똥고개의 추억, 인천 달동네박물관을 다녀오다 _ 이희환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5-14 22:06:29
똥고개의 추억, 인천 달동네박물관을 다녀오다 _ 이희환
1924년 4월 20일자 『동아일보』 소식란에는 「연일 놀이도 많다」는 부제를 달고 벚꽃으로 꽃바다를 이룬 인천의 꽃놀이 소식을 내보내고 있다. 일제의 조선 강점 이후 1910년대 들어 풍치지구로 지정되고 벚꽃이 대대적으로 식재된 월미도는 식민지시대 내내 봄철의 벚꽃놀이의 명소로 이름이 높았다.
송림산이란 지금은 대규모의 아파트촌으로 변모한 수도국산의 옛 이름이다. 옛 지명이 만수산(萬壽山)인 송림산(松林山)은 소나무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어느덧 구도심의 한가운데 비죽이 솟아 아파트와 공원으로 재개발되었지만, 이곳은 대대로 서민들이 모여 살던 인천의 대표적 달동네 지역이었다. 개항 이후 인천을 강제로 개항시킨 일본인들이 제물포 일대(오늘날의 인천 중구)로 밀려들자 조선인들은 억지로 이 산 언저리로 쫓겨와 옹기종기 모여 살기 시작하였다. 1910년 12월 1일 이곳에 수도국 저수지가 생겨서 이후로는 수도국산(水道局山)이라는 애칭이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때는 우거진 소나무와 일본인들이 심어놓은 벚꽃으로 하여 자연의 아름다운 풍취를 선보이던 영화로운 시절도 있었다. 수도국산은 그러나 8·15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전재민과 피난민들이 판자촌을 이루고 모여 사는 혈거부족들의 삶터로 변모하였다. 황해도 피난민들의 사투리가 들리는 한편으로 전후 복구기를 거쳐 1960~70년대에는 산업화의 물결을 따라 고향을 버리고 도시로 몰려들던 삼남의 장삼이사들은 가녀린 삶의 보금자리를 이곳에 마련하고 타향살이의 설움과 더불어 쨍하고 해뜰날의 희망을 가슴에 부여안고 가파른 고갯길을 오르내렸을 터이다.
우리들의 아버지와 엄마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그 시절 수도국산 달동네의 풍광은 이제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비좁은 골목길은 구불텅한 곡예를 하면서 수도국산의 능선에 가닿고, 그 고갯마루를 넘어 도심지대인 동인천과 인천항 일대로 나가 먹을 것을 구해왔던 시절. 그 골목길의 초입에 자리 잡은 구멍가게와 복덕방, 연탄집과 쌀가게를 한참 지나 내려가다 보면 이발소도 나오고 솜틀집과 만화가게, 그리고 깡시장이 있던 곳. 가파른 똥고개를 오르내리며 아이들은 구슬치기와 고무줄놀이, 숨바꼭질과 말뚝박기에 정신이 없고, 뻥튀기 아저씨라도 동네에 찾아올라치면 온동네 아이들이 환호하던 곳. 여름이면 비가 새는 지붕 틈으로 밤하늘의 총총한 달과 별을 헤아리고, 겨울이면 매서운 바람에 이불전쟁을 하던 그곳. 구공탄이 지핀 방바닥은 손바닥만한 아랫목만 미지근하게 데워 놓을 뿐 머리맡에 떠다놓은 냉수는 쨍쨍 얼어붙었던 그 겨울의 추위. 추위와 가난 속에서도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인정만은 따뜻했다. 그 신산스러운 전쟁터와도 같은 삶터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강도도 도둑도 아닌 연탄가스였다. 시시때때로 껌벅이다가 나가버리는 전깃불이며, 먹을 물조차 나오지 않는 고지대 삶의 설움은 물지게를 져야 했던 어린아이들이 먼저 뼈저리게 체험해야 했다.
김일 선수의 레슬링 시합이 있는 날에는 저 아랫동네의 전파사 앞에서 올망졸망 키를 재던 아이들에게 그래도 명절은 그들만의 세상이었다. 추석이면 폭음탄을 터트리며 달동네 온 골목을 헤집고 다니고, 설날에는 텃밭의 공터에 모여 세상을 향해 멀리 소망의 연을 띄우던 곳. 세뱃돈이라도 받을라치면 딱지도 사고 뽑기도 하고 껌도 씹던 그때 그 시절의 달동네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송림산 언저리 5만5천 규모의 산등성이에 자리 잡았던 인천의 대표적 달동네였던 수도국산 달동네는 도시주거환경개선사업에 의해 일시에 정비되고, 지금 그 자리에는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구도심의 한가운데로 흉물스럽게 솟아 있다. 아파트촌의 조성과 함께 달동네 아이들이 연을 날렸을 법한 자리에는 공원이 조성되고 그 한가운데 현대적 건축물의 외관을 자랑하는 달동네박물관이 2005년 10월 25일 개관하였다. 인천광역시 동구가 인천의 대표적 달동네 지역이었던 수도국산을 재개발하면서 전국에서 최초의 서민들의 생활사를 복원한 달동네박물관을 개관한 것이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 안에 달동네의 풍광과 삶의 모습을 알뜰하게 재현한 달동네박물관은 한 시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우리가 벌써 아스라이 잊어가고 있는 지난 연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박물관을 나오자마자 앞을 가로막고 선 거대한 고층아파트의 차가운 위용과 함께 우리는 새로운 개발이익을 쫓아 끊임없이 개발의 봉토를 요구하는 냉엄한 자본의 논리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이 고단한 자본의 무한질주에 때로 지쳐 옛날이 그리울 때, 인천 수도국산에 자리 잡은 달동네박물관을 찾아볼 일이다.
글·사진/이희환 lhh400@hanmail.net
인천작가회의 회원, 인천도시환경연대회의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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