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천연구,자료

근현대시기 인천지역의 거주공간과 지역체계

by 형과니 2023. 3. 21.

근현대시기 인천지역의 거주공간과 지역체계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2-22 11:17:44

 

근현대시기 인천지역의 거주공간과 지역체계

 

지역문화연구소 연구원 안 승 택

 

 

. 들어가며

 

 

1933년 일제하 인천부에서 발행한 仁川府史에는 1883년 개항 당시의 인천부-제물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개항과 동시에 곧 이전되기는 했지만, 당시의 인천부-현재의 인천부인 제물포에 대척되는 존재로서의-는 현재의 문학산기슭(부천군 관교리)에 있었으며, 인천부사의 청사도 그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인천부인 당시의 제물포는 아주 막막한 일개 한촌이었으며, 완만한 구릉 일대에는 잡초가 무성하였다. 각국의 거류지가 존재하게 될 저지 일대는 울창한 갈대들이 음울한 습지를 덮고 있었고, 가끔씩 월미도 동쪽 또는 만석동 해변의 어가(漁家)에서 가느다란 연기가 갈대풀들 사이로 피어오르고 절절한 애조의 아리랑 가락이 들리는 외에는 문자 그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쓸쓸하고 적막한[滿目蕭條] 무인(無人)의 산야(山野)였던 것이다. 인마(人馬)의 왕래, 선박의 출입 또한 전혀 없었으며, 단지 외로운 기러기 울음소리만이, 밀려왔다 쓸려 가는 파도소리에 공허히 메아리칠 뿐이었다(仁川府, 1933, p.116).

 

위의 인용은 개항과 식민지화 이후 일본들인에 의해 주도된 인천의 변화상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물론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항 당시 제물포의 풍경에 대한 묘사로서 큰 하자가 없고, 근대 이후 인천지역취락변천사를 개괄하는 이 강의의 출발점으로서도 적절해 보인다.

 

인천지역의 근대이후 취락변천을 개관하는 일은, 한편으로 이 '만목소조의 무인산야'로부터 국내 굴지의 대도시로 성장하는 인천의 눈부신 변화상을 쫓는 작업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 만목소조 무인산야의 한가운데에서 가느다란 연기를 피어 올리던 가옥들이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살고 있었는지, 그것들은 주변의 다른 가옥, 마을이나 지역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었는지, 그것이 어떻게 융성하는 대도시의 흥기에 밀려나면서 또 그것을 지탱하고 부양해주었는지를 찾는 작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전자가 대도시 인천의 화려한 불빛을 부각시키는 종류의 일이라면, 후자는 그 화려함을 가능하게 하고 그 불빛이 도드라지는 배경이 되는, 캄캄한, 잘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색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주로 후자의 작업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지루하고 단조로운 이야기들의 연속이지만, 달리 보면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하고 친밀하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들일 수도 있다. '달리 보기''살아남겠다'거나 '잘 살아 보겠다'고 하는 우리와 같은 목적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시대 다른 공간-일부는 중첩되기도 하지만-에서 어떻게 그 목적의식을 실현해나갔는지를 궁금해하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글이 그 문제의식을 제대로 성취하였는가의 문제와는 별도로, 그러한 문제의식의 중요성, 시각을 전환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도시지역의 형성

戶口總數(1789)에 따르면, 조선 후기의 인천부는 부내(府內), 원우소(遠又 ), 다소(多所), 주안(朱安), 남촌(南村), 조동(鳥洞), 신고개(新古介), 황등천(黃等川), 전반(田反), 이포(梨浦), 영종영하(永宗營下), 전소(前所), 후소(後所), 삼목(三木), 용유(龍流), 무의(無依) 16개 면과 덕적진(德積鎭), 그리고 덕적도 상의 익포(益浦)와 능동(陵洞), 그 주변의 소야도(蘇爺島) 및 문갑도(文甲島), 백아도(白牙島굴업도(屈業島)를 관할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인천부에는 4096호에 14,566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하였는데, 여기에 나타난 면별 호구수와 동리명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위 표에서 특수행정구역이며 도서지역인 영종진과 덕적진 관할의 섬들을 제외하면 인천부 관할 행정구역은 10개 면이 된다. 이포면의 경우 일종의 비지(飛地)로 인천부와 뭍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100리나 떨어져서 남양부의 땅에 둘러싸여 있었으므로, 현재의 시각에서 인천지역의 취락발달을 논하는데 크게 유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포면은 현재의 화성시 비봉면 삼화리 및 유포리 일대이며, 1895년 남양군에 통합될 당시는 포촌(浦村), 유촌(柳村), 연화(蓮花), 이화(梨花), 도파() 5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위 표를 통하여, 호구총수의 단계에서, 도서지역과 비지를 제외한 육지지역의 인천부에는 모두 54개의 마을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부내면과 원우소면, 다소면을 제외하면, 주안면의 성리와 신고개면의 포촌 외에는 모두 1, 2, 3리 등으로 숫자에 의해 동리명이 구분되고 있다. 약간 거친 추측이지만, 호구총수단계에서 숫자에 의해 구분된 마을들은 이 시기까지는 마을이름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었고, 그야말로 '적막한 산야에 몇 채의 가옥들이 가느다란 연기를 피어 올리고 있는' 상황을 반영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 이들 지역은 아직 촌락 단위의 사회로 분화·정립되지 않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를 현재의 동명과 대조해보면 다음과 같다. 부내면은 남구의 관교동·문학동, 연수구의 선학동과 중구의 내동·경동·용동·인현동·사동·신생동·신포동·북성동·선린동에 해당한다. 원우소면은 현재의 연수구 동춘동·연수동·옥련동·청학동 등지를 가리키며, 남구 도화동·숭의동·주안동과 동구의 화수동·화평동, 중구 전동·도원동·신흥동·답동·송월동 등지가 다소면 지역이 된다. 또한 남촌면은 대체로 현재의 남동구 남서부에, 조동면은 남동구의 동부지역에, 주안면은 대체로 남동구의 북서부와 부평구 남부 지역에 해당한다. 신고개면과 전반면, 황등천면은 1914년 부천군 소래면으로 통합되었다가 1973년 시흥군으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음 <9>1789년 단계의 호구총수1871년 단계의 경기읍지를 바탕으로 동리명 및 동리수를 정리한 것이다. 편의상 육지부의 9개 면으로 비교대상을 한정하였다. 9개 면에서 80여 년 간 동리수는 54개에서 91개로 증가하였다. 문화적인 시각에서 더욱 인상적인 것은 1, 2, 3리 식으로 숫자에 의해 구분되었던 지역들이 정식의 마을이름을 가지고 기록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정부의 통계에서만 하나의 동리로 분류되고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마을로 정립·형성되어 있지 못하던 일군의 가옥들이, 하나의 마을로 정립되어 마을이름을 만들고 독자적인 생활의 단위가 되어 가는, 그리하여 자타가 공히 하나의 마을로 인식하게 되는 상황을 추정케 한다. 이는 부내면을 제외한 인천부 전지역에서 동시적으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기본적으로 농촌적인 또는 반농반어촌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인천에서 도시적인 현상의 출현을 보려면 조금 더 시간을 기다려 개항 이후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한편으로 앞서 인용한 개항기의 제물포에 대한 일인들의 묘사가 결코 개항 이전 인천부 전체의 정체상태라는 이미지로 확대될 수 없고 오히려 부내 전지역에서 역동적으로 촌락단위를 형성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인천시내 촌락들 중 상당수의 역사가 적어도 마을공동체라는 수준에서는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안쪽의 현상일 가능성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개항과 함께 일본과 청국의 조계지가 잇달아 설치되면서, 도시적인 성격을 띤 조선인들의 주거지들은 이들 조계지의 외곽에서 발생, 성장하게 된다. 그 위치는 만국거류지의 동쪽, 청국거류지의 북쪽, 그리고 만석동 일대의 광활한 지역이었고, 절포(折浦. 일제시대의 濱町 일대. 현재의 중구 사동), 화개동(花開洞. 일제시대의 花町 일대. 현재의 중구 신흥동), 답동(沓洞. 일제시대의 寺町 또는 旭町 일부. 현재의 중구 답동), 용동(龍洞. 일제시대의 龍岡町. 현재의 용동), 화동(華洞. 일제시대의 花平里. 현재의 동구 화평동), 화도동(花島洞. 일제시대의 新花水里. 현재의 동구 화수동)과 같은 마을들이 그 땅에 산재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및 청국 거류지들이 성장하면서 점차 이들 조선인 마을들을 침식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따라 시가지에서 밀려난 조선인들은 점차로 동산 하나를 넘어 전동의 구 전환국터(전 인천여고 운동장 부지) 주변에서 집단주거지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이 일제시대의 조선가(朝鮮街) 또는 조선촌(朝鮮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仁川府 1933, p.146). 따라서 당시 상인천역(上仁川驛)이라고 불리던 현재의 동인천역 주변, 특히 동인천역과 자유공원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 개항기 이래 인천시내에 생활근거를 마련했던 조선인들의 도시생활공간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같은 해에 출간된 朝鮮聚落()(善生永助, 1933, 朝鮮總督府調査資料第三十九輯)에는 각도 경찰부장에 대한 조회를 바탕으로 '최근 수년간 호수 및 인구 증가가 현저하고 급격히 발전하고 있는' 마을들을 열거하고 있는데, 이 중 현재의 인천광역시 관내에 해당하는 마을은 모두 4개가 있다. 이를 도표화하면 <10>과 같다.

 

 

(자료출처: 善生永助 1933, pp.334-336)

 

이중 금광개발로 인해 광부 등이 몰려들고 있는 운서리의 경우를 제외하면, 동인천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당시의 시가지 개발양상을 볼 수 있다. 우선, 막 일본인 거주권역에 편입되고 있던 용강정의 경우 일종의 택지재개발(연못의 매립)을 통해 일본인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신흥주택가가 건설되고 있다. 반면 경제력이 약한 신규유입인구들은 동인천역을 경계선으로 한 외곽지대의 저지대 공터나 산비탈에 주거지를 마련하고 있다. 이들은 인천시내의 노동자와 영세상인으로 도시빈민층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이제 도시를 벗어나 인천의 외곽지대, 근교지역으로 향하기로 한다. 그곳은 경기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흔히 만날 수 있는 농촌 또는 반농반어촌들이지만, 인천이라는 대도시의 일부였기에 가지고 있는 독특한 특징들을 만나게 되기도 한다.

 

 

. 도시외곽지역의 촌락사회

 

1. 먼우금의 마을과 지역체계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 일대는 과거 먼우금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먼우금은 조선후기 인천부의 행정구역이었던 원우소면(遠又 面)의 우리식 발음이기도 하다. 원우소면이라는 행정구역이름은 이미 조선왕조말기에 사라졌지만, 그 한글 이름은 여전히 주민들 가운데서 전해지고 있다. 옥련동 옥골 마을 토박이인 이중봉씨(. 1928년생)는 먼우금이 크게 네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면서 옥골[玉洞], 독바위[甕巖. 또는 독배], 한나루[漢津], 크냄[大巖]의 네 개 마을이름을 들었다. 그에 따르면 1940년 직전 정도의 시기에 옥골에는 25-26, 독바위에는 13-14, 한나루에는 13-14, 크냄에는 20여 호가 각기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역시 옥련동 한나루(양짓말) 마을 토박이인 윤종노씨(. 1934년생)에 따르면 '먼우금'은 옥련동만 아니라 청학동과 동춘동 일부까지 포함하는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이라고 하였다. , 현재의 옥련동 지역에서는 양짓말, 옥골, 조개고개, 독배, 점말, 한나루, 크냄, 서녀케의 8개 마을이, 청학동에서는 뒷굴이, 동춘동에서는 동막이 하나로 묶여져서 먼우금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는 해방 직전의 먼우금 거주 세대수에 대하여 양짓말 18세대, 옥골 30여 세대, 조개고개 5-6세대, 독바위 40여 세대, 점말 10여 세대, 한나루 6-7세대, 크냄 25세대, 서녀케 7-8세대 등으로 이야기하고 있어, 이에 따르면 동막과 뒷굴을 제하고도 140세대가 넘는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먼우금의 지역 범위와 거주호수에 대한 설명에서 차이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선 이중봉씨는 서녀케는 독바위에, 양짓말은 한나루에, 점말·장승배기·조개고개가 옥골에 각기 포함되는 하위지명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남는 문제는 일제시기에 동막이나 뒷굴이 먼우금 지역을 구성하는 하위지역으로 존재했는가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지역을 통합하는 장치로서의 민간신앙/공동체의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송도고등학교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산을 주민들은 '당산'이라고 부르는데, 과거 당집에는 당나무와 당집이 있었고, 봄이 오기 전인 음력 2월에 날을 받아서 당고사를 올렸다고 한다. 당나무는 당산 정상부에서 약간 아래로 내려온 곳에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였으며, 그 앞으로 기와로 지어진 당집이 있었다. 이중봉씨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는 당집은 항상 기와집이었으며, 방 한 칸에 마루 한 칸을 갖춘 두 칸 집이었다. 당집 안은 소상이나 화상, 위패 등의 신체는 물론 아무런 설비나 장식도 없는 빈방이었다고 한다. 먼우금 당제는 10여 년 전에 중단되었고, 먼우금 당산은 현재 신원미상 무속인들의 신앙행위처로 사용되고 있다.

 

한나루 송도어촌계 사무실 옆에 거주하는 나운복씨(. 1950년생)는 이 당고사에 한나루쪽에서 참여한 일은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중봉씨는 먼우금 전체에서 이 당을 모셨다고 하였고, 더 과거로 올라가면 동촌동 동막 마을에서도 먼우금 당제에 같이 참여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같은 바다에 다니니까. 그렇게 서로 영향이 있으면 합동으로 하는 예가 있다. 여기하고 동막은 그런 연관관계가 있다'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먼우금의 지역범위의 문제, 즉 동막 등의 지역이 포함되는가의 문제는 일단 윤정노씨의 이야기를 쫓아 포함되는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중봉씨 역시 먼우금 당제에 동막 주민들이 참여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그 이유에 대해서 '같은 바다에 다니니까'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업과 의례의 단위로서 공통성을 보이고 있다면 일단 하나의 강하게 상호 연결된 지역을 형성하는 것으로 파악해도 무리가 없다. 따라서 먼우금은 이중봉씨가 젊었던 시절, 또는 그 이상으로 거슬러올라가면 현재의 옥련동보다는 조금 더 큰 지역범위를 가리키는 지명이었던 것으로 보기로 한다. 그리고 이후의 당고사가 쇠퇴하는 과정에서 참여하는 지역범위가 먼우금 전체옥련동옥골 일대로 축소되는 현상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두 사람의 기억 사이의 또 다른 차이였던 먼우금 거주 호수의 문제는, 일차적으로 기억의 불확실성과 착오 등에 따른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 또는 착오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이 무렵 이 지역의 인구증가가 현저했던 사정을 반영하는 결과일 수도 있다. 가령 마찬가지로 토박이지만 이들보다 20여 세 이상 젊은 이승수씨(. 1959년생)는 먼우금이 수인선 송도역전을 가리키는 지명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이를 70세 전후 노인들의 이야기와 대비시켜보면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옛 먼우금 지역에서 인구의 증가, 신규거주지역의 생성, 그리고 마을 및 마을이름의 분화 등이 이루어졌고, 의례의 지역단위에서 확인되듯 먼 곳에 있던 동막 등의 마을이 먼저 먼우금 지역에서 제외되기 시작하였다. 행정구역명으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면서 그 범위는 전적으로 사람들의 기억과 활동에 의해 결정되는 종류의 것이 된다. 마을을 넘어서는 광역단위의 사회활동을 가능하게 했던 사회적 통합력이 약화되면서 그 범위는 점차로 축소되었고, 먼우금은 이 일대 전체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지명에서 그 안의 한 하위지역(물론 당시로서는 가장 중심지였던 송도역전)만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국한하여 이해하게 된 것이다.

 

2. 남촌의 마을과 지역체계

 

현재의 인천시 남동구 남촌동은 원래 인천부 남촌면 와우동(臥牛洞) 지역인데, 1914년의 행정구역통폐합에 의해 부천군 남동면 와우리가 되었다. 와우동은 그 전에는 염촌(鹽村)으로 불렸다는 기록도 있다(한글학회 1986). 1940년의 인천부 확장에 의해 인천부에 편입되어 오보정(五寶町)으로 개칭되었으며, 해방 직후 남촌동이 되었다. 일제시기 와우리(오보정)는 상촌, 중촌, 하촌, 소촌 등 모두 네 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촌은 와우리 지역에서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서 배치되어 있었으며, 소촌은 현재 동사무소가 있는 곳으로부터 서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현재는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고 개발이 진행되어 예전의 마을모습을 짐작하기 힘든 상태이다.

 

와우동 하촌 마을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가 있다. 김재훈씨(. 1922년생)에 따르면, 은행나무 아래에는 원래 왕씨의 산소가 있었는데, 이 왕씨 일족은 고려왕조가 망한 뒤 이 일대로 내려와 정착한 것으로 주민들 사이에서 전해진다고 한다. 그 산소들은 이미 없어졌고 왕씨들은 더 이상 이 이곳에 살지 않아 내력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김재훈씨는 '왕씨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은행나무를 심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하였다. 이 후손으로 추정되는 왕씨들은 서창동 독굴 마을에 2집이 살았고 나머지는 현재의 광명 일대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김재훈씨는 '옛날에는 당고사를 지낼 때 하촌의 은행나무 앞에서 도당굿을 했다는 이야기를 나도 듣기는 했는데 우리 어려서는 못봤다'고 대답하였다.

 

남촌의 당고사(또는 도당제)는 이 일대가 남동공단 이주단지로 결정되기 전인 198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는데, 김재훈씨가 아는 한 남촌의 도당제는 상촌에 있던 '도당할아버지' 앞에서의 당고사가 전부였다. 도당할아버지는 둘레가 두 아름 가량 되는 굵은 엄나무였다. 엄나무가 서 있던 위치는 현재의 남촌동사무소로부터 남쪽으로 30m 쯤 떨어진 곳인데, 이곳은 주변보다 약간 지형이 높아서 야트막한 ''을 이루고 있었다. 이 일대는 예전의 길과 지형이 모두 사라져서 답사를 통해 그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기가 힘든 상태이다. 원래 와우동에서 당고사를 올리면 마을 전체에서 소 한 마리를 잡아 음력 7월 초하루부터 45일간 고사를 올린 뒤 주민들이 고기를 나누어먹었다. 특히 소의 염통은 '영좌님'이라고 불리던 마을의 최고연장자에게 우선적으로 보내드렸다고 한다.

 

분육(分肉)을 할 때 정육은 '매를 지어서' 주민들에게 나누어준다. ''란 맷고기나 맷담배 따위를 작게 썰어 동여놓고 팔 때 그 한 묶음을 일컫는 말이다. 이 날은 일년에 한 번 소고기를 먹는 날이므로 마을 사람들 거의 모두가 빠짐 없이 고기를 받아갔으며, 고기를 나눌 때 고기값을 가지고 오는 날을 지정해준다. 20일쯤 지나면 차례차례 고기값을 걷어나갔다. 즉 고기값을 걷는 날은 마을 전체가 한 날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나누어주는 매를 단위로 하여 몇 일에 걸쳐 나누어져 있었던 것이다. 매는 보통 열 근 정도를 단위로 나누는데, 고기를 나눠 받을 때 각자의 형편에 따라 한 매를 셋이 짓기도 하고 일곱이 짓기도 하였다. 보통은 45명이 한 매를 짓는 경우가 가장 많았는데, 이렇게 한 매를 지은 사람들이 한 날 모여서 고기값을 갚았다. 고기값을 갚는 날에는 인근의 주민이 모여서 고기값 갚는 사람들이 내는 술과 국수 등을 함께 먹는 관행이 있었다고 한다.

 

와우동 도당제의 도당 할아버지는 와우동의 주변부 또는 인근 마을의 신앙물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수산동 찬우물 마을과의 경계지대, 같은 동 발촌 및 능골 마을과의 경계지대, 그리고 와우동 소촌 마을의 북서단(2경인고속도로 남동인터체인지 진출입로와 남촌동 접경지에 빌라들이 들어선 지점으로부터 북쪽 50m 지점)에는 각기 장승이 서 있어서, 도당 할아버지에게 제사를 올린 뒤 족을 하나씩 떼어서 각 방면에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을로 가지고 가 다시 장승제를 지냈다고 한다. 김재훈씨는 찬우물과의 접경지대에 있는 장군에는 '북방흑제장군(北方黑帝將軍)'이라고 적혀 있던 것을 보아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장승에 뭐라고 적혀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었는데, 지형조건상 발촌 마을 방면의 장승과 소촌 남동인터체인지 방면의 장승은 각기 동쪽과 서쪽의 마을입구를 지키는 장승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김재훈씨는 '남쪽으로는 장승이 없었던 것 같고 도림리에 도당 할머니가 있었다'면서, '도당할머니는 도림동 도림이 사람들이 고사를 지내는데, 도당 할아버지와 도당 할머니가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 그런 것은 모르겠다'고 하였다. 이 관계에 대하여 도림동 주적골에서도 역시 소상히 알 수 없었지만, 남촌동에서보다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도림동은 도림이[桃林里], 오봉산(五峯山), 이무시[女舞室里], 주적골, 새마을, 숯굴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주적골에는 과거 도림동(도림리) 전체에서 모시던 당이 있으며 이를 '도당 할머니'라고 부른다. 도당 할머니는 남촌의 도당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엄나무 수종의 아름드리 고목이다. 현재 이 엄나무 앞에는 조그만 당집이 지어져 있다. 도당고사일은 보통 음력 칠월 칠석 안으로 잡혔으며, 제물은 소 한 마리를 잡아서 사용하였고, 고사가 끝나면 동네 사람들이 고기를 나누어 먹고 각자의 몫을 받아 갔다. 현재 주민들에 의한 공동체의례로서의 도당고사는 중단되었는데, 당집과 당나무는 그대로 남아 이곳에 출입하는 만신의 기도처로 사용되고 있다. 주적골 출신인 김영아씨(. 1973년생)1980, 81년 경에 마지막으로 도당 할머니 앞에서 소를 잡는 것을 보았는데, 그 후로도 몇 해 동안은 외부 도살장에서 소를 잡아와서 도당고사를 올렸다고 한다.

 

1946년에 주적골로 시집온 박종숙씨(. 1927년생)의 설명에서는, 그리 명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도림동의 도당 할머니가 남촌동의 도당 할아버지와 일정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 도당고사일은 남촌동 도당 할아버지 고사를 지낸 다음 도림동 주적골의 도당 할머니 고사를 올리도록 잡았으며, 의례절차상으로도 남촌동 도당 할아버지에게 고사를 올리면 그곳에서 제물로 사용한 고기의 일부를 주적골로 가져와서 도당 할머니에게 올렸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도림동의 도당 할머니 고사를 올린 뒤에는 그 제물로 사용한 고기의 일부를 가지고 남촌동으로 가서 도당 할아버지에게 이를 올렸다고 한다.

 

이상의 논의는 도당 할아버지와 도당 할머니의 관계, 그리고 이들이 다시 남촌동 하촌의 은행나무와 맺는 관계, 그리고 장승을 매개로 하여 발촌[發李洞찬우물[冷井里능골[陵洞경신[慶新里] 등 남촌면의 외곽에 해당하는 현 수산동 지역 마을들과 맺는 관계 등이 불명확한 채로 남아 있어 한계를 갖는다. 그러나 이 일대의 지세와 앞서 인용한 동리 분화상황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잠정적인 설명은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남촌면의 면소재지였던 와우리는 기본적으로 해발고도 10m가 될까말까한 낮은 지대에 위치하며, 특히 마을 서쪽을 흐르는 승기천으로 흘러드는 지류들이 합류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지형은 토질이 비옥하지만 홍수에 취약하다는 약점을 지닌다. 특히 와우리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사이에서 마을 북동쪽에서 마을 서쪽을 향하여 남서방향으로 승기천의 지천이 흘러들며, 동쪽은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호우시에 어디로 흐를지 예측할 수 없는 지세를 하고 있다. 또한 동··북쪽은 바닷가를 향해 터져 있는 남쪽과 달리 마을과 마을 외부를 잇는 길들이 뚫려 있는 방향이기도 하다. ··북쪽으로 장승이 배치되고 남쪽에 장승이 없었던 이유는 이렇게 설명이 될 것이다.

 

한편 앞서의 <9>를 보면, 1871년 단계에서 현재의 수산동 지역에는 발촌, 찬우물, 능골, 경신 등 네 개 마을이, 현재의 도림동 지역에는 도림이, 오봉산, 이무시 마을들이 이미 성립해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마을은 모두 해발 2030m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이에 비하여 해발 10m 정도밖에 되지 않는 현재의 남촌동 지역에는 염촌 마을 하나만이 성립하여 있다. 한편 개항 이전에 성립해있던 마을 중 고잔리와 논현리 등은 오봉산 이남 지역으로, 남촌·도림·수산동 지역의 마을들과는 지리적으로 구분되는 곳이다.

 

따라서 남촌면 내에서 시기적으로 마을의 분화가 일어나는 지역들이 해발고도에 따라 구분가능하다. , 17891871년 시기 남촌면에서는 해발고도 2030m 지대에서 촌락의 분화·정립현상이 일어났다. 그보다 해발고도가 낮은 저지대에서 촌락들의 분화·정립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19세기말 이후의 일이다.

 

저지대에서 촌락분화현상이 지체되었던 것은 침수의 위험 때문이었는데, 와우동에서는 물길이 지나는 곳이면서 외부로부터의 기타 위협요인이 들어오는 길목이 되는 동··북쪽에 장승을 세워 마을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장승이 배치되지 않았던 남쪽에 위치하고 도당 할머니 나무가 서 있는 주적골은, 새말[新村]과 함께 해발 1020m 지대에 있어 도림동의 다른 마을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저지대에 속한다. 그리고 와우동 내의 여러 마을들처럼 19세기말 이후 하나의 촌락으로 분화·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에 저지대 공략이라는 동일한 사회경제적 목표를 지니고 있었던 두 마을이 도당 할아버지와 도당 할머니 나무를 매개로 하여 함께 의례적 결합관계를 창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 해방 전후시기 인천지역의 생산과 유통체계

 

1. 근현대시기 인천의 장시변동

 

이미 대도시화되어 있었던 일제시대 인천시내에는 오일장 형태의 정기시장이 없었으며 몇 개의 상설시장들이 존재했다. 가장 먼저 생긴 인천시내의 상설시장은 1895년에 당시 근해어업어획물을 거의 독점하여 조선인촌 입구에서 이를 노점상과 행상들에게 도매로 팔아 넘기던 정흥택의 어시장이 최초의 것이다. 이후 이에 경쟁하던 일본인 중심의 인천공동어시장조합이 수산물시장을 그 앞에 세움으로써 동·서 어시장 체제를 형성하였다가, 양시장이 합병함으로써 1907년에 인천수산주식회사가 설립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소위 인천 최초의 단일한 수산물도매시장이 되는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통합되지 않고 독자적으로 어물유통을 꾀하는 세력이 끊이지 않았다. 1915년 이들을 다시 통합하여 支那町 57번지에 새로운 수산물도매시장을 만듦으로써 일제시대의 기본적인 어물유통의 틀을 형성하지만, 그 후에도 이 시장을 통하지 않고 빙장(氷藏)을 하여 유통시키는 별도의 유통경로들이 존재하였다(仁川府 1933, pp.1144-1147). 인천수산주식회사는 1938년 한국내 각종 수산단체의 자본을 규합하여 설립된 조선수산개발주식회사에 흡수되었다(인천광역시 2002)

 

일제시대 인천부내 상설일용품시장으로는, 정흥택의 어시장에 기원을 두고 新町 41번지에 세워져서 수산물 소매를 담당하던 제일공설시장과 新町 7번지에 세워져서 과채류의 소매를 담당하던 제이공설시장이 있었다(仁川府 1933, p.1453). 그러나 전기한 어시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조선총독부의 공설시장 설립 및 운영주체 단일화 원칙에도 불구하고 과채류 시장의 단일화 역시 경쟁시장의 설립으로 난항을 겪었다. 결국 1930년 인천물산주식회사가 인천청과주식회사를 합병하는 형식으로 시장운영주체의 통합을 이루었고, 과일류는 龍岡町을 중심으로, 채소류는 新町을 중심으로 유통되는 시장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仁川府 1933, pp.1454-1157). 그러나 수산물과 과채류 외에는 공설시장의 설립을 보지 못했고, 인천시내의 유통에서 노점과 행상이 차지하는 역할이 강력한 상태로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 귀환동포와 도시실업자층이 대거 인천에 유입되면서 이들 중에서 노점 및 행상을 하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1946년경부터는 '무질서하게 산재되어 있던 노점을 한 곳으로 집중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고, 드디어 19461217일 해방 전의 인천일용품시장을 중심으로 소성자유시장 자치회를 조직하여 노점의 규합이 시작되었다. 이후 소성자유시장을 모체로 송현동, 전동, 숭의동, 도원동 등 각처에서 노점과 자유행상을 하던 상인들을 조합원으로 속속 규합하여 송현동 100번지 일대에 집중 유치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중앙시장의 근원이 되었다(인천광역시 2002, 4권 제6장 제11 §3).

휴전과 함께 전후복구시기인 1955년 당시의 인천시장은 송현동의 중앙시장을 비롯, 신포시장, 어시장, 송월시장, 신탄시장(화수동), 청과시장(인현동), 가축시장(만석동) 7개 정도였다. 이들 중 중앙시장의 점포수가 699개로 가장 많았고, 신포시장이 그 다음으로 130개였다. 이들 시장의 주 판매품목은 농산물로서 연간 매출액의 77.3%에 달하고 잡품이 6.7%, 축산류 6.6%, 직물류, 수산물이 차지하였다. 이들 시장 중에서 중앙시장에서 거래된 매매고는 43.3%에 이르고 있어 가장 큰 시장이었으며 거래가 활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은 1955년 인천시내의 시장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자료: 인천시사(), p.1215, 인천광역시 2002, 4권 제6장 제11 §3에서 재인용)

 

일제시기 인천부내에 정기시장이 존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개항 이전의 인천부에서도 정기시장의 존재는 미약했다. 아래 표는 조선후기로부터 일제시대에까지 존재했던 인천부 지역 정기시장의 변동상황을 도표화한 것이다. 인천부만 아니라, 인천부 외곽에서 인천부민의 출시권역에 포함되었던 장시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동국문헌비고단계에서 존재했던 장시들 중 기탄장과 신기장이 1830년 이전에 이미 소멸하였다. 기탄장과 신기장은 개시위치가 가까우므로 병설된 것이 아니라 이설 또는 폐지 후 신설된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관계는 명확치 않다. 19세기 중반에는 이미 폐지되어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1770년의 자료는 증보문헌비고를 참고하였으나, 증보한 내용에 해당하지 않으므로 동국문헌비고 단계의 서술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단 부평부 석천면의 신기장은 증보한 내용에 해당한다. 참고문헌명 아래의 연도는 문헌의 출간연도가 아니라 문헌에 실린 자료의 조사연도이다. 자세한 서지사항은 참고문헌을 볼 것.

 

**증보문헌비고의 기탄장 항목은 개시일을 ''으로 적은 뒤 '邑誌作四九'라고 주를 달았다. 경기지(1842-1843)에는 기탄장과 신기장에 대해 '幷皆今廢'라고 적었으며, 경기읍지(1871)에는 기탄장의 개시일을 4·9일로, 신기장의 개시일을 2·7일로 기록한 후 모두 '今廢'라고 적었다.

 

인천부내에 해당하는 장시들이 이렇게 개항 이전에 이미 소멸하였던데 반하여, 인천부 외곽의 부천(시흥), 김포 등지에 있던 장시들은 일제시대는 물론 해방 후에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인천부 거주민들 일반생활물자를 거래하기 위해서 이들 장시를 출입했던 것은 아니었다. 인천부민의 이들 장시에 대한 출입은 당시로서는 주요한 '재테크'의 수단이었던 소의 거래를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보도록 한다.

 

2. 인천외곽에서 인천시내로콩밭열무와 김치의 경우

 

일제시대 남촌동(오보정) 주민들이 농사를 짓는 경작지는 논과 밭의 비율이 반반 정도였다. 남촌동의 밭에서는 보통 보리를 베고 그루갈이[根耕]로 콩을 심는 농사가 주종이었다. 김재훈씨는 '그래서 이 때를 삼농(三農)이라고 한다. 모 내고, 보리 베고, 그루 갈고, 세 가지 농사를 짓는 시기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그루갈이농사와 김재훈씨가 말하는 '삼농' 또는 경기일대에서 보다 자주 사용되는 용어로 '삼그루판' 시기의 다망함은 경기남부지역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런데 남촌의 그루갈이 농사가 특이한 점은 콩을 심을 때는 먼저 한 사람이 앞서가면서 무씨를 끼얹고, 이어서 콩을 파종한다는 점이다. 그 후 수수모를 사이사이에 이앙한다. 콩의 파종열간 간격은 30가량으로 잡았다. 그렇게 하면 콩과 무청대가 같이 올라와서 자라게 된다.

 

콩 사이에서 자란 무청대는 그늘에서 자라니까 연하고 아주 맛이 좋았다. 당시 '남촌콩밭열무라고 하면 인천에서도 알아주었다'고 한다. 열무를 뽑을 때는 현재 문학경기장이 들어선 앞을 지나 주안동의 법원 근방까지 지고 나갔으며, 김재훈씨가 젊었을 무렵에는 거기까지 가면 시내에서 받으러 나오는 장사꾼들이 있어서 넘기고 바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열무재배농민과 상인들은 처음에는 그렇게 법원 앞에서 거래를 했는데, 나중에는 농민들이 점점 더 멀리 가게 되면서 숭의동 도깝다리(숭의동로터리에서 100m 남쪽의 벽돌공장이 있던 곳)가 주요 거래장소가 되었다. 남촌동에서 열무를 지고 숭의동까지 갈 때는 문학동 되천리 고개에서 한 번을 쉬고 갔다. 김재훈씨는 "그 때 고개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쉬면서 졸다가 깨서 떠나는데 방향을 잘못 잡아서 되나오는 사람도 있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다른 열무장사 나온 사람을 만나서 '자네 왜 도로 오나?' 해서 그 소리를 듣고 다시 갔다는 거지"라고 당시의 일화를 전해주었다.

 

그는 "그 때 남촌열무가 인천에서 유행을 하니까 해방되고 오보정을 없애면서 와우리가 되지 않고 남촌동이 되었다는 거에요"라고 지명유래를 밝히기도 하였다. 이는 물론 남촌면소가 있던 곳이라는 또 다른 내력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기는 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촌'이라는 지명이 잊혀지지 않고 유지되어온 또 하나의 내력, 남촌동 일대의 주민들에게서 인천시내를 상대로 한 열무 장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도림동 주적골에서도 그루갈이 콩밭 사이에서 열무를 재배하여 시내에 내다파는 장사를 많이 하였는데, 역시 이를 '콩밭열무'라고 불렀다. 주적골에서 나는 콩밭열무는 동인천, 배다리시장, 신흥동의 수인선 철도 종점인 수인역 인근이 주요 판매처였다. 머리에 이고 가기도 하고 마차로 싣고 가기도 하였는데, 시장을 찾기보다는 집집마다 다니면서 팔았다. 박종숙씨의 경우 머리에 이고 갈 때는 문학에서 한 번, 도재에서 한 번, 두 번을 쉰 뒤 시내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렇듯 콩밭열무 또는 남촌열무 장사는 일제시기로부터 해방 후에 이르기까지 동인천역 주변의 '조선가' 도시지역을 상대로 성행하였다. 그것이 성행하면서 열무재배지역이 확대되었고, 이에 가담하는 인천 외곽지역의 농민가구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주안동의 법원근방까지 상인이 나와서 받아가던 거래방식이 숭의동까지 농민이 직접 가지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바뀌게 되고, 또 직접 도시지역을 찾아다니면서 파는 방식으로 바뀌게 된 것은, 이에 참여하는 농민의 숫자가 늘어 공급이 증대하는데 따른 현상일 것이다.

 

본래 근대시기 인천지역에서의 채소재배로 큰 수입을 올린 것은 중국인들이었다. 仁川府(1933, pp.1153-1154)에 따르면, 도시화와 인구유입에 따른 채소수요의 증대를 예측한 중국인 모씨가 부천군 다주면의 조선인 모씨와 합작하여 대규모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 인천부내 중국인 농업의 시발이었다고 한다. 당시 중국인 농업자는 인천부내에 2호에 불과하였는데, 이것이 청일전쟁 후에 15호로 늘고, 노일전쟁 후에는 이미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중국인들이 채소농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당시 인천부내의 일본인들은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중국인들은 일본인이나 한국인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임야를 홀연히 개간하고 일제 당시의 松坂町(현 송월동), 龍岡町(현 인현동), 龍里(현 용동), 栗木里(현 율목동), 花町(현 신흥동) 등지에서 풍토에 적합한 종자를 연구·채택하여 일본인과 조선인의 기호에 맞는 작물들을 독점공급하다시피 하였고, 그 유통권을 경성으로까지 확대하였다.

 

그러나 인천의 시가지가 이들 지역으로 확대되면서 채소농업은 인천 외곽의 부천군 지역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다주면(多朱面. 간석동, 구월동, 도화동, 숭의동, 용현동, 주안동 등 대체로 현재의 인천시 남구 지역) 일대가 채소농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조선에서 대거로 철수하게 되는 1927년 이후에는 이 지역에서의 채소생산의 주요담당자들이 조선인과 일본인들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채소생산지의 기능이 주민들의 기억에서처럼 부천군 남동면 지역(남촌동 현재의 인천시 남동구 지역)으로 확대·이전된 것은 재차 이루어진 인천시가지 팽창의 결과일 것이다.

 

열무장사 못지 않게 인천 외곽지역 농민들의 직접적인 상업가담경향을 보여주는 것은 김치와 된장 등의 행상이다. 박종숙씨의 경우 참외로 담근 참외깍두기, 무말랭이, 장아찌 등을 돌고 인천시내를 누비며 행상일을 하였다. 보통 이런 김치 등을 담가서 팔 때는 통이나 '양은 다라이'에 담아 이고 가서, '탕키(김치보시기)' 단위로 팔았다. 남동구 서창동 독굴 마을에 사는 구창분씨(. 1929년생)19세에 이 마을로 시집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 20세에 분가하자마자 남편이 입대하여 6년간 군생활을 하였으므로 그 기간 혼자서 갓 태어난 아이를 돌보며 생계를 영위하여야 했다. 이 기간 소규모의 농사와 각종의 품팔이 외에 생계를 많이 의지하였던 것이 김치와 된장장사였다. 그는 서울과 인천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김치와 된장을 팔았으며, 서울에서는 주로 '염춘교 건너 남산 밑구녕'을 다녔다. 서울에 가려면 새벽 2시에 김치 한 통을 이고 집을 나서서 새벽에 소사까지 걸어서 간다. 독굴에서 소사를 갈 때는 장수동 만의골을 넘어서 두 시간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었다. 소사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김치와 된장을 팔고 집에 돌아오면 밤이 늦은 시간이 되었다.

 

김치는 담가서 팔기도 하고 사다가 팔기도 하였고, 된장은 주로 사다가 팔았다. 된장과 김치를 사는 곳은 군자·소래 일대의 '시골동네'였다. '시골에는 장도 많이 담가놓으니까' 시골마을을 다니면서 장을 사 모으기가 수월하였다. 구창분씨가 25세 무렵에 보통 양동이 크기인 깡통 하나 분량의 된장을 농가에서 20원 가량 주고 사들였으며, 이를 서울로 가져가면 25원 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김치는 기본적으로 집에서 담가서 팔았고, 이를 위해 "무청, 배추찌끼 떨어진 것을 다 주워다가 독이 있는 대로 전부" 김치를 담갔다. 파는 것은 문제가 없었고 팔면 돈이 되었기 때문에 '독이 없어서 못 담그지 담그는 양은 한정이 없었다'는 것이다. 구창분씨의 경우에는 콩밭에서 자란 열무도 보통 김치를 담가서 인천시내에 내다 팔았다고 한다. 열무김치를 서울에 파는 일은 없었는데, 이는 서울로 가지고 가면 그 사이에 김치가 너무 익어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담가서 팔다가 담근 김치가 떨어지면 역시 시흥·안산 일대의 '시골마을'에서 김치를 수집해서 내다 팔았다.

 

장수동 무네미 마을에서 만난 이용규씨(. 1924년생)는 별다른 경제적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23세가 되던 1946년 이 마을로 들어와서 초기에는 상당히 고생을 하였다. 그에 따르면, "여기 와서 보니 남자들이 무·배추를 심어서 우마차에 실어 가지고 인천 들어가고, 아줌마들은 김치 해서 머리에 이고 인천 가서 내다 팔고 하던데 그것도 좀 여유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그거 해서 땅 사고 집 짓는 아줌마들이 있을 정도였으니까"라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하였다. 김치 장사만 해서 집을 짓는 것은 불가능했겠지만, 여성이 독자적으로 경제적 기반을 만드는데 이 김치장사가 큰 몫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앞서 언급했던 서창동 독굴 마을 구창분씨의 경우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 분가 당시 남편이 마련한 농토는 밭 400평이 전부였다. 당시 한 집이 그럭저럭 먹고살기 위해서는 논 한 섬지기에 밭 1,000평 정도는 필요하였는데, 남편은 군생활로 6년 간 집을 비웠고, 당시 품값이 남자는 쌀로 대두 한 되, 여자는 보리쌀로 대두 한 되를 받던 시절이었다.

 

그는 농사와 품팔이, 김치행상만으로는 생계가 막연하였으므로, '살림의 기초를 잡기 위해' 첫 해에 30원을 주고 돼지새끼를 샀다고 한다. 그런데 2월에 산 돼지가 여름을 채 나기도 전인 칠월 칠석날에 덜컥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다시 돼지새끼를 한 마리 구입하였고, 이를 일 년간 키워서 판 돈에, 이듬해 여름 내 농사를 지은 것과 장사를 하여 번 돈을 합해 2년째 10월에 송아지를 살 수 있었다. 송아지 값이 당시 5만 원 정도 하였는데, 일 년 길러 3년째 되던 해에 돌이 된 소를 파니 10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중 8만 원을 투자하여 논 500평을 구입하였다. 논을 사고 남은 2만 원과 다시 그동안 벌어들인 돈을 합해서 이번에는 12만 원을 주고 어린 소 한 마리를 구입하였다. 그는 이런 식으로 해마다, 또는 이태마다 소 한 마리씩을 키우고 팔고 하면서 500, 550, 600평 단위로 논을 사들였다. 이렇게 20년 간을 모아서 사들인 논이 모두 500600평 단위의 논 10개 구역이 되었고, 마흔 두 살에 이를 팔아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지었다. 물론 김치장사만으로 이런 일이 이루어졌던 것은 아니었지만, '김치장사 해서 땅 사고 집 짓는 아줌마들'의 한 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3. 경기남부에서 인천외곽으로, 다시 경기서부로소의 경우

 

위에서 서창동 독굴 마을에 거주하는 구창씨가 농사와 각종의 품팔이, 그리고 김치행상으로 모은 돈으로 소를 사서 재산을 불려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이러한 '재테크' 방식은 당시의 농민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일반적인 것이었다.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박중(. 1922년생)에게 보통 소를 몇 살까지 기르는지를 묻자 "우리는 그렇게 안부려봤지만 강원도에 가보면 소 한 마리를 가지고 30, 40년씩 부리는 경우도 있어요. 우리는 그렇게 안하고 소 한 번 사면 일 년 정도 부리고 개우(改牛)를 하거든. 사서 그걸 살을 찌워서 팔면 돈이 되니까. 보통 날읍(유치 4개 정도를 영구치로 갈이한, 보통 태어난지 만 3년 정도 된 소)된 거는 사야 일을 시키니까. 그런 걸 사서 일 년 정도 키우면 소가 살이 붙고 아주 좋아진다구"라고 설명하였다.

 

인천부/부천군/인천시민들이 주로 이용했던 우시장은 만석동의 우시장, 그리고 부천군 소래면 신천리(현재의 시흥시 신천동)의 뱀내장[蛇川場]이었다. 만석동의 우시장은 중간에 생겼다가 곧 없어졌으므로, 주민들의 기억에도 그리 크게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더 이문을 남기고 팔기 위해서는, 부천의 황어장(주민들은 보통 황어장을 '황에장' 또는 '황해장'이라고 부른다. 현재의 인천시 계양구 장기동)이나 김포의 양곡장으로까지 출시하는 일이 있었다.

 

남동구 구월동 전자울 마을 태생인 윤길(. 1931년생)에 따르면, 전자울의 주민들은 주로 신천리의 뱀내우시장을 보러 갔지만, 그 외에도 황어장이나 양곡장, 수원장, 오산장을 드나들며 소를 거래하기도 하였다. 평균적으로 소값을 따지면 오산장수원장뱀내장황애장양곡장 순으로 소값이 비싸질 것이라고 하였다. 양곡우시장은 '김포에 수리조합에서 하는 농사가 많으니까 소를 많이 사서' 소값이 비쌌다고 한다. 따라서 양곡우시장으로 출장하는 목적은 주로 소를 팔기 위한 것이었다.

남동구 수산동 발촌 마을에서도 우시장은 신천리 뱀내장(현재의 시흥시 신천동)으로 다녔다. 소를 살 때나 팔 때나 뱀내장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을에 소장수가 들어와서 소를 사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는 해방 후의 일이며 일제시대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한다. 발촌 마을 태생인 송석(. 1919년생)'뱀내장 외에 수원장이나 황어장으로 소를 매매하러 가는 경우가 있었고, 멀리 가면 김포의 양곡장으로 가기도 하였다. 이 네 개 우시장간의 소값을 비교하면 수원이 소값이 가장 싸고 소도 많았으며, 뱀내장, 황어장, 양곡장으로 소값이 점차 비싸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원 등지까지 소를 사러 가는 것은 농민 일반이 모두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 '소를 잘 보는 사람은 멀리 가서도 사지만 우리같이 모르는 사람들은 신천리에서 그냥 산다'는 것이다. 그는 '양곡장에 가는 사람들은 주로 소를 팔러 가는 것인데 보통 서 너 살 먹은 소들을 가지고 갔다. 암소를 길러서 새끼를 잘 낳고 일을 잘 하면 그대로 두고 키우고, 새끼를 잘 낳지 못하거나 일을 못하면 양곡장 등지로 소를 팔러 나섰다'고 설명을 달았다. 남동구 장수동 장자골에서도 역시 뱀내장을 주로 가지만 황어장이나 양곡장에 가는 일이 더러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남동구 남촌동에서도 주로 뱀내우시장을 이용하였다. 이는 팔 때나 살 때가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드문 일이지만 '좋은 소를 산다고' 해서 수원장까지 가는 일도 있었다. 김재씨의 경우 양곡이나 황애장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아마 남촌동에 살던 벌중개(원중개인 밑에서 먹고사는 사람)를 서는 사람들도 거기는 가지 않고 뱀내장에만 갔을 것'이라고 하였다.

 

서창리의 주민들 역시 보통 신천리 뱀내장에서 소의 거래를 하였는데, 소를 살 때는 어쩌다 수원장이나 황어장에 가는 일이 있었지만, 소를 팔 때는 대개 뱀내장에 갔다. 살 때와 팔 때를 막론하고 서창리 사람으로 양곡장에 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박중씨에게 수원장과 황어장, 동대문밖장의 소값을 비교해달라고 하자 '그 날 그 날 운 따라 중개 잘 만나면 잘 사는 수도 있고'라고 하였으며, 살 때는 멀리 가기도 하는데 반하여 팔 때 멀리가지 않는 이유를 묻자 '팔 때는 멀리 가지고 나가도 별로였던 것 같다'면서 "그렇게 멀리까지 소를 걸려서 가면 소가 진이 빠져서 제값을 못받거든. 수원장에서 사오면 소가 하도 고생을 해서 몇 일 동안은 다리를 쩔쭉 쩔쭉 하고 그랬으니까"라고 대답하였다. 송석씨의 이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소장사에 나서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음을 말해주는 것일 터이다. 또한 남촌동과 서창동 등지는 양곡장의 출시권역에서 제외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박중씨는, 소의 출신 지역에 대해서 '저 아래(수원) 가서 사오면 경상도서 영남치가 올라오는데, 영남치가 좋다는 말을 했다'고 하였다. 영남치는 '등치가 작은데 작은 것도 일을 가르쳤고, 거기서 어떻게 먹였는지 모르지만 여기 와서 소를 먹여보면 잘 불어난다'고 하여 좋은 소로 쳤으며, '경기도에서 나는 소보다 먼 데서 오는 소가 더 좋다고 했다'고 한다. 한편, 황애장터에는 강화도와 황해도에서 오는 소들이 들어왔는데, 이를 '황치'라고 불렀다. 황치에 대해 박중근씨는 '황치가 소가 크긴 큰데 거세다고. 잘못되면 소가 억세서 사람이 휘지를 못해. 일을 시키는데 휘어 부리지를 못하고 끌려간다고'라고 설명하였다. 강원도소에 대해서는 "트럭 나오고 80년경에 웬만한 집집이 다 소를 먹이다시피 해서 고기소를 강원도서 사오는데 소가 다르더라고. 거기서 좋은 풀을 먹기는 하지만 소가 알곡도 좀 먹어야되거든? 거기 가서 보면, 거기서는 낮에 보면 옥수수단 하나 던져주고 끼니를 잇고 그러니까. 그런 거 장에 가면 걸레, 아주 개값이지. 그런 거 갖다 먹이면 소가 아주 푹푹 늘어나"라고 하였다. 말을 다르게 알아듣지 않냐고 묻자, '전라도서 온 소는 말이 달라서 말을 안듣는다'면서 "왼쪽으로 가는 거는 어뎌 어뎌 이러는데, 전라도서는 그 때 자라 자라 자라 그러거든. 그래서 왼쪽으로 가야되는데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이렇게 (다른 방향으로) 가고, 그냥 가고 그런다구"라고 하였다.

 

김재씨의 경우 황해도소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지만, 경상도소와 전라도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지식이 있었다. , 수원에는 전라도와 경상도에서 오는 소들이 있었는데, 전라도 소는 사람을 받고 하여 회피되었지만 경상도 소는 농사일을 잘 해서 선호되었다는 것이다. 김재씨는 그렇게 일을 잘 하는 경상도소를 '제곶소' 또는 '제곶내기'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는 '경상도 소라는 뜻'이다. 물론 제곶소라고 해서 모두 일을 잘 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가 자랄 때만 해도 멀리서 오는 소가 그리 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소의 출신지역에 대한 지식은 경기도 일대에 어느 정도 공통되는 것이면서, 그 위치에 따라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또한 대체로 비슷한 우시장을 이용하는 같은 인천시내에서만 해도 소거래의 양상이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앞서 남촌·서창동과 구월·수산동에서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지만, 인천시에 속하는 도서지역의 경우 이 차이는 조금 더 두드러지게 된다.

 

영종도의 운남동 남디 마을에 거주하는 추문(.1927년생)는 장을 보러 갈 경우 시내의 중앙시장에 많이 갔는데, 중앙시장에는 우시장이 없었기 때문에 '운남동에서 소를 사려면 소래에 가서 샀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의 경우 소를 사는 일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집에서 기르는 소가 새끼를 낳으면 송아지를 길러서 일소로 삼고 늙은 소는 파는 식으로 경영하는 것이 기본적인 상태였다. 소를 팔 때도 우시장으로 직접 가지고 가는 일이 거의 없고, 소장수가 마을로 들어오면 이들에게 넘기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그는 '소래에 가서 팔면 약간 비싸게 받겠지만 대개 앉아서 판다'고 이야기하였다.

 

운남동 반길안 마을에 거주하는 김태수씨(. 1920년생), '뱀내장에는 충청도에서 올라오는 소들이 있어서 서울놈들이 와서 된박같이 살찐 소를 사가지고 갔다'고 하였다. 영종도에서 나가는 소들은 뱀내장보다는 양곡장으로 많이 갔는데, 소를 가지고 우시장으로 가는 사람들은 일반 농민이 아니라 소장수들이었다. 그는 "소장수들은 이 장에서 못팔면 몰이꾼들한테 맡기거든. 어느 장으로 가지고 오너라 하고. 그래서 이 장 저 장을 돌아다니는 건데우리는 전부 영종에서 길러서 팔거든. 장사꾼한테 팔기도 하고 직접 갖다가 팔기도 하지만 여기서 팔 수 있으면 여기서 팔아야지. 장에 가지고 가면 '영종서 촌뜨기 소 가지고 왔다'고 빽 돌려놓으면 사는 사람도 없어. 그러면 하루 종일 고생하다가 싸게 파는 거지"라면서 영종도 사람들이 소장수들에게 의지하게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영종도에서 소를 싣고 갈 때는 소를 싣는 배가 따로 있었다. 소를 싣는 배는 바닥이 얕아야 하므로 일반 연락선에는 소를 싣지 못했고, 그래서 이는 영종도에서 월미도로 사람을 실어 나르는 배와는 다른 배였고, 배를 대는 곳도 달랐다. 추문씨는 약 60년 전까지 이런 배들이 운행하였다고 했는데, 다른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이보다 훨씬 나중에 이르기까지 이런 배들이 왕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시 이러한 배를 통해서 소 운반을 담당하는 집단은 일반농민이 아니라 전문적인 우상인들이었다. 만석동 일대에서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에 배를 대는가 하는 문제는 그때마다의 사정에 따라 약간씩 달랐던 것 같다.

추문씨는 영종도에서 소를 수집한 소장수들은 배를 타고 만석동에서 뭍으로 올랐다고 하였다. 같은 남디 마을에 거주하는 윤효(. 1937년생), 소만 실어 나르던 풍선들은 인천 청라도(현 서구 쓰레기매립지 구역에 포함된 파렴 지역)를 통해 '개울'을 따라 뭍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한편, 김태씨는, 양곡장으로 가려는 소장수들은 만석동(또는 청라도나 율도)이 아니라 안동포와 검단의 사이로 배를 대고 여기에서 양곡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그 정확한 지명이 어디인지를 김태씨로부터 확인할 수 없었지만, 왕길리, 곧 현재의 인천시 서구 검단동 대왕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한말이나 일제시대에 작성된 지형도를 통해서 보면, 해안지대가 대부분 갯벌로 둘러 쌓인 가운데 왕길리를 향해서 수로가 깊숙이 뚫려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소장수들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소를 팔러 양곡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이곳으로부터 양곡까지는 걸어서 3, 4시간 거리였다.

 

 

참고문헌

大東輿地圖』 『戶口總數(1602) 林園經濟志』 『京畿誌(12178)

京畿邑誌(12177) 增補文獻備考

越智唯七(), 1917,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京城: 中央市場.

文定昌, 1941, 朝鮮市場, 日本評論社.

山口 精(), 1910, 朝鮮産業誌(), 京城: 日韓印刷株式會社.

善生永助, 1924, 朝鮮市場(調査資料 第8), 朝鮮總督府.

, 1926, 市街地商圈(調査資料 第14), 朝鮮總督府.

, 1929 朝鮮市場經濟(調査資料 第27), 朝鮮總督府.

, 1933, 朝鮮聚落()(朝鮮總督府調査資料第三十九輯).

仁川府, 1933, 仁川府史.

김성훈, 1977, 한국농촌시장의 제도와 기능연구: 그 사적고찰과 구조기능의 분석

(농업경제연구보고 88), 국립농업경제연구소.

인천광역시, 2002, 인천광역시사.

한글학회, 1986, 한국지명총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