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의 침묵 금해호 총성의 진실-(1)사건의 전말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5-19 15:34:22
평온한 여객선이 생지옥으로
35년의 침묵 금해호 총성의 진실-(1)사건의 전말
35년 전 인천에서 강화로 가던 금해호에서 총성이 울렸다. 승객 4명이 숨지고 13명이 크게 다쳤다. 하지만 그 참사는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다. 진실은 여객선을 납치한 무장공비 진압으로 왜곡됐다.
(▲해군 경비정의 무차별 총격으로 승객 4명이 숨진 비운의 여객선 금해호(29t급).)
무장공비로 오인된 전투경찰대원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말이 없다.유족은 어린 내 아들 딸이 왜 주검이 됐어야 했는지 아직도 알 길이 없다. 팔꿈치가 으스러진 부상에도 아무 말을 못했다. 생존자들의 증언과 기록을 통해 금해호 사건의 진실을 추적한다.
1972년 8월10일 오후 5시40분 인천시(당시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동검리 앞바다. 저녁이 가까워지고 있으나 수은주는 25.3도를 가리킬 정도로 후텁지근한 날이었다. 하늘빛도 맑아 자유공원에서 영종도까지 2배 거리인 20km의 밖까지 눈에 들어왔다.
여객선부두였던 중구 북성동 8부두에서 이날 오후 2시30분쯤 출발한 인천~강화 간 정기여객선 ‘금해호’는 여느 때처럼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를 향해 한가로이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그런대로 피서철 특수를 탄 2층짜리 금해호에는 50여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큰댁을 찾는 초등생들, 외갓집을 다녀오는 10살 난 꼬마와 그의 아버지, 백일 된 아이를 업고 길을 나선 20대 새댁, 친동생의 생일상을 차려 먹고 집으로 돌아가던 50대 부부….
여유로움도 잠시, 금해호는 느닷없이 뱃머리를 인천 쪽으로 틀었다. 승객들이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 채는 순간, 왼손에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든 군복차림의 전투경찰 안모(당시 21세) 일병이 선장실 바로밑 1층 객실로 들이닥쳤다. 선장 권모(당시 38세)씨는 배꼬리 쪽으로 이미 몸을 피한 뒤였다.
“난 전경이다. 서울서 사람을 죽여 옷장 속에 넣어 두고 오는 길이다.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수류탄을 터뜨리겠다.” 안 일병의 엄포에 객실 안 승객 26명은 오금이 저려 숨이 멎는 듯했다. 안 일병은 한달 전 막사안 무기보관함에서 빼돌린 수류탄 2발을 같은 해 8월3일 정기외출 때 몰래 갖고 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숨죽였던 객실분위기는 조금씩 누그러졌다. 안 일병은 객실 안 매점에서 빵과 음료수 등을 꺼내 얼굴이 허옇게 질린 승객들에게 건넸다.
“내게도 부모 형제가 있다. 아무 죄없는 사람들을 해칠 몹쓸 사람은 아니다.” 안 일병은 그렇게 한 시간여를 얘기하며 승객들을 안심시켰다.
금해호가 작약도 앞바다에 이를 무렵, 난데없이 나타난 해군과 해양경찰 경비정 15척이 금해호를 에워쌌다. 몸을 숨긴 선장이 무장공비 출현을 뜻하는 적기를 걸고 구조요청을 하자 때마침 지나가는 배가 군부대에 긴급 무전연락한 탓이었다.
(▲35년의 침묵, 1972년 금해호 사건 당시의 정황과 증언이 담겨있는 판결문. 김성중기자 jung@i-today.co.kr)
경비정은 이내 불을 뿜었다. 목선인 금해호 선체는 총탄에 맥없이 구멍이 뚫렸다. 금해호 사무장이자 청원경찰인 김모(당시 28세)씨는 부랴부랴 경비정과 마주한 반대편 1층 갑판으로 승객들을 피신시키고, 연신 양손을 엇갈려 저으며 사격을 저지했다.
처절한 몸짓이 경비정에 먹혀들지 않자 김씨는 배에서 밥을 짓는 ‘화장’ 최모(당시 17세)씨를 바다에 밀쳤다. 승객이 죽어 나자빠지니 얼른 경비정으로 헤엄쳐 ‘사격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라는 급박함에서였다.
하지만 최씨가 경비정에 닿기 전 금해호에선 돌이킬 수 없는 참사가 벌어지고 있었다. 엉덩이를 뚫고 왼쪽 무릎으로 빠져나온 총탄에 김씨는 혼절하고 말았다.
금해호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객실 안으로 날아든 탄알은 안 일병의 왼쪽 어깨를 파고 들었다. 안 일병의 손을 벗어난 수류탄은 ‘펑’ 하는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찰라, 동구 송현초교에 다니던 자매 중 언니(당시 11세)는 왼쪽 가슴에, 동생(당시 8세)은 배와 엉덩이에 총탄과 수류탄 파편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져 널부러졌다.
숭의초등학교 학생이던 두 남매도 한 맺힌 짧은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누나(당시 13세)는 머리를 향해 날아 든 총알에 주검이 됐고, 남동생(당시 10세)은 수류탄 쇠조각이 박힌 다리에서 흐르는 피를 막지 못해 병원서 끝내 숨졌다.
객실 안은 부상자 14명이 토해내는 피의 얼룩과 애끓는 신음소리로 생지옥이었다. 백일 된 아이를 안고 있던 스무 살의 새댁은 총탄에 오른쪽 팔꿈치가 으스러졌다. 겁에 질린 50대 아낙은 오른쪽 장딴지에 파편과 총알을 맞고 고꾸라져 실신하고 말았다. 사탕을 사러 매점에 내려갔던 철부지 초등생(당시 10세)도 왼쪽 팔에 총상을 입었다.
참사가 있은지 2년 뒤인 1974년 12월 안 일병은 살인죄 등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고, 금해호의 총성은 35년간의 침묵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여객선을 납치한 무장공비 진압이라는 허울에 가린 채….
박정환·최보경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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