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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성의 미추홀

염전(鹽田) 

by 형과니 2023. 4. 11.

염전(鹽田)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6-26 16:06:35

 

미추홀 - 염전(鹽田) 

조우성 <객원논설위원>

 

소금은 그 대체품이 없다는 점에서 쌀보다 더 중시했던 귀물이었다. 고대에는 권력을 낳는 황금알이기도 했다. 조선 개국 초기 왕가에서 염업을 장악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도 그 같은 소금의 힘 때문이었다.

 

인천의 소금사는 개항 이후 큰 변화를 보였다. 전까지만 해도 서구, 계양구와 국내 최대 생산지인 소래, 군자 등지에서 조달해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중국, 일본산 소금이 밀려들기 시작하자 염업 자체가 고사의 위기에 몰렸다. 당시의 염업은 농촌의 부업에 불과한데다가, 생산 설비도 미흡해 산업으로 발달하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바닷물을 끓여 얻는 전오(煎熬)소금은 중국산 암염에 비해 순도나 가격에서 처져 뒷전으로 밀리기가 일쑤였다.

 

이 같은 상황에 몰리자, 정부는 소금 제조권과 상권 보호 및 장악을 위해 1907년 인천부 주안에 천일염전, 부산에 전오염전을 각각 설치해 실험했다. 그 결과 천일염 제조가 한국에서 가능하고 경쟁력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천일염 시대가 막을 연 것이다. 정부는 3차례에 걸쳐 인천부 주안, 남동, 군자와 평안남도 덕동, 귀성, 남시 등지에 염전을 확장시켜 나갔다. 인천부 소재 1115정보의 염전에서는 연간 15만톤의 소금이 생산됐다.

 

그렇게 한국의 소금사를 새롭게 쓴 인천이었다. 1960년대 초만 해도 경인선 철길 주변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던 순백색의 소금밭과 검은색 창고들은 한 편의 이색적 풍물시였다. 더 늦기 전에 그 풍물들을 보존해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면 어떨까 싶다. 물론 소래염전 소금창고 철거 사건과 같은 비상식적인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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