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식 없는 역사기념물 - 러시아의 인천해전 추모비 건립을 중심으로 -
仁川愛/인천이야기
2007-01-14 19:03:12
1904년 2월 4일 일본은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2월 10일에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한다. 선전포고에 앞서 2월 8일 밤 일본함대가 뤼순(旅順)의 러시아 극동함대를 공격하고, 동시에 인천항에서는 러시아 함선 바랴크(Variak)호와 코레에츠(Koryetz)호 두 척이 꼼짝 못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일본육군의 상륙이 감행된다. 2월 9일 아침 일본함대는 러시아 함선에 대하여 중립항인 인천항에서의 철퇴를 요구한다. 일본의 경고에 진퇴양난에 빠진 러시아 함선은 비장한 결의로 항구를 떠난다. 소월미도를 돌아 팔미도 해상으로 나갔을 때, 일본함대는 40여분에 걸친 집중적인 포격을 퍼부어 바랴크호를 대파시킨다. 일본함대의 공격을 피하여 후퇴한 코레에츠호는 자포자기 자폭을 하고, 바랴크호와 기선 숭가리(Sungari)호는 스스로 방화하여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일본의 승리다. 이것이 바로 러일전쟁의 발발을 서방세계에 알린 ‘인천해전’이다.
영웅이 된 패잔병들
그로부터 꼭 100년 뒤인 2004년 2월 11일, 인천항 연안부두에 ‘인천해전’에서 사망한 러시아 장병을 기리는 추모비 제막식이 있었다. 러시아 대사, 러시아 정교회 대표, 러시아 태평양함대 사령관 및 3척의 군함을 타고 온 해군 장병 등 수백명이 참석하였다. 추모비에는 <순양함 ‘바랴크’호와 포함 ‘코레에츠’호 러시아 선원들의 희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감사드리는 러시아 국민들로부터>라는 글이 한국어, 영어, 러시아어 등 3개 국어로 새겨져 있다. 여기서 ‘희생’을 ‘기념’한다는 것은 어떠한 ‘기억’의 계승과 창조를 의미하는 것인가?
첫째로는 추모비가 기억하는 ‘순양함 바랴크호와 포함 코레에츠호 러시아 선원들의 희생’이 영웅적 행동으로 표상되어 간 측면을 지적할 수 있다. 미감리회 선교사인 H.B.헐버트는 ꡔ대한제국멸망사ꡕ에서, “승리를 기약할 수 없는 전투에 나서는 것은 용기 있는 자의 행동이며, 패배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사지로 향하는 것은 영웅의 행동”이라고 하여, 싸우다가 죽기를 원하여 자폭한 러시아 군인들의 행동을 영웅의 그것으로 보고 있다. 그는 치명상을 입은 바랴크호의 “러시아인들은 닻을 내린 채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싸우다가 최후에는 갑판 위의 모든 것과 함께 함선을 폭파할 결심을 하고 있었다. 그들로서 그 길 이외 달리 할 방법이 있었던가? 그들은 항복을 원하지도 않으며 배를 두고 떠날 수도 없으며 상륙한다고 하여도 적의 포로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비극을 끝내고 싶었으며 싸우다가 죽기를 원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장렬하게 싸우다가 국기와 함께 자폭을 선택한 러시아 장병의 선택을 서양인들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동정하면서 이를 영웅적인 행동으로 인식한 것이다
둘째로 황인종의 도전에 굴하지 않고 맞섰다는 점이 서양인들에게 자부심으로 인식되었다. 미국 외교관 W.F.샌즈는 ꡔ조선의 마지막 날ꡕ에서 다음과 같은 바랴크호의 부함장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우리는 아시아인의 함대에 투항하는 첫 번째 유럽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일본함대를 돌파해서 여순항으로 가도록 애써 봐야죠. 하지만 승산은 별로 없습니다.” 최초의 백인종과 황인종의 전쟁을 목격한 서양인들은 일본의 승리로 귀결된 것에 충격을 억제하지 못하였으며, 항복을 거부한 러시아 군인의 행동을 백인종의 자존심을 지킨 명예로운 것으로 보았다. 살아남은 러시아 군인들을 구출한 프랑스와 영국측이, 특히 영일동맹하에 있던 영국까지, 전쟁포로를 인도하라는 일본측의 요구를 거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쟁에 패하였지만 백인종 국가들의 비호 하에 전쟁포로가 되는 것을 겨우 면하여 귀국길에 오른 러시아 병사들은, 4월 5일 마르세이유 항구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다. 사실상 패잔병인 그들 러시아 장병들은 황인종인 일본에 항복하지 않고 최후까지 싸우다가 함선과 함께 ‘희생’당한 길을 택한 러시아 장병의 영광을 대표하여 영웅으로 인식된 것이다. 이후 그들은 ‘인천의 영웅들’로 ‘기억’된다.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살아 돌아온 장병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황인종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참패한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황인종에게 굴복하지 않고 러시아의 국기(國旗)와 명예를 지키고 백인종의 자존심을 세운 것을 오히려 높이 평가한 것이다. 1959년에는 콤소몰 광장에 바랴크호 함장 르도네프의 동상이 세워졌고, ‘바랴크’라는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인천해전을 기념하는 노래까지 만들어졌다. 사회주의 소련에서도 인천해전에서 일본군과 싸워 장렬하게 전사한 제정 러시아의 해군 장병, 그리고 살아 돌아온 장병들을 영웅화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러시아 역사교과서는, 일본함대와 과감하게 맞서 싸우고, 이기기 어렵게 되자 차라리 자폭함으로써 일본에게 전리품을 주지 않은 행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처절한 패배임에도 불구하고, 애국주의에 기반하여 이 사건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제정 러시아와 소비에트 연방을 거쳐 오늘의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100년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은 소련이 붕괴한 후 1990년 러시아와 다시 국교를 맺는다. 인천해전에서 패하여 파블로프 러시아 공사 일행이 인천을 떠난 이후, 실로 86년만이다. 러시아는 수교 이후 매년 2월 9일에는 인천해전에서 전몰한 장병들을 기억하는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인천해전에서 자폭한 배의 이름을 따서 러시아 태평양 함대 소속의 1만 7천톤급 미사일순양함에 바랴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1989년이다. 부활한 바랴크호는 1997년 2월 9일 인천항을 찾아와 감개무량한 추모행사를 가진다.
러시아측은 이것을 기억하기 위한 항구적인 방법으로 기념물을 세울 것을 모색하였다. 러시아측은 2004년 러일전쟁 100주년을 기념하여 인천 앞바다 인근에 위령탑이나 추모비를 세우는 일에 협조해줄 것을 한국측에 요구하였다. 외교통상부는 한러친선과 통상의 발전을 위하여 이에 적극 협력할 것을 인천시에 요청하였다. 인천시에서는 월미도 남단에 추모비를 건립하여 제공하고자 하였다. 그 곳은 100년 전 러시아 해군의 석탄고가 있었던 상징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월미도의 역사생태공원화를 주장하는 시민단체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
잠복된 추모비 건립문제가 다시 되살아난 것은 2003년 10월 태국 아펙회의에서 열린 한러정상회담에서였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인천해전에서 바랴크호가 피침되었을 때 탈출한 러시아 선원들을 인천시민들이 구조하고 장례를 치러준 사실이 있었다고 하면서, 2004년 2월 러시아 해군이 100주년 기념행사를 가질 수 있도록 협조를 요구한 것이다.
푸틴 대통령이 기억하고 싶어하는 인천시민의 러시아 선원구조설은 무엇을 말하는가? 러시아 해군의 사망자는 바랴크호 사관 1명, 수병 40명, 부상자는 사관 2명, 수병 64명(8명은 곧 사망)이고 함장도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들은 자폭한 러시아 함선과 함께 수장되었다. 생존한 수백명의 병사들은 프랑스 함선 파스칼호, 영국 함선 탈보트호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부상자 중 중상을 입은 24명은 2월 13일, 영국성공회 내리교회의 영국병원에 임시로 설치된 일본적십자병원에 수용되어, 일본인 의사와 간호원의 치료를 받았다. 부상병들은 여기서 치료를 받은 뒤 3월 7일 日本松山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 인천의 한국인 시민이 러시아 병사를 구조하고 장례를 지내 줄 겨를과 여지는 전혀 없었다. 이처럼 기억은 임의로 선택되고 창조된다.
추모비 건립에는 러시아 태평양함대 사령부 소속 3척의 함정과 장병 800여명이 참가하여 100년 전의 ‘희생’을 추모하였다. 부활한 바랴크호는 물론, 2003년 8월에 다시 이름 붙여진 대잠초계함 코레에츠호가 포함되어 있다. 한국인을 뜻하는 코레에츠호의 부활은 2002년 9월 블라디보스톡의 러시아 태평양함대 사령부를 방문한 우리나라 합참전략본부장의 건의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그는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코레에츠함 장병들을 위로해” 주기 위하여 코래에츠함의 부활을 건의하였다고 한다. 그는 “100년 전 러시아 함정에 코레에츠라는 이름을 처음 사용했던 것은 러시아인들이 고려인의 근면성과 불굴의 정신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순진하게 해석했다.
한반도 근해에서 활동하던 함선에 한국인을 뜻하는 코레에츠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만주와 한국을 영향권 하에 넣어 동아시아 패권을 장악하려던 야욕의 과시일 뿐이다. 코레에츠를 비롯한 러시아 함대는 일본과 제국주의적 대결을 벌였고 양국 모두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야욕을 지니고 있었다. 러일전쟁의 해전에 참여한 일본의 함선 가운데 진센마루(仁川丸)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국내적으로는 체첸공화국을 가혹하게 진압하고 대외적으로는 패권주의를 추구하는 러시아의 해군 함정에, 한국인이라는 의미의 이름을 붙이도록 건의하고 그래서 그 함선이 한반도의 근해를 누비는 것을 장엄한 영광으로 인식하는 것은 역사의식의 실종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일이다.
승리의 축제 '인천의 날‘
인천해전에서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러시아 함선을 격퇴하고 그것이 자폭하는 것을, 인천의 각국공원(일제시 서공원, 오늘날의 자유공원)과 해안가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던 인천 일본조계의 일본인 7,000여명은, 기뻐 날뛰며 만세를 불렀다. 만세소리가 인천시가를 진동했다. 일본 천황은 승리를 이끈 사령관에게 조칙을 내려 치하했다. 인천해전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최초로 승리를 거둔 것으로 국민적 사기를 드높인 사건이다. 이로써 인천 이남의 제해권은 완전히 일본해군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 대한제국 정부 내에서는 친러파 정권이 붕괴되고 급속히 친일파가 등장한다. 2월 23일에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어 일본군은 한반도의 전략상 지점을 마음대로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은 완전히 일본의 전장터로 전락하였다. 중립항인 인천항에 대함대를 파견하여 전력상 대적할 수 없이 궁지에 몰린 러시아 함선을 선전포고도 없이 선제공격한 일본제국주의의 비겁함은 은폐되었다.
일본은 인천해전을 어떻게 기념하고 기억의 장으로서 활용하였는가? 1905년 일본은 침몰한 바랴크호를 인양하였다. 거기서 러시아 국기, 바랴크호 군함기, 소총과 포탄, 닻과 노 등을 수거하였다. 바랴크호는 국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폭하였지만 일본은 자폭 수장된 함선에서 국기를 들추어내고 승리를 만끽한 것이다. 바랴크호는 수리되어 잠시 일본해군의 연습함으로도 사용되어 승리의 기억을 되살리게 하였다. 코레에츠호는 물속에서 폭파 해체된 후 인천의 고물상에 의하여 판매되었다. 탐조등 글라스, 대포 케이스, 소총탄 케이스 등은 고물상 주인이 소장하였다고 전해진다. 소월미도 해상에서 자폭한 코레에츠호가 폭발하면서 날아 올라간 쇳조각과 불에 탄 트럼프, 그을린 사진 등은 축현의 한국인 주거지에까지 떨어졌으며 인천시민들은 그것을 일본승리의 증거로 간직하였다고 한다.
일본조계의 일본인들은 1년 뒤인 1905년 2월 9일, 모든 학교의 수업과 사업장의 영업을 중단하고, ‘인천의 날’이라는 기념일을 정하여 축제를 벌였다. 이 행사는 인천해전과 러일전쟁의 결과 한국병합이 이루어지고 그럼으로써 식민도시 인천의 번영과 융성을 가져오게 되었음을 기억하는 장으로서 식민지시기 내내 인천에서 개최되었다. 인천해전을 승리로 이끈 치요다(千代田)호가 1930년 폐함되자 그 돛대를 서공원 정상에 세워 기념하고, 러시아 함선에서 획득한 러시아 국기와 해군기, 기타 유물을 전시하였다. 인천의 어떤 일본인은 100년 후의 ‘인천의 날’을 꿈꾸면서 과거의 기억을 회고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식민지체제가 붕괴되어 이 모든 행사와 기념물들은 철거되었고, 100년 후인 오늘 ‘인천의 날’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일본 여야 국회의원 50명이 러일전쟁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여 메이지 신궁을 집단참배하고, ‘러일전쟁에서 배우는 모임’을 발족한다고 전해진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한국을 식민지화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오래 전부터 일본우익은 호언하고 있다. 그러한 그들이 러일전쟁에서 배우려는 것은 무엇인가? 유사법제의 제정,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 그리고 평화헌법의 개정에서 가시화되고 있듯이 러시아와 중국의 애국주의, 패권주의에 맞서 만주와 한반도를 가운데 둔 동북아시아에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적 대국화를 꿈꾸면서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를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다.
기억의 주체와 공간
동아시아의 판도를 바꾸어 놓은 러일전쟁, 한국의 보호국화 및 식민지화의 직접적 조건을 형성한 제국주의 전쟁인 러일전쟁에 대하여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기억으로 제국주의시대는 대표되고 만다. 러시아의 제국주의에 대한 경험과 기억은 사라지고 없다. 한반도를 무대로 전쟁이 일어나고 한국인의 엄청난 희생을 동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일전쟁에서 우리는 기록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기억의 주체도 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병사 추모비의 건립에 대하여 한러친선의 잣대로만 보는 우리의 무신경함은 이러한 역사의식의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추모비 건립의 배경에 한러친선특급 프로젝트가 있다는 점이 주목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철도복원이 합의된 이후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연결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한러정상회담을 통하여서도 철도연결의 필요성이 확인되고 이를 촉진하기 위한 외교방책이 모색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러친선특급’이라는 계획이 외교통상부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양국 외교당국자 등 민관의 협력에 의하여 2002년 7-8월 2주에 걸쳐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1만여km를 달리면서 7개 도시에서 한러친선 행사가 개최되었다. 최종 종착지인 상트 페테르부르그에서는 한말 이범진 초대 주러시아 공사의 추모행사를 개최하였다. 이범진은 대한제국의 러시아 공사로 지내던 중 보호국이 되자 귀국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한국병합을 맞이하여 자결한 애국지사인데, 그의 묘지를 찾아내 현판식과 추모비 제막식을 거행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행사가 러시아측의 인천해전 전몰장병에 대한 추모비 건립을 긴박한 것이다. 한러친선특급에서 푸틴대통령의 환영사까지 받은 외교통상부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측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었다. 우리도 이범진 추모비를 세운 터에 말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은 제국주의전쟁이며, 러시아는 만주 뿐 아니라 한반도를 장악하기 위하여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싼 러일의 대립은 결국 러일전쟁으로 결판나고 말았다. 한국은 자주독립의 길이 막히고, 중립화의 가능성도 보장되지 못하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세력의 영향력 하에 놓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은 기념해야 할 것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우리의 비극이다. 식민지시기의 일본인의 축제나, 러시아의 추모비 양쪽 모두에 우리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러시아가 승리하지 못하고 패하였다고 하여 그것에 동조하여 가슴아파 하면서 추모비 건립을 허용하는 것은 기억의 주체를 몰각하는 인식이다. 이것은 이범진 공사 추모비 건립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문제이다.
20세기 전쟁을 일으킨 나라들은 제국주의, 패권주의를 추구하였고, 그것이 자국 내에서는 애국주의, 민족주의로 분식되었다. 미국에서는 스페인과의 전쟁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등에 마을마다 출정한 병사들의 희생을 기리는 추모비를 건립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이제 이라크전쟁에서 희생된 병사들의 추모비도 속속 들어설 것이다. 일본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이 봉안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고 있고, 위헌판결에도 불구하고 굴복하지 않으려 한다.
러시아가 자국 내에 러일전쟁 패전을 추모하는 역사기념물을 세운다면 우리로서는 대응할 길이 없고, 대응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한국 내에 세워진다면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일본이 인천해전의 승리를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운다면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임이 자명한 것처럼, 러시아가 패전했다고 해서 그 희생을 추모하는 추모비를 세우는 것은, 그것이 제국주의 전쟁이고 궁극적인 목표가 만주와 한반도의 식민지화에 있었음을 망각하는 처사이다. 동북아의 평화와 공존을 짓밟은 행위를 자국의 영웅적 애국적 행동으로 위장하여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 등 9개 시민단체들이 한반도를 강탈하기 위한 러일간의 제국주의 전쟁을 기념하는 것에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추모비 제막식 현장에서 격렬한 반대시위를 전개한 것은 기억의 주체와 공간을 되찾기 위한 투쟁이다. 그들은 인천해전을 “명백히 조선을 두고 각축했던 두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쟁탈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제정 러시아의 역사적 죄악에 대하여 응분의 사죄조차 한 마디 없이 자국의 애국주의를 조장하기 위한” 기념비 건립을 강력히 반대한다고 주장하였다.
러일전쟁에 대한 추모비를 러시아측이 세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제국주의 전쟁에 의하여 온 국토는 전장터로 화하고 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하고 그 결과 보호국, 식민지화가 된 우리가 주체가 되어, 그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하여, 기억하기 위하여 ‘역사기념물’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의식 없는’ 태도는 어디 가서 탓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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