니산과 해안가를 중심으로 좋은 쑥이 자생하였다. 강화는 오염되지 않은 지역일 뿐만 아니라 해양성 기후에 물빠짐이 좋은 토질 등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어 품질 좋은 쑥이 생산된다. 강화도의 자생쑥으로는 사자발쑥 외에 싸자리쑥(싸주아리, 황해쑥)도 있다.

 

 

 

이중 싸주아리는 강화에서 예부터 자생하고 있는 약쑥이다. 향이 높고 잎 뒷면이 희며, 잎 형태가 새의 날개 모형이면서 평평하고, 줄기가 부드럽고, 흰색을 띠고 있다.

 

 

 

사자발쑥은 강화 자생약쑥 중 가장 품질이 우수한 약쑥으로 키가 70cm 내외로 자라며 줄기가 다소 굵고 곧게 자란다. 잎 모양은 사자발바닥 모양으로 단순하게 갈라져 있고 잎 끝이 뾰족하면서 약간 위로 오므라진 형태이다.

 

강화약쑥의 성분을 보면 항암성분인 유파틸린, 항위궤양성분인 세오시딘을 포함 아밀라제, 콜린, 아르테모즈, 유칼립톨과 정유성분 65, 비타민, 단백질, 칼슘, 마그네슘, 철분, 칼륨, 인 등 사람 몸에 유익한 다양한 것들이 들어 있다.

 

강화약쑥의 성분을 보면 항암성분인 유파틸린, 항위궤양성분인 세오시딘을 포함 아밀라제, 콜린, 아르테모즈, 유칼립톨과 정유성분 65, 비타민, 단백질, 칼슘, 마그네슘, 철분, 칼륨, 인 등 사람 몸에 유익한 다양한 것들이 들어 있다.

 

약쑥의 다양한 사용방법이 강화농업기술센터 누리집에 나와있다. 그중 쉽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차를 만들어 마실 수 있는데, 말린 쑥 한 주먹 정도를 주전자에 넣고, 600800밀리리터 정도를 붓고, 얇게 썬 생강을 23조각 넣어 끓인다. 20분 정도 끓이되 끓기 시작하면 약불로 다린다. 이를 하루 100밀리리터씩 3번 마신다. 다만, 쑥차를 끓일 때 쇠로 된 주전자는 쑥의 타닌 성분과 반응하여 문제가 생길 수 있어서 피한다.

 

 

 

쑥술을 만들어 마실 수도 있다. 1.8리터의 주둥이가 큰 병을 준비하고, 말린 쑥을 믹서기로 갈아 가제 자루에 담아 병에 넣고 소주를 부어 2달 정도 놓아두면 쑥술이 된다. 쑥의 양은 병의 1/31/4 정도가 적당하며, 쑥술은 매일 저녁 20밀리리터 정도 마시면 좋다고 한다.

 

 

 

또 약쑥은 베개나 방석 및 이불에 쓸 수 있으며, 목욕할 때 건조쑥 3050그램을 가제 수건에 싸서 온수에 담갔다가 넣으면 좋다. 쑥을 자루에 넣어서 욕조에 넣을 때는 건조쑥 100200그램 정도를 섭씨 40도의 따뜻한 물에 30분쯤 미리 담갔다가 쓰면 된다. 목욕이 끝난 후 말려 다시 써도 좋다.

 

강화군의 우수한 농특산품인 강화사자발쑥을 주원료로 한 다양한 건강식품과 건강상품들이 판매되고 있다.

 

최초 발견자 김국현씨의 며느리 서영임씨는 사자발쑥 생산단지 2.5헥타르, 공동증식포 1000제곱미터, 공동건조저장고 330제곱미터를 바탕으로 사자발뜸쑥, 사자발쑥 추출액을 생산, 판매하고 있다. 발쑥뜸기, 좌욕쑥뜸기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더불어 공급한다.

 

또 강화에는 강화농업기술센터의 지도로 여러 농가가 뜸쑥과 추출액은 물론 사자발쑥을 이용한 쑥환, 뜸봉, 비누, 화장지, 화장품 따위를 생산 판매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쑥 냉면, 쑥 칼국수, 쑥 만두, 쑥 수제비를 생산하는 업체도 있다. 이에 따라 농가소득도 크게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이 사자발쑥이 널리 알려진 계기는 쑥담배를 개발한 공로로 2002년부터 3년 연속 '한국불교승단협의회'를 비롯한 137개 종단의 연합 추천의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고운맘 스님이 적극적으로 나선 데 있다. 스님은 사발발약쑥이 처음 발견된 곳에 기념비를 세울 계획을 하고 있다.

 

 

 

이 강화에서 생산되는 사자발 약쑥은 단순한 분석의 가치를 초월하는 우리 겨레의 생명자원은 아닐까? 더구나 인류 건강에 이바지할 수 있는 소중한 강화만의 특산물이다. 사자발 약쑥을 활용하여 곰이 아닌 사자의 건강을 이어받으면 좋을 일이다.

 

 

 

7). 14:00 까지 강의 휴식

 

 

 

8). 강화 지석묘 도착 (14:10)

 

 

 

.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 유적비

 

 

 

) 고구려 명장 연개소문

 

강화삼다(江華三多)라는 말이 있다. 예부터 강화도에는 세 가지가 유명하다고 전해지 는데 바로 역사가 깊고 인물이 많고 글(文章)이 뛰어나다는 뜻이다. 역사라면 고조 선시대부터 고구려,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강화도가 빠질 수 없다. 각 시대에

 

걸친 유적, 유물들이 많이 산재해 있는 고장이기에 우리 역사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곳이다. 또한 이곳은 뛰어난 인물이 많았기로도 유명하다. 사람들은 이것을

 

강화도에는 마니산이 있어 영험하고 고려산이 있어 기개가 높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고구려의 대막리지였던 연개소문이 바로 이곳 강화도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_. 연개소문은 고려산 북편 시루미산에서 출생하였는데 "나는 물 속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설화를 담고 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 상고사)에서 "연개소문(淵蓋蘇文)이야 말로 고구려의 걸출한 민족 영웅으로, 중국에서 가장 영걸한 임금으로 손꼽히는 당태종(唐太宗:재위627-649) 이세민(李世民)도 연개소문만큼은 두려워했다" 고 적고 있으며, 지금은 실전되어 볼 수 없으나 해상잡록(海上雜錄)을 인용하여 고구려의 걸출한 두 명의 위인인 재상 명림답부(明臨答夫)와 연개소문이 조의선인 출신이기에 뛰어나다고 하였다.

 

 

 

. 연개소문 유적비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 유적비 개국의 성역이자 선사시대의 유적지인 이곳 강화는 천하통일의 큰 뜻을 품었던 고구려의 명장 연개소문의 연고지이다. 향토사 강도지에 따르면 그는 강화도 고려산 기슭에서 태어나 치마대와 오정(五井)에서 무예를 갈고 닦았으며 위엄어린 얼굴에 당당한 풍채는 뭇 사람을 압도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그가 출생하였다는 옛 터와 자취가 남아있다. 조선 상고사에 의하면 당을 정벌하고 한 민족의 얼을 드높일 것을 주장한 연개소문은 큰 꿈의 나래를 펼치고자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어 나라 정치를 바로 잡았다.

 

 

 

그때 당태종은 연개소문의 집권을 응징한다는 구실로 쳐들어오자 고구려는 군()과 민()이 하나가 되어 요수(遼水)와 안시성(安市城)에서 크게 싸워 당()의 함선 4백여척과 30만 대군을 쳐부수었다. 특히 안시성 싸움에서 당태종은 눈에 화살을 맞고 도망쳤다. 연개소문은 승전의 기세를 몰아 당나라 내륙으로 깊숙히 밀고 들어가 화북(華北)지방을 정벌하고 빛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영걸(英傑)이었다.

 

 

 

앞의 사실을 영원히 기리기 위하여 숭조회 초의로 비석을 세우다. 서기 1993년 초여름, 이호경 짓고 유달영, 이항녕, 감수, 정규은 쓰다. 연개소문은 이곳 강화도에서 천하패업(天下覇業)의 뜻을 품었다고 한다. 연개소문의 집터는 현재 고려산 서남쪽 봉우리인 시루봉의 중턱에 있다. 집터는 고려산 바로 아래에 위치한 삼거리 저수지에서 왼쪽 산길로 약 5백여미터를 지나면 바로 나온다. 세월의 풍상(風霜)을 이겨온 주춧돌이 곳곳에 널려 있지만 학계에서 아직 정확한 고증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집터가 위치한 곳의 전망이나 고려산에 이어지는 능선으로 보아 충분한 지형조건을 갖춘 곳이다. 연개소문은 이곳에서 말을 타고 고려산 오정을 올라 치마대의 능선을 달리면서 광활한 만주대륙과 중원의 제패를 꿈꾸었을 것이다.

 

 

 

서해바다의 세찬 바다바람을 이겨내고 고려산 정상에 다다르면 바로 다섯개의 우물이 나온다. 이 오정은 삼별초의 굽힘없는 저항에 혼이 난 초원의 몽골인들이 고려와 원나라가 강화를 맺은 다음에 쇳물을 부어 물줄기를 막았다는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몽골인들은 아마 고려산에서 태어나 당태종을 손안에 가지고 놀았던 연개소문의 기개가 두려워 이 산의 정기를 끊어 위대한 장수가 태어나는 것을 막고자 했을 것이다. 치마대는 능선이라 아직 건재하다. 연개소문은 집터에서 고려산 정상으로 단숨에 올라 치마대를 달리면서 무술을 익히고 군사전략과 웅지를 키웠으리라. 서해바다의 광활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대륙을 경영하는 포부를 키웠으리라

 

 

 

.연개소문 (淵蓋蘇文)

 

연개소문(淵蓋蘇文/?~665) 고구려 말기의 대막리지(大莫離支), 장군. 일명 천개소문(泉 蓋蘇文). 동부대인(東部大人) 태조(太祚)의 아들. 개금(蓋金)이라고도 한다. 15세에 부친 의 직책을 계승하여 동부대인 대대로(大對盧)가 되었으며, 642년 당나라의 침입에 대비 하고자 북쪽 1,000리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였다.

 

같은 해, 자신을 제거하려는 대인(大人)들의 기미가 보이자 주연을 베풀어 대신과 대 인 18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을 시해(弑害), 보장왕을 옹립하고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 어 정권을 장악,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러 온 신라의 김춘추(金春秋)를 감금하고 신라 와 당나라의 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점령하였다.

 

 

 

644(보장왕 3) 신라와의 화해를 권고하는 당 태종(唐太宗)의 요구를 물리치고 그 사 신 장 엄(蔣儼)을 구속하는 등 강경책을 쓰자 이에 격노한 당 태종이 645(보장왕 4)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그는 고구려군을 지휘하여 개모성(蓋牟城), 요동성 (遼東城), 백암성(白巖城) 등에서 적에게 큰 타격을 가하고 마침내 안시성(安市城)의 혈 전(血戰)에서 60여 일 간의 공방전 끝에 당군을 격퇴하였다.

 

 

 

그 후에도 4차례나 당나라의 침입을 받았으나 이를 모두 막아냈다. 한편 이보다 앞선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도교(道敎)의 도사(道士) 8명과 도덕경(道德 經)을 들여오는 등 업적을 남겼다.

 

 

 

 

 

 

 

. 고인돌 설명.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한다. 한국 선사시대 여러 유적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분포관계를 보면, 주변지역인 중국에서는 산둥 반도와 랴오닝 지역의 남부 저장 성 부근에서 가끔 보이며, 일본은 규슈 지역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이들 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수만 기()에 해당하는 많은 고인돌이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에 퍼져 있다. 주로 강을 낀 낮은 구릉지대에 분포하며, 주변의 자연지세에 걸맞는 골짜기 방향이나 강·해안선을 따라서 만들어졌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이어오는 자연숭배 사상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강 옆의 들판이나 바닷가 부근에 있는 것은 물과 깊은 관련이 있고, 수적으로 많이 분포하는 평안·황해·전라지역은 서해안이라는 점에서 바다와 고인돌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목된다. 기능면에서 볼 때, 당시의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던 어떤 대상이나 자연의 힘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의 의식을 거행하던 '제단고인돌'과 죽은 사람을 묻기 위하여 만들었던 '무덤고인돌'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무덤고인돌이다. 무덤고인돌의 형식을 보면, 먼저 밖으로 드러난 모습인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굄돌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며, 덮개돌 밑에 있는 무덤방의 짜임새는 만든 방법과 재료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탁자식고인돌(북방식·전형)4개의 판판한 돌을 세워서 지표 위에 네모꼴의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았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덮개돌의 하중을 받고 있는 긴 벽은 그대로 있지만, 고인돌을 만든 다음 나들이문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되는 짧은 벽은 거의 파괴되어 없어진 상태이다. 이러한 형식은 황해·평안도의 서북지역에 많이 있고 전라남도 나주, 경상남도 거창에서도 드물게 나타난다. 바둑판고인돌(남방식·기반식)은 땅 위에 놓인 3~4개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것으로, 땅 속에 있는 무덤방은 구덩이·돌널·돌덧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구덩식고인돌(무지석식·개석식)은 땅 위에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그리고 많이 분포하고 있어 고인돌의 기원을 밝히는 데 중요하며, 전북 고창지방에 있는 것은 덮개돌이 무려 170t 가량 된다.

 

 

 

고인돌은 상당히 일찍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옛 기록으로는 BC 78전한서 前漢書에 처음 나타나며, 우리나라에서는 1200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에 금마군(지금의 익산군)의 고인돌이 소개되었다. 광복 이후 발굴된 여러 유적 가운데 고인돌의 수가 가장 많다. 제천 황석리와 양평리, 달성 진천동 유적에서는 사람뼈가 나왔다. 껴묻거리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의 토기가 있는데, 간혹 늦은 시기의 빗살무늬토기도 나온다. 석기는 대부분 간돌검[磨製石劍돌촉[石鏃] 등이다. 가끔 청동유물을 찾을 수 있는데, 최근 여천 적량동유적에서는 한 유적에서 여러 점의 비파형동검이 나와 주목된다. 드물게, 꾸미개인 곱은옥[曲玉]과 대롱옥[管玉]이 나오고 사슴이나 소과[牛科]의 동물, 돼지 등 짐승뼈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고인돌을 만들 때 치렀던 제의나 묻힌 사람의 영생을 바라는 내세에 대한 믿음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고인돌사회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X'자가 새겨진 자갈돌이 옥천 안터유적과 화순 대전유적에서 나왔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값이 나온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발굴조사에서 찾은 껴묻거리를 통하여 대강 연대를 살펴보면, 양평 양수리의 연대측정값이 3,900±200BP로 드러났고 안터고인돌에서는 늦은 시기의 빗살무늬토기가 나왔으며, 담양 문학리, 충주 하천리, 제천 함암리 고인돌에서는 이른 철기시대의 토기와 쇠똥[鐵滓]을 찾았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늦은 신석기시대부터 조금씩 만들어지다가 청동기시대에 널리 퍼졌고 이른 철기시대까지도 지역에 따라 가끔 만들었던 것 같다.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는 고인돌의 기원에 관해서는 바다를 통해 동남아시아 또는 중국 동북부지역에서 전해졌다는 전파설과 함께 주변지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다는 점과 축조연대가 이르다는 점에서 주변지역과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자생설이 맞서고 있어 아직까지 뚜렷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커다란 덮개돌을 옮겨 고인돌을 만드는 데는 훌륭한 기술과 많은 사람들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기술과 노동력은 선사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지금까지 밝혀낸 당시의 여러 생활상으로 보아 고인돌을 만들 때는 사회적·경제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공동체의식 속에서 마을 전체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

 

 

 

. 분과별 사진 촬영.

 

 

 

. 고인돌 출발 (14:25)

 

 

 

9) 고려 궁지 도착.

 

. 사적 제133호 고려가 몽고 침략에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다.

 

1232년 고려 고종은 천연의 요새인 강화에 도웁을 옮겼다 관아와

 

궁궐이 완성된것은 1234년이다

 

 

 

. 고려 고종 19년에 몽골군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왕도가 강화로 옮겨졌다.

 

이후고려왕실은 원종 11년에 화의를 맺고 개성으로 환도한다. 이처럼 고려궁지는

 

몽고의 침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로 12326월 고려 고종 당시

 

항몽의 기치를 들고 강화에 도읍을 옮긴 후 2년 뒤인1234년에 관아와 궁궐의 규모가

 

완성되었다. 당시 불교문화의 정수인 팔만대장경이 이 곳 강화에서 만들어졌고, 금속

 

활자도 개발되었는데, 12705월 몽고와의 강화가 성립되어 개성으로 환도하면서

 

성과 궁궐이 무너졌다.조선시대에는 행궁이 있었고 1637년 병자호란시에는 강화성이

 

청나라 군대에 함락되어 치욕을 당하였다. 그 후 고려궁터에는 강화유수부의 건물들이

 

들어섰고,

 

현재 동헌과 이방청이 남아있다. 동헌은 강화유수부의 건물로서 1638년 인조 16년에

 

건립되었다. 이방청은 1654년 효종 5년 강화부에서 건립한 관아로서, 1783년 정조 때

 

에 개수한 ㄷ자형의 건물로 크기는 79평 정도이다. 현재의 고려궁터는 1977년에 보수

 

정화한 것이다.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고려의 궁궐터.

 

사적 제133.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1232(고종 19)부터 1270(원종 11)까지 39년간 사용했다. 고려사절요 高麗史節要에 의하면 최우가 12326월 이령군(二領軍)을 동원하여 건립했다고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1234년 본격적인 궁궐과 백사(百司)의 건립이 이루어졌다.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었고 궁궐의 뒷산도 송악(松岳)이라 했다. 고려궁의 정문은 승평문(昇平門)으로 양쪽에 3층루의 문이 2개 있었고, 궁내에 많은 관아·전각·창고·문이 있었으나 1270년 송도환도 때 모두 허물어졌다. 1631년 행궁(行宮)을 고려 옛 궁터에 건립하면서 장녕전(長寧殿)을 지어 조선 태조와 세조의 영정을 모셨고, 강화유수부 건물들과 규장외각을 건립해 많은 장서와 문서를 보관했다. 그러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책과 서류를 약탈해갔으며 많은 건물이 불탔다. 지금 고려궁지에는 1638(인조 16) 건립된 현윤관(顯允館)이 남아 있는데 1769년 중수하면서 '명위헌'이란 현판을 붙였다. 1977년 고려궁지를 보수하면서 담을 설치하고 고려궁지 진입로 옆에 있던 강화동종을 옮기고 경역에 보도를 설치해 경내를 조성했다.

 

 

 

 

 

. 고려궁터

 

강화읍 관청리, 강화산성의 북문으로 가는 도중에 고려 고종19(1232)부터 원종11(1270)까지 39년간 몽골의 난을 피하여 머물렀던 고려궁터가 있다.

 

규모는 작으나 송도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었고, 도성(都城)도 지금은 강화읍성으로 불리는 내성만 남았지만 당시에는 중성과 외성까지 쌓아서 삼중으로 요새를 만들어 장기 저항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39년이라는 긴 항전 끝에 강토는 황폐해지고 백성은 기진맥진하여 헤어날 길이 없으므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몽골의 요구대로 스스로 성을 허물고 나와 항복한 후에 개경으로 환도하고 말았다.

 

그 후 빈터로 남아 있던 고려궁터에 조선 인조 때 행궁(行宮)을 건립하고 강화유수부, 규장외각(奎章外閣)등을 세웠으나 병자호란 때 함락되었으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완전 소실되는 등 수난의 역사가 거듭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동헌(東軒)과 이방청(吏房廳)은 조선시대 강화유수부 건물이고 고려궁과는 무관한 건물들이다. 정면 8,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인 동헌에는 영조 때 명필 백하 윤순(白下 尹淳)이 쓴 명위헌(明威軒)이라는 현판이 걸여 있다.

 

이방청은 12칸 대청에 8칸의 온돌 방을 갖춘 큰 건물로서 이,,,,,(吏戶禮工兵刑) 6방 중의 하나인 이방이 사무를 보던 곳이다. 1654년에 강화유수 정세규가 건립한 후 여러 번 개수, 중수 되어 왔으며 동헌과 함께 병인양요 때 소실되지 않고 남아 있는 단 두 채의 건물이다.

 

동헌에서 이방청으로 가는 정원 한편에 프랑스군이 약탈해 가려다 실패한 강화동종이 종각 안에 걸려 있는데 한국종의 특징인 음통이 없고, 종 아래부분에도 당좌가 없이 숙종37(1711)에 만들어 졌다는 명문만 새겨져 있다. 꾸밈이 없이 간결한 조선시대의 문화적 특징을 지닌 종으로서 보물 제11호이다.

 

고려궁터에서 가장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외규장각이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귀중한 소장품들을 약탈 당하고 건물까지도 소실된 것을 최근에 복원하여 빈 건물만 제자리도 아닌 담장 밖에 쓸쓸히 서 있다.

 

임진왜란 때 각지에 있던 사고(史庫)들이 불타버리자 국가의 중요한 서적들을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강화에 보관하기 시작했으며, 궁궐도서관으로 규정각을 세웠던 정조가 이곳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짖고, 강화 안에 분산되어 있던 서책들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을 비롯하여 어필(御筆), 어제(御製), 의궤(儀軌), 옥인(玉印), 옥첵(玉冊), 금보(金寶)등을 서울 궁성으로부터 옮겨 보관했다.

 

그러나 왕실보관소로서 귀중한 자료와 보물들로 가득했던 외규장각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서적 340책을 비롯한 옥책, 은괴 19상자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물을 약탈 당하고 나머지는 거의 다 소실되었다.

 

지금도 한,불관계에 있어서 주요 현안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문화재 반환문제이다. 찾아오기가 그리 쉽지 않으리라고는 하지만 도적 질 해 간 우리 문화재가 명백한 이상 조속히 환수되어야 할 것이다.

 

고려궁터를 벗어나서 100m즘 걸어 나오면 큰길 왼편에 선원 김상용(仙源 金尙容)선생의 순의비(殉義碑)가 서 있다. 원래는 강화성 남문에 세웠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운 것이다.

 

병조, 예조, 이조판서와 우의정까지 역임했던 김상용선생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묘사(廟社)를 받들고 왕자, 비빈과 함께 강화에 내려와 있었으나 이듬해 1월 강화성이 함락되자 강화성 남문에서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하였다.

 

청군에게 투항하지 않고 순국한 절의(節義)를 기려 세운 비석이다.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인 청음 김상헌(淸陰 金尙憲)의 형이기도 한 선생은 병자호란 때 절의의 상징으로 추앙 받고 있는 인물이다.

 

김상용순의비가 있는 코너에서 골목으로 좀 들어가면 높은 언덕 위에 축대를 쌓고 절 집처럼 세운 성당이 있다. 영국에서 한국 초대 성공회 주교로 서품 받은 코프씨가 1900년에 세운 성당이다.

 

 

 

대한성공회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이요, 1898년에 세워진 천주교의 명동성당 보다는 2년 늦게 세워진 건물이다. 전통적인 한옥구조에 기독교식 건축양식을 수용해 지은 것으로 동서양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축대 위에 담장을 두르고 태극무듸도 선명한 솟을대문의 외삼문, 내삼문이 정연하며, 문안에 들어서면 범종과 종각이 있고, 전면 기둥에는 주련마저 걸려 있어서 대문 앞에 서면 어느 사당 인 듯 하고, 삼문 안에 들어서면 어느 절에 온 듯 한 느낌을 받는다.

 

외부는 이층이고 내부로는 단층이어서 절의 대웅전 양식이고, 용마루에 세워진 십자가와 천주성전(天主聖殿)이라는 현판만 아니면 우리나라 절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정면4, 측면 10칸으로 한옥처럼 앞이 넓은 게 아니라 종으로 길이가 길은 점과, 내부에 들어가면 측면 10칸 중 8칸은 예배실이고 나머지 두 칸은 성의실 등으로 구성된 것 등 서양의 기독교 교회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더욱이 눈길을 끄는 것은 높이 1m즘 되는 큰 돌을 파내서 만든 영세대(領洗臺)이다. 예배당 중앙에 위치한 영세대 전면에는 한자로 수기(修己), 세심(洗心), 거악(去惡), 작선(作善) 여덟

 

자가 새겨져 있다.

 

 

 

성당의 건축양식과 영세대를 비롯한 여기 저기 걸려 있는 당시의 표어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기존 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거부반응을 줄이고, 토착신앙에 접목하려 했던 코프주교의 고심한 흔적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성공회 강화성당에서 나와서 큰길로 좀 내려가다가 다시 골목길로 들어서면 강화도령 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살던 집인 용흥궁(龍興宮)이 있다. 사도세자의 증손자인 원범(元範)이 열 아홉 살까지 살던 집터에 세운 건물이다.

 

 

 

증조할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는 뒤주 속에 갇혀 죽었고, 할아버지 은언군(恩彦君)과 큰 아버지 상계군(常溪君)은 역모에 몰려 죽었으며, 아버지 전계군(全溪君)과 형 원경(元慶)도 그 후의 또 다른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되었으니 원범의 14세 때의 일이다.

 

 

 

할머니, 큰 어머니도 그 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천주교 교인이라 하여 죽임을 당했으니 어려 서부터 왕족이란 이유 때문에 부모, 형제, 친척들이 죽임을 당하는 참상을 수 없이 목격한 그였다.

 

 

 

신분을 숨기고 농사 지으며 살던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헌종이 아들 없이 죽자 6촌 이내의 왕족은 하나도 없었고, 7촌 아저씨였던 그가 제일 가까운 친척이기도 했으며, 그와 같은 항렬의 흥선대원군 형제들도 있었지만 당시 세도가문인 안동김씨의 정략이었다고도 한다.

 

 

 

그가 왕위에 오르자 일찍이 살던 오막살이 집터에 당시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가 내전과 외전, 별전을 각각 한 채씩 짖고 잠저구기비(潛邸舊基碑)와 비각을 세웠다.

 

 

 

그 철종도 또한 아들이 없이 죽어서 8촌 동생인 고종이 왕위에 올랐으니, 비빈과 궁녀가 그렇게 많았는데도 왕족의 씨가 마른 것을 보면 인간의 한계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10). . 돈대. 첨화비. 대원군 프랑스 싸워서 이겼다.

 

 

 

11). 전쟁사.

 

 

 

12) 철종과 양순이 이야기.

 

조선 25대왕 철종, 33세로 단명한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자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의 손자입니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사람 뿐이었습니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영의정 정원용의 건의와 순원왕후의 명으로 강화도에서 농사꾼으로 살고 있는 이원범을 데려와 조선 25대왕 철종으로 앉혔죠. 이원범은 형 화평군의 옥사로 가족과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어 살다보니 자연히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사꾼이 되었습니다. 당시 19세였으며 이런환경의 원범이 갑자기 환경이 변하여 왕이되고보니 정치는 안동김씨인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되고 1851년에는 안동김씨 김문근의 딸을 왕비로 맞았으며 이때부터 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손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었으며 문란한 정치로 탐관오리가 횡행하며 백성들의 생활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철종은 1863년 재위 14년만에 33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그는 모두 8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자식들도 유난히 단명하여 아들과 딸 모두가 일찍 죽었다.

 

 

 

강화도령 원범이는 조선 24대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으로 추대되어 강화를 떠났는데 훗날 철종으로 불리게 된다.

 

 

원범은 14살에 강화로 부친과 함께 유배되어 왔다. 강화도령은 천주교 박해에 희생으로 부모님을 모두 잃고 홀로 19살까지 강화도에서 숨어살고 있었다. 그때 위로를 해주고 삶의 희망을 심어준 아가씨가 양순이다. 이들은 강화읍 내수골 도령네 집에서 멀리 떨어진 찬우물에서 사랑을 확인하곤 했단다.

 

 

 

그러나 나뭇꾼 강화도령과 양순이는 못내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헤어져야만 했단다. 임금으로 등극한 강화도령은 찬우물 사랑을 잊지 못해 강화도가 좋았다는 말을 틈만 있으면 했다고 전하며 양순이는 임금 되신 도령과의 사랑을 정절로 지키며 홀로 일생을 살았다고 전한다.

 

.찬우물은 언제부터 나오는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강화읍권을 비롯하여 서울에서 까지 매주 물을 길러 오시는 분들이 줄을 잇고 있다. 꼭지가 없으니 물을 잠글수도 없고 일년내내 가믐을 안타니 멈추지도 않는다. 항상 물통이 줄을 잇고 있어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오는 것이 좋다. 그리 높지도 않은 산에서 어찌 그리 물을 많이 머금고 있는지 물을 마실 때마다 앞산을 쳐다보게 된다. 물맛 또한 어디에서 맛보랴!

 

찬우물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선원면 냉정리 철종 외가가 있다.

 

13). 강화 관광 이야기.

 

 

 

14) 강화 산성 도착 (14:38)

 

. 산성 탐방.

 

강화읍은 고려시대 몽골이 침입했을 때 잠시 도읍을 옮겼던 곳으로 이와 관련한

 

유적들이 많다. 강화산성 역시 그같은 문화유산으로 고려시대에 쌓은 산성이다.

 

강화산성은 고려 고종 19(1232)에 몽골의 제2차 침입에 대항하고자 착공되었다.

 

공사가 완공되기도 전에 강화도로 천도하는 사태가 발생했고 1234년부터 본격적으로

 

축성되었다. 고려의 성은 내, , 중성이 있었는데 내성은 현재의 강화성으로

 

둘레가 7,122m이고 중성은 둘레가 5,381m1250년에 축성하였다. 외성은 1233년에

 

축조되기 시작했다. 이 성들은 모두 토성이었으나 1677년에 강화

 

유수 허질이 대대적인 개축을 하면서 석성으로 쌓았다. 1709년에 강화유수

 

박권이 다시 개축했고 조선 후기에 보수가 이어졌다.

 

강화산성에는 안파루(), 첨화루(), 망한루(), 진송루()4대문과 암문,

 

수문, 장대 등의 방어시설이 있다.

 

강화산성은 구한말에 병인양요, 신미양요와 강화도조약 체결 등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사적 제132.

 

 

 

. 강화산성[江華山城]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과 내가면, 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

 

고려가 몽고의 침입으로 인해 강화도로 천도할 당시 궁궐과 함께 축조되었다

 

원래 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3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성이 규모있게 궁궐의 내성으로 축조된 것은 1234(고종 28) 1월부터였고, 당시의 성은 토석혼축(土石混築)이었다. 그리고 이 내성을 방어하기 위한 중성이 축조된 것은 1250(고종 37)으로, 둘레가 약 7에 달하는 토성이었다. 또 중성을 둘러싸는 외성은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1235년에 전국 주(()에서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인 결과 동쪽 육지를 바라보는 선을 따라 37,070척에 달하는 성이 1237년에 일차 완성되었다.

 

고려시대의 강화 내성에는 고려 궁궐과 관청이 들어서 있었는데, 그 규모나 배치를 모두 송도(松都 : 지금의 개성)의 것을 옮겨놓은 듯이 비슷하게 하여 왕족과 귀족들은 송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생활을 영위했다. 궁궐의 정문은 정남향의 승평문(昇平門)이었다. 한편 중성에는 모두 8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송도의 것을 그대로 본떠 동에 선인문(宣仁門), 서에 선기문(宣祺門), 남에 태안문(泰安門), 북에 북창문(北昌門)을 두었고, 동남에 장패문(長覇門), 서남에 광덕문(光德門), 서북에 선의문(宣義門), 동북에 창희문(彰熙門)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의 강화가 성립되어가던 1259(고종 46) 몽고의 요구로 내성이 헐리게 되었고, 외성도 허물었다. 그리고 고려정부가 완전히 송도로 환도하는 1270(원종 11)에는 궁궐도 헐리어 현재는 궁궐터마저 불완전하게 남아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1627(인조 5)에 정묘호란이 있자 인조가 잠시 피난했으며,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봉림대군을 비롯한 빈궁(嬪宮)들과 신하들이 피난했으나 청군에 의해 강화성이 함락되면서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 외침이 잦자 조선정부는 이후 수차에 걸쳐 강화성을 개축하여 화강암의 석성으로 바꾸고 여장(女墻 :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도 설치했다. 이렇게 하여 강화성은 4개의 성문과 4개의 암문(暗門), ··서쪽의 장대(將臺)2개의 수문(水門)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현재 북악과 남산을 연결하는 지역에 남아 있는 성벽의 일부와 성문은 거의가 조선시대에 축조되어 1970년대에 보수된 것이다. 동문은 망한루(望漢樓)인데 지금은 없어졌다. 그리고 서문은 첨화루(瞻華樓)1711(숙종 37)에 건립되어 그동안 퇴락되었다가 1977년에 개축되었다. 남문은 안파루(晏波樓)1711년에 건립되었으나 1955년 홍수 때 무너진 것을 1975년에 복원한 것이다. 북문은 1783년에 건립하여 진송루(鎭松樓)라 했으나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했다. 조선시대에는 성내에 많은 관아(官衙)가 들어서 있었으나 1866(고종 3) 병인양요 당시 많은 건물이 소실되어 현재는 고려 궁터에 동헌(東軒)과 이방청(吏房廳) 등이 복원되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서문 근방에 일본의 강압에 의해 강화도조약이 조인되었던 연무당(鍊武堂)터가 있다

 

 

 

15) 강화산성 출발 (14:48)

 

. 강화 동...북문 이야기.

 

용이 그려저있으면 동쪽. 호랑이 그려져있으면 서쪽.

 

인삼 밭 덥게 높은곳 남쪽 낯은곳 북쪽.

 

 

 

. 문화행사.

 

10월초 외포리항서 새우젖 축제.

 

10월초에 고인돌 축제.

 

4월 말경 고려산 진달래 축제등이 있다.

 

 

 

. 역사관 앞 도착 (15:00)

 

 

 

16) 손돌목 이야기

 

. 조선시대 인조로 추정되는 왕이, 강화도로 피신하게 되어 배를 타게 되었다.

 

손돌은 경험이 많은 뱃사공으로 왕의 배를 젓게 되었느데, 왕이 앞을 내다보니, 손돌은 위험하게 보이는 여울 쪽으로 노를 젓는 것이었다. 두려운 생각이 든 왕이 "여울물 쪽으로 가지 말라."고 하였지만, 손돌은 계속하여 위험한 여울 쪽으로 노를 저어갔다.

 

왕이 손돌을 의심하여 손돌을 죽이라고 명령하자, 손돌은 "여울은 위험해 보이지만 그 길이 강화도로 가는 안전한 길"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왕은 믿지 않았다. 손돌은 체념한 뒤 바가지 한 개를 올리면서 "만약, 배를 저어가다 뱃길을 잃게 되면, 이 바가지를 배 앞에 던져 이 바가지를 쫓아가십시오." 라고 마지막 말을 한 뒤 처형되었다.

 

손돌이 처형되자, 초겨울의 북서풍이 세차게 불고, 배를 가눌 수 없게 되어 침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손돌이 남긴 바가지를 배 앞에 던지니 바가지는 배 앞에서 떠가는 것이었다. 왕이 탄 배는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 뱃길을 잡아 강화도에 도착하였고, 왕은 손돌의 사당과 비석을 세웠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20일경에는 북서풍이 거세게 불어오는데 이를 손돌풍 이라 하며, 매년 음력 1020일에 손돌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손돌이 죽은 곳을 손돌목 이라고 한다. 광성보에 들어가면 손돌목돈대가 있다. 손돌목돈대 동쪽 아래에 있는 용두돈대로 가면, 용두돈대 앞의 염하가 손돌목이다. 손돌묘는 용두돈대 건너편의 덕포진에 있다.

 

다 사라져가는 풍습

 

1020일에 관례적으로 불어오는 심한 바람을 손돌풍 혹은 손석풍이라 한다. 이 손돌풍의 유래에 대해서는 그 배경설화인 '손돌풍 설화'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는데, 손돌목의 지명과도 관련이 있으므로 손돌목전설·손돌전설이라고도 하며, 이는 음력 1020일께 부는 차가운 바람신인 손돌신의 신화이며, 경기도 김포군과 강화군 사이에 있는 손돌목이라는 여울의 지명유래담이다. 손돌설화의 기본형은 손돌목·손돌무덤이 있는 강화·인천지방을 중심으로 전승되어 왔다. 손돌풍 설화의 전형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입으로 왕이 강화로 피난을 할 때 손돌이란 뱃사공이 왕과 그 일행을 배에 태워서 건너게 되었다. 손돌은 안전한 물길을 택하여 초지(草芝)의 여울로 배를 몰았다. 마음이 급한 왕은 손돌이 자신을 해치려고 배를 다른 곳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신하를 시켜 손돌의 목을 베도록 명하였다. 이때 손돌은 왕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 배에 있는 박을 물에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몽고군을 피하며 험한 물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 손돌이 죽이자 적이 뒤따라 오므로 왕과 그 일행은 손돌의 말대로 박을 띄워 무사히 강화로 피할 수 있었다. 왕은 손돌의 충성에 감복하여 그의 무덤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그 영혼을 위로하였다. 손돌이 억울하게 죽은 날이 1020일이었으므로, 그 뒤 이날이 되면 손돌의 원혼에 의해 매년 추운 바람이 불어오므로 이를 손돌풍이라 하고 이 여울목을 손돌목이라 하게 되었다.

 

손돌목은 강화도와 육지 사이의 좁은 곳으로 바닷물이 급류를 이루고 있어서 지금도 배가 지나가면 조심을 해야 하는 곳이다. 그래서 강화도 사람들은 손돌풍이 부는 날에는 배를 타지 않는다고 한다. 또 어부들은 이날 바다에 나가는 것을 삼가고, 평인들은 겨울옷을 마련하는 풍습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손돌풍에 관해서는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그 기록이 보이며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10월 조에는 "강화도로 가는 바다 가운데에 암초가 있는데, 그곳을 손돌목이라 한다. 그리고 방언에 산수가 험하고 막힌 곳을 목이라 한다.

 

일찍이 뱃사공 손돌이란 자가 있었는데, 1020일 이곳에서 억울하게 죽었으므로 그곳에서 이런 이름이 생긴 것이다. 지금도 이날이 되면 바람이 불고 추위가 매우 극렬하므로 뱃사공들은 경계를 하고, 집에 있는 사람도 털옷을 준비한다는 것이다."라 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기후로 봐서 이때가 되면 계절풍이 불고 따라서 몹시 추워지므로, 여기에 손돌의 원한에 대한 이야기가 붙어서 이러한 풍속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 2005121() 11:00 연합뉴스

 

<신문이 소개한 '손돌추위' 유래>

 

(연합뉴스) 함보현 기자 "바닷사람들은 음력 10월말에 오는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한다."

 

1일 북한 웹사이트 우리민족끼리에 따르면 주간 통일신보 최근호(11.26)"`동국세시기'에는 해마다 음력 1020일 큰 바람과 추위가 일게 되는데 이날의 추위를 손돌추위라고 한다고 씌어 있다"며 그 유래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손돌'은 고려시대 뱃사공으로 통진과 강화 사이 나룻가에서 원통하게 죽은 전설 속 인물.

 

그가 죽었다는 날이 바로 음력 1020일로, 이 무렵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추위는 손돌의 넋이 일으키는 것이라고 전해진다.

 

고려의 한 왕이 손돌의 배를 타고 강화도로 들어갈 때 일이었다.

 

왕은 행차를 재촉했지만 누구보다 바다를 잘 알았던 손돌은 "날씨가 몹시 나쁘기 때문에 바람이 좀 잠잠해진 다음 안전한 뱃길로 에돌아 천천히 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왕은 이를 무시한채 "시간이 바쁘니 즉시 떠나라, 뱃길도 돌지 말고 곧바로 잡아서 빨리 가자"고 거듭 명령했다. 손돌은 어쩔 수 없이 배를 곧바로 몰아 노를 저었지만 아니나다를까, 곧 폭풍이 몰려오고 물길도 몹시 사나워졌다. 그는 진땀을 흘리며 배를 몰아 위험한 물목을 빠져나온 뒤 목적지에 거의 도착했으며, 이때 폭풍도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런데 배가 몹시 흔들리는 바람에 왕의 옷이 흠뻑 젖고 상처도 여러 군데 입게됐다.

 

포악한 왕은 사공이 나쁜 물길로 배를 잘못 몰았다면서 부하들을 시켜 손돌의 목을 베었다.

 

신문은 "손돌이가 억울하게 죽은 사연은 마을사람들에게 알려졌다""그때부터 손돌이가 참형을 당한 물목을 손돌목이라 하고 그가 죽은 무렵 추위를 손돌추위라 했다"고 덧붙였다.

 

손돌추위에 얽힌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도 있다.

 

고려 21대 희종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자연도(紫燕島.지금의 용유도)로 뱃길을 재촉할 때 사공 손돌이 왕의 뱃길 행차를 맡았다는 것이다. 희종 일행이 음력 1020일 강화도 용두돈대 아래에 다다르자 손돌은 물살이 거칠고 막다른 곳으로 배를 저어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왕은 손돌을 역적으로 여겨 그 자리에서 베고 말았다. 손돌은 그러나 죽으면서도 "바다에 바가지를 띄워 바가지가 가는 길로 따라 가면 바다가 트일 것"이라고 일러줬다.

 

그의 말대로 이곳을 무사히 통과한 왕은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손돌을 묻어주고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지금도 손돌의 묘가 김포 대명리 덕포진에 있으며 손돌추위와 손돌바람(孫石風)이라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손돌이의 혼은.추위와 물결을 몰고 온다.

 

용두돈대 바로 밑을 흐르는 곳이 물이 빙빙 돌며 파도가 험하기로 '유명한 손돌목이다. 고려 21대 희종이 몽고란을 피하여 자연도(용유도)로 뱃길을 재촉할 때 뱃사공으로 이름이 알려진 손돌 사공을 선정하였다. 희종이 음력 1020일 이 곳 용두돈대 밑에 당도하니 물살이 쎄고 바다가 막힌 곳으로 자꾸 배를 저어가자 '당황한 왕은 사공 손돌이를 역적으로 ' 의심하여 목을·제거했다.

 

손돌은 죽으면서 왕에게 "바다에 바가지를 띄워서 바가지가 가는 데로 따라 가면 바다가 트일 것이다·" 고 일러주고 죽었다고 한다. 말대로 바가지를 띄워 이곳을 통과한 왕은 손돌을 죽인 것을 후회하고 손돌을 김포쪽 강가 야산에 묻어주고 제사를 올려 주게 하였다.

 

지금도 억울하게 희생된 그때의 무덤이 있으며 그곳을 "손돌목' 이라 하고 매년 음력 1020일 경이면 강추위가 오는데 이 추위를 "손돌추위" 라고 전해온다.

 

손돌목의 묘는 강화도 용두돈대와 마주보는 김포 대명리 덕포진 안에 있다. 덕포진은 김포에 위치하고 있기는 하지만 강화의 진에 예속되어 있던 진 이다.

 

 

 

. 손돌의 민담에서 나온 노산 이은상 선생의 시,()를 한 수 소개한다.

 

사공은 억울한 죽음을 죽으며

 

그나마도 선심을 발휘하며

 

나는 원통하게 죽거니와 바가지를 물에 띄우고

 

그 바가지 흘러 가는 것만 따라가면 왕은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원혼이 바람에 들어 이 바다에 떠돌면서

 

해마다 그 날이 오면 분하여 운다 하네

 

그 왕도 간지 오래니 잊어버리고 말려므나

 

손돌이 어진 사공 제 죽음 한 함이랴

 

고국정한(古國精限)을 풀어도 남겠구나

 

 

 

거세게 물구비치며 여울목의 물발 손에 익지 않은 물길이라 사공이 벌벌 떨기만 한다. 위험이 바싹바싹 다가온다.

 

옹은 손돌 사공이 남기고간 말이 생각난다. '빨리 저 바가지를 띄워 안전한 물길을 찾도록 하라" 시종은 재 빨리 바가지를 띄워 사공은 그뒤를 따라 배를 가도록 했다.

 

때는 음력으로 1020일이니 바다바람은 차갑기만 했다. 손돌이 죽어 바다에 버려지면서 지금껏 맑은 하늘엔 검은 먹구름이 덮히고 세찬 하네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거치른 파도는 미친 듯이 뱃전을 두둘겨 배는 나뭇잎 인냥 파도에 휩 쌓인다.

 

그러나 바가지에게 길을 트이게 한 배는 손돌의 혼이 담겨 있는 듯 거센 파도를 헤치고 무사히 여울목을 빠져나가 목적지인 강화도에 다다랐다. 인조왕은 이때에 비로소 손돌의 마음씨를 깨달아 그 죽음을 불쌍히 여기게 되었다.

 

이괄의 난리가 평정되어 대궐로 돌아간 왕은 곧바로 각 대신들을 소집하여 손돌의 죽음을 탄식하게 되었다. "짐은 강화에 난리를 피하였을 때 될 수 없는 예감에 얽혀 죽음을 낳게 했다.

 

그 사공 손돌을 나는 잊을 수가 없구나. 전혀 내가 살리지 못한 일이니 당시 돌아보니 가

 

아프기만 하니 강화섬에 사당을 세워 매년 그날을 지정하여 제사를 올려라. 손돌의 원혼을 위로토록 해라" 왕은 엄한 명령이 내려졌다.

 

그후 이상하게도 손돌의 제삿날이 되면 반드시 거센 바람이 불어 추워졌다. 바다는 험준하여 배 타려는 나그네들은 배질 하기 전에 사당에서 빌어 손돌의 원망하는 혼을 달래주어야만 했다.

 

사람들은 1020일에 거칠고 세찬 바람을 손돌의 탄식하는 숨소리라고 하며 이를 손돌이 바람이라 한다.

 

손돌이가 죽은 여울을 손돌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세월이지나 사당이며 비석은 자취를 감추었으나 해방후 복원하여 유서를 남기고 있으며, 아직도 손돌목, 손돌바람이라 불러 전하여 진다.

 

 

 

17) 초지진 도착 (15:15))

 

해상으로부터 친입하는 왜적을 막기위해 1656년 구축한 요새이며 병인양요.

 

신미양요. 알본 군함 운양호 침공등 근세 외침에 줄기차게 싸운 격전지다.

 

1971년에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으며, 면적은 4,233m2이다.

 

 

 

1656(효종 7) 강화유수(江華留守) 홍중보(洪重普)가 처음 설치하였다. 66(현종 7) 병마만호(兵馬萬戶)를 두었다가 1763(영조 39)에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는데 이 때의 병력은 병마첨절별사(兵馬僉節別使) 1, 군관 11, 사병 98, 돈군(墩軍) 18, 목자(牧子) 210, 진선(鎭船) 3척과 무기 다수가 있었다. 1866(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이 곳에서 프랑스 함대의 로즈 소장과 싸웠으며, 1871(고종 8)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로저스 중장이 이 곳에 침입하였을 때 필사의 방어전을 전개하다 함락된 바 있었고, 1875(고종 12)에는 일본 군함 운요호[雲揚號]와도 이 곳에서 교전하였다.

 

 

 

이 초지진은 모두 허물어져 돈()의 터와 성의 기초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73년 초지돈만 복원하였다. 돈에는 3곳의 포좌(砲座)가 있고 총좌(銃座)100여 곳 있다. 성은 높이 4m 정도에 장축이 100m쯤 되는 타원형의 돈이다. 돈 안에는 조선 말의 대포 1문이 포각 속에 전시되어 있는데, 포각은 정면 3, 측면 1칸의 맞배집 홍살로 되어 있으며, 대포의 길이는 2.32m, 입지름 40cm이다

 

 

 

덕진진

 

원래는 경기수영에 소속된 수군첨사(4)가 진장인 덕포진(德浦鎭)이었으나, 1666년 통진으로 이설하고 그 자리에는 별장을 두면서 강화유수부에 소속시켰다(수군육군 전환). 1677(숙종 3) 병마만호진(4)을 신설하고 이름을 덕진진이라 하였다. 덕진진에는 종4품의 병마만호 밑으로 군관, 이방, 병방 등의 향리(鄕吏)가 근무하였고, 군관 24토졸(土卒)63명 배치되어 있었으며, 1개 돈대(덕진돈대)가 소속되어 있었다.

 

 

2) 덕진진

 

덕진진은 고려시대 강화 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로 초지진과 광성보의 중간에 위치해 군작전상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덕진진포대는 덕포진포대와 더불어 해협의 관문을 지키는 강화 제일의 포대였다. 1866년 병인양요때 양헌수 부대가 야음을 틈타 이 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군을 격파했고, 1871년 신미양요때는 로저스가 이끄는 미 극동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덕진진의 성첩과 건물은 이때 모두 파괴되고 문루지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 문루를 다시 세우고 돈대를 복원하였다.

 

덕진진 내에는 바다를 향해 경고비가 있는데 이는 1867년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그 내용은 '타국선은 어떠한 경우라도 함부로 이 곳을 통과할 수 없다'는 뜻이다

 

 

 

공조루(控潮樓)

 

공조루는 강화외성에 설치되었던 7개 문루 중 하나로 덕진나루에서 덕진진으로 들어갈 때 이용했던 문루이다. 원래 문루만 있고 이름이 없어 영조때 편찬된 󰡔여지도서󰡕1783(정조 7)에 편찬된 󰡔강화부지󰡕에도 덕진문루라고 표기되었으나, 19세기 말 제작된 고지도에는 공조루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정조 이후 어느 시기엔가 공조루라는 편액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공조루조수를 제어하는 문루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남장포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포대. 강화 8개 포대 중의 하나로, 1871(고종 8) 신미양요가 끝난 뒤 강화도의 중요성이 재차 부각되면서 강화 방비의 일환으로 축조되었으며 덕진진(德津鎭)의 관할 하에 있었다. 자연적인 지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해상에서는 적에게 보이지 않는 반월형의 천연요새를 이루고 있다. 포좌(砲座) 15문이 설치되어 강화도에 축조된 포대 중 가장 큰 규모이며, 손돌목의 험한 물살 및 인근 포대들과(광성포대, 덕포포대) 어우러져 외적의 선박이 쉽사리 통과하지 못하였다. 남장포대에는 홍이포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다른 포대들과 마찬가지로 조수에 의해 훼손되었던 것을 1977년 강화도 전적지보수정화사업 때 복원되었다.

 

 

 

강화도에서 사용한 화포 무기

 

 

 

불랑기

 

불랑기(佛狼機)16세기 초 유럽에서 중국에 도입된 화포로, 그 명칭도 유럽을 뜻하는 프랑크(Frank)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 명종 때 제작된 불랑기 자포가 현존하고 있어 우리나라에는 16세기 중반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하나의 모포(母砲)에 여러 개의 자포(子砲)가 딸려 있어 미리 화약을 심어둔 자포를 이용해서 연속 발사가 가능했기 때문에 조선 후기에 대량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강화도 진무영소속의 13진보와 54개 돈대에 설치되었던 주력 무기였다.

 

해문방수비(海門防守碑)

 

병인양요가 발발한 직후인 1867년 덕진진 덕진돈대의 남단에 고정시켜 세운 비석으로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해문을 막고 지킬 것이니 다른 나라의 선박은 감히 지나지 말라 - 라고 새겨져 있어 외국 선박의 출입을 통제하였음을 볼 수 있다. 동시기에 세워진 척화비(斥和碑)와 더불어 대원군의 쇄국정책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비석이다.

 

복원 관련부분

 

현재 덕진진의 시설물 중 복원된 것은 1976년 강화전적지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으며 문루인 공조루(控潮樓), 남장포대, 덕진돈대 등 3곳이다. 정작 중요한 덕진진의 진사(鎭舍)와 그 부속건물은 복원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