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찾아보는 인천의 근현대인물 100인
仁川愛/인천의 인물
2007-01-14 05:18:26
새롭게 찾아보는 인천의 근현대인물 100인
일러두기 - 이희환
- 인천광역시사의 인물편에서 주요인물을 가려 뽑고, 여기에 빠진 주요인물들을 추가하여 작성하였습니다.
- 친일과 냉전, 반민주로 인해 온전히 청산되지 못한 인천 지역의 과거사를 다시 재정립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운동가나 월북 문화예술인들을 적극적으로 발굴, 수록하였고, 친일 행적이 있는 일부 인물들도 함께 수록하였습니다.(사회주의 운동가들에 대해서는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참조, 기타 새롭게 발굴된 인물에 대해서는 선자의 논문에서 일부 발굴함)
- 한국근대사의 보편성을 가진 인물이면서도 인천 지역사에서 빠뜨릴 수없는 인물들은 함께 포괄하였습니다.
- 외국인의 경우 인천지역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던 개항기의 인물들을 포괄하였습니다.
- 인물에 대한 설명이 짧다고 하여 그 인물의 비중이 낮은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 해방 후 활동하였던 현대의 인물이나 생존인물에 대해서는 엄격한 선발의 어려움이 있음을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 분류가 다소 자의적일 수 있습니다.
1) 민족운동가
1> 백범 김구[金九 1876∼1949]
독립운동가·정치가. 황해도 해주(海州) 출생. 초명은 창암(昌巖)·창수(昌洙)·구(龜). 자는 연상(蓮上), 초호는 연하(蓮下), 호는 백범(白凡). 법명은 원종(圓宗), 환속명은 두래(斗來). 본관은 안동(安東). 15세부터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을 배우면서 과거공부를 하다가 부패 타락한 봉건사회에 대한 반감으로 18살에 동학에 입교하여 19세에 팔봉접주가 되었다. 1894년 해주에서 정덕현(鄭德鉉) 등과 함께 척양척왜(斥洋斥倭)의 기치를 들고 탐관 오리와 일본인 숙청을 목적으로 일어났으나, 일본군에 쫓겨 만주로 들어가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義兵團)에 가입하여 활약했다. 21세 때 귀국,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는다 하여 안악(安岳) 치하포에서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士田壤亮]를 죽임으로써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이룩했으나 곧 체포되었다.
인천감옥에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誌)》 등을 읽고 처음으로 신학문·신문명에 접했다. 고종의 특사령(特赦令)이 내려져 사형은 면할 수 있었지만 당시 일본인들의 간섭·방해로 석방되지는 못하고, 1898년 인천감옥을 탈옥하여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이듬해 환속하여 황해도 장연(長淵)에 봉양학교(鳳陽學校)를 설립, 교단에서 계몽과 교화에 힘쏟았다.
1905년 진남포(鎭南浦)에서 을사늑약(乙巳勒約) 소식을 듣고 이준(李儁)·이동녕(李東寧)과 함께 상소를 올리고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는 등 구국대열에 선봉이 되었다. 1909년에는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의거에 관련된 혐의로 해주감옥에 다시 투옥되었고, 석방 뒤 안악의 양산학교(楊山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10년 신민회(新民會)의 황해도 대표로 참가했으며, 이 회의에서 국내에서는 대일항쟁을 전개하고 국외에서는 만주에 무관학교를 세워 광복군을 양성할 것 등이 결의되었다. 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두 번의 감형으로 14년에 가출옥되어, 동산평(東山坪) 농장에서 농감(農監)으로 일하며 농촌운동을 전개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上海]로 망명해 임시정부 경무국장(警務局長)으로 취임, 이어서 내무총장(內務總長)·국무총리대리·국무령(國務領)을 지내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28년 이동녕·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조소앙(趙素昻)·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결성해 당수가 되었다. 29년 재중국거류민단 단장을 맡았으며, 31년에는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32년 그의 지휘 아래 있던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히로히토 천황[裕仁天皇]을 저격하려다 실패하고, 윤봉길(尹奉吉)은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활동을 시작했다. 33년에는 장제스[蔣介石]와 만나 한국의 무관양성소 설치를 합의했고, 35년 이동녕·조완구·김붕준(金朋濬)·엄항섭(嚴恒燮)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지지세력이 될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새로이 창당했다.
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40년에는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한국민주당 3당이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자 그 집행위원장이 되었으며, 한국 광복군총사령부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했다. 44년 임시정부 주석(主席)에 재선임,
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했으나 8·15로 귀국했다. 불행히 임시정부는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고, 모스크바 3 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가 결의되자 이에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전개했다. 46년 2월 국민회의 비상국민회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民主議院)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 부총재 등을 지내며 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우익진영을 이끌었다. 48년 유엔소총회에서 남한만의 총선거가 결의되자 이에 반대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북으로 가 평양에서 정치회담을 가졌으나 실패했다. 그 뒤 남한만의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이 정권을 장악했으나 그는 계속 민족의 양심에 호소하여 민족통일의 원칙을 주창했다.
49년 6월,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安斗熙)에 의해 경교장(京橋莊)에서 저격당해 절명했다. 그해 7월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추서되었다. 김구암살사건의 진상은 오랜 기간 규명되지 않고 있었으나, 민간차원의 꾸준한 조사가 진행된 결과 안두희의 우발적 단독범행이 아니라 면밀하게 모의된 정권적 차원의 범죄였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최소한 도의적 책임이 있고 사건 뒤처리에 개입한 것이 확인되었다. 김구는 완전한 자주독립노선을 추구한 지고지순한 민족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2> 강화석(姜華錫), 강준(姜準) 부자
가톨릭 신자이자 관인의 신분으로 개항장 인천에 깊이 관여하면서 전방위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인물 중에 강화석이란 인물이 있다. 세레명이 요한인 강화석(본관 晉州)은 1845년 평안남도 중화군에서 출생하였다. 황해도 지방의 권세 있는 반가에서 출생한 것으로 짐작되는 강화석은 어려서는 사서를 읽으며 과거를 준비하다가 1865년 약관의 나이에 이르러 가톨릭에 입교하였다. 대원군 정권의 대대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황해도 지방에 잠입하여 전교활동을 벌이고 있던 베르뇌(Berneux) 주교로부터 영세를 받은 것이다. 이후 강화석은 일생 동안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험난한 시기를 살아간다.
강화석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고향 중화 지방이 일찍부터 천주교 포교가 이루어진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베르뇌 주교에 앞서 일찍부터 전교 활동을 하고 있던 김기호(金起浩)의 노력 덕에 중화 지방에는 많은 영세자가 배출되었고, 때문에 이 지역은 천주교의 황해도 진출에 관문 같은 구실을 하였으며 이 때문에 병인박해 때에는 대표적인 수난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로 보면 강화석의 입교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이는 마치 남인 양반층이 서학과 천주교와 깊이 몰두한 사정과 근사하다 할 것이다.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로 인하여 강화석도 여러 차례 체포되었으나 부친의 영향력으로 풀려나곤 하였다 한다. 그는 결국 병인박해를 피해 1870년 중국으로 건너간다. 신앙심이 웬만큼 깊지 않고서는 어려웠을 선택인데, 천주교를 통해 서양의 사정에 눈을 뜬 그가 대원군의 답답한 쇄국정책과 가혹한 종교탄압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중국으로 건너간 그는 한어를 공부하는 한편 리델(Ridel) 주교를 도와 ?한불자전(韓佛字典)?을 편찬하는데 일조하기도 하였다. 1873년에는 리델 주교를 따라 북경으로 가서 프랑스 공관의 힘을 빌고 중국 의례부를 통해 조선 고종에게 외국과의 통상에 임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준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876년에는 리델 주교를 따라 상해에 머물며 각국조계를 통해 서양 문명을 실감하였다. 이후 일본 고오베(神戶)와 상해를 오가며 일어와 영어를 배우던 그는 인천 개항이 임박한 1882년 10월에 민영익(閔泳翊), 묄렌도르프와 함께 상해로부터 10여년만에 고국에 귀국하였다.
그가 이 두 사람과 입국하였다는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민씨 세도정권의 중추적 인물인 민영익은 당시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독변권지판사무(督辨權知辨事務)의 자격으로 해관 창설 사무를 교섭하러 중국에 갔던 것이다. 이홍장의 추천에 따라 그는 청국 해관에 근무하였던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교섭하여 귀국길에 올랐던 것이다. 묄렌도르프는 이리하여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협변이자 총세무사로서 조선 해관 창설 업무를 담당하게 이른다.
강화석이 이들과 함께 귀국한 이유는 자명하다. 묄렌도르프와 함께 조선 해관 창설의 주요한 역할을 맡기고자 조선 정부에 의해 고빙된 것이다. 조선인으로서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 서양 사정에 눈밝고, 불어 · 영어 · 중국어 등 여러 외국어에 능통한 그였기에 해관 창설에 있어 적임자를 달리 찾기 어려웠을 터였다. 당시에 조선 내에서 관세 업무에 능통한 인재를 찾기 어려웠을 뿐더러 청국의 압력에 따라 외국인을 총세무사(總稅務司)로 고빙해야 했던 조선 정부로서는 강화석을 찾게 된 것이 더없이 반가웠을 것이다. 귀국 직후부터 해관 창설 실무에 착수한 강화석은 1883년에 조선 해관이 설치될 때 방판(幇辨)에 임명되면서 처음 관직에 나아간다.
그러던 그가 인천과 인연을 맺은 것은 1887년 3월 16일 교섭아문(交涉衙門)의 주사 직급으로 인천 해관의 방변에 발령된 뒤부터의 일이다. 이 해 11월16일자로 서기관으로 직급이 올라간 뒤로 인천 해관에서 줄곧 근무하던 그는 1889년에 주일본 조선공사관에 파견되어 1년간 근무하다가 귀국하여 다시 인천항 서기관으로 일하였다. 1893년에는 강화수군 총제영(總制營)에서 운영하는 학당의 영어 교사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894년에는 교섭아문의 주사로 1895년에는 농상공부 주사로 일하였다. 청·일 전쟁의 수습차 2개월간 중국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 해 윤5월에 개항장에 새로 경무청관제가 실시되자 제물포 경무관(警務官)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1896년에는 개혁법령 제1호 재판소구성법이 제정·공포됨과 함께 한성재판소의 판사로 임명되었다. 당시 한성재판소와 개항장재판소는 일반 민·형사 사건 외에도 외국인과 조선인간의 민·형사 사건을 재판하였고 원칙적으로 단독판사가 재판권을 행사했다. 해관 업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뒤로 강화석은 그 능력을 인정받아 외교관으로 일본과 청나라를 내왕하며 중요한 외교적 현안을 관장하였고 귀국해서는 경무청 경무관, 재판소 판사 등의 직책으로 새로운 근대적 제도를 안착시키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해나갔던 것이다.
1897년 9월 19일 강화석은 복설된 감리서 제도에 따라 인천항 감리 겸 부윤 겸 판사(종3품)로 임명되었다. 복설된 감리서의 감리는 각국영사 교섭과 조계 및 항내 사무 일체를 관장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1895년 이전의 감리 업무보다 일층 그 업무가 확대되었다. 여러 개항장 중에서도 가장 큰 인천 개항장에 그가 감리 겸 부윤으로 임명됨으로써 그는 ‘새인천’ 의 근대적 제도화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게다가 당시의 감리는 학교관제에 따라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인천지교(漢城外國語學校 仁川支校, 인천상업학교의 전신)의 교장직을 겸임하게 되어 있었다. 강화석은 그 교장직까지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가 인천항 감리로 부임한 기간은 고작 3개월 정도였다. 징계를 받고 갑자기 감리에서 해임되었던 것이다.(?관보?, 광무 원년 9월 22일자.) 징계의 사유는 천주교 신자를 경무청의 순검으로 채용한 것에 반감을 품은 경무사(警務使) 및 감찰과의 알력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징계는 1898년 4월에 풀려서 6월에는 중추원(中樞院) 2등 의관(議官)으로 임명된다. 한달 만에 다시 외부(外部) 참서관(參書官)으로 임명되어 2년간 일하다가 1900년 농상공부 기사주임 1등으로 전임되었고, 1902년 8월에는 박람회(博覽會) 위원까지 겸임하였다. 1904년에는 농상공부 참서관주임 1등으로 1907년 6월에는 서기관으로 승진하여 정년을 마친 듯 하다.
1917년 반신불수병을 얻어 황해도 수안 지방의 들무정이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겨 살게 되었다. 그가 수안 지방으로 옮긴 이유는 그의 뒤를 이어 인천 해관에서 근무하던 아들 강준(姜準, 바오로)이 1910년 경술국치 후 관직을 사임하고 영국인이 경영하는 수안광산의 총지배인 겸 영어 통역관으로 가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안 지방에서는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부유하며 영향력이 컸던 아들 강준 곁에서 강화석은 병고를 겪으면서 10여년 동안 선종을 예비하였다.
강화석의 입교 이후로 그의 집안은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아들 강준 역시 독실한 천주교 유력 신자였거니와, 강화석의 손녀요 강준과 유마리아 사이의 둘째딸인 강마리아(젤드루다)는 어린 나이에 수녀가 되어 종교생활에 정진하다가 1918년 11월에 선종하였다. 손녀의 죽음을 지켜보며 조용히 선종을 예비하던 강화석은 1926년 3월 2일 모든 성사와 임종전대사를 받고 생을 마감하였다. 가톨릭 유력신자인 그의 사망을 가톨릭 기관지인 ?경향잡지?는 자세하게 보도하고 있다.
강화석은 조선이 근대 제도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해관, 경무청, 재판소, 감리서, 외부, 농상공부 등의 다양한 부서에서 여러 업무를 통괄하며 근대 제도가 안착하는 데 있어 적지 않은 실무의 중책을 담당한 직업적 행정관료로 판단된다. 그러나 그는 비단 관직의 공무에 한정하여 활동한 인물이 아니었으니 인천을 주무대로 삼아 종교와 교육, 계몽운동에 걸쳐 다양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의 아들 강준과 함께 설립한 인천박문협회는 독립협회 인천지부의 역할을 담당하면서 인천의 자주적 근대화를 모색한 민족운동단체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들의 영향 아래 인천 천주교회에서 인천항사립박문학교를 설립하였고, 강준은 초대 교감에 취임하였다.
3> 서상빈(徐相彬 : 1859∼1928년) 서병훈(徐丙薰 : 1888∼1949년) 부자
서상빈은 인천 태생으로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인천 개항 후에는 부내면장(府內面長)을 지내기도 했다. 1889년 개항 초기에 인천감리(監理)를 지낸 서상집(徐相潗)과 함께 우리 나라 최초의 상인단체이자 상공회의소의 전신(前身)인 인천신상협회(仁川紳商協會)를 설립했고, 신상회사의 실질적인 사장 역할을 했다. 개항과 함께 침투해 들어 온 외국 상인들의 발호 속에서 민족상인을 보호 육성하고 애국운동을 고취하려는 일념에서 활약했다.
1899년 인천에서 최초로 다소면(多所面) 독정리(讀亭里)에 유지들이 사립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세운 데 영향을 받고, 우리 나라 사람의 자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신학문과 영어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제녕학교(濟寧學校)를 설립, 후진 육성에 전념했다. 서상빈은 실로 개항시대를 살아 온 인물 가운데 최초로 육영사업과 민간경제 보호 육성을 실천한 선구적인 인천의 인물이다.
서병훈은 인천 개항 초기 인천신상협회(仁川紳商協會)를 이끌며 민족상인 보호에 큰 공헌을 한 서상빈(徐相彬)의 아들로, 선친이 민족경제 육성에 힘썼던 것을 본받아 1920년대에 하상훈(河相勳) 등과 인천물산객주조합의 이사(理事)로 활약했다. 또한 하상훈의 뒤를 이어 동아일보 제2대 지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더구나 인천의 경제권을 독점하여 좌지우지하는 일본인 기업주들에게 착취당하는 인천의 한국인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운동에 적극 참여, 언론을 통한 배일사상(排日思想) 고취에 전념했다.
4> 정재홍 의사
한말의 구국지사 정재홍은 인명의숙(仁明義塾)의 설립자로서 민족주의적 정치사상과 고취에힘썼을 뿐만 아니라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으로 친일세력의 ‘일진회’와 투쟁하였다. 정재홍 지사는 1907년 6월 30일 ‘일진회’의 주도적 인물 ‘박영효’에 대한 암살을 계획하다가 실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동포들에 대한 민족정신 고취를 북돋았으며, 「사상팔변가」를 남겼다.
5> 이건승(李建昇 : 1861∼1928년)
이건승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되고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 오늘에야 목놓아 우노니)’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리자 울분을 참을 길 없어 이에 기어코 국권을 회복시키는 방도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하고서 애국 동지들을 규합했다. 그리하여 1906년 동지 권병효(權炳孝), 이선재(李善宰) 등 수 명과 협력하여 화도면 사기리(沙器里)에 고등학과 계열의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했다. 청소년에게 애국계몽사상을 고취시키고 구국교육운동을 추진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이 계명의숙의 설립 취지를 국민개학(國民皆學), 무실(務實), 심즉사(心卽事), 실심실사(實心實事), 광개지식(廣開智識) 등으로 정했다. 그러니까 양명학적 세계관에서 신학문을 닦아 독립권을 쟁취 확보하자는 애국정신에서 발로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계명의숙은 1905년에 강화진위대 참령(參領) 이동휘(李東輝)가 제창한 보창학교(普昌學校) 진흥운동에 발맞추어 봉기한 계몽교육운동과 다름없었다. 이 학원은 그 때문에 국내에서도 으뜸가는 교육기관으로서, 교사들도 국내 굴지의 성가(聲價)를 올리던 뛰어난 교육 인사를 초빙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비록 1회 졸업생이 1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유능한 애국 인사를 배출시켰다. 그 뒤 학원은 5년 간 지속되다가 1910년 나라가 완전히 일본에게 강탈당하자, 이건승은 기당(綺堂) 정원하(鄭元夏), 문원(文園) 홍승헌(洪承憲)과 함께 의론한 끝에 결연히 조국 광복의 새 웅지(雄志)를 품고 압록강을 건너 만주 땅으로 건너갔다. 이역만리 낯설기는 해도 옛 우리 조상들의 고구려 고토(故土)에서 동지를 널리 규합하고 젊은이들을 계몽 계도하는 일에 악전고투하다가 그 곳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다.
6> 이동휘(李東輝 : 1872∼1935년)
이동휘는 함경도 단천 출신으로 향리에서 한학(漢學)을 공부하였다. 20세 전에 지방 관청의 용인(傭人)으로 일하다가 서울로 와서 이용익(李容翊)의 소개로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 육군 참령(參領)에 올랐다. 1907년 7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에 의하여 한국군이 강제 해산될 때까지 참령으로서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를 이끌었다. 일제(日帝)의 강압으로 군대 해산을 당한 통분한 입장인지라 1909년 3월 군대 동지인 연기우(延基羽), 김동수(金東秀) 등과 더불어 강화 전등사에서 의병 조직과 궐기의 모의를 획책하였다. 그러나 발각되어 붙잡히고 유배를 당했는데, 미국인 선교사 벙커의 활약으로 10월 초순 무렵 풀려났다. 이 해에 이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개화운동과 항일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1911년에는 윤치호(尹致昊), 양기탁(梁起鐸) 등과 함께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
그는 무관 출신이었으나 한편으로 교육문화사업에서도 적지 않은 활동을 하였다. 1905년 강화진위대 참령으로 있을 당시 강화초등학교의 전신인 사립보창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08년에는 강화 양도초등학교의 전신인 흥천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미국인 선교사 벙커와 박능일 목사를 움직여 합일학교를 신설, 개교하였고, 개성·평양·원산 등지에도 여러 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1906년 오상규(吳相奎), 유진호(兪鎭浩) 등과 함경도 출신 청년들을 중심으로 민족 계몽을 위한 단체인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 서북학회(西北學會)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국내에서의 여러 활동과 아울러 1915년에는 러시아로 망명하여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조직하였다. 1919년 8월 말경에는 김립(金立)의 사위인 오영선을 대동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하기 위하여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고, 취임 후 자파 세력의 확장을 위하여 민족진영의 인사 일부까지도 규합하여 1920년 봄 공산주의자 그룹을 조직하였다. 이것의 발전 형태로서 1921년 종래의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으로 개칭하였다. 그는 국무총리직에 있는 동안 모스크바의 레닌으로부터 2백만 루블의 원조를 받았으며, 그 중 4십만 루블은 고려공산당 조직 기금으로 유용한 것이 임시정부에 발각되어 사임하였다. 한편, 만주·간도 방면의 독립운동 무장단에도 일찍부터 관심을 가져 왔다.
1920년 말에는 간도의 독립군이 일본군에 쫓겨 밀산(密山)을 거쳐 시베리아의 이만으로 퇴각할 때에 긴급 구호금으로 1만 원을 보냈다. 그는 비록 공산주의운동의 선구적 활동을 하였으나, 그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반일민족독립운동을 우위에 놓고 있는 것이었다. 이동휘 자신도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고 스스로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오직 반일민족독립운동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 소련 정부와 제휴한 민족주의 혁명운동자라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사임한 후 시베리아에서 죽었다.
7> 심혁성(沈赫誠 : 일제시대)
심혁성은 부평 백석동 출신이다. 계양(桂陽) 지방으로 이주해 살았으며 천주교 신자였다. 1919년 3·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만세 시위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을 살았다.
출감 후 가산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준 다음 자신은 산 속으로 은신하여 약초를 캐먹으며 연명해 갔다. 그 뒤 만주로 건너가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광복이 되어 고향에 돌아와 살았으나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조용히 생애를 보냈다.
8> 김교창(金敎昌 : 1889∼1959)
김교창은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仙杏里)에서 생장했다.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동지인 홍면(洪冕) 등과 함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26일에는 왕광연, 홍명성, 홍복룡, 김도하 등과 함께 송산면 앞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거사 동지들과 송산면사무소 및 그 뒷산에서 만세 시위를 계속할 계획을 세우고 시장 장날인 28일 홍 면, 홍문선, 홍남후, 홍승한, 민용문 등 1천여 명의 시위 군중과 일시에 시위운동을 펼쳤다. 이 때 일본 순사부장으로 있던 노구치[野口]가 지휘하는 경찰이 출동하여 저지하려 했으나 군중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렇게 되자 노구치 순사부장과 시위 주도자들간에 팽팽한 시비가 벌어지고, 성난 노구치 순사부장의 권총이 발사되어 홍 면 동지가 중상을 입었다. 이를 목도한 주도자들과 군중들의 노도와 같은 함성으로 시위가 더욱 격해졌을 뿐 아니라, 급기야 성난 시위 주도자들에 의해 노구치가 돌에 맞아 죽는 큰 사건으로 번지고 말았다. 사건이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간 탓으로 시위 주도자들은 일경(日警)에게 모두 체포 구속되었으며, 1920년 7월 5일 김교창은 고등법원에서 소요 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7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광복 후 훨씬 뒤에야 정부에서 그 사건을 파악하고 그 공을 기리어 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했으며, 그의 장한 뜻을 기리어 1984년 강화군 선원면 창리에 소재한 묘소에 기적비를 세웠다.
9> 신순성(愼順晟 : 1878∼1944년)
신순성은 서울 출신으로 한성외국어학교 일어과를 이수한 뒤 관비 유학생으로 도쿄고등상선학교(東京高等商船學校)에서 갑종(甲種) 항해사(航海士) 자격을 따내어 우리 나라 최초의 근해 항해술사가 되었다. 귀국 후 우리 나라 최초의 군함인 광제호(光濟號)의 부함장이 되었다. 광제호는 당시 우리 나라에 두 척밖에 없던 군함 중 하나로서 19세기 말 일본 가와사키[川崎] 조선소에서 건조한 배인데, 한일합방이 되자 군함의 자격을 상실하여 총독부 체신국의 해사관리선으로 이적되고 말았다. 신 함장은 1917년 가족을 이끌고 인천으로 낙향하여 1926년 광제호가 인천항을 떠날 때까지 근무하다가 퇴직하고 여생을 보냈다. 그의 장남이 인천에서 널리 알려진 신태범(愼兌範) 박사이다.
10> 신태범
신태범은 서울 태생으로 한국 최초의 해군 함장인 신순성의 장남이다. 5세 때 부친을 따라 인천으로 이주해 왔다. 인천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1936년 서울대학의 전신인 경성제대 의학부를 졸업하였다. 1942년 인천에 신외과의원(愼外科醫院)을 개원하고 1943년에는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래 1979년까지 개업의로서 활동을 해 왔다. 1950년부터 1958년까지 인천의사회장을 역임하였고, 1956년부터 1960년까지 중앙교육위원을 역임하였다. 1963년부터 1972년까지 10년 간 인천시정(市政) 자문위원장을 지냈으며, 국제로터리 376지구 총재를 역임했다. 1986년부터 1994년까지는 인하대학교 교양학과 초빙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반사경(反射鏡)』을 비롯하여 『인천한세기』, 『개항후의 인천풍경』, 『먹는재미 사는재미』가 있으며, 번역서로는 『미국사연의(美國史演義)』를 펴내는 등 다양한 저술 활동을 전개했다. 조선일보 파리 특파원을 지내고 한국인권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용석(鏞碩) 등 5형제가 사회 각계에서 활약했다.
11> 박길양(朴吉陽 : 일제시대)
박길양은 강화읍 관청리에서 출생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유경근(劉景根)으로부터 독립공채증서 5백원권 1매를 전달받았다. 그것을 계기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4년 3월 서봉준(徐鳳俊), 김훈태(金勳泰), 이학신(李學信) 등과 강화중앙청년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3월 「동아일보」 강화지국장으로 있다가 이 해 8월에 「시대일보」 강화지국장을 맡았다. 다음해에는 4월 15일 개최될 예정인 ‘전조선 기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서울로 상경했다. 이와 함께 같은 달 20일 개최하기로 예정된 ‘전조선 민중운동자대회’에도 강화지역 준비위원으로 참석하기로 하였다.
이 무렵 여러 갈래의 사회주의운동 단체들이 통합의 뜻을 굳혀 4월 17일 비밀리에 조선공산당을 결성하였으며, 조선공산당 청년조직체인 고려공산청년회도 결성되었다. 서울에 상경해 있었던 박길양은 18일밤 조봉암(曺奉岩)의 안내로 박헌영(朴憲永)을 책임비서로 한 조선공산청년회에 가담하였다. 이후 강화로 돌아와 지역 청년운동단체를 통합하기 위한 강화청년연맹을 결성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25년 11월 22일에 발단된 신의주 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에 가담한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박길양도 이 때 체포되어 신의주 지방법원에서 6년형을 선고받은 후, 서대문형무소에 이감되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12> 박헌용(朴憲用 : 1882∼1940년)
당대에 명성이 높은 한학자이며, 민족사관이 뚜렷한 독립유공자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경기문장(京畿文章)으로 알려졌다. 이건승(李健昇)과 강화 하도면(下道面) 사기리(沙器里)에서 계명의숙(啓明義塾)을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다.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서 법률을 전공했으며, 동덕고등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기도 했다. 독립운동에 관여하여 임시정부 요인 김석황(金錫璜)과 연락, 군자금 조달 및 정보 연락을 하였으며, 서울에서 심상옥(沈相玉) 등과 의용단(義勇團)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6년 황기범(黃基範)과 함께 상해로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지폐인쇄기를 구입하여 만주 안동현(安東縣)으로 밀반출하다가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인천경찰서에서 2년 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안창호 선생과 제휴하여 군사연락원으로 있다가 산해관(山海關)에서 다시 체포되어 여순(旅順) 감옥에서 3년형을 살았다. 다시 출옥한 후, 요시찰 대상자가 되어 강화에서 여생을 연금 상태로 지냈다.
강화 향토사에 남다른 애착을 품어 1926년에는 향토 곳곳에 산재한 시고(詩稿)를 엮어 『강도고금시선(江都古今詩選)』을 편술하였고, 1931년에는 강화 역사를 재정립한 『강도지(江都誌)』를 편찬하여 강화 역사 문화 소개에 크게 발자취를 남겼다. 1940년 59세를 일기로 타계했으며, 한국 현대 서예가 10걸(傑)의 한 사람인 동정(東庭) 박세림(朴世霖)이 그의 유일한 혈육이다.
13> 연기우(延起羽 : 구한말)
연기우는 한말의 의병장이다.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 부교(副校)로 있다가 1907년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동지 지홍윤(池弘允), 이동휘(李東輝) 등과 전등사(傳燈寺)에 모여 의거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 군 내 각 장병들을 설득하여 강화진위대 병사들이 의병전에 전부 뛰어들게 하였다. 진위대의 부교로서 그는 대장이 되어 우선 강화 무기고(武器庫)를 접수하여 무기들을 확보하고, 친일 집단인 일진회(一進會) 간부를 처단케 한 뒤, 일본인 순경을 사살하고 일본인 공무원을 추방하여 강화 전도를 삽시간에 장악하였다.
이후 일본 수비대 1개 소대가 갑곶진으로 상륙하자 일제 사격으로 패퇴시켰으나, 증원 부대가 늘어나자 화력이 딸려 강화도를 탈출하여 서해 지방으로 집결, 고랑포(高浪浦)에서 대한창의존양군(大韓倡義尊壤軍)을 정식으로 발족시키고 대장으로 초대되어 전열을 가다듬고 일본에게 본격적으로 선전포고를 하는 격문을 보냈다. 그는 장단을 필두로 삭령(朔寧), 적성(積城), 파주(坡州), 마전(麻田), 양주(楊州), 이천(伊川) 등지로 옮겨 다니며 일본군 사살에 주력하였으나, 화력의 열세로 오지로 숨어 다니며 게릴라 전법을 쓸 밖에 없었다. 연 대장은 그 뒤 3년여를 계속 지능과 용맹으로 과감하게 항전하니 일본군이 그때마다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점차 병력이 감소될 뿐만 아니라, 화약이 떨어져 가는 탓으로 지리산에 근거를 두고 호남 의병부대와 합세하여 유격전을 지속하였다. 연 대장은 산중에서 풍찬노숙하며 2년여 간 혈전을 계속하며 끝까지 굴하지 않고 분전해 갔으나, 철마산(鐵馬山) 전투에서 화력의 열세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강화를 첫 싸움의 무대로 시작하여 전국이 그의 전쟁터가 된 것이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내려졌고 또한 국립묘지 순국선열 위패로 현충사(顯忠祠)에 안치되었다.
14> 유경근(劉景根 : 1877∼1955년)
유경근은 강화읍 월곶리에서 생장하였다. 강화진위대 참령(參領) 이동휘(李東輝)와 제휴하여 신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육영사업 진흥에 힘쓰고자 강화·김포에 5개소의 사립 보창학교(普昌學校)를 설립하고 스스로는 광명학교(光明學校)라는 현판을 걸고 교장이 되어 봉사하는 한편, 국권 회복을 위하여 민족사상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9년 3·1 운동 때에는 서울 국일관 집회에 참석하여 강화·김포 지구 독립운동 책임자로 발탁되어 주도적으로 만세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그 때문에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다 병으로 보석되었다.
1920년 8월 만주 관전현(寬甸縣)에 있는 광복단군영(光復團軍營) 참모장 이탁(李鐸)의 지령으로 잠입해 온 결사대장(決死隊長) 김영철(金榮哲)을 도와 무기 은닉에 협조하는 한편, 임시정부 군무총장(軍務總長)으로 있는 이동휘가 독립혁명군을 양성하고 있는 해삼위(海參威 : 블라디보스톡)의 무관학교(武官學校)로 국내 혁명군을 모집하여 보내곤 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경(日警)에 탐지되어 수배되었음을 전해 듣고 미주(美洲)로 망명하기 위해 해삼위에서 일단 서울에 잠입하였다가 운 나쁘게 체포되어 3년 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 뒤 국내에 은거하면서 은밀히 군자금 모금을 지속하였으며, 다시 미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해삼위로 가던 중 함흥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강릉, 춘천, 서울형무소로 전전하며 3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에 출옥하였다. 그는 일제 탄압 아래에서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독립운동 선봉에 섰으며, 종손 유용갑을 비롯하여 정인섭, 최성창, 박길양(朴吉陽) 등과 제휴, 지하 공작을 지속하면서 3·1 만세운동 이후 독립군 지원을 위한 모금운동에 끊임없이 참여했다. 해방 후 만주에 있던 독립군을 지원한 국내 유공자로서 철기(鐵驥) 이범석 장군으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예우를 받았다. 1955년 타계하니 국권 회복에 큰 공로만이 길이 빛나게 되었다.
15> 이능권(李能權 : 1864∼1900년)
이능권은 강화 국화리 출신으로 구한국 군대의 육군 대장이었다. 1905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참가하러 가는 이상설(李相卨), 이준(李儁) 밀사 일행을 호위하여 일본군 수비대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국외로 나갈 수 있게 도왔다.
국내로 다시 돌아온 1907년, 군대 해산령이 강행되자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 소속 군인 3백여 명을 규합 편성한 의병 부대의 의병장이 되어 우선 강화도에서 일본군과 접전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08년에는 의병 부대의 이름을 ‘대동창의진(大同倡義陳)’이라 명명하고 이호춘(李浩春), 유성준(兪成俊), 김추옥(金秋玉), 여만복(呂萬卜) 등과 더불어 강화 길상면의 방의표(方宜杓)로부터 1천 5백 냥을 받는 등 11개 처에서 4만 3천 8백 냥의 군자금을 조달받았다. 그리고 강화도 전등사에 은닉시켜 둔 무기를 일본군에게 넘겨 준 송계찬(宋桂燦 : 전등사 주지)을 화도면 장화리 장곶 앞바다로 끌고 가 바다에 밀어 넣어 죽임으로써 이적 행위자를 징벌하였다. 또한 휘하 분대장 차만복(車灣福)으로 하여금 대원 28명을 이끌고 교동(喬洞) 경찰주재소를 습격케 하여 군검(軍劍)과 의류를 탈취했다. 이어 친일분자들인 김유영(金裕榮) 등 동류 3인의 집을 습격하여 7천 3백 냥의 군자금을 탈취하였다. 또한 휘하 이경석(李庚錫)의 병졸로 하여금 부근 해역을 통과하는 범선 1척을 멈추게 하여 적재한 쌀 20 포대를 군량(軍糧)으로 거두어 오게 했다. 그리고 이능권의 병대장 막하에 있는 강화 동문동 김덕순과 같은 대원인 지홍일(池弘一), 조인선(趙仁善), 박계석(朴啓石) 등 10여 명에게 지령하여 1908년 7월 삼산면 상리 농민으로부터 군자금 1백 원을, 석모리에서 또한 1백 원을, 양사면 철산리에서 1천 원, 서도면 끝섬[末島]과 볼음도에서 40원을 모금하였다. 이어 부근에 정박해 있던 일본 선원 야스다[安田]를 처형하고 군자금 2백 원을 탈취했는데, 끝까지 저항하는 요시무라[吉村]도 이 때 연이어 처형하였다. 또 이능권 의병장의 막하인 김용기(金龍基)로 하여금 박계석, 고부성(高富成)과 더불어 1908년 8월 일본 관헌에게 밀고를 지속해 온 양사면 철산리 거주 일진회장(一進會長) 양학진(梁學辰)과 강화읍 동문동에 거주하는 헌병 보조원 송대현(宋大鉉)을 강화읍으로 들어오는 길목 송해면 솔정리에서 처형케 했다.
이로 인해 박계석은 4년 뒤인 1912년 10월 일본 헌병들의 집요한 추적을 받은 끝에 운 나쁘게 붙들려 서문 밖 국화리 노변에서 사살되었으며, 고부성은 같은 무렵 서문 안 외골목에서 붙들려 총격을 받았으나 경상을 입고 도피했는데, 어느 노파의 집에서 갈증으로 물을 얻어 마시다가 밀고당해 끌려가서 사살되었다.
이능권 의병부대는 이렇듯 혁혁한 전적(戰績)을 올리며 전투를 전개해 가면서 1908년 10월 상순경에는 강화도 내 일본인들을 처단하고 강화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10월 하순 경, 일본군 제6사단이 제13사단과 한국 감시의 임무를 교대하게 되면서 제6사단장 니시야마[西山助義] 중장은 용산의 제13사단에서 1소대를 뽑아 강화로 보내어 강화의 의병 활동을 괴멸시키려 하였다. 그리하여 고야마[小山] 소위가 이끄는 30명의 이른바 토벌대가 10월 29일 서울을 떠나 인천에서 강화로 급파되어 30일 오전에 광성진(廣城津)에 상륙하였다. 이 때 독립군 의병부대는 정족산(鼎足山) 전등사 일대에 진지를 구축하고 전투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드디어 의병부대는 고야마 소대와 1주간에 걸쳐 전투를 계속하였고, 격전 끝에 격퇴시킬 수 있었다. 고야마 소대는 결국 강화읍으로 퇴각하여 서울 본대에 증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제13연간 소속 보병 20명과 공병 15명이 증파되어 와타나베[渡?] 중위의 지휘 아래 전등사 의병부대 진지로 다시 출진하였다. 그러나 의병부대는 일본군의 증원군을 예상하여 와타나베 부대가 전등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여러 곳으로 나뉘어 이동한 뒤였다. 이에 고야마 소대는 강화 남쪽에 있는 장봉도(長峰島) 일대를 수색하고, 와타나베 부대는 강화섬 북쪽 지역인 별립산(別立山)과 양사면 철산리(별칭 산이포) 주변을 수색하였으나 의병의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이처럼 행동이 기민한 의병부대를 강화에 그대로 남겨둔다면 일본군에게 장차 큰 화근이 될 것이므로, 니시지마 사단장은 강화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 계획을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일본군은 강화에 150여 명의 큰 병력을 증원 집결시키고 3일 동안 강화 전역을 수색하였으나, 일시에 의병의 기습을 받아 전과를 거두지 못한 채 원대 복귀하고 말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의병들은 하점면 이장리 부호인 이 감찰(李監察) 댁에 이르러 일본 군경과 교전하였고, 이어 양사면 철산리 월곶 마을에서 교전하여 역시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 후 의병들은 고려산 동남쪽 산기슭 느라골에 무기를 은닉하고 각처에서 기습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능권 의병장은 정탐 임무를 띠고 단신으로 서울에 잠입하였다가 감시망에 걸려 붙들리는 바 되었다. 이어 사형 집행을 당하자 한강변에 가매장하였다가 야음을 이용하여 시신을 파내 강화읍 국화리 초입에 평토 매장하였으며, 1955년 지금의 묘역으로 이장하고 묘비를 세웠다. 비문에 ‘의병대장양성이공능권지묘(義兵大將 陽城李公能權之墓)’라 하였다.
16> 유완무(柳完茂 : 미상∼1907년)
유완무는 부평 시천동 태생이다. 그는 일본에게 우리 국권을 빼앗기자 항일운동을 일으켰다. 백범 김구 선생이 인천 감옥에 갇히자 그를 탈옥시켜 은신케 했다. 국내에서 항일운동이 어렵게 되면서 만주로 건너가 훈춘에 군관학교(軍官學校)를 세워 독립군대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1907년 자택에서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서예가 검여 유희강은 그의 아들이다.
17> 윤응념
인천의 부호들을 전율케 했던 윤응념은 누구인가
- 1923년 떠들썩했던 인천 군자금 모집사건
광복 58년째를 맞는 올해의 8·15를 전후해서도 식민지 시대를 둘러싼 과거청산의 문제가 국내외에서 뜨거운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지난 잘못에 대한 사과는 고사하고 날로 군사대국화로 치닫고 있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 움직임과 그들 위정자들의 거듭된 망언은 오늘날에도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식민지 잔재를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한 국내에서는 여전히 친일 논란이 뜨겁다.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에서는 지난 8월 14일, 일제에 부역해 반민족행위를 한 사람들의 행적과 죄상을 밝힐 목적으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안’을 의원 154명의 공동발의로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식민지시대 민족운동의 상징인 김구 선생을 기리는 백범기념관에 시민들이 발길이 한산하고, 몽양 여운형 선생은 아직까지도 독립유공자 포상 심사조차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진보와 보수로 각기 나뉘어 두 쪽이 난 8·15 기념행사가 말해주듯, 식민지시대의 역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살아있는 역사인 것이다. 역사에 대한 온전한 해석은 고사하고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지난 과거의 실상조차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 묻혀 있는 인천 민족운동사의 한 인물을 만나보자.
조수 같은 청중 중에 인천사건 공판
- 인천으로 신출귀몰하게 군자(軍資) 모집에 활동한 사건
인천을 중심으로 하여 대대적으로 군자금을 모집한 윤응념(尹應念) 일파에 대한 공판은 예정과 같이 지난 18일 오전 9시 반에 경성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서 열리었다. 시간 전부터 군중은 사면으로 모여들어 방청석은 터지고 넘칠 듯이 되었으며 그 위에 입장하지 못하고 섭섭히 그만 돌아간 사람도 적지 아니하다. (중략)
- 윤응념은 쾌쾌히 답변, 아무 은휘(隱諱-숨김) 없이
윤응념부터 심문을 시작을 시작하였다. (······) 피고는 사실 전부를 가리움 없이 모두 승인하였으나 다만 자기가 군자금을 모집할 때에 권총을 겨누고 돈을 내지 아니하면 죽인다고 협박하였다는 것은 전혀 무근한 사실이라, 자기는 조선민족을 위하여 다만 그들에게 동정을 구하였을 뿐이니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자가 민족에게 위해(危害)를 가한다면 그는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근본 뜻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그것만은 변명을 하였는데 (하략) - ?동아일보?, 1923. 9. 19
위의 기사는 1923년 9월 18일 열린 인천 군자금 모집사건의 결심공판을 전한 ?동아일보? 기사이다. 1923년 5월부터 여러 신문지상에 “인천사건” 혹은 “인천의 중대사건”으로 시시각각 보도된 바 있던 이 사건은 넘쳐나는 공판정의 인파가 말해주듯 당시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사건이었다. 인천항 부근의 영종, 대부, 장봉, 시, 신불 등의 섬 부호들을 상대로 하여 임시정부의 독립자금을 모집하다가 드러난 이 사건으로 윤응념(27)을 비롯하여 이호승(43) 이동진(25) 윤경중(27) 송중식(35) 최수연(26) 김순창(31) 장수태(45) 김유근(48) 모두 9명의 인천 사람들이 체포되었다. 끝내 체포되지 않은 김원흡(金源洽)은 해방 후 언론의 주목 속에 이국에서 금의환향하였다.(「윤응념, 김마리아 사건의 혁명투사 김원흡씨 귀국, ?대중일보?, 1947. 3. 1)
서슬 퍼런 일제 법정에 서서 자신을 파렴치한 강도쯤으로 몰아가는 검사에 맞서 “자기는 조선민족을 위하여 다만 그들에게 동정을 구하였을 뿐이니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자가 민족에게 위해(危害)를 가한다면 그는 민족을 위하여 일하는 근본 뜻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라고 당당히 그 정당성을 외쳤던 윤응념,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인천을 중심으로 한 중대사건의 진상
- 군자 모집에 전력, 상해 가정부와 교통하고자 배 한 척을 사다가 발각 체포
- 전에는 교통부 참사로, 김마리아를 상해로 호송한 것이 이 사람의 일이다
윤응념은 지금으로부터 6년전에 중국 지부(芝罘)로 건너가서 영어를 연구하다가 대정8년에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교통부(交通部) 참사(參事)가 되어 가지고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는데, 대정9년 9월에는 <독립신문>과 ?신한공론?을 가지고 조선에 건너와서 배부한 일이 있으며 다시 10년 4월에는 중국인으로 변장을 하고 조선에 와서 임시정부 비서국장 도인권(都寅權)의 처자와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를 인천으로 데려다가 그 해 7월 20일에 풍범선을 타고 인천 근해에 있는 초치도(草歭島)에 상륙하였다가 그 날 저녁에 이미 약속하였던 인천을 떠나 위해위(威海衛)로 가는 중국배를 타고 위해위를 거쳐 상해로 가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지부에서 미국인회사에 있다가 작년 3월에는 다시 임시정부 교통총장 손정도(孫貞道)의 명령을 받아 가지고 조선으로 건너와 인천을 중심으로 하여 가지고 대활동을 하게 된 것이더라. - ?동아일보?, 1923. 5. 20
황해도 제령군 태생으로 일찍이 중국에서 고학한 윤응념은 3·1운동의 와중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 가담한 열혈청년이었다. 1919년 수립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연통제(聯通制)와 교통국(交通局)을 두어 국내 민족운동을 진작시키려 노력하였는데, 윤응념은 교통국 산하의 교통부 참사로 독립운동을 시작하여 민족지사와 그 가족을 망명시키는 일을 담당하기도 하였고, 인천 지역을 주무대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였던 것이니 상해 임시정부의 인천 지역 담당자였던 셈이다.
식민지시대 인천의 역사 중에서 인천 민족운동의 한 긍지로 기억해야 할 이 사건과 윤응념은 그러나 ?인천광역시사?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어디 비단 그 뿐이겠는가. 친일파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식민지시대를 거쳐 급격하게 근대도시로 성장한 인천 지역에는 다른 지역과 비교하여 훨씬 많은 친일파들이 존재했을 터이다. 그러나 인천의 근대사는 아직도 온전한 실체조차 복원되지 못한 채 무관심 속에 묻혀 있다.
2) 종교 및 사회복지가
18> 이승훈 [李承薰 1756∼1801(영조 32∼순조 1)]
한국 최초의 가톨릭 영세자, 한국 가톨릭교회 창설자 중의 한 사람. 자는 자술(子述), 호는 만천(蔓川). 세례명은 베드로. 본관은 평창(平昌). 서울 출신. 참판 동욱(東郁)의 아들이다. 1780년(정조 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 학문에 전념하다가 서학을 접하게 되었고, 이벽(李檗)과 친교를 맺으면서 가톨릭을 알게 되었다. 83년 동지사의 서장관인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北京]에 들어가 예수회 선교사에게 교리를 배운 뒤 L. 그라몽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가톨릭 서적·십자고상(十字苦像)·묵주·상본(像本)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 뒤 명례방(明禮坊;明洞) 김범우(金範禹)의 집에서 모임을 갖던 중 85년 관헌에 적발되어 배교하였다가 87년 교회로 돌아와 자치적으로 활동을 개시,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를 주도하였다. 한편, 89년 평택현감으로 등용되었는데, 90년 베이징에 밀파되었던 윤유일(尹有一)이 돌아와 가성직제도와 조상제사의 금지를 명한 베이징 주교의 말을 전하자 다시 배교하였다. 그 후 다시 교회에 돌아왔으나 91년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 세번째 배교한 뒤 풀려났다. 94년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밀입국하자 다시 회개하고 돌아와 이듬해 성직자영입운동에 관계한 혐의로 체포, 예산(禮山)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러나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이가환(李家煥)·정약종(丁若鍾) 등과 함께 대역죄로 사형에 처해졌고, 56년(철종 7) 아들 신규(身逵)의 탄원으로 신원되었다. 저서로 《만천유고(蔓川遺稿)》가 있다.
19> 전학준(全學俊·Eug Deneax : 1873∼1949년)
전학준 신부(神父)는 프랑스의 부유한 은행가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파리 외방전교회(外方傳敎會)의 선교 사명을 띠고 1900년에 약관 27세로 인천에 당도했다. 그는 도착 즉시로 답동(沓洞) 천주교성당에서 운영해 갈 인천박문학교를 설립하고 천주교 신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의 자녀들에게 초급 과정의 교육을 시키는 일부터 시작했다. 1904년에는 비로소 답동성당 본당 신부로 취임했고, 이어 1917년에는 남녀 두 학교를 합쳐 인천박문학교 설립자 겸 교장에 취임했다. 이 학교의 특징은 제3자의 도움없이 오로지 전 신부가 상속받은 유산으로만 이끌어 가는 데 있었다. 학교가 본궤도에 올라서자 1930년에는 바오로수녀원을 비롯하여 고아원 등 본당의 기반을 이루는 모든 시설을 갖추고 대규모로 증축을 했다.
역시 사재(私財)를 기울여 용현동과 영종도(永宗島) 등지에 20여만 평의 농토를 마련하여 보육원에 기증하고 보육원 운영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굳혀놓았다. 1937년에는 증가 일로에 있는 신자들을 위하여 오늘에 보는 바와 같은 큰 성당 건물을 준건하였고, 3층으로 된 현대식 해성병원(海星病院)을 개설했으며 또한 박문유치원을 설립 개원했다. 이렇듯 많은 사재를 기울여 이 고장을 위해 헌신하면서 육영가로서, 불쌍한 사람들의 어버이로서, 수도원의 지도 성직자로서 오로지 영생 구제에 전념하다가 74세로 인천에서 생을 마쳤다.
20> 율리아나 수녀(인천 샬트르성바오로수년회)
1893년 뮈텔 주교는 조선교구의 재정적인 곤란을 해결해 보고자 프랑스의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교구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마침 제4대 선교사로 부임한 마라발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어, 1893년 인천항에서 발병한 장티푸스로 죽어가는 노동자들을 위해 성당 내에 치료소를 두었는데, 많은 환자를 보살피기 위해 제물포에 수녀원의 설립이 필요하다고 제안하였다. 이에 뮈텔 주교는 답동에 사두었던 3,212평의 성당 부지 중 일부를 샬트르 수녀원 부지로 떼어주어 1893년 7월 초 기초 공사를 시작함으로써 수녀원 건립 공사가 시작되었다.1) 1894년 청일전쟁의 발발로 공사가 한때 중단되기도 했지만, 8월 18일 드디어 공사가 마무리되어 서양식 3층 벽돌집으로 된 성 바오로 수녀회 제물포 분원이 설치되었다.2) 이후 수녀원은 병자들의 치료뿐만이 아니라 15명 가량의 어린이들을 모아 처음으로 고아원(오늘날 해성보육원의 전신)을 운영해 나갔고, 특히 여자 아동들의 교육에도 착수하였다.
수녀원의 건립과 함께 성당의 건립도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1895년 8월에 정초식을 거행하여 1896년 7월에는 종탑이 먼저 완공되었다. 그리고 1897년 7월 4일 저녁 7시경 뮈텔 주교에 의해 인천 성당의 축성식이 거행되었다. 주교가 집전한 미사가 신축된 성전에서 봉헌되고, 81명의 교우에 대한 견진성사도 올려졌다.3)
한편 1894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제물포 분원이 생긴 이후로 수녀회에서는 성영회를 운영하여 고아들을 기르는 한편 무료진료소를 개설하고 가정 방문치료를 병행하여 지역에서 좋은 평판을 듣게 되었다. 이들은 한편으로 이미 고아들에게 초보적인 읽기, 쓰기, 수공예 등을 가르치면서 교육사도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 초보적인 교육활동을 발전시켜서 수녀회에서는 1899년 8월부터 여자 통학학교를 개교하였다.
1894년에 설립된 샤르트르 성 바오로회 수녀들의 고아원은 현재 106명의 아이들을 수용하고 있읍니다. 수녀들은 또 1년 전부터 외부에서 통학하는 학교를 열었는데, 벌써 30명 가량의 한국 소녀들이 다니고 있읍니다. 거기서는 읽기, 쓰기, 바느질 등을 가르칩니다. 약 반수나 되는 외교인 학생들도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기도도 배우고 교리문답도 배웁니다.4)
고아원과는 별도로 외부에서 성당으로 통학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그것도 신자가 아닌 절반 가량의 조선인 여자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시작한 이 학교는 아마도 한국 최초의 근대식 초등 여성교육기관이 아닐까 생각된다. 일부 교우 자녀 및 외교인 여자아이들을 성당으로 통학하게 하여 읽기와 쓰기, 바느질 등의 실용적 기술을 가르치고 이와 함께 종교 교육을 병행한 이 학교는 그러나 정식학교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선교활동에는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조선교구에서는 이 학교가 교육을 통해 선교에서 적지 않은 효과를 거두는 것을 보고 주목하였다. 그리하여 제물포에서의 여자 통학학교에 뒤이어 1900년에는 종현성당, 1901년에는 약현성당에서도 여학생들을 위한 학교를 개설하였다. 제물포의 여학교를 비롯한 이들 자선학교들은 이후 매우 번창해 갔다.
제물포 여자학교의 성공적인 운영은 1900년 인천항 사립 박문학교의 개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수녀회의 자선 · 봉사활동으로 시작한 이 여학교가 지역에 큰 관심을 일으키게 되고 아울러 선교에서 큰 효과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1892년 이후부터 1899년 여자기술학교의 운영에 이르기까지 제물포 본당 내에서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던 학교 개설 움직임은 1900년에 들어 드디어 조선인 교우들과의 협력에 의하여 인천항 사립 박문학교를 개교하기에 이른다.
오랜 박해와 시련 속에서 포교 활동을 전개했던 천주교는 조선인 마을을 중심으로 파고들면서 서양의 여러 종교 중에서도 가장 많은 신자수를 얻게 되었다.
20> 랜디스 박사, 남득시(南得時 : 1865∼1898년)
남득시는 미국 펜실바니아 랭카스터 출신으로 1888년 펜실바니아 의대를 졸업하고 고향인 랭커스터 공립병원에서 전문의 과정을 마친 의사이다. 1890년 리처드 엠벤스 신부의 주선으로 고요한 주교(主敎)를 따라 영국성공회 선교사업을 위해 인천에 도착했다. 그는 인천에 온 즉시 큰 집을 세내어 두 곳의 입원실과 진찰실을 꾸며 ‘성(聖) 루카병원(藥大人)’으로 명명한 다음, 조선인 환자들을 대상으로 의료 활동을 하면서 선교활동도 시작했다. 또한 1891년에는 40명의 학생들을 모집, 이들을 4개 반으로 나누어 주 6회에 걸쳐 강의를 하는 영어학교를 개설하기도 했다. 같은 해 4월에는 현재의 송학동 3가 3번지에 성공회(聖公會) 인천성당(仁川聖堂)을 착공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1892년에는 6살 난 고아를 데려다 키우기 시작함으로써 고아원의 효시가 되었고, 한국에 관한 연구에도 열중하여 1895년에는 「로사라수트라(염주경)」등 3편의 불교 문헌을 출판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불철주야로 활동하다가 선교사업을 위해 인천에 온 지 8년만인 1898년 32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인천에서는 그의 헌신적인 선교활동과 의료 봉사의 뜻을 받들어 인천의 외국인 묘지에 안장하였다.
21> 조원시(趙元時·G. H. Jones : 1867∼1919)
조원시는 미국 뉴욕주 출신으로 1888년 약관 20세로 선교사가 되어 우리 나라에 왔다. 처음 5년 간은 서울 배재학당(培材學堂)에서 교편도 잡고, 문서 출판 사업을 하다가 1892년부터 1903년까지 인천 지방 선교부 책임자로 파견되어 11년 간 내리교회(內里敎會)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활동은 선교와 교육 전반에 걸쳐 놀라운 업적을 쌓아올려 ‘내리의 아버지’라 지칭되었다. 그는 한국 최초로 교회 이름으로 된 교육기관인 영화학교(永化學校)를 인천에 개설했으며, 강화와 황해도 연안(延安), 해주(海州) 그리고 남양(南陽)으로 전도를 시작했다. 1895년 만수동에 최초의 지교회(支敎會)를 개척하였고, 1897년에는 우각동(牛角洞 : 현 금창동)에 선교사 주택을 건축했다. 또한 1899년에는 한국 최초의 신학회(神學會)를 조직하여 이동식 학교를 개설하였고, 1900년에는 제물포웨슬레기념학교를 금창동에 건축하였다. 1901년에는 한국선교회가 3개 지방회로 확장되면서 인천에 한국 최초의 서지방회(西地方會)를 조직하여 장로사(長老司)로 취임했다. 또 1901년 성탄절을 기해 내동 현 위치에다 80평 규모의 십자가형 벽돌 예배당을 건축하였고, 1902년에는 홍승하(洪承河) 전도사를 선교사로 한 하와이 이민회사를 조직하여 50명의 교민을 이민시켰다. 1903년 11년 간 헌신 봉사한 내리교회를 떠나 서울로 전임했다. 그의 부인인 존스 여사 또한 영화여학교를 세움으로써 이 고장 여성교육의 개척자가 되었다.
22> 김기범(金箕範 : 1868∼1920년)
김기범은 1885년 6월에 내리교회에 초대 목사로 부임해 온 아펜젤러를 도와 노병일(盧秉日), 백혜란(白惠蘭) 등과 함께 전도 활동을 하였으며, 1892년 2대 목사로 부임한 존스(趙元時) 밑에서 정식으로 전도사가 되어 활동했다. 1899년에 ‘신학회(神學會)’의 전도사 과정을 이수하고 원산으로 파견되기도 하였으며, 1901년에 서울 상동교회에서 개최된 제17회 한국선교회에서 무어 감독 주례로 시란돈, 조원시, 로보을 목사의 보좌를 받아 한국인 최초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내리교회 교인으로서 한국 개신교 사상 최초의 한국인 목사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03년 제3대 내리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부임한 이래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우선 교회 내에 영화학교(永化學校)를 설립하여 인가를 받았고, 1904년에는 벽돌로 교사(校舍)를 신축하기도 했다. 1910년 진남포로 전임되어 그곳에서도 많은 업적을 남겼으나, 병약한 관계로 1920년 세상을 떠났다.
23> 최병헌 [崔炳憲 1858∼1927]
감리교 목사. 호는 탁사(濯斯). 충청북도 제천(堤川) 출생. 일찍이 《영환지략(瀛環志略)》 등의 서적을 통해 서양문화의 발달상과 그 정신적 지주가 그리스도교임을 알게 되었다. 1888년(고종 25) 배재학당 한문교사를 지내다가 93년 세례를 받은 뒤 정동제일교회 전도사로 활동하는 한편, 성서번역위원 및 《제국신문》 주필, 《신학월보》 편집인 등으로 활동하였다. 인천에서 목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02년 목사 안수를 받아 교회를 담임하고 등단설교(登壇設敎)를 할 수 있는 최초의 목사가 되었다. 해박한 한학지식을 바탕으로 동양의 여러 종교를 이해하였으며, 특히 한국적 상황 속에서 그리스도교의 의미와 위치를 밝히려고 노력하였다. 저서로 《만종일만》 《천도소원(天道遡源)》 등이 있다.
3) 정치인
24> 변영태(卞榮泰 : 1892∼1969년)
변영태는 보성중학교(普成中學校)를 졸업하고 한일합방 후인 1912년 만주 통화현(通化縣)에 있는 신흥학교(新興學校)에 입학하여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리고 북경(北京) 협화대학(協和大學)을 1년 수료했으며, 1920년 고국에 돌아와 1943년까지 중앙학교(中央學校) 영어 교사로 있었고, 1945년 광복 후 고려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정부 외교 사절로 외교 활동에 빈번히 나섰고, 1951년부터 55년까지 외무장관을 지냈다. 1953년에는 국무총리가 되어 외무장관을 겸직하기도 했다. 1963년에는 정민회(正民會) 당수가 되어 대통령에 출마하기도 했다.
25> 장면(張勉 : 1899∼1966년)
장면은 인천 출신으로 부친인 장기빈(張箕彬)이 외국 상사(商社)의 지배인 직을 맡으면서 인천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박문소학교와 수원농림학교를 거쳐 도미(渡美)하여 맨해튼 카톨릭대학 문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천주교 평양 교구에서 교회 일을 보다가 1931년 서울동성상업학교 교장이 되어 해방 후까지 재직했다. 그 뒤 1948년 정계에 투신하여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했다. 이 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 수석대표로 참가하여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어냈고, 1949년 주미대사로 파견된 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이 참전토록 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1951년 귀국하여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이듬해 사퇴하여 야당 활동을 전개했다. 1955년 신익희(申翼熙), 조병옥(趙炳玉)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 중 한 사람이 되었으며, 1957년에는 부통령에 당선했다. 이 해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을 당했으나 경상에 그쳤고, 4·19 혁명이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자 제53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내각책임제 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9개월만에 5·16 군사혁명으로 퇴진했다.
26> 조봉암(曺奉岩 : 1898∼1959년)
조봉암은 강화 태생이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에 가담하여 1년 간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 일본에 건너가 도쿄중앙대학에서 1년 간 정치학을 공부하고 비밀결사 흑도회(黑濤會)에 가입하여 사회주의 이념에 의한 독립 쟁취를 목표로 항일운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1925년 조선공산당 조직에 참여했고, 그 산하단체인 고려공산당청년회의 간부가 되었다. 이 해 공산청년회 대표로 상하이(上海)를 경유, 모스크바에 가서 코민테른 총회에 참석하고 이어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 공산대학(共産大學)에서 2년 간 교육을 받았다. 귀국 후에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을 조직, 문화부책으로 활동하다가 상하이로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遠東部) 조선대표에 임명되고 이에 ML당(黨)을 조직하여 활약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 간 복역했다.
출옥 후 인천에서 저항운동을 하다가 다시 검거되었으나 광복과 함께 풀려났고, 인천에서 치안유지회, 건국준비위원회, 노동조합, 실업자대책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조선공산당 중앙간부 겸 인천지구 민전의장(民戰議長)에 취임했다. 이듬해 남로당 당수인 박헌영에게 충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공산당을 탈당하여 우익 진영에 가담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이어 초대 내각의 농림장관으로 입각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되어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52년 제2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차점으로 낙선했다. 1956년에도 제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했다. 이 해 11월 진보당(進步黨)을 창당하고 위원장이 되어 활동하다가 1958년 1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처형됐다.
27) 이승엽[李承燁 1905∼1953]
경기도 부천(富川) 출신. 1919년 인천상업학교 재학중 3·1운동에 가담하여 퇴학당한 뒤 23년 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고 25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30년 부산반제반전사건 주모자로 4년 동안 복역했으며, 46년 남조선노동당중앙위원·경기도당위원장 및 《해방신문》 주필 등을 지내다가 48년 월북, 최고인민회의대의원·사법상을 지냈다. 50년 6·25 때 서울시 임시인민위원장, 51년 노동당비서, 52년 인민검열위원장을 지냈다. 53년 남로당계가 숙청될 때 간첩죄로 사형되었다.
28> 하상훈(河相勳 : 1881∼1964년)
하상훈은 동학(東學) 농민봉기 때 부친이 해주(海州)에서 옮겨와서 답동 터진개 근방에서 객주업을 시작하여 번창시켰다. 영화초등학교 초기 졸업생으로 1920년대 인천물산객주조합의 부조합장을 맡아 민족상권을 지키는 데 공헌했다. 초기 동아일보 인천지국장을 역임했고, 서병훈(徐丙薰), 이범진(李汎鎭) 등과 국악(國樂) 동호회인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하여 활약했다. 1927년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만들어지자 인천지회장에 추대되어 활약했으며, 일제(日帝)의 탄압으로 해체되자 ‘신정회(新正會)’를 조직하고 그 회장을 맡았다.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 인천지부의 발기인이 되었으며, 민주의원(民主議員)과 입법의원(立法議員)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1946년 인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어 1952년 제3대까지 3차에 걸쳐 회장을 역임했다. 또한 1948년에 인천시 고문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1952년 초대 인천시의회의 의원으로 당선되어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60년 제2공화국 민주당 정권 당시 참의원(參議院) 의원으로 출마, 당선됐다. 1964년 작고하자 인천 최초의 사회장(社會葬)으로 장례가 모셔졌다.
29> 곽상훈(郭尙勳 : 1896∼1980년)
곽상훈은 부산 동래 출신으로 소년기에 인천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경인간 기차 통학을 할 때부터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를 주도했으며, 인천 야구팀인 ‘한용단(漢勇團)’의 응원단장이 되어 일본팀과의 경기가 있을 때마다 적개심에 불타는 응원을 했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한 이래 1923년에는 조선소년군(朝鮮少年軍) 제4호 대장이 되어 활약하였고, 1924년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되기도 했다. 1925년 ‘이우구락부(以友俱樂部)’를 조직하여 하상훈(河相勳), 서병훈(徐丙薰), 이범진(李汎鎭), 최선경(崔銑卿) 등과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며, 이 무렵 중국으로 망명하여 ‘한국인 청년동맹’의 간부가 되었다. 1928년 ‘만보산(萬寶山) 사건’이 터지자 재만동포 보호연맹 인천특파원으로도 활약했다.
해방 후 1948년 인천에서 제헌(制憲)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것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하여, 1949년 반민특위(反民特委) 검찰차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에 재선된 이래 제5대까지 당선하여 국회전원(全院) 의원장, 국회부의장,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民議院)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30> 임홍재(任鴻宰, ?-?)
일제말 인천부 농림과장 역임. 해방 후 미군이 진주하면서 정회장 추천을 통해 최초의 조선일 시장으로 임명됨.
31> 양재박(梁在博 : 1886∼1965년)
양재박은 제주(濟州) 태생으로 일제시대에는 주로 무역업에 종사했다. 1945년 민족 광복의 날을 맞아 9월 초에 한국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본격적으로 조국 정계에 투신하였으며, 한민당 인천시 지부를 결성하고 그 지부장을 맡아 활약했다.초대 인천시의회 부위원장 역임. 1946년에는 하상훈(河相勳) 선생과 함께 미군정에서 구성한 입법의원으로 선출되어 이로부터 계속 재야에서 정치 활동을 전개했다. 4·19 의거가 있은 후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수립되어 민주당 정권의 천하가 되자 제주도 지사가 되어 금의환향하기도 했다. 그러나 5·16군사정변 후 다시 야당의 위치로 돌아가서 험난한 대여 투쟁에 가담했다. 작고할 때까지 신민당 인천지부 고문으로 추대되어 재야 원로 정객으로 만년을 장식했다.
32> 김은하(金殷夏)
생년월일 : 1923년 07월 24일
현 직 : 前 민한당 국회의원
직 업 : 정치인, 국회의원
최종학력 : 동국대 정치과 졸업
최근경력 : 古김정렬전시 송덕비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33> 김태훈
인천의 대표적인 친일파. 인천상공회의소 부회두, 경기도 경제회 이사, 인천부회 의원 역임. 해방 후 공금횡령 혐의로 인천공안서에 소환, 유치됨.
34> 표양문
정부수립 이후의 초대 시장
35> 김정렬(金正烈 : 1907∼1974년)
김정렬은 인천과 접경해 있는 경기도 소래(蘇萊) 태생으로 1933년 보성전문(普成專門) 법과를 졸업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서울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인천지원 판사를 역임했고, 1950년에는 인천지원장(仁川支院長)과 부장판사로 승진하였다. 법관으로 재직 중이었던 1954년 제2대 민선 인천시장에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재임 중 인천체육회장과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인천시위원장을 역임, 체육 발전과 문예 진흥에 많은 공헌을 했다. 곧이어 제3대 민선 인천시장에 무투표로 당선되어 국내 유일의 무투표 당선 시장이 되었다.
4·19 의거 후, 제2공화국 심계원(瀋計院) 차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1967년 인천에서 민정당(民政黨)으로 출마하여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4년 67세로 작고할 때까지 변호사로서 활동하였다.
4) 언론인
36> 고일(高逸 : 1903∼1975년)
고일은 서울 태생이다. 한 살 때 부친을 따라 인천으로 이주했다.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때는 양정고보 학생이면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곽상훈(郭尙勳)을 회장으로 한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의 문예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양정을 졸업한 후 조선일보 인천지국 기자가 되었다가, 1924년 최남선(崔南善)이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하자 시대일보 인천지국 기자로 자리를 옮겼다. 이 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기자 활동을 하면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유치장 출입이 다반사가 되었고,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4년 간 영어(囹圄)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32년에는 ‘신간회(新幹會)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북만주로 망명을 떠나기도 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다시 언론계에 복귀, 대중일보 편집국장을 위시하여 조선·고려·한국통신 등 여러 통신사의 편집장을 역임하다가 6·25 동란이 일어나자 충남으로 피난을 떠났다. 1954년 「주간인천」의 주필로 활약했으며, 1960년 인천신문 논설위원으로 사설(社說)을 집필했고, 경기일보에 ‘인천사(仁川史)’를 연재했다. 1956년부터 인천시사 편찬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고, 1964년 재위촉되어 1971년 「인천시사(仁川市史)」가 간행되어 나오기까지 인천 향토 언론계의 원로(元老)로 활동했다.
37> 엄흥섭
소설가. 월북작가. 언론인. 엄흥섭은 일제의 검열이 강화된 시기인 1930년대에 문단에 등단하여 1951년 월북하기 직전까지 65여 편의 장·단편 소설과 7권의 소설집을 내는 등의 왕성한 집필력으로 창작 활동을 한 작가이다. 이런 많은 양의 작품 속에서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작품 세계는 `휴머니즘`과 통속성을 빌어 쓴 `예술소설`이었다. 그는 당시 문단적 상황에 부응하여 휴머니즘론에 입각한 소설을 쓰게 되는데 엄흥섭의 휴머니즘은 현실을 반영해 내리라는 자신의 문학관과 조화를 이루면서 그의 작품 속에서 형상화되어 리얼리즘을 지향하고 있다.
1920년대 말 습작기에 인천의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습작시대? 동인으로 참여한 바 있는 엄흥섭은 해방 후 인천에서 터를 잡고 활동하였다. 1945년 12월 18일 결성된 인천문학동맹결성식에서 엄흥섭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부위원장 尹基洪, 서기장 金次榮을 비롯하여 인천지역의 문인들이 참여한 문학운동 단체가 바로 인천문학동맹이었다. 조선혁명자구원회 인천지부 고문도 역임했다.
한편 엄흥섭은 해방 직후 인천에서 창간된 일간신문 ?대중일보?의 편집국장을 맡았다. 얼마 후에는 ?인천신문?의 편집국장도 역임하였다.
38> 송수안(宋壽安 : 1903∼1983년)
송수안은 인천 태생으로 초기에는 피복업(被服業)에 뛰어들어 성가(成家)했으며,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매일신보(每日新報)의 인천지사장을 맡으면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듬해 광복이 되자 인천 최초의 향토지인 대중일보(大衆日報)를 창간하고, 그 운영이사장에 취임하였다. 광복 전부터 인천선영사(仁川鮮英社)라는 인쇄소를 경영해 온 이종윤(李鍾潤)의 인쇄 시설을 영입하여, 1946년 고주철(高珠徹)을 사장으로 임명하고 스스로는 전무 겸 편집인을 맡고 이종윤을 인쇄책임자 겸 편집국장에 앉혔다.
1950년 9·15 수복과 함께 대중일보의 제호를 인천신보로 바꾸고 스스로 발행인 겸 사장에 취임한 다음, 이종윤을 부사장 겸 편집 인쇄 책임자로 하였다. 1957년 경기도는 물론, 호남 전역으로 지세(紙勢)를 확장시키고자 제호를 다시 기호일보(畿湖日報)로 바꾸었고, 1960년에는 경기매일신문사(京畿每日新聞社)로 개제했다.
그러나 경기 지방 언론계에서 오랜 지령을 과시해 오던 동지(同紙)는 1973년 9월 1일 1도1사주의(一道一社主義)의 정부 방침에 따라 지령 제9918호 간행을 끝으로 문을 내리고 말았다.
39> 조수일(趙守逸 : 1910∼1988)
조수일은 서울 태생으로 인천에서 성장했다. 일제시대 일본대학 문과를 졸업했으며, 인천 세관에 근무하게 되어서 광복 후에도 세관 공무원으로 복무하다가 1950년 6·25전쟁을 전후하여 언론계로 자리를 옮겼다. 인천신보 기자로 출발하여 문화부장, 편집부장을 거쳐 인천신보가 경기매일신문으로 발전하면서 편집국장을 장기간 역임했고, 만년에는 상무 겸 주필로 지역 언론계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언론계에서의 활동은 직장 생활일 뿐이었고, 그 이전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있었던 관계로 소설 창작에 매진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지역 예술문화계 일원으로 광복 후와 6·25 전란 이후의 지역 문단 기반을 구축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국문인협회 초대지부장이라는 직함과 예총 경기도 지부 이사를 지낸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고 하겠다.
40> 김응태(金應泰 : 1921∼1995년)
김응태는 인천 화평동 출신으로 일본 식민지 시대에는 인천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했으며, 1945년 8·15 광복과 함께 인천 언론계에 투신하여 대중일보 일선 기자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1950년 6·25 동란 후 인천신보 기자로 활약하여 역시 향토 언론계 민완기자로 알려졌다. 1955년 향토지 「주간인천」이 창간되면서 편집국장으로 자리를 잡았고, 1960년 「주간인천」이 인천신문으로 탈바꿈하면서 역시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그 간에 서울대학교 신문대학원을 이수할 기회를 가졌으며, 제3공화국이 되자 경기일보 편집국장에서 부사장 위치에 오르기도 했다. 지역 언론계의 기린아로서 초창기 인천 언론계의 원로 고일(高逸)의 대를 잇는 지사적(志士的) 언론인의 면모를 발휘했고 할 수 있다. 제3공화국 유신 시절에 1도1사주의(一道一社主義)라고 하는 지역 언론 말살정책으로 경기일보가 폐간될 당시에 언론계를 은퇴하고 한진계열 기업의 고문과 인하대학 사무처장으로 만년을 장식했다.
5) 사회운동가
41> 박창한(朴昌漢, ?-?)
1923년 6월 결성된 소성노동회 회장. 1924년 4월 6일 전조선노농총동맹회에 소성노동회가 참가할 것을 결정하고 인천노동총동맹회로 개정하고 위원제로 회칙을 개정하였을 때 위원장에 선출됨. 1924년 11월 25일 북풍회 경성에 참가. 1925년 2월 19일 전조선민중운동재대회 줌비위원으로 참가. 1925년 4월 15일부터 3일간 열린 조선기자대회에 참가하여 여해 등과 서기로 지명되었다.
42> 유두희(劉斗熙, 1901-?)
경기도 인천 출생. 빈한한 가정에서 성장했다. 상업학교 3년을 수학한 후 직공으로 취업했다. 1925년 3월 제물포청년회에 가입했다. 1926년 11월 조선노농총동맹 제8회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상무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1월 고려공산청년회 경기도위원이 되었다. 그해 조공 인천야체이카 책임자가 되었다. 인천청년동맹에 가입했다. 신간회 인천지회에 가입했고, 신간회 내 조공 플랙션에 배속되었다. 8월 노동총동맹의 중앙기관 선출 위원으로 선되었다. 9월 노총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3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43> 정경창(鄭慶昌, 1988-?)
鄭敬昌, 千昌一, 벤고프, 경기도 강화 출생. 1924년 강화중앙청년회에서 활동했다. 4월 신흥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했다. 11월 고려공청 추천으로 모스카바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 입학했다. 1926년 6월 결혼관계로 중퇴했다. 이후 연해주로 갔다가 다시 모스크바로 가서 공장종업원이 되었다. 1930년 조선공산당 재조직준비위원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게 수배되었으나 소재불명으로 기소중지되었다.
44> 송봉기(宋奉起, 1897-?)
경기도 개풍 출생. 농업에 종사하다가 1922년경 인천으로 이주하여 정미소 인부로 일했다. 인천노동조합에 가입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2년경 김형선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했다. 9월 상해로 파견되어 김단야와 함께 조공 재건운동에 관한 방침을 협의하고 인천으로 귀환했다. 1933년 4월 인천에서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해 경기도경찰부에 검거되었다. 1934년 12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1936년 1월 만기출소했다.
해방 후 좌익계열의 인천실업자동맹 위원장을 맡음.
45> 최진하
일제하 1920년대 인천 청년운동의 주도인물 중 한 사람
46> 이범진
일제하 1920년대 인천 청년운동의 주도인물 중 한 사람. 해방 후 초대 한민당 인천지부 간부 역임. 초대 인천시의회 사무국장 역임.
47> 권충일
해방 직후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의 핵심 간부
48> 박남칠
해방 직후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의 간부로 활동. 인천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초대 인천시의회 부위원장. 경기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49> 김용규(金容奎, ?-?)
해방 직후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인천인민위원회 위원장 역임. 초대 인천시의회 위원장 역임. 인천미곡상조합장, 인천연료상조합장
일제시대인 1934년 3월의 보궐선거에서 제1대 인천부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으며, 다시 1943년 5월 치러진 제4대 인천부회 의원으로도 선출되어 해방될 때까지 활동하였다.
50> 이보운
해방 직후 결성된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 간부, 인천인민위원회의 총무부장으로 활동. 초대 인천시의회 총무부장. 경기도 인민위원회 산업부 차장.
51> 권평근(權平根, ?-?)
1945년 9월 8일 인천항에 들어오는 미국군 환영행사장에서 경비를 담당하고 있던 인본인 경관대가 발포하여 노동조합 인천중앙위원장이었던 권평근이 가슴과 배에 탄환을 맞고 즉사함.
52) 김조이(金祚伊, ?-?)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이며 조봉암의 처이다. 해방 후 인천시 인민위원회에서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그 자신이 주도하여 결성된 부녀동맹 인천지부의 부위원장 역임. 위원장은 박창례.
53> 김점권(金點權, ?-?)
경기도 고양 출신. 1927년 3월 인천영화학교를 졸업한 뒤, 자유노동에 종사하다가 1928년경부터 이승엽의 지도를 받았다. 1929년 5월 인천청년동맹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30년 9월에는 치안유지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1년을 선고받았다. 1931년 8월에는 김형선의 지도 아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했으며, 1932년 1월경에는 인천에서 적색노동단체를 조직하고 조직부문을 담당하였다. 그 해 5월에는 인천 인촌주식회사의 동맹파업을 지도하다가 검거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후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인민위원, 경기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인천지구 노동조합평의회 의장.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결성시 인천 대의원 겸 검사위원으로 참여. 그 뒤에도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남로당 중앙위원 등을 지냈다.
5) 문화·예술인
54> 김은호(金殷鎬 : 1892∼1979년)
김은호는 인천 문학동 태생으로 인천관립일어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 해 집안이 파산하자 일어학교를 중퇴하고 인천사립인흥학교(仁興學校) 측량과에 입학, 1908년에 졸업했다. 이듬해 부친이 억울한 옥고를 치르고 쓰러지자, 패가한 집을 정리하고 서울 남대문 근처에 전세방을 얻어 이발소 잡역에서부터 제화공(製靴工)에 이어 임시 측량기사로도 다녔다. 그러다가 서울 모처 개인 저택에서 동양화 한 폭을 감상하고 충격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1912년 서예가 현 채(玄 采)와 문사(文士) 김교성(金敎聲)의 소개로 당대의 대가 중 쌍벽인 안중식(安仲植)과 조석진(趙錫晉)이 주도하는 경성서화미술원(京城書畵美術院)에 들어갔고, 거기서 뛰어난 화재(畵才)를 확인시켜 교수진을 놀라게 했다. 1915년 서화미술원 3년 과정을 이수하고, 미술전람회에 세필화(細筆畵) 「조선의 가을」을 출품하여 포상을 받았다. 이후 창덕궁(昌德宮)의 하명으로 이왕(李王) 전하(殿下)의 대원수군복(大元帥軍服) 차림 영정을 완성시켜 어용화가(御容畵家)의 영광과 명성을 획득했다.
1926년 일본 도쿄(東京)에 체류하며 동경미술학교 청강생이 되었고, 제국미술전(帝國美術展)에 출품, 전통화가로서 처음 입선했다. 1928년 제7회 조선미술전시회(鮮展)에 출품하여 특선을 했고, 같은 해 동경동양화회화전에 출품하여 1등상을 탔다. 1939년 남원(南原) 춘향묘(春香廟)에 「춘향의 상(像)」을 비롯하여 「이충무공상」, 「논개상」, 「안중근상」, 「엘리자베드 여왕상」을 그렸으며, 1971년 대통령장(章) 문화훈장을 받았다. 1955년 3·1문화상 본상을 수상했고, 1966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55> 변영로(卞榮魯 : 1898∼1961년)
변영로는 부평부 오정면 고강리(古康里) 출신이다. 변영만, 변영태 형제의 막내 동생으로 1915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학교 영어반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6개월만에 마쳤다. 그 뒤 1931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귀국하여 기독교청년학교 및 중앙고등학교 영어 교사를 지냈고, 1919년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1920년 「폐허(廢墟)」 동인을 비롯한 문단 활동을 시작했으며, 『조선의 마음』 등의 시집을 발표하기도 했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출발하여 광복 후인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어과 교수로 취임했다. 작품집으로 『수주(樹州) 변영로 문학선집』이 있다.
56> 고유섭(高裕燮 : 1905∼1944년)
고유섭은 인천 용동(龍洞) 출신으로 경성제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미학(美學) 및 미술사(美術史)를 전공했다. 1930년 졸업과 함께 모교 미학연구소 조수로 발탁되었고, 1933년 28세에 개성부립박물관장(開城府立博物館長)에 취임하여 1944년 향년 40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한국미술사와 고고학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짧은 생애 동안 남다른 학구열과 초인적인 정력으로 황무지와 다름없는 한국미술사를 개척하고 많은 논문들을 발표하여 광복 후 황수영(黃壽永)을 비롯한 제자들에 의해 여러 권의 저서로 간행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30주기를 기념하여 1974년 문무대왕(文武大王)의 해중릉(海中陵)이 바라다 보이는 경북 감포(甘浦)와 선생의 고향인 인천의 시립박물관 앞에 기념비와 추모비가 세워졌고, 1980년에는 ‘우현(又玄) 미술상’이 제정되었다. 또한 1992년 새얼문화재단에서 시립박물관 마당에 동상을 세웠다.
57> 진우촌(秦雨村 : 생몰 미상)
진우촌은 인천 태생으로 본명은 종혁(宗赫)이고 우촌은 예명이다. 일본 물산장려회 희곡 작품 모집에 응모한 희곡 「암탉」이 당선되어 희곡작가로 등단하였다. 조부 학명(學明)이 구한국 시대의 관비 유학생으로 도일(渡日)한 바 있었고, 부친 진수(秦秀)는 1895년 신학제(新學制) 포고와 함께 설립된 관립외국어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우고 인천해관(仁川海關)의 통역을 맡아 했다. 1926년 배우이며 연출가인 정암(鄭岩)과 무대장치가인 원우전(元雨田), 언론인 고일(高逸)과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를 설립하여 향토 연극운동을 전개했다. 한편으로 동인지 「습작시대(習作時代)」를 간행하기도 했다. 8·15광복 후에도 극단 ‘고향’을 창단하여 활동했다. 작품으로 「암탉」, 「두뇌수술」, 「춘향전」(각색), 「피를 파는 사람들」이 있다.
58> 소설가 현덕[玄德 1911∼?]
소설가·아동문학가. 서울 출생. 어린 시절을 인천의 섬지방에서 보냄. 경성제일고보 중퇴,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인천 부두가의 풍경을 아이의 시선을 담은 소설 「남생이」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그 뒤 소설·아동소설을 주로 발표하였으나 8·15를 전후로 세태풍자적인 작품경향에서 전환하여 사회주의적 계급의식을 표출하였다. 또한 좌익문학가 계열인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출판부장으로 활동하였고 6·25 때 월북하였다. 그 동안 규제문인으로 묶여 있다가 88년 7월 전작품이 해금되었다. 작품으로는 동화집 《집을 나간 소년(1946)》 《포도와 구슬(1946)》 《토끼 3형제(1947)》 등이 있다.
59> 극작가 함세덕 [咸世德 1915∼1950]
극작가. 인천 화평리 출생. 유치진(柳致眞) 밑에서 공부하여 희곡을 쓰기 시작하였다. 1936년 《조선문학(朝鮮文學)》지에 《산허구리》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초기에는 서정적인 문제작 《해연(海燕)》 《동승(童僧)》 《무의도기행(無衣島紀行)》 등을 썼으며 일제 말기에는 친일극 《추장(酋長) 아사베라》 등을 발표하였다. 8·15 후에는 《기미년 3월 1일》 《태백산맥》 등의 경향성 짙은 작품을 쓰는 한편 조선문학가동맹(朝鮮文學家同盟)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뒤 월북하여 6·25 때 북한 인민군 종군작가로 참전하였다가 50년 전사하였다. 그 동안 규제문인의 한 사람이었으나 88년 7월 전작품이 해금되었다.
60> 평론가 김동석 [金東錫 1915∼?]
문학평론가. 영문학자. 인천 출생.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 광복 전 여러 잡지에 수필을 썼고, 첫 수필집 《해변의 시(1946)》와 시집 《길(1946)》 등을 간행하였다. 광복이 되자 문학가동맹(文學家同盟)계열에서 김동리(金東里) 등의 민족주의 경향과 맞서 논쟁하였다. 즉 김동석의 《순수의 정체》와 김동리의 《독과문학(毒瓜文學)의 본질》이라는 두 평론의 대립인데, 여기서 김동석은 계급문학·물질론·사회주의 리얼리즘 등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또한 모스크바 3상회의의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서 《예술과 생활(1947)》이라는 평론집을 쓰기도 하였다. 이 밖에 평론 《실존주의 비판(1948)》 등이 있다. 대한민국정부수립을 전후하여 월북했다.
61> 배우 서일성(徐一星 : 미상∼1950년)
서일성은 인천 태생으로 1925년 초창기 신극단(新劇團)인 ‘토월회(土月會)’에 참가하여 이백수(李白水), 윤심덕(尹心悳) 등과 활동했다. 1935년에는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에 참여하여 서울 동양극장(東洋劇場)을 중심으로 연극 활동에 매진했다. 1939년에는 연출가 박진(朴珍) 등과 함께 극단 ‘아랑(阿娘)’을 결성하고 활약했으며, 8·15 광복이 되자 그 해 10월 양백명(梁白明), 장진(張陣) 등과 극단 ‘백화(白花)’를 창단했다. 1950년 6·25 동란 때 인천 주안(朱安)에 거주하다가 처가가 있는 서산으로 피난을 갔으나, 북한군에게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곳에서 피살당했다. 일제시대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의사당) 무대에서 연기를 하면 무대에 홀로 서도 온 무대가 꽉 차는 듯한 연기를 보여줬다고 일본의 저명한 연극 평론가가 격찬하기도 했다. 출연 작품으로는 톨스토이의 「부활」, 버나드 쇼의 「오로라」, 「춘향전」, 「박쥐의 집」, 「백의민족」 등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지니고 있었다.
62> 시인 배인철
인천 출신의 시인. 흑인시라는 독특한 시세계를 펼쳐보임.
해방 직후 인천의 문화운동의 선동에 서서 <인천신문화협회>를 결성하고 활발한 문화운동을 전개함.
63> 조각가 조규봉 [曺圭奉 1917∼?]
조각가. 인천(仁川) 출생. 1941년 일본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조각과를 졸업하였다. 8·15 직후 서울에서 조선조형예술동맹 간부로 있다가 월북하여 평양미술대학 조각강좌장과 조각학부장을 지냈다.
64> 시인 조병화 [趙炳華 1921∼2003]
시인. 호는 편운(片雲). 경기도 안성(安城) 출생. 1938년 경성사범학교, 45년 일본 도쿄[東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해방 직후 인천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 49년 첫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간, 문단에 데뷔하였다. 이어 제 2 시집 《하루만의 위안(1950)》, 제 3 시집 《패각(貝殼)의 침실(1952)》 등 계속적으로 시집을 발표하며 정력적인 작품활동을 하였고, 많은 국제대회에도 참가하였다. 현대적 도시풍의 서정시인으로 자신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하였으며, 일상의 평이한 문맥으로 진솔하게 그려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았다. 60년 아시아자유문학상, 74년 한국시인 협회상, 85년 대한민국예술원상 및 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하였다. 82∼84년 시인협회장, 89∼91년 문인협회 이사장, 95년 예술원회장이 되었다. 기타 번역시론집 《현대시론(1956)》, 수필집 《사랑은 아직도》 등이 있다.
65> 시인 한하운 [韓何雲 1919∼1975]
시인. 본명은 태영(泰永). 함경남도 함주(咸州) 출생. 일본 도쿄[東京] 세이케이고등학교[成蹊高等學校] 2년을 수료하고 베이징[北京]으로 건너가 1943년 베이징대학 농학원을 졸업하였다. 49년 《신천지(新天地)》 4월호에 <전라도 길>과 함께 12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나병이 들어 인천 부평의 성계원에 기거하면서 시작활동을 계속했다. 같은 해 첫시집 《한하운 시초(詩抄)》를 간행하여 나병시인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이어 55년 제 2 시집 《보리피리》, 56년 제 3 시집 《한하운 시선집》, 57년 자서전 《나의 슬픈 반생기》, 60년 자작시 해설집 《황토길》 등을 펴냈다. 그의 작품은 나환자라는 독특한 처지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고 객관적인 어조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 나환자 구제사업에 헌신하였다.
66> 시인 김차영
시인, 해방 후 결성된 인천문학동맹 서기장 역임.
김수영과 함께 앤쏠로지 시집 ?도시들의 합창? 간행.
67> 시인 이인석
월남시인, 인천예총에서 활동. 여러 권의 시집 출간
68> 박세림(朴世霖 : 1925∼1975년)
박세림은 강화 출신으로 사숙(私塾)에서 한학(漢學)과 서예를 수학했고, 1947년 단독으로 ‘대동서연회(大同書硏會)’를 조직했다. 1952년부터 유희강(柳熙綱), 장인식(張仁植)과 함께 인천 서예진흥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1953년 위의 두 서예인들과 함께 국전(國展)에 출품하여 5회 연속 입선을 하였고,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연 3회 연속 문교부 장관상을 수상하고 국전 추천작가(推薦作家)로 선임되었다. 1965년에는 국전 초대작가(招待作家)가 되어 1972년까지 연속 5회에 걸쳐 심사위원을 맡았으며, 제20회 국전에서는 서예분과 심사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1965년부터는 5회 연속으로 경기도 예총지부장에 선출되어 지방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1958년부터 1974년까지 1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1960년 이후로는 ‘동정서숙(東庭書塾)’을 개설하여 이곳에서 신경희(申卿熙), 전도진(田道鎭) 등을 배출해냈다.
69> 유희강(柳熙綱 : 1911∼1976년)
유희강은 인천 서곶 출신으로 1937년 명륜전문학교(明倫專門學校)를 졸업한 뒤 1939년 중국으로 건너가 베이징(北京)의 동방학회(東方學會)에서 서예와 금석학(金石學)을 연구했다. 또한 1943년에는 상하이(上海) 미술연구소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기도 했다.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인천 미술계에서 활동하며 대동서화연구회(大東書畵硏究會)를 조직, 서화 연구의 활성화를 기했다. 1953년 이후 국전(國展)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상하였으며, 1959년부터는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이 되었다. 1964년부터는 일반에게 알려진 검여체(劍如體) 서풍(書風)의 완성 단계에 들어가 1975년 「검여 유희강 서예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1972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70> 장발 [張勃 1901∼2001]
서양화가·미술교육자. 인천(仁川) 출생. 1922년 일본 도쿄[東京]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한국인 최초로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미학·미술사를 공부하였다. 8·15 광복 뒤 한국미술가협회 등에서 활동하며 서구미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주력하였고, 미술교육에 전념하는 등 한국의 서양화단 및 미술교육·미술행정 등에 있어 선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주로 천주교회를 위해 성화를 많이 제작하였고, 대표작품으로 《김대건 신부상(1920)》 등이 있다.
71> 정암(鄭岩 : 생몰 미상)
정암은 인천 태생으로 초창기 조선배우학교(朝鮮俳優學校) 출신이다. 그는 19세기 벽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인천 지부를 이끌며 친일 세력과 맞싸우고, 일진회(一進會) 회장 박영효(朴泳孝)를 저격 응징하려다 실패하자 사상팔변가(思想八變歌)를 남긴 채 권총 자결한 애국열사 정재홍(鄭在洪) 선생의 둘째 아들이며 본명은 종원(鍾元)이고, 암(岩)은 예명이다.
일본 전위좌(前衛座) 연극연구소에서 연기 연마를 했고, 귀국하여 토월회(土月會)와 낭만좌(浪漫座)에서 연극 활동을 했다. 또한 고려영화사(高麗映畵社)를 창설하고 무성영화인 「쌍옥루(雙玉樓)」를 찍었으며, 이 때 출연까지 겸하여 정식 영화배우로 인정을 받았다. 그리하여 영화 「낙화유수(落花流水)」에서는 주연을 맡기도 하였다. 1926년 지방연극 발전을 꾀하는 뜻에서 희곡작가 진우촌(秦雨村)과 무대장치가인 원우전(元雨田), 언론인 고일(高逸) 등을 규합하여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를 창설하여 향토 연극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출연 작품은 「햄릿」, 「상하(上下)의 집」, 「춘향전」, 「칼멘」, 「사랑의 주검」, 「눈물의 빛」, 「스테파노의 죽음」등이다.
72> 김도인
1937년 1월 10일 창간된 잡지 ?월미(月尾)?(편집 겸 발행인 김도인)를 원문 그대로 전재한다. 이 잡지는 인천부 용강정(龍岡町, 지금의 중구 인현동) 24번지에 있는 백미사(白眉舍)에서 4×6배판 50면의 지역종합교양지 발간되었다.
발행인인 김도인은 ?동아일보? 인천지국의 기자 출신으로 문학활동과 연극활동에도 종사한 바 있는 문화인이다. 그는 1927년 2월 인천에서 진우촌의 주도에 의해 창간되었던 ?습작시대?에 동인으로 참여하였고, 또한 우촌과 함께 정암, 원우전, 고일 등이 조직하였던 극단 <칠면구락부>에도 참여한 바 있다. ?습작시대?나 <칠면구락부>가 인천에서 출현 가능했던 것은 1920년대 초반부터 경인기차통학생회 친목회를 통해 축적된 인천의 문화적 역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30년을 전후한 10여년간 프로문예운동이 광범위하게 전개됨으로써 지역적 문예운동은 그 주변부로 전락하였다. 이로 보면 ?월미?의 창간은 프로문예운동이 수그러들면서 나타난 차안적 지역문화운동의 한 반영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사실은 김도인의 여러 행적에서도 간파된다. 김도인은 일찍이 ?습작시대? 3호(1927. 4)의 「나의 결투장」이란 글에서 팔봉 김기진에게 강력한 항의를 던진바 있다. “조선의 청년이 열구하는 이상(理想)과 참지 못할 의분의 규호(叫號)를 표현키 위하야 필연적으로 갖게되는 문학열”을 두고 ?습작시대? 2호에서 김기진이 문학적 완성도의 세련 없이 문학의 공리성만을 추구하는 것이라 비판한 데 대하여 격렬한 항의를 제출한 것이다. 김도인이 강조한 것은 오히려 문학적 세련성에 앞서 사상과 예술관의 확정이었다. 그 뒤 김도인은 오랫동안 재직하던 ?동아일보? 기자직을 그만 두고 1935년에는 강화도 본섬에서 떨어진 길상면 동검리의 작은 섬에서 사립학교를 설치하고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동아일보?, 1935. 2. 24) 이로 보면 김도인은 줄곧 문학 혹은 문화의 지역적 실천성을 자각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해방 후에도 인천문학동맹의 집행위원 겸 소설·희곡부 위원으로 참여했다.
73> 원우전 [元雨田 ?∼?]
본명이 원세하(元世夏)인 원우전은 1903년 인천 출생으로 미술을 전공한 뒤 <토월회>의 창립단원으로 미술부를 담당하였고, 이후 <조선연극사> <신흥극장> <태양극장> <황금좌> 등에서 무대미술을 거쳐, <청춘좌>와 <호화선>을 전속극단으로 하는 동양극장에서 독보적인 무대미술을 펼쳐보였다고 한다. 1942년 제1회 연극경연대회에서는 일본 축지소극장에서 무대장치를 공부하고 돌아온 김일영(金一影, 극단 <아랑> 「행복의 계시)을 누르고 <청춘좌>의 「산풍」을 무대장치한 원우전이 무대미술상을 받았다고 한다. 특기할 사실은 그가 1920년대 초창기의 주요한 문학동인지 중 하나인 ?백조?지에 깊이 관련된 인물이라는 점이다. ?백조?파 동인 중에서도 특히 안석영(安夕影), 나도향(羅稻香), 홍사용(洪思容) 등과 깊은 예술적 심정을 교류하면서 ?백조? 제 1, 2호의 표지를 장식하는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다. 인천에서 진우촌, 정암 등과 함께 ‘칠면구락부’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23년 극단 토월회(土月會)에 참여, 무대장치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 한국연극 초창기의 본격적인 무대미술가이다. 조선연극사(朝鮮硏劇舍) 무대미술부 단원, 신흥극장·문의극단·황금좌 등의 창립단원이었으며, 토월회 재건과 극단 백화(白花) 창립에 참여하였다. 20∼30년대에는 전문적인 무대미술가가 드물어 그가 사실상 주요 극단의 작품들을 도맡아 하였다. 6·25 때 부산으로 피난하여 신협과 국립극단의 몇몇 작품의 무대장치를 하였다. 특히 그는 배경화 정도에 머물러 있던 당시 무대장치의 수준을 사실적·입체적으로 끌어올렸다. 1942년 제 1 회 조선연극문화협회 연극경연대회에서 《산풍(山風)》으로 무대미술상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토월회의 《춘향전》 《산송장》 《농속에 든 새》 등과 《춘하추동》 《이순신》 《산유화》 등 60여 편이 있다.
74> 최성연(崔聖淵)
생년월일 : 1914년 06월 16일
시조시인, 경성제2고등보통학교 졸업,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인천지부 문학부 위원. 인천의 근대사에 대한 연구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특히 그의 저서 ?개항과 양관역정?은 한국 근대건축사 연구의 필독서가 되고 있다.
75> 이경성 [李慶成 1919∼]
미술평론가. 인천(仁川) 출신. 1941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률과를 졸업했다. 45∼54년까지 인천시립박물관장, 54∼61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61∼81년 홍익대학교 교수, 81∼83년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지냈다. 한국 근대미술사를 처음으로 체계화시켰고, 미술이론에서 미술평론·공예론 등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으며, 국전을 비롯해 많은 전람회의 운영위원·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 현대미술 발전에 기여했다. 국민훈장 목련장, 보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저서로 《미술입문(1961)》 《한국미술가논총(1974)》 《한국근대미술연구(1975)》 《한국근대회화(1980)》 등이 있다.
76> 화가 우문국
우 화백은 황해도 출신으로 어릴적부터 그림을 좋아했으며 해주보통학교를 다니고 중국 상해로 그림 수업을 떠난 것이다. 그 곳에서 10여년간의 그림 수업을 마치고 해방 후 귀국하여 인천 . 중구 신포동 근처에 거주하면서 헌신적인 문화활동을 계속하여 왔다.
1954년부터 1959년까지 5년간 초대 인천문화원장으로 취임하여 美 공보원의 영사기등 기재일부를 지원받아, 처음에는 특 미문화관으로 발족하여 오다가 그로 하여금 문화원 기반조성에 힘써 왔다.
그 후 1956년 10월에는 인천시장 및 재인기관장 22명이 후원회를 조직하여 지원책을 강구하기도 했으며, 인천시립박물관장도 역임하였고, 인천현대미술초대전, 인천초대추천작가전, 한.중교류전 등 많은 활동을 해 왔던 것이다.
문총 인천지부 표양문 위원장은 1956년 10월 유토피아다방에서 개최된 그의 양화개인전에서 인사의 말을 통하여 “우 씨가 교편을 잡으면서 시간 및 생활과 자료등 모든 고난을 극복하여 조금도 제작열이 정지됨 없이 작품활동을 계속하는데 높이 치하하고 인천의 문화활동에 10년 동안 힘을 기울여 온 그의 노고에 감사한다”고 피력하였다. 나는 근 반세기에 걸쳐 신포동에서 살았고 이곳을 떠나본적이없다.
1953년 휴전이 되고 서울과 인천이 수복되던 날부터 60년대에 이르기까지 신포동 골목에는 글쓰는 사람, 화가, 기자 등과 특히 우문국, 김찬희, 김영건 등은 저녁 때만 되면 동리 사람들과 마주앉아 대포잔을 주고 받곤 하는데 여기에 또 시인 최병구, 김양수, 조한길, 손설향이 불그스레한 얼굴로 앉아 있는 것이다. 당시 우리 문인들은 집잃고 재산잃은 빈 털털이었다. 신포시장 거리를 비롯하여 용동대포집거리는 신문기자, 시인 등 묵객들의 전용지역 이었다.
다방이나 대포집을 기웃거려보면 의례히 전투모를 쓰고 카키복을 입은 “프레스”란 완장을 두른 기자나 글쓰는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특히 두주가로 알려졌던 인천신보의 윤치봉, 조선일보의 김종윤, 백양테일러의 황씨, 뚱뚱이 윤기봉 그리고 화가 김영건, 김찬희, 이승하, 우문국, 최병구 등은 매일같이 「안흥관」 「백항아리집」 「애주집」 등을 출입하였던 것이다.
특별히 기술할 것은 추사 김정희 이후의 명필가로 알려진 검여 류희강은 일제시중국 상해에서 우화백과 만나 함께 동.서양화를 수학하고 해방 후 함께 귀국하여 우 화백과 인천에 머물면서 인천시 박물관장에 차례로 취임하였고, 검여와 동정박세림, 우초 장인식 등 3인은 전국에서도 널리알려진 서예가인데 모두 우 화백과는 신포동에서 함께 동고동락한 근 반세기 전우와도 같던 그들이 아닌가?
우화백은 미술가, 음악가, 체육가, 문인, 교육가, 신문기자 ...... 등등을 거의 신포동에서 사귄 교우들이다.
「신포시장」 - 시장이란 서민들의 진정한 모습과 다양한 표정을 드러내는 곳이다.-
1893년 개항을 본 이곳은 금년으로 백주년을 넘겼는데 그동안 엄청난 변화를 거듭하여 지금은 세계를 한품에 안을 동양 최대의 항구로 등장하였다. 쓸쓸하고 한적하기만 했던 포구가 오늘날은 수도의 관문으로 성장 발전하여 천험(天險)의 해조(海潮)를 순전히 우리 힘으로 극복하여 지금은 간만의 차가 거의 없게 하였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신포 시장은 옛날 중국 사람들의 청과물로 판을 치던 시장이었는데 지금은 식료품 등 없는것이 거의 없는 시장으로 변하였다. 대포집 대명사로 되어있는 백항아리집은 지금도 호주머니가 가벼운 주붕들의 단골로 되어 있지만 아침 저녁으로 드나들던 김영건, 이승하 씨는 고인이 되고 유일한 생존자는 우문국 화백 한 사람 뿐인 것이다.
77> 화가 김영건
화가. 해방 직후에 지역에서 활동한 화가
78> 시인 최병구
인천의 대표적인 향토시인. 인천문인협회에서 오랫동안 활동. 기인적인 풍모로 기억됨
79> 한남철(韓南圭, 1927-199?))
소설가, 인천 출생. ?사상계?롤 등단. ?신동아? 기자 역임. 인천을 문학적 공간으로 하는 많은 단편소설들을 발표하였고, 현덕 문학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평가됨. 유고소설집으로 ?바닷가소년? 이 있음
6) 학자·교육자·여성
80> 박두성(朴斗星 : 1888∼1963년)
박두성은 강화 교동 태생으로 교동봉산의숙(喬桐鳳山義塾)을 졸업하고 1906년 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어의동보통학교(於義洞普通學校 : 후의 孝悌普通學校)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1913년 제생원 맹아부(濟生院 盲啞部 : 서울맹학교의 전신) 교사로 자리를 옮겨, 이 때부터 맹인 교육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일어(日語) 점자(點字)로만 교육을 해야 하는 일에 아쉬움을 느끼고 1926년부터 한글 점자 연구에 착수하였다. 이미 1923년 1월 비밀리에 ‘조선어점자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7년 간의 연구를 거쳐 1929년에 이른바 훈맹정음(訓盲正音)이라는 이름의 한글 점자를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한글 점자로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을 출판하였으며, 1935년 일제 통치 하임에도 부면협의원(府面協議員) 선거에서 처음으로 한글 점자로도 투표가 실시되어 맹인들의 사회 참여가 가능해졌다.
광복 후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그 승인을 받았다. 그의 공적은 또한 1941년 점자로 된 「신약성서(新約聖書)」를 완성한 일이었으며, 맹인의 자활과 사회적 역할에 강한 열의를 갖고 의학, 복술학(卜術學), 안마, 지압에 이르기까지 76종류의 맹인용 교육 자료를 만들어 보급시킨 일이었다. 우리 나라 맹인들의 아버지로 추앙받아 서울맹학교 교정에는 ‘박두성한글점자찬앙기념비(點字讚仰紀念碑)’가 세워졌다.
81> 장석우(張錫佑 : 1871∼1942년)
장석우는 강화 출신으로 1900년에 주명서(朱命瑞), 김용태(金鏞泰) 등과 주단포목전인 ‘서흥태(瑞興泰)’를 일으켜 번창 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리하여 인천 상업계에 중추 인물로 떠올라 정치국(丁致國), 정영화(鄭永化), 최승우(崔承宇) 등과 함께 인천조선인상업회의소(仁川朝鮮人商業會議所)를 이끌어 나갔다. 한일합방이 되면서 조선인상의(商議)가 일인상의(日人商議)에 합쳐지자 조선인 의원(議員) 중 특별회원으로 뽑혔으며, 1920년에는 조선인에게 유일하게 한 자리가 주어지는 부회두(副會頭)에 선출되기도 했다. 3남인 광순(光淳)의 권유에 따라 1940년 부평(현 경찰대학 자리)에 고등여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도 기여했다. 8·15 광복 이후 학교의 운영권은 광순에게서 천주교 측으로 넘어갔는데, 이 학교가 현재의 인천박문여자중고등학교이다. 지금도 이 학교 강당에는 설립자인 장석우의 영정이 걸려 있다.
82> 길영희(吉暎羲 : 1900∼1984년)
길영희는 평북 희천(熙川) 태생으로 19세 때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 3·1만세운동 때 학생 대표로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6개월 징역에 집행유예 3년 선거를 받고 학적을 박탈당했다. 24세에 다시 배재고보 4학년으로 편입, 26세로 졸업했다. 그 해 일본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에 입학, 30세에 졸업하고 배재고보 교사가 되었으나 1년 후 경신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34세 때 뜻이 맞는 동지들과 안변(安邊) 개간사업 민립농과대학 설립 계획을 세웠다. 36세 때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으로부터 민족의 장래에 관한 교화를 받고 39세 때 인천 만수동에 후생농장(厚生農場)을 착수했다. 40세 때는 경신중학교를 사임하고 인천 후생농장에 귀종하여 농업 입국의 투지를 펴 나갔다.
1945년 민족 해방을 맞자 인천 유지들의 추대로 인천중학교 교장에 취임하고 이후 민족교육 수립에 전력을 기울여 나갔다. 그는 우선 영재교육을 목표하여 1952년부터 53년까지 문교부 주최 전국학술경시대회에서 3연승을 하는 실적을 올렸으며, 전국 중학교 가운데 가장 높은 서울대학 합격률을 차지했는가 하면, 제물포고등학교를 인가받아 교장에 취임했다. 1956년에는 무감독 시험제를 창안, 실시했고, 교지「춘추」를 발간하여 1960년 전국고교 교지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였고, 제물포고교 제5회 졸업생이 서울대학교 입시에서 수석 합격을 하기도 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5년 일찍 정년퇴임을 하고 자택에다 대성학원(大成學園)을 설립 경영해 가다가, 1967년 충남 예산에 가루실농민학원을 설립하고 생애를 마칠 때까지 이끌어 갔다. 그의 교육열은 인천에서의 영재교육 활동으로 큰 발자취를 남겼다.
83> 김애마(金愛麻 : 1903∼1996년)
김애마는 인천 율목동 출신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1936년 내셔널대학을 졸업했다. 1940년 경성여자전문학교 보육부장을 거쳐 1945년 광복이 되자 이화여자대학교 교육학 부장이 됐다. 1946년에는 미 군정청 문교교육 심의의원에 위촉됐고, 같은 해 이화여대 총무처장에 취임했다가 총장서리를 역임했다.
1951년에는 이화여자대학 사범대학장에 취임했고, 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YMCA연합회장을 역임했다. 김활란, 서은숙, 김영의와 함께 인천 출신 이화인 4대 여걸로 꼽히고 있다.
84> 김영의(金永義 : 1908∼1986년)
김영의는 인천 출신으로 1929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를 졸업한 후, 1935년 미국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학교를 이수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복귀했다. 1945년 동 전문학교가 대학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동교 음악과장이 되었다. 1946년 다시 도미하여 줄리어드 연구원에서 연수를 마치고 1950년 이화대학교 예술원장으로 복귀했고, 1966년에는 이대 음악대학장으로 취임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모교에서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85> 변영만(卞榮晩 : 1889∼1954년)
변영만은 부평부 오정면 고강리(古康里) 출신이다. 법관학교를 나와 판사가 되었으나 사법권이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자 판사직을 사퇴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한일합방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학문 연구에 전념, 한학 및 영문학(英文學)의 석학이 되었다. 해방 후 귀국하여 성균관대학 교수를 지냈다.
86> 김활란(金活蘭 : 1899∼1970년)
김활란은 인천에서 성장하여 1919년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마치고 1922까지 동교 예과 및 고등과 교수로 있다가, 1924년 미국에 유학하여 웨슬리언대학과 다음 해 보스턴대학을 마치고 워싱턴에서 개최된 ‘세계여자기독청년회’에 참가했다. 1925년 귀국하여 이화여전 교수에 보직되었으며, 1931년 미국 콜럼비아대학원을 마치고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39년에서 1945년까지 이화여전 교장을 맡음과 동시에 재단이사장을 맡아 했고, 1945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 총장과 재단이사장에 취임했다.
1961년 9월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정년퇴임하고 명예총장과 재단이사장 직만을 맡아 했다. 1963년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했으며, 평생 독신을 지키며 한국 여성교육에 이바지한 공이 커서 1970년 작고 후 정부로부터 1등 수교훈장이 수여됐다. 미국에서는 닥터 헬렌 킴으로 알려졌다.
87> 장극(張剋)
생년월일 : 1913년 4월 8일
현직 : 前 인천대 석좌교수
학력 : 독일 베를린공과대 대학원 공학 박사
경력 : 인천대 석좌교수
88> 박창례(朴昌禮 : 1910∼1983년)
박창례는 인천 출신으로 창영학교를 마치고 계속 면학의 뜻을 펴나가기 위해 서울 정신여학교(貞信女學校)에 진학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2학년 때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교외 강의록으로 와세다(早稻田) 대학 2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이와 같이 가난하여 배움의 길을 걷지 못하는 고통을 뼈저리게 느끼고 인천에서 이옥녀(李玉女)와 함께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육사업에 진력했다. 먼저 도원동 보각사(普覺寺)에서 강당 일부를 빌어 당시 성냥공장과 정미소에 다니는 여공 1백여 명을 모집하고 야학을 시작했으나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6개월만에 해산되고 말았다. 다시 이흥선(李興善) 정미소 창고를 빌려 여공 30여 명을 데리고 야학을 시작했으나 이마저 일본 경찰의 탄압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동분서주하여 일본인의 토지를 임대하게 되었고, 각계의 유지들로부터 480원(圓)의 기부를 받아 교사(校舍)를 신축하고 동명학원(東明學園)의 기초를 다졌다.
1945년 광복 이후에는 현재의 동구 송림동 114번지로 교사를 이전하고 6년제로 승격되는 기쁨을 맞이하였다. 이 학교는 개교 이래 박 교장의 교육 이념으로 말씨 곱고, 예절 바른 학교로 전국에 알려졌다. 이 같은 교육계에서의 공로로 1957년에는 인천시에서 시민상(市民賞)을, 1964년에는 대한교육연합회에서 특공상(特功賞)을, 1966년에는 소년한국일보의 ‘훌륭한 어머니상’을, 같은 해 경향신문교육상을 각각 수상했다. 1971년 정년을 하면서 국민훈장 동백장(冬栢章)을 수상했으며, 1982년 한국일보가 제정한 제1회 교육대상(敎育大賞)을 수상했다. 1983년 학교 재단의 재정을 확립시켜놓고 세상을 하직했다.
89> 서은숙(徐恩淑 : 1900∼1977년)
서은숙은 인천 율목동 출신으로 1930년에 미국 신시내티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1931년 콜럼비아대학교 대학원을 이수하였으며, 귀국 후 1941년 이화학당 재단이사와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1956년 명예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5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서리에 취임하였다. 이어 이화여대 사범대학장을 역임한 다음, 1970년에는 이대 재단이사와 대한여자기독교청년회 이사장을 맡았다. 동향 선배인 김활란 박사가 별세하자 제2대 재단이사장에 취임했다.
90> 신태환(申泰煥 : 1912∼1993년)
신태환은 인천 출신으로 인상(仁商)을 졸업한 후 1939년 도쿄대학(東京大學) 상과를 졸업했다. 일본에서 돌아 온 1939년에서 해방 후인 1948년까지 10년 간 연희대학교(延禧大學校) 상과 교수로 있으면서 동 대학 학장을 겸하기도 했다. 1949년 동국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가 6·25 직후인 1953년에서 1957년 초까지 5년 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초청으로 연구를 쌓았고, 1957년 서울대학교 법대교수로 돌아와서 학술원(學術院) 회원이 되기도 했으며, 같은 해 서울대학교 총장이 되기도 했다. 1959년에 동국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학의 저서로 『동태(動態) 경제학의 범위와 성질』 과 『화폐적 균형의 개념』이 있다.
관직으로는 1964년 통일원 장관을 지낸 바 있었고, 1971년에는 아시아경제연구소장이라는 전문 직책을 맡기도 했다. 곧이어 경제기획원 장관의 중책을 맡기도 했다. 1972년도에는 모교인 인고(仁高)의 4대 동창회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80년대 중반에 드디어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93년 81세로 타계할 때까지 재경(在京) 인천인회의 회장을 맡았다.
91> 이훈익(李薰益 : 1916∼2002년)
이훈익은 인천 서구 연희동 출신으로 옛 서곶(西串)의 토박이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지 30여 년 간 인천시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서곶 출장소장을 끝으로 정년을 맞은 뒤 원예협동조합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생애 전반기는 일반 직장인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으나, 후반기로 접어들면서 향토사학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대대로 살아온 서곶 지역 향토사의 맥을 찾아 탐구해 가던 끝에 인천 전역에 걸친 지명 유래를 더듬어 정리하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1985년부터 인천향토문화연구소장에 임하여 그의 저술 작업이 출판되기 시작했다.
『인천충효록』, 『인천지지(地誌)』, 『인천지방 향토사담』, 『인천의 성씨인물고』, 『인천지방의 전통제례』, 『인천금석비명집』, 『근세인천지방의 전란사』등의 저서로 향토사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의 남다른 향토사 업적이 인정되어 1983년 인천교육대상, ’84년 인천시민상(문화부문), ’96년 인천광역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92> 박광성(朴廣成 : 1925∼1995년)
박광성은 충북 제원군 백운면 출신이다. 대구사범을 거쳐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충주사범학교 사학 담당 교사로 10여 년 근무하던 끝에 1960년대에 인천교육대학 교수가 되었다. 인천교대에서 10년 근무하고 1980년대 초에 인하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 정년을 맞고 대우교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교육자로서의 경력보다도 사학자로서 괄목할 만한 활약과 업적을 남겼다.
경기도사 편찬위원, 경기도 정책자문위원을 거쳐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한 이후로는 인천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 인천시 문화재위원, 인천시 행정자문위원 등 폭 넓은 활동을 했다. 특히 한국사 중에서 민란사(民亂史)를 전공해서 그 방면의 독보적 연구 업적을 남겼으며, 향토사로서의 인천시사를 재정리함으로써 인천의 통사를 바로잡아 놓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인천 향토사 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이다. 저서로는 『한국 중세 사회와 문화』가 있다.
7) 기업인
93> 정치국(丁致國)
부산 출신의 ‘총각엿장수’로 인천갑부가 되어 최초의 근대식 극장인 협률사를 창설했다.
94> 타운센트(미국 타운센트양행 사장)
미국 상인 모오스(J. R. Mores)는 1877년부터 일본 요코하마에서 상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하여 1894년에는 미국무역상사(America Trading Company)라는 상호를 내걸고 영업한 결과 동양의 미국 상회사 중에 가장 큰 회사로 발전시켰다. 모오스는 1883년 차관 협상차 일본에 온 김옥균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 진출에 대한 계획을 세웠으며, 실무경험이 많은 타운센드(Walter D. Townsend)를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김옥균과 동행한 타운센드가 나고야호를 타고 1884년 5월 1일 제물포에 도착하여 미국무역상사 조선지점을 제물포에 설립하였다.
조선의 삼림 및 광산이권을 노리고 진출한 타운센드 상회는 조선정부 관허의 조선 상회사인 순신창(順信昌)을 인수하고 가장 수익성이 있는 미곡무역에 진출한다. 관리인으로 조선인 서상집(徐相集)을 고용하여 적극적으로 추진된 미곡무역은 조선인 객주 및 감리서 직원과의 마찰, 그리고 인천항의 방곡령 단속 속에서도 계속되었다. 1892년부터는 정미업에 손을 대는 한편 자본력을 바탕으로 조선 상인을 대상으로 고율의 고리대금업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조선에서의 토지확보와 함께 자본축적을 꾀하였다. 일본 소재 미국무역상사와의 중개무역을 통해 무기를 비롯한 잡화류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올리기도 하고, 왕궁의 전등시설 가설공사에까지 참여하였다.
1895년 무렵 모오스의 미국무역상사로부터 독립한 타운센드는 이후 석유와 폭약의 중개무역, 금융 보험업 등으로 업종을 변경하면서 활동하였다. 1897년 미국의 거대 석유기업인 스탠다드 석유회사와 계약하여 조선에서의 석유 독점판매권을 획득하였고, 월미도에 50만통의 석유를 저장할 수 있는 창고를 건설하여 독점적인 석유판매 이익을 얻었다. 1912년까지 지속된 타운센드 상회의 석유사업으로 이 상회는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한편 1900년에는 부평의 율도에 폭약창고를 건설하여 광산개발에 소요되는 폭약의 중개무역을 병행하였다.
알렌을 비롯한 미국 공사들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날로 팽창하던 타운센드 상회는 1905년 일본의 조선강점 이후 석유를 제외한 기타 업종을 축소하면서 쇠퇴하였다. 1918년 타운센드 사망 이후에도 타운센드 상회는 후계자에 의해 1930년경까지 존속하다가 미국으로 철수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타운센드 상회의 무역활동은 인천 지역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타운센드 상회를 통해 들어온 석유가 당시의 조선사회에 던져준 생활상의 변화는 가장 상징적인 것이다. 일본인 부인을 둔 타운센드는 친일적인 성향의 인물이었고 각국거류지의회의 중요위원으로 매번 선거 때마다 당선되었던 권력가이자, 수익이 된다면 어떠한 사업에라도 뛰어 든 사업가였다. 중국인 우리탕과 마찬가지로 그도 개항장 인천의 어엿한 주인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타운센드 상회에서 근대적인 상업업무를 배운 서상집, 장기빈과 같은 일군의 조선인들은 이후 조선인 사회 내부의 변화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한다.
95> 마이어(독일 세창양행 사장)
세창양행은 1883년 1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참판으로 임명되어 외교 통상관계 업무를 장악하고 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후원에 의하여 무역 및 용역 거래, 자본투자 등의 경제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독일인 마이어(H. E. Meyer, 麥爾)가 함부르크에 둔 본사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무역사업에 적극 참여하여, 1884년 제물포에 세창양행을 설립하였던 것이다.
인천에 최초로 진출한 구미 외국상사이기도 한 세창양행은 사옥을 건축하고 초기에는 바늘, 면도날, 물감, 의약품, 양품 등 생활필수품의 판매로 시작하여 점차 쇠, 강철, 기계, 무기 등을 중개무역 하였고, 은행업, 광산업, 해운, 보험, 고리대금업에까지 영역을 확대하였다. 특히 선박운송 및 해운, 차관 업무, 기술자 고빙, 광산개발 등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올렸는데, 1885년말 묄렌도르프가 귀국한 후에도 한성의 독일영사관의 비호 아래 안정적으로 사세를 확장하여 갔다.
1888년 경성전환국이 개국되면서 최초의 근대 화폐를 발행할 때에도 세창양행을 통해 수입한 독일제 조폐기기가 설치되어 화폐를 주조하였으며, 1889년에는 독일에서 쾌속정을 구입하여 제강호라 이름하고 인천․마포간을 왕복 운항하였는데 이 사업에도 제물포 세창양행이 사업수단을 발휘하였다. 1893년 1월에 민영준․정병하․우경선 등이 연안해운업을 목적으로 ‘이운사’라는 기선회사를 설립하였다가 청일전쟁으로 말미암아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져 이운사 소속의 4척 기선은 일본우선주식회사에 의해 위탁 운영되었다. 연안 도시간의 정기운항을 담당한 이운사 해운도 일본과의 계약이 끝나자 1895년 무렵부터는 인천의 세창양행이 관리하여 운항하게 되었다.
이처럼 세창양행은 무역을 중심으로 하면서 독일인 관료와 영사관의 비호 아래 한국내의 이권에 깊숙이 개입하였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조선 정부를 대상으로도 적극적인 사업을 벌여, 독일의 조선경제 침탈의 선봉에서 그 중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세창양행의 활동은 1910년대의 인천 상권 경쟁에서 다른 여러 나라들을 크게 앞서는 결과를 결과하였다.
* 1910년도 각국조계 내의 지주수와 세액
최성연, 개항과 양관역정, 90면
위의 표를 보면 각국조계 내까지도 일본인들의 토지 침투가 많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물론 1910년의 통계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주수가 11명밖에 되지 않는 독일이 전체의 42%에 달하는 세금을 내고 있다는 점은, 세창양행이 당시에 차지하고 있던 인천 개항장에서의 경제적 영향력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1884년 세창양행의 제물포 진출과 함께 각국조계 내에 건축된 세창양행 사택은 이탤리식 2층 벽돌집으로 가장 오래된 양관 중의 하나였다.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하자 세창양행은 철수하였고, 일본인들이 1922년에 이 양관을 인천부립도서관으로 탈바꿈시켰다.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그 자리에는 현재 맥아더 동상이 서 있다.
한편, 지금까지도 그 명성이 입으로 전해지는 세창양행의 바늘이라든가, ?독립신문?을 비롯한 구한말의 신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세창양행의 광고를 놓고 보더라도, 당대에 세창양행이 조선인들의 생활세계에 가한 변화가 어느 정도였는가는 능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96) 우리탕(吳禮堂, Woo Li Tang)
“淸國외교관 출신으로 仁川海關 일을 보면서 韓末外交의 숨은 공로자”5)로 기억되는 이 인물은 존스톤별장과 함께 당시 인천의 랜드마크 구실을 했던 ‘오리당’이라는 독일식 호화주택의 소유자였다. 출생연대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신비의 인물로, 1912년 죽은 후에도 중국인묘지인 의장지에 묻히지 않고 각국조계에 있는 외인 묘지에 묻힌 특이한 인물이다.
김원모 교수는 최근 논저 ?한미수교사?에서 우리탕에 대해 자세한 소개하고 있다.6) 조선정부의 요청에 의해 이홍장이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조선해관 창설엄무에 천거하자 청국해관에서 함께 근무하던 우리탕도 내한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은 인물이다. 미국유학생 출신으로 영어에 매우 능통한 우리탕은 1883년 4월 10일 조선에 입국하여 6월 16일에 인천해관이 창설되자 이곳에 곧바로 방판으로 배속되어 근무하였다. 그러던 중 7월 16일에 조선 정부가 최초로 미국에 파견하는 조선보빙사의 통역으로 발탁되었다. 견미보빙사 일행은 대미 외교교섭 업무상 영어, 서반아어, 중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인물이 필요하였고, 이에 묄렌도르프는 우리탕을 천거하여 민영익, 홍영식 등과 함께 통역으로 미국에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행길에는 당시 일본에 있던 미국인 퍼시벌 로웰도 참찬관의 자격으로 동행하였다. 미국 사행을 마친 후 전권대사 민영익을 비롯한 서광범, 변수 일행은 세계일주 길에 올랐고, 부전권대사 홍영식과 함께 우리탕과 로웰 등은 곧바로 조선 귀국길에 올라 그 해 12월 20일에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로웰이 제물포에 대한 기록은 바로 이 경험의 소산인 것이다.
귀국 후 우리탕은 인천해관에서 다시 근무하다가 상무위원이 되어 용산에서 통상업무를 일시 담당하기도 하였다. 1885년 묄렌도르프가 소환될 때에도 그는 조선에 남았으며, 원산의 상무위원으로 1889년까지 근무하다가 1890년경 은퇴하여 인천에 영주하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많은 재산을 모았고 은퇴 후에도 부동산업과 고리대금업으로 치부하여 인천의 외국인 중에서 가장 큰 거부가 되었다 한다.
조선에 오기 전 주스페인 청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일한 바 있었던 우리탕은 그곳에서 스페인 여성과 결혼하였고, 조선에서도 이 부인과 함께 하였다. 1909년 그는 부인의 소원에 따라 거대한 양관을 인천에 신축하였다. ‘오리당’으로 알려진 이 독일식 양관은 연건평 405평의 2층 건물로 둥근 돔 지붕을 지닌 인천 유일의 붉은 벽돌 저택이었다. 불행하게도 이 건물은 한국전쟁 때 전화를 입어 파괴되었지만, 말년의 우리탕은 제물포구락부와 이 집을 고가면서 인천주재 외국인 저명인사들과 사교를 나누고 여생을 보내다가 1912년 생을 마쳤던 것이다. 혹시 그가 청인들의 삼리채거류지 확장과 관련하여, 조선인들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 숨은 배후로 활동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막연한 추측일 뿐이다.
97> 유군성(劉君星 : 1880∼1947년)
유군성은 강화 태생으로 10여 세 때 인천 항구로 옮겨와서 사동(沙洞)에 자리를 잡고 제재소와 정미소를 경영하여 명실공히 갑부의 위치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부호이면서 보기 드문 자선가로서 온후장자(溫厚長者)의 구실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 말기 통제시대에 들어서자 사업이 차츰 기울어 만년은 매우 궁핍한 가운데 마쳤다. 사업소 문을 내릴 때에도 재산을 정리하면서 자식들만이 아니라 부리던 사람들에게도 재산을 골고루 분배하는 데 인색치 않았다.
98> 이흥선(李興善 : 1877∼1975년)
이흥선은 본래 김포 태생이지만 유년 시절에 인천에 와서 성장했다. 당시 인천은 미두(米豆) 경기(景氣)가 번창하던 시절이었는데, 어릴 때 일찍부터 일본인 미두거래소에 취직하여 근면 성실하게 10여 년 간 근무하였다. 퇴직하면서 퇴직금으로 받은 당시의 금액 1천 환으로 자본금을 삼아 1918년 유동(柳洞)에 인흥정미소(仁興精米所)를 차리고 1944년까지 경영하였으며, 1936년에는 석유와 곡물업을 겸한 인흥상사(仁興商事)를 경영해 인천의 10대 부호에 들게 되었다. 사회사업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는데, 1938년에는 최승우(崔承宇), 김세완(金世玩), 유군성(劉君星), 장석우(張錫佑) 등과 현재의 동산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상업전수학교를 설립했다. 동산학교 설립에도 관여한 연고로 1974년 동산학원 이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다.
99> 서정익(徐廷翼 : 1910∼1973년)
서정익은 인천 출신으로 민족지(民族誌) 육성에 공헌한 서병훈(徐丙薰)의 아들이다. 1932년 일본 나고야[名古屋] 고등공업학교 방직과(紡織科)를 졸업하고, 1933년 인천의 도요방직[東洋紡織]에 창설 사원으로 입사했다. 한때 중국의 동양방직에 근무하기도 했으나 광복과 더불어 인천으로 돌아와 동양방직공장의 차장으로 복직하여 공장장과 이사를 거쳐 1949년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6·25 전란으로 잠시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1955년에 민영화된 동일방직(東一紡織)의 사장으로 취임한 이래 사세를 계속 확장시켜 1960년에는 중앙염색가공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1963년에는 대한화섬주식회사를 설립하여 1969년 철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사세가 확장되면서 1962년 대한방직협회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63년에는 전국경제인협회 이사로 취임했고, 1970년에는 대한상공회의소 상무이사로 선임되어 한국 경제의 중추적 인물로 부상하였다.
100> 배인복
배인철의 형, 배경숙 교수의 오빠. 인천 상업계의 거물
101> 이회림(李會林)
생년월일 : 1917년 7월 9일
현직 :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
학력 : 서울대 경영대학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경력 : 동양제철화학 명예회장
102> 김경하(金敬夏 : 1911∼1967년)
김경하는 인천 숭의동 출신으로 17대째 인천에서 살아온 토박이다. 1953년부터 1967년까지 대한연공업(大韓沿工業) 회사의 이사회장을 지냈고, 1957년에 한국식품의 회장을 겸했다. 1952년부터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의 조정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54년에는 민선 교육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중하(重夏), 은하(殷夏), 상봉(相鳳) 등 4형제의 백형(伯兄)이다. 셋째인 김은하는 6대 국회부터 11대까지 6선 의원으로 신민당 원내총무와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8) 법조인
103> 조진만(趙鎭滿 : 1903∼1972년)
조진만은 인천 태생으로 1920년대 인천에서 서울로 기차 통학을 한 곽상훈(郭尙勳), 고유섭(高裕燮) 등과 함께 ‘경인기차통학생 친목회’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1927년 해주지방법원 판사를 출발로 전국 각지방의 판사 직을 역임했다. 1939년에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가 되었으며, 1943년 퇴직 후 변호사 개업을 했다. 1951년 법무장관으로 입각했으며, 1960년에는 서울 제1변호사회장이 되었다. 1961년 법무장관 고문으로 추대되었다가 사법부 최고의 책임자인 대법원장에 취임하였다. 1964년 다시 연임된 후 이 나라 법조계에 큰 공적을 남기고 은퇴했다.
9) 체육인
104> 이길용
1899년 경남 마산 출생. 인천으로 이주해 인천영화학교를 마치고 배재학당을 거쳐 일본 동지사대학에서 수학. 귀국 후 인천 청년운동의 주도적 인물로 활동함. 인천한용단, 인천배제회 들의 회장 역임.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 1936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 우승자 손기정(孫基禎)의 사진을 실을 때, 가슴의 일장기를 지워버린 사건. 36년 8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제11회 올림픽대회에 일본팀의 일원으로 출전하였던 손기정이 마라톤에 우승하자 《동아일보》는 월계관을 쓴 손기정의 사진을 입수, 유니폼의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에 게재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8월 29일자부터 무기정간처분을 당하고, 사장 송진우(宋鎭禹), 주필 김준연(金俊淵), 편집국장 설의식(薛義植), 체육부기자 이길용(李吉用) 등은 언론계활동을 금지당하였고, 사회부장 현진건(玄鎭健), 사진부장 신낙균(申樂均), 사진을 수정한 화가 이상범(李象範) 등은 체포되어 구류처분을 받았다. 한편 《동아일보》는 정간 9개월 뒤인 37년 6월에야 다시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으며, 이 사건을 직접 일으켰던 이길용에게 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05> 정용복(丁龍福 : 1910∼1977년)
정용복은 충남 서산 출신으로 어릴 때 부친을 따라 인천으로 왔다. 경동 싸리재에서 미곡상을 하여 부자가 된 부친의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평생을 청빈한 생활로 일관했다. 한편생을 체육계에 투신하여 보이스카웃과 체육계를 위해 많은 활동을 하였다.
우선 1954년에서 1955년에 걸쳐 한미친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도원동에 위치한 인천공설운동장과 야구장의 재건, 보수공사를 단행하여 운동장의 면모를 소생시켜 놓았다. 1950년대 초반부터 인천체육회 이사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57년에서 1960년까지는 경기도체육회 이사장으로 경기도의 체육 진흥을 위해 많은 공헌을 하였다.
<참고> 근대 이전의 역사인물 24인
1> 단군(檀君 : 서기 전 2333년 고조선 개국)
단기 51년(서기 전 2283년) 운사(雲師)와 배달신(倍達神)에게 명하여 혈구[江華] 마리산(摩利山)에 천제단(天祭壇)을 쌓게 하고, 장정 8천 명을 동원하여 정족산에 삼랑산성(三郞山城)을 쌓았다. 마리산 정상에는 참성단을 쌓았으며, 단기 54년(서기 전 2280년)에 참성단을 완공하고 하늘에 제사지냈다. 한민족의 비조인 단군왕검의 최초의 터전이 되는 강화도
2> 비류(沸流 : 서기 전 18년 미추홀 개국)
졸본부여(卒本夫餘)에서 남하하여 당시 미추홀(彌鄒忽)인 인천에 부족국가를 건설했다는 백제(百濟) 설화상의 인물이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으로 등극하는 주몽(朱蒙)이 동부여로부터 졸본부여로 피해 온 뒤에 졸본왕의 딸과 결혼했다. 졸본왕이 죽자 주몽은 그 왕위를 잇고, 이어서 비류와 온조(溫祚)를 낳았다. 그런데 주몽에게는 본래 동부여에서 결혼한 부인이 있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유리(琉璃)가 장성하여 부왕(父王)을 찾아 졸본으로 온다. 주몽은 유리를 태자(太子)로 삼았다. 또 하나의 소전(所傳)에 의하면 북부여왕 해부루(海夫婁)의 손자인 우태(優台)가 졸본으로 와서 졸본 여인과 결혼하여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 우태가 죽은 뒤, 주몽이 남하하여 고구려를 세우게 되었다. 이때 주몽은 우태의 미망인을 왕비로 삼고 그 두 아들을 친자식처럼 사랑하였다. 그 뒤 부여에서 실자(實子)인 유리가 찾아와 주몽의 태자가 되고 뒤를 이어 왕위를 이었다.
위의 두 설화에 공통되게 비류·온조 형제는 졸본부여의 태자인 유리에게 용납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그 생모를 모시고 자기 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망명하였다. 형제는 서울 북한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비류는 지금의 인천인 미추홀에, 온조는 지금의 서울 강동[풍납동]인 위례성(慰禮城)에 각각 본거를 정하였다. 서기 전 18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인천 쪽은 물이 짜서 백성들이 안거할 수 없었으며, 서울 강동 쪽은 한강을 끼고 안거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비류가 죽자 인천쪽 부족들은 전부 온조의 지배하로 들어갔다. 온조는 그때까지 ‘십제(十濟)’라 불렀던 국호를 ‘백제(百濟)’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 단군과 비류는 ‘개국의 상징적 존재’라는 점에서 고대의 대표적인 인물로 내세웠다.)
3> 이희목(李希穆 : 신라말 ∼ 고려초)
이희목은 신라말 부평(富平) 지방의 호족(豪族)으로 부평 이씨의 시조이다. 고려가 건국하자 태조 왕건은 부평 고을에 와서 주권을 잡고 있는 이희목을 설득, 높은 벼슬을 내려 부평 고을을 쉽게 접수했다. 그리고 고려 태조는 이희목을 ‘고려개국벽상공신삼중대광태사(高麗開國壁上功臣三重大匡太師)’에 봉작하고 그의 자손에게도 벼슬을 내려 요직에 등용하였다. 시호는충민(忠敏)이다.
4> 대각국사 의천(고려 문종 연간)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은 불교에 귀의하여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문종의 넷째 아들로 어머니는 인예왕후이다. 인천이씨 인예왕후의 고향인 인천에서 태어났다. 중국 송에 유학하여 학문이 깊었다. 불고가 교종과 선종으로 갈라져 대립하던 시기에 천태종을 열어 불교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대각국사문집’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5> 이허겸(李許謙 : 고려 헌종 연간)
인천 이씨의 중시조로 그의 선조가 신라의 대관(大官)으로서 사신이 되어 당(唐)에 들어갔을 때, 천자(天子)로부터 이씨(李氏) 성을 사성(賜姓) 받은 것이라 한다. 바로 그 자손들이 신라시대의 인천인 소성현(邵城縣)에 이주하여 살게 되었으며 또한 인천 이씨가 고려시대 귀족 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 이허겸의 시대부터였다고 한다. 그에게는 2남 1녀가 있었고, 그의 딸이 김은부(金殷傅)에게 시집가 세 딸을 낳았는데, 이 딸들이 모두 현종(顯宗)의 비(妃)가 된 까닭에 김은부가 외척이 되면서 이허겸 또한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인천 이씨가 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현종 15년(1024)에 왕의 처외조부인 이허겸에게 ‘상서좌복야상주국소성현개국후(尙書左僕射 上柱國邵城縣開國侯)’를 추증하고 식읍(食邑) 1,500호(戶)를 내렸다.
6> 이자연(李子淵 : 고려 문종 연간)
이허겸의 손자로 문과에 급제하고, 정조 초에 급사중(給事中)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인천 이씨가 외척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자연의 세 딸이 모두 문종비(文宗妃)가 된 까닭이다. 인예태후(仁睿太后), 인경현비(仁敬賢妃), 인절현비(仁節賢妃)가 그들로서 인예태후는 순종(順宗), 선종(宣宗), 숙종(肅宗)의 세 임금과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義天) 외에 여섯 왕자와 두 궁주(宮主)를 낳았다. 둘째 딸인 인경현비는 세 왕자를 낳았으며, 셋째 딸인 인절현비는 소생이 없었다.
이때로부터 인천 이씨가 정권을 잡고 권세를 누렸으니, 이자연의 여덟 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아우인 이자상(李子祥)과 그의 손자들도 모두 높은 관직을 차지하여 외척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또한 해주 최씨, 경주 김씨, 평산 박씨, 파평 윤씨, 강릉 김씨 같은 명문들과 인척을 맺어 큰 벌족 세력을 형성했다.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러 공신의 호를 받고 ‘개부의동삼사 태사 겸 중서령 감수국사 상주국 경원군 개국공(開府儀同三司太師兼中書令監修國史上柱國慶源郡開國公)’에 봉해졌다.
7> 이규보(李奎報 : 고려 고종 연간)
이규보는 만년에 동방(東方)의 시호(詩豪)로 불리어질 만큼 명문장가로서 알려지게 되었으나, 젊은 시절에는 불우한 처지를 견디어야 했다. 그의 비문(碑文)에 의하면, 명종 20년(1190) 전시에 합격한 후, 고종 24년(1237)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벼슬에서 물러나기까지 많은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문신(文臣)으로서보다 특히 문인으로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56권과 『백운소설(白雲小說)』 등 많은 저술을 통하여 고려 일대(一代)의 문운을 가름할 큰 업적을 남겼다. 동시대의 진엽은 백운거사[이규보]의 문장을 “적선(謫仙)의 일기(逸氣)가 만가(萬家) 밖에 서 있는 것 같다” 하였고, 최자(崔滋)는 “일월(日月)과 같아서 감히 칭찬할 수가 없다”고까지 하였다. 백운거사의 문집에 2천여 수의 시와 사(詞)가 남아 있으나, 생전에 7, 8천여 수에 이르는 시와 사를 지었다 하니 참으로 천부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몽골의 침략으로 고려가 조정을 강화로 옮기고 이 나라 국보로서 고려 팔만대장경을 판각할 당시, 불력(佛力)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간절한 「기고문(祈告文)」을 지었으며, 『상정예문(詳定禮文)』의 발문에서는 이것이 주자(鑄字)를 사용하여 간행한 세계 최초의 주성활자(鑄成活字) 서책임을 밝히기도 했다.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외교문서가 백운거사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돌아볼 때, 그는 붓의 힘을 가장 크게 발휘한 문호로 일컬어짐에 손색이 없다고 평가되고 있다.
8> 배중손(裵仲孫 : 고려 원종 연간)
강화 길상면(吉祥面) 출신이다. 무신정권의 집권자 최우(崔瑀)는 당시 나라 안에 도둑이 들끓자 건장한 사내들을 모아 매일 밤 순찰을 도는 야별초(夜別抄)를 조직했다. 그러나 도둑이 계속 늘자 순찰 업무를 더욱 강화하고 야별초를 확대해 좌우(左右) 별초로 나누었다. 이어 몽골에 잡혀갔다 탈출해 온 원한에 사무친 무리들로 조직된 신의군(神義軍)까지 가세해 삼별초로 발전해 갔다.
몽고에 굴복하고 타협하는 의미가 담긴 개경 환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들 삼별초 군사들은 원종의 출육(出陸) 환도에 반기를 들고, 원종의 육촌인 ‘승화후’ 온(溫)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반란의 기치를 치켜들었다. 배중손은 김통정과 함께 그 거사를 주도한 우두머리 장군으로서 강화에 진을 친 삼별초군과 자신을 따르는 백성들을 이끌고 천여 척의 배로 진도에 본거지를 옮겨갔다. 그러나 뒤쫓아 온 여몽연합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배중손 군대는 용감히 싸운 끝에 끝내 무너지고 이 전투에서 배중손 장군 역시 전사했다. 나머지 군사들은 김통정 장군의 주도하에 제주도로 향했으나 역시 평정되고 만다.
9> 최자(崔滋 : 고려 원종 연간)
고려의 문신이자 대학자. 강종 1년(1212) 문과에 급제하여 상주 사록이 되었는데, 치적이 우수하여 국자감(國子監) 학유(學諭)에 이르렀다. 「우미인초가(虞美人草歌)」, 「수정배시(水精盃詩)」로서 이규보(李奎報)에게 알려져 출세의 계기가 되었다. 집권자 최우(崔瑀)가 문병(文柄)을 잡을 만한 후계자를 묻자 이규보는 최자를 첫째로 추천했다. 이인로(李仁老)의 『파한집(破閑集)』을 보충한다는 뜻에서 엮어낸 최자의 『보한집(補閑集)』은 이인로의 저술과 함께 문학평론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문장집이다. 특히 그 『보한집』에서 당시 강화의 인문, 지리 등 강화가 우리 국토에서 차지하는 국방상의 중요성과 우월성을 강조해 놓았다. 더구나 강화의 사라져 간 지명들을 찾아볼 수 있게 하여 그 방면에 큰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문학적 성격은 대체로 이규보의 문학관을 잇고 있으며, 또한 학식과 행정력을 겸비한 선비로서도 평가받고 있다.
10>정화궁주(貞和宮主 : 고려 충렬왕 연간)
고려 26대 충렬왕의 비(妃)로 종실 시안공(始安公) 왕인(王絪)의 딸이다. 충렬왕이 태자였을 때 납비(納妃)되었으나 원종 15년(1274) 충렬왕이 즉위하면서 정화궁주로 책봉되었다. 원나라로부터 왕비를 맞아들이게 되어 몽골인 왕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돌아온 뒤로는 항상 별궁(別宮)에 거쳐하면서 충렬왕과는 가까이 하지 못하게 되었다. 충렬왕 2년(1276) 무녀를 시켜 제국공주를 저주하였다는 무고를 받아 나장가(螺匠家)에 갇히고, 부고(府庫)를 봉쇄당했다가 유경(柳璥)의 도움을 받아 풀려나기도 했다. 충렬왕 8년(1282)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에서 대장경을 인출하여 강화 진종사(眞宗寺)에 보존토록 하고, 옥등(玉燈)을 시주하였으므로 이를 기해 절 이름을 진종사에서 전등사(傳燈寺)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현재 옥등의 행방은 알 수 없다. 뒤에 ‘정신부주(貞信府主)’라 불리었다.
11> 최영(崔瑩 : 고려 말기)
고려 말의 명장이다. 처음에 양광도도순문사(揚廣道都巡問使) 휘하에서 왜구(倭寇)를 자주 토벌하여 그 공으로 우달치[于達赤 : 司門人]가 되었다. 최영의 군인으로서의 경력은 왜구와 홍건적 퇴치로 점철되었다. 우선 공민왕 8년(1359) 홍건적 4만 명이 침입하여 서경이 함락되자, 다른 장수들과 함께 이를 여러 방면에서 무찔러 공을 세우고 승진했으며, 1361년 홍건적 10만이 다시 침입하여 개성을 함락시키자 이듬해 안 우, 이방실(李芳實) 등과 이를 격퇴하여 개성을 수복하고 그 공으로 ‘벽상공신(壁上功臣)’이 되어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올랐다.
왜구를 물리친 경우를 보면, 공민왕 6년(1357) 배 4백여 척으로 오예포(吾乂浦)에 침입한 왜구를 복병을 이용하여 격파하였다. 공민왕 13년(1364)에는 왜구가 교동(喬桐), 강화에 침입하자 동서강도지휘사(東西江都指揮使)가 되어 동강에 진주하였는데, 이때 신돈의 무고로 귀양을 갔다가 신돈이 처형된 후 복귀되었다. 다음해 다시 왜구가 연산(連山) 개태사(開泰寺)에 침입했을 때, 원수(元帥) 박인계(朴仁桂)가 패배하자 노구를 이끌고 자원하여 홍산(鴻山 : 扶餘)에서 크게 무찔러 그 공으로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이 되었다. 우왕 3년(1377)에는 도통사가 되어 강화·통진 등지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다음, 왕에게 상주하여 교동·강화의 사전(私田)을 혁파하고 군자금에 충당하게 했다. 이어 1378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에 침입하자 이성계(李成桂), 양백연(楊伯淵) 등과 함께 적을 크게 무찌르고 그 공으로 ‘안사공신(安社功臣)’이 되었다. 이무렵, 명나라가 철령위(鐵嶺衛)의 설치를 통고하여 철령 이북과 이서, 이동을 요동(遼東)에 예속시키려 하므로, 요동 정벌을 결심하고 왕과 함께 군사를 출동시켰다. 그러나 3만 8,8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민수(曺敏修) 좌군도통사와 함께 떠난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사건으로 요동 정벌은 무위로 돌아가고 역성혁명을 일으킨 이성계에게 참살당했다. 이성계는 새 왕조를 세우고 6년 만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넋을 위로하기도 했다.
강화에는 최영 장군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으며, 고기잡이 어부들은 해양신으로 믿어 왔다고도 한다. 무속에서는 당굿의 수호신으로 전하고 있다고 한다.
12> 김민선(金敏善 : 조선 선조 연간)
김민선은 선조 5년(1572)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쳤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인천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 직에 있었는데, 문학산성(文鶴山城)을 수축하고 방어진을 구축하여 수 없는 싸움에서 적을 맞아 섬멸하였다. 이어 인천 각지와 부평, 김포 등지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고 끝까지 적을 물리치는데 성공하였으나, 전투에 노심초사한 탓으로 과로가 겹쳐 병을 얻고 쓰러졌으며,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순사(殉死)하였다.
나라에서는 그의 전공을 가상히 여겨 도승지에 추증하였으며, 인천 주민들은 그의 혁혁한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문학산성 내에 ‘안관당(安官堂)’ 이라는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게 했다.
13> 조헌(趙憲 1544∼1592, 중종 39∼선조 25)
조선 중기 문신·학자·의병장.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峰)·도원(陶原)·후율(後栗). 본관은 배천(白川). 이이(李珥)의 문인(門人)으로 그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다. 집안이 빈한하였으나 주경야독하여 1567년(명종 22)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파주·홍주 등의 교수를 지내며 사풍(士風)을 바로잡았으나 72년(선조 5)과 89년 전후 3차례에 걸쳐 면직되었다. 그 사이에 교서관 정자·박사, 호조좌랑, 사헌부감찰, 통진현감, 공주목제독 등을 지냈다.
조헌이 통진부사로 있다가 모함을 받아 부평으로 유배되었을 때 일 조헌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율도를 몰래 개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온 가족을 율도로 피난시켜 난을 피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은 전쟁터로 나아갔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옥천(沃川)으로 내려가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91년 일본사신 겐소[玄蘇]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무리한 요청을 들고 왔을 때, 그를 목벨 것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 등과 옥천에서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92년 8월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淸州城)을 수복하였다. 충청도관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되었으나, 7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금산(錦山)으로 가서 다시 영규의 승군과 합세하여, 호남지방으로 진격하려던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왜병과 전투를 벌였다. 이 금산전투에서 의병들은 모두 전사하였으나 적의 예봉을 꺾었다. 순절지 <칠백의총(七百義塚)>은 1971년 성역화되었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었고, 배천 문회서원(文會書院), 옥천 표충사(表忠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중봉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
14> 권필(權킠 : 조선 광해군 연간)
권필은 희세(稀世)의 문장가로 강화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선조 20년(1587)에 사마시에 으뜸으로 급제했으나 자유분방한 그의 성품은 벼슬하기를 싫어했다. 선조 34년(1601)에 칙사(勅使)가 이항복과 더불어 선생의 시문(詩文)을 보고 탄복하여 제술관(製述官)으로 임명하기도 하고, 순릉참봉(順陵參奉) 또는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하기도 하였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강화 홍의촌(현 송해면 하도리)에 거주를 마련하고 머물렀다.
광해군 3년(1611)에 어느 선비가 전시(殿試)에 제출한 시문에서 왕비의 척분인 유(柳)씨네 세도를 꼬집는 내용을 담았던 연유로 광해군에 의해 그 선비는 합격자 명단에서 취소되고 말았다. 이를 아깝게 여긴 권필이 무명의 선비 편을 돕는 궁유시(宮柳詩)를 지어 풍자했는데, 이 시문이 이이첨의 음모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죽은 황혁(黃爀)의 몰수당한 집 문서 중에서 나온 탓으로 1612년 의금부(義禁府)에 구속되어 혹독한 국문을 받은 다음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옥문을 나와 주막에서 행인들의 동정 어린 술잔을 받아 마신 다음 대취했는데, 고문으로 입은 상처가 도져 그 해 4월 17일 숨을 거뒀다.
15> 이윤생(李允生 : 조선 인조 연간)
이윤생은 부평 이씨로 인조 14년(1636)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원도(猿島 : 낙섬)에 진을 쳤다. 이는 청나라 군대의 유격병들이 내왕하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대한 보장지세(保障之勢)를 이루기 위함이었다. 11월 24일 청나라 군사는 닥치는 대로 노략질을 일삼으며 쳐들어 왔으나, 이윤생이 다가오는 적마다 모두 사살하였다. 적군은 도저히 접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일단 패주하였으나 이튿날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
이윤생이 역시 힘을 다하여 사살하자 적군이 감히 근접할 수가 없었는데, 반나절이 지나 이쪽의 화살이 다한 것을 눈치 채고 일제히 섬 안으로 쳐들어 왔다. 그는 끝까지 눈을 부라리며 소리 높이 적군을 꾸짖다가 살해당했으며 의병들도 대부분 전사하였다. 그때가 바로 인조 15년(1637) 1월 25일로서 강화도가 적군에게 함락된지 3일 후이고, 남한산성을 개성하게 되는 5일 전이었으니, 이 때 그의 나이는 34세였다. 그의 부인 강씨(姜氏)는 부군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곧 바다에 몸을 던져 부군과 의절(義節)을 함께 했다. 섬 안 진중(陣中)에서 요행히 살아난 박성인(朴性人)이 그의 11세 아들을 거두어 길렀는데, 그가 나중에 성장하여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제수받은 이정현(李廷賢)이다.
이윤생은 철종 12년(1861)에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부인 강씨에게는 숙부인(淑夫人)이 추증되었으며 정려(旌閭 : 시지정 기념물 제 4호)가 내려졌다. 인천시 남구 용현동 442번지에 그의 후손이 각우(閣宇)를 보존하고 있다.
16> 김상용(金尙容 : 조선 인조 연간)
김상용은 선조 23년(159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강화 선원면 선행리로 피난하였다가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이 되어 왜군 토벌과 명나라 군사 접대에 공을 세워 선조 31년(1598) 승지로 발탁되었고,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인조반정 뒤, 판돈영부사를 거쳐 병조, 이조, 예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정묘호란 때에는 도류대장(都留大將)으로 서울에서 지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1637년 청나라가 강화에 침입해오자 김상용은 남문에 올라 화약궤를 끼고 자폭하였다.
그 바로 직전에 계하에 있던 사람이 그에게 “배를 마련하여 급할 때 대비하십시오” 하고 말했거늘, “전하께서 적에게 포위당해 계시어 안후를 알 수 없고, 종묘사직과 원손께서 모두 여기 계신데 만약에 불행한 일이 있으면 죽을 뿐이요, 어찌 살기를 도모한단 말이오” 하며 응하지 않자 누구도 더이상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으나 모두 물러가라고 외치고 서손(庶孫)인 수전(壽全)과 종자 한 사람이 끝내 물러가지 않았으며, 별좌(別坐) 권순장, 생원 김익겸(金益兼)이 함께 죽겠다고 애원하므로 하는 수 없이 묵인한 다음 담뱃대의 불을 화약궤에 붙이니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과 함께 누각은 공중으로 산산히 날아가고 사람 또한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난이 평정된 후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지고 영조 34년(1758)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강화 충렬사를 위시해서 양주 석실서원, 정주 봉명서원, 상주 서산서원, 정평(定平) 모현사(慕賢祠)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7> 이단상(李端相 : 조선 현종 연간) / 이희조(李喜朝 : 조선 경종 연간) 부자
이단상은 인조 27년(1649)에 문과에 급제, 옥당(玉堂)을 거쳐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대간(臺諫)으로 있을 때 효종이 죽으매 대세가 변하므로 관직을 버리고 집에서 경서(經書)를 연구하였다. 후에 청풍부사(淸風府使), 응교(應敎), 인천부사(仁川府使)를 지냈으나 곧 사퇴하였다. 또한 홍명하(洪命夏), 송준길(宋浚吉), 조복양(趙復陽)의 추천으로 경연관(經筵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양주(楊洲)에서 학문 연구에 힘썼다. 37세 때에 인천부사로 부임하는데 행공(行公) 기간은 비록 몇 달에 불과했지만 이른바 ‘흥학변속(興學變俗)’ 등에 있어서는 자못 괄목할만한 업적이 있어 당시 경기 암행어사 여성제(呂聖齊)가 관내의 선치자(善治者)들을 복명할 때 이단상도 함께 상주하였다. 그러나 이단상은 관직보다는 학문으로 평가될 인물로, 당시 대표적인 노론(老論) 가문에서 태어나 학문에 힘써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는데, 대표적으로 아들인 이희조(李喜朝)와 사위인 농암(農岩) 김창협(金昌協)을 들 수 있다. 특히, 이희조는 유일(遺逸)로 천리되어 동궁서연관(東宮書筵官) 등을 거쳐 대사헌, 참판 등을 지낸 인물로 그도 후에 인천에서 부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단상의 저술로는 『대학집람(大學集覽)』, 『사례비요(四禮備要)』, 『성람통기(聖覽通紀)』 등이 있으며, 학덕이 높아 상하에서 기용코자 했는데, 특히 현종이 통정(通政), 승지(承旨), 참지(參知)에 임명하였으나 모두 사퇴하고 현종 10년 부제학(副提學)으로 서연(書筵)을 모셨다. 죽은 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인천의 학산서원(鶴山書院)과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에 배향되었다.
이희조는 인천부사(仁川府使)를 지낸 부제학 단상(端相)의 아들이다. 숙종 6년(1680)에 추천을 받아 건원능참봉(健元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몇 차례 추천을 통해 벼슬을 하였다. 숙종 23년(1697) 어머니를 모시고 인천부사로 부임해 와서, ‘이곳은 나의 선부(先父)가 부사를 역임한 고장으로서, 선부의 치적이 아직 남아 있는 이곳에서 정사에 능하지 못해 죄를 짓게 된다면 무슨 면목으로 선묘(先廟)를 배알하고 노모를 안도하게 해 드릴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하며 대흉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기에 성력을 다하는 등 선치(善治)에 힘썼다고 한다.
그가 거처하는 곳을 ‘인민당(人民堂)’이라 하였는데, 이 때의 사실들을 기록한 김창협(金昌協)의 「인민당기(記)」가 『인천읍지(仁川邑誌)』에 전한다. 이들 부자(父子)의 선정은 오랫동안 인천부민들에게 기억되어 1702년(숙종 28년) 문학산(文鶴山) 기슭에 「학산서원(鶴山書院)」을 세워 먼저 이단상(李端相)을 제향하였고, 후에 이희조도 배향되었다.
18> 민진원(閔鎭遠 : 조선 영조 연간)
민진원은 숙종 17년(169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숙종 23년(1697) 중시(重試)에 을과로 또 급제하였다. 숙종 31년(1705)에 강화유수를 지냈고, 숙종 45년(1719)에 강화구관당상(江華句管堂上)을 역임하기도 했다.
강화유수로 부임했을 때 강화 사람들의 인습이 심히 각박하며, 자기 욕심만 채우고 상하의 예절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실상을 엿보았다. 그러나 강압적으로 이를 누른다 하여 옳지 못한 인습이 단시일에 고쳐질 리가 없으므로, 우선 행정 구역을 소동(小洞) 단위로 개편하여 행정에 편의를 도모함으로써 주민을 순화시키는 데 진력하였다. 또한 한가한 농한기를 이용하여 선두포언(船頭浦堰), 선두포둑을 막아 섬이었던 하도면(下道面 : 현 華道面)을 강화 본도와 연육시켜 교통의 편의를 도모하는 한편, 화도평야를 간척하고 하도 주민과 상도(현 양도) 주민들에게 많은 전답을 분배해 주어 국리민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강화 내성을 신축하였으며, 남문 안파루(按波樓)와 서문 첨화루(瞻華樓)를 새로이 건축하여 강화 내성의 면모를 일신시켰다. 민진원 유수가 재임하고 있을 당시에는 많은 강화도 주민이 부역(負役)에 시달리기도 하였으나, 후세 강화도 주민들이 이르기를 ‘백년 간에 할 일을 2년 만에 모두 이룩하였다’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한다.
19> 이형상(李衡祥 : 조선 영조 연간)
이형상은 숙종 6년(168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살아가며 많은 업적을 남긴 사대부 학자이다. 벼슬살이하는 곳마다 발자취를 크게 남겼으며, 저술 또한 적지 않게 남겼다. 그 가운데서도 『강도지(江都誌)』가 전해지고 있는데 숙종 22년(1696)에 저술한 것으로, 훨씬 후에 박헌용(朴憲用) 선생이 저술한 『강도지』보다 234년이나 앞선다.
이는 3백년 전의 문헌으로 강화 향토지로는 최고본(最古本)에 속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 『강도지』는 병자호란을 치른 후인지라 국토 방위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내성(內城)의 개축과 진(鎭), 보(堡), 돈대(墩臺)의 설치와 병력의 배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였을 뿐 아니라, 인문지리(人文地理)에 관한 사항도 세밀히 기록하고 있어 강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 이긍익(李肯翊 : 조선 순조 연간)
이긍익은 강화 사기리(砂磯里) 출생으로 그의 아버지 광사(匡師)가 양명학을 접하기 위해 강화도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살았다. 나이 20세 때 아버지가 나주 패서사건에 연루, 유배되어 배소에서 죽자 역경과 빈곤으로 벼슬을 단념하였다. 그는 조선사 연구의 선구자로 저서는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 있다.
21> 신헌(申櫶 : 조선 고종 연간)
신헌은 전형적인 무관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이름난 학자들 문하에서 수학하여 유장(儒將)이란 소리를 들었다. 순조 28년(1828) 무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해 가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초에 걸쳐 중요 무반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에는 총융사(總戎使)로 강화의 염하(鹽河 : 강화해협)를 수비하여 난이 끝난 다음 좌참찬겸 훈련대장에 임명되고, 수뢰포(水雷砲)를 제작한 공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올랐다. 그 뒤 어영대장, 지행삼군부사(知行三軍府事), 판의금부사를 거쳐 고종 11년(1874) 진무사 겸 강화유수(鎭撫使兼江華留守)에 임명되어 정월에 부임하였다.
그는 당시 강화도의 전략상 중요성을 인식하고 연해의 요새지인 광성·덕진·초지진 등에 포대를 구축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운양호 사건’ 이듬해인 고종 13년(1876)에 병중이었음에도 판중추부사로 전권대관(全權大官)에 임명되어 강화도에서 일본의 전권변리대신(全權辨理大臣) 구로타[黑田淸隆]와 협상을 벌여 ‘강화도조약’을 체결, 조선의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 뒤 고종 19년(1882)에 역시 전권대관이 되어 미국의 슈펠트 제독과 ‘한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 시호는 ‘장숙(壯肅)’이다.
22> 양헌수(梁憲洙 : 조선 고종 연간)
양헌수는 헌종 14년(1848) 무과에 급제하고 관직 생활을 거듭하여, 고종 2년(1865)에는 제주목사로 임명되어 제주도민의 칭송이 높도록 선정을 베풀었고, 병인양요를 당해서는 정족산성(鼎足山城 : 江華 三郞城)의 수성장(守城將)이 되었다. 5백여 군사들을 이끌고 광성진 손돌목을 건너 정족산성을 지키던 중, 10월 3일 프랑스 함대의 로즈 제독이 보낸 해군 대령 올리비에의 군사 2백여 명의 침공을 받았다.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 6명을 전사시키고 많은 부상자를 냈으며, 대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려 프랑스군이 패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 좌윤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김병학(金炳學), 홍순목(洪淳穆), 이용희 등과 함께 개국을 반대하는 척화론을 끝까지 주장하였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23> 어재연(魚在淵 : 조선 고종 연간) / 어재순(魚在淳 : 조선 고종 연간) 형제
어재연은 헌종 7년(1841)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친 끝에, 고종 3년(1866) 프랑스 로즈 제독이 이끄는 극동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 때 군사를 이끌고 광성진을 수비하였다. 고종 8년(1871), 이번에는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침공으로 신미양요가 발발하였다. 6월 1일 손돌목 포격사건의 개시로 한미간 최초의 군사 충돌이 발생했다. 위급이 고해지자 어재연은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광성포로 급히 달려나가 6백여 군사를 이끌고 광성보에 이르러 미군과 대치하였다. 6월 10일 드디어 미군이 강화도 상륙작전을 전개하면서 격전 끝에 초지진을 점령하였고, 11일에는 덕진진까지 함락시키고, 마지막으로 광성보 공략에 나섰다. 이 때 어재연은 광성보에 수자기(帥字旗)를 게양하고 침공해오는 미군을 격퇴할 태세를 취하였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 양면작전을 개시하여 해상에서는 함포 사격으로, 지상에서는 야포 사격으로 초토화 작전을 전개하였다. 끝내는 광성보로 돌입해 온 미군과 어재연 군이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어재연은 임전무퇴의 결의로 손에 칼을 잡고 적을 무찔렀으며, 포탄 10여 개를 양손으로 받쳐들고 적군에 던지며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의 불타는 충성심과 애국열의를 높이 추앙하여 병조판서 지삼군부사(兵曹判書 知三軍府事)를 추증받았고, 시호는 ‘충장(忠壯)’이었다. 강화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어재순은 신미양요 때 진무중군(鎭撫中軍)으로 미군과 싸우다 순국한 어재연의 아우이다. 그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홀로 대소가를 지키며 은거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신미양요가 발생하여 형 재연이 진무중군이라는 막중한 중책을 지고 광성보에서 농성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자, 이에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형을 따라 미군을 격퇴시켜야 한다는 결의를 다지고 백의종군할 것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를 본 일가 친척들이 나서서 지금 강화도에는 외국 군선이 바다를 메워 들어가기가 힘들 것이라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는 ‘생사는 하늘에 달렸으니, 적이 두려워서 어찌 나라 구하는 일을 못하리까’라고 마지막 한 마디를 외치고 광성보를 향해 달려갔다. 어재연 장군은 아우 재순이 달려온 것을 보고, ‘너는 궁향(窮鄕)의 일개 벼슬하지 않는 백성에 불과하다.
너는 나라 일을 하다 죽는 나와는 다른 입장이니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거라!’ 하며 권하며 꾸짖기까지 하였으나, 나라를 위하여 충성하는 일에는 신민이 모두 하나라고 역설하면서 일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형과 함께 칼을 빼어 들고 선두에서 미군과 육박전을 벌이다가 전사하였다. 이에 나라에서는 그를 가상히 여겨 이조참의에 추증하고 백의충절을 기렸다.
24> 이건창(李建昌 : 조선 후기)
이건창은 고종 3년(1866) 15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너무 어려 19세에야 관직이 주어졌다. 1880년 경기도 암행어사로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는 한편, 흉년을 당한 농민들을 찾아다니면서 구휼에 힘썼다. 뿐만 아니라, 세금을 감면하여 주기도 하여 백성으로부터 추앙을 받아 그의 불망비(不忘碑)가 각처에 세워지기도 했다. 갑오경장 이후로 일체의 관직을 사양하였으며, 병인양요 때 강화에서 자결한 시원(是遠)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개화를 뿌리치고 척양, 척외주의로 일관했다. 그 뒤 고향 강화 사골(사기리)로 낙향한 지 2년만에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1) 뮈텔주교 일기 1, 145면.
2)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바오로 뜰 안의 애환 85년사?, 가톨릭출판사, 1973, 200-2면.
3) 「1987. 7. 4. 뮈텔 주교 일기」, 인천교구의 전사, 81면.
4) 「파리외방전교회 1900년도 연말보고서」, 인천교구의 전사, 91-2면.
5) 신태범, 앞의 책, 53면.
6) 김원모, 앞의 책, 375-397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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